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얼마 전 국정원에서는 과거사진상규명활동보고서를 냈는데, 지난 7~80년대부터의 공안사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강화도에서도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만 하는 작고 외진 섬, 미법도에 한동안 국가공무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곳을 찾아 미법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납북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1976년 오형근씨 사건을 시작으로 미법도에 공안사건의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1977년 안장영, 안희천씨, 1981년 황용윤씨가 차례로 ‘간첩’이란 꼬리표를 달고 법정에 섰다. 오형근씨 수사 과정에서 안장영씨에 대한 첩보가, 안장영씨 수사 과정에서 안희천씨와 황용윤씨에 대한 첩보가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나왔다. 황용윤씨의 수사 과정에서 나온 ‘첩보’가 발단이 돼 간첩으로 몰린 정영(67)씨 사건까지 서해의 작은 섬 미법도에서만 모두 5건의 간첩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미법도 납북 어부들은 군사독재의 하수인들에게 ‘황금어장’으로 비쳤던 게다. - <한겨레21>(2007년11월01일 제683호) 특집

불과 70여 가구가 거주하는 어촌에 불과한 미법도에 그렇게 많은 간첩들이 거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들은 간첩이 아니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들이었고, 국가기밀은커녕 검찰에서 자신이 하는 진술이 법정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안기부 직원들이 바로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했던 진술이라고 자신의 진술을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어부들을 법정으로 불러내 처벌한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국가보안법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화된 시대이기에 과거에 비해 국가보안법이 남용될 위험도 적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제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록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지난 4월 19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뒤 5개월여 동안 이시우는 감옥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끊임없이 기밀과 창작, 검열과 창작의 자유를 놓고 투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장장 60여일에 걸친 단식 투쟁도 불사했다. 그는 구치소에 수감된 뒤 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그의 부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65kg이었던 체중이 20kg 정도 빠져 “뼈에 얇게 살을 발라놓은 몰골”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5월 1일 그가 아직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옥중에서 발표한 한 장의 편지가 있다.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이시우가 말하는 사진가는 우리에게도 『하늘에서 본 지구』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다. 한 사람은 군 헬기를 얻어타고 공중에서 DMZ를 촬영하고, 다른 한 사람은 풍경 사진 속에 강화 고려산 미군 통신시설의 일몰을 촬영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시우는 간첩일까?

먼저 간단하게나마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 1967년 충남 예산 출생, 1988년 신구전문대 사진과 제적, 1989년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창작단장, 1990년 전국노동자문화단체협의화 풍물분과장, 1991년 전국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 창작단장, 1993년 서울중구문화회관에서 <사람과 사진>전, 1995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그는 강화도에 거주하면서 주로 비무장지대 DMZ의 풍경을 촬영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해왔다. 사실 이 책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은 그의 이런 작업 내용을 담아 지난 1999년 처음 출간되었고, 올해 재판 1쇄가 새롭게 나왔다. 이미 본 사람들은 다 본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올해를 상징하는 책 10권 가운데 하나로 재선정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리게 되는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2007년, 올해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평양에 갔다. NLL(북방한계선)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갈라진 민족의 양 정상은 현재의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데 합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자신의 발로 직접 넘어서던 그 날, 사진작가 이시우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개월 째 수감 중이었고, 목숨을 건 40여일의 단식 투쟁 중이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에 대해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독재 시대에 있던 낡은 유물”이라며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민통선을 촬영하던 사진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대통령의 말이 진실이라면 국민이 주인 되는 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2003년 말 1,000여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국보법 철폐’ 단식을 하면서도 끝끝내 수구보수세력의 저항을 넘어서지 못했다.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겠다던 대통령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저들과 보수연정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의 반동들이 모여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2007년 올해 10년 만에 사회과학서점들이 경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했다. 인터넷 헌책방 미르북 대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구속적부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일단 석방되었다.

여기 거의 7년여 만에 재출간된 사진집 한 권이 있다. ‘슬픈 조국의 대지’를 만남과 강, 사색이란 주제로 촬영한 사진집이다. 강화도에서 정동진에 이르는 155마일 휴전선 아니 비무장지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색할 수 있을까? 남과 북, 좌와 우의 꽉 막힌 철옹성들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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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슬로우 불릿, 고엽제(에이전트 오렌지)

경북 칠곡군 왜관읍은 내게는 그리 낯선 동네가 아니다. 대학 들어가기 전 3년 동안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무렵 왜관읍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성 베네딕도 수도원 공사 현장에서 겨우내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 수도원 공사현장은 제법 규모가 크고, 읍내와 거리도 있는 편이어서 별도의 함바(공사현장노무자를 위한 밥집)집도 있었다. 음식의 질이야 얼마 전 ‘함바 비리 사건’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대로 수준 이하였지만 어쨌든 끼니와 군것질거리, 담배 등속은 함바를 통해 해결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왜관읍까지 나갈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비 오거나 공사가 없는 날엔 읍내에 나가 단백질을 보충하거나 귤 한 봉지 사서 나눠먹는 일은 종종 있었다. 아마 그런 까닭이었겠지만 왜관읍에 캠프 캐럴(미군기지)에 대해선 특별한 인상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엊그제 뉴스에서 이곳 캠프 캐럴에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사용했던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고엽제 수천 킬로그램을 비밀리에 지하에 매몰 처리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나서야 왜관읍 근방에 미군 기지가 있었다는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캠프 캐럴에 고엽제가 비밀리에 매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위치한 KPHO-TV(CBS계열)가 지난 16일(미국시간) 캠프 캐럴에 근무한 적이 있다는 3명의 전 주한미군 병사들의 증언을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1978년 캠프 캐럴에서 중장비 기사로 복무했던 스티브 하우스는 “상관이 처리할 게 있다며 도랑을 파라고 했고, 그곳에 ‘베트남 컴파운드 오렌지’라고 적혀 있는 드럼통을 묻었다”고 증언했는데, 그와 함께 복무했던 로버트 트라비스 역시 “창고에 있던 205개 드럼통을 일일이 손으로 밀고 나왔다”며 이때 실수로 드럼통에서 새어나온 고엽제에 노출돼 자신에게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보도와 관련해 캠프 캐럴 관계자는 “고엽제를 묻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것”이라며 부인했지만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다”며 사실 관계를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가 찾아내서 사실을 확인하고 따지면 그때 가서 태도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보도 이후 이어진 보도에 따르면 그동안 캠프 캐럴은 환경오염과 관련된 사건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기름 유출과 석면 오염 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캠프 캐럴 측은 한국 국민의 건강을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기름 유출 사건으로 인해 대구 시민의 식수원인 낙동강이 오염돼 칠곡 군청이 나서 수년에 걸쳐 방제작업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석면 파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란 무엇인가

미국은 베트남전 기간 동안 베트남의 정글에 고엽제, 이른바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를 뿌렸는데, 그 양이 자그마치 50,000톤(약 4,000만 리터)에 이른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고엽제를 사용한 것은 주요 전투가 밀림이 우거진 정글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는 보호해야할 만한 주요 산업시설이 거의 전무했으므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을 지키거나 공격하는 것으로는 상대의 전투의지를 꺾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월맹과 남베트만민족해방전선은 농촌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기 때문에 미국은 지상군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해서 헬기를 이용한 ‘공중기동(air-mobility)’과 같은 새로운 개념의 작전을 도입했고, 적의 출몰지역을 중심으로 ‘수색섬멸(Search and Destroy)’ 작전에 주력했다. 그러나 도로망이 부족하고 열대림과 같은 자연적 장애물이 많은 상태에서 미군의 작전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의 기습공격에 노출될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미군은 적에게 은닉처를 제공하고, 작전에 장애가 되는 베트남의 밀림을 파괴하기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와 같은 강력한 화학 제초제들을 공중 투하하는 새로운 작전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랜치핸드(ranch hand, 목장 일꾼)’ 작전이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펼쳐진 이 작전은 항공기를 이용해 정글 위 40m 이하 상공에서 시속 240km의 저속으로 비행하면서 4분 이내에 폭 80m, 길이 16km의 정글을 완전히 말려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랜치핸드 작전에 따라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고 있는 UC-123 (USAF photo)

‘에이전트 오렌지’란 이름은 당시 이 약품이 노란색 드럼통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으로 실제 고엽제 용액의 색깔이 노란색은 아니었다. 주로 유기염소계의 제초제인 2,4,5-T(trichloro phenoxic acid)와 2,4-D를 1:1로 혼합한 약품으로 2,4-D는 국내의 잡초 제거를 위해 미국에서 1950년부터 수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사용 당시만 하더라도 인체에 큰 독성은 보고된 바 없었지만 2,4,5-T와 2,4-D의 혼합시 생성된 불순물질로 다이옥신인 2,3,7,8-TCDD가 발암성, 돌연변이성 질환을 일으키면서 크게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에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 동안 32만 명이 참전했지만 고엽제의 후유증은 1991년 호주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이 내한해 고엽제의 피해로 인해 원인모를 병을 앓아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으로 1993년 2월 고엽제 후유의 중환자 진료 등에 관한 법률을 국회에 통과시키는 등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국가보훈처에서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보상 및 치료를 실시하게 되었다.


고엽제에는 발암성이 가장 높다는 맹독성분인 다이옥신(다이옥신은 청산가리의 1만 배, 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지닌 물질이다)에 의한 폐암, 간암, 임파선암, 혈액암 등의 건강장애가 제일 심각하고, 심각한 생식기능장애, 면역손상으로 각종 전염성 질환에 걸릴 수가 있으며 호르몬조절 기능손상으로 불임, 기형, 장애어린이 출생, 발육 장애 등이 올 수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에는 맹독성인 다이옥신 외에도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러 화학물질들이 함유되어 있는데, 살포 당시 노출되었던 임신한 동물들에게서 피부발진과 피부색소변화를 일으켰다. 인체에 나타난 현상은 안면, 목, 배에 피부발진, 사지감각손실, 신경손상, 성욕소실, 불면증 등을 일으킬 수 있고, 이외에도 두통, 위장염, 신장염, 장출혈, 혈관질환 등을 나타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노출된 당사자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진은 에이전트 오렌지로 인해 돌연변이성 질환으로 사산된 신생아들의 모습이다(에이전트 오렌지에 의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이미지는 이외에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너무 끔찍한 모습들이라 옮기지 않는다).

이처럼 인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치는 에이전트 오렌지이지만 과거 DDT가 그러했던 것처럼 초기에는 참전 군인들의 원인모를 발병에 대해 관계당국은 고엽제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발뺌하거나 부인해 왔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고엽제와 이와 같은 질병들의 상관관계가 서서히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에이전트 오렌지가 밀림을 고사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노출된 사람들을 오랜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게 만들고 유전적으로 후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슬로우 불릿’이라 불렀다. 현재 미국에서 이 말은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한국과 무관한가

한국은 1965년도부터 1973년 철군할 때까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32만 명을 베트남전쟁에 파병했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은 4,960명이 전사, 10,962명이 부상자를 냈지만 전쟁의 상처는 끝나지 않았다. 사전에 아무런 주의사항 없이 미군에 의해 주도적으로 사용된 고엽제는 적과 아군의 구별 없이(적에게 사용하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치명적인 후유증을 안겨주었고, 그 고통이 대를 이어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전에 어떤 경고도 받지 못했던 파월 장병들은 고엽제를 몸에 바르면 정글에서 모기 등 해충을 방제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철모에 듬뿍 퍼 담은 가루 고엽제를 가슴에 안고 비료처럼 뿌려대는 시범을 보이고는 짝짝짝 박수를 받기도 했을 정도로 고엽제의 영향에 대해 무지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991년 호주 교민의 고발이 있기 전까지 고엽제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1993년부터 보훈처를 통해 대책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대한민국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베트남전쟁참전전우회' 등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데, 고엽제로 인한 국내 사망자는 현재에도 한해 200여 명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엽제 피해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만의 문제인가? 2001년 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60년대 말 우리나라 DMZ에서 복무했던 제대군인이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에 의해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심사 결과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말 현재 DMZ에서 복무했던 제대군인 중 554명이 고엽제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으며, 심사 결과 이 중 14명이 후유증을, 65명이 후유의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9년 12월 <함께 사는 길>에 게재된 「비무장지대 고엽제 살포」란 글에 따르면 “지난 1968년 4월부터. 서부전선에서 동부전선까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남쪽에서 민간인 통제선 이북 지역으로 2천2백만 평이 대상 지역이었으며, 철책선 양쪽 1백여 미터와 전술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역, 그리고 주요 도로 양쪽 30여 미터에 살포했다. 당시 뿌려진 고엽제는 베트남전 때 사용된 것과 똑같은 ‘에이전트 오렌지’이며 원액 2만1천 갤런(약 3백15드럼)을 경유와 3대 50으로 섞어 사용했는데 살포한 분량이 무려 1백40만 리터, 드럼통으로 7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식물통제계획 1968년’이란 작전명으로 실시된 당시 살포작업에는 주로 한국군이 동원되었고 주한미군은 감독만 했던 것으로 드러났는데, 국방부의 각종 기록들에 따르면 살포작업에 2만6천6백여 명의 한국군이 동원되었다고 밝혔지만, 한 방송사는 살포 첫해인 1968년에만 다섯 달 동안 연인원 3만5천여 명이 동원되었고, 이듬해에도 같은 규모로 이루어진 점으로 미루어 볼 때 2년 동안 총 7만여 명은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고엽제의 독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병사들이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살포작업에 동원됐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더운 날씨 탓에 심지어 옷까지 벗어던지고 고엽제의 안개 속에서 수 시간 동안이나 무방비로 노출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고엽제 성분은 토양이나 동식물에게 30여 년 동안 잔류하기 때문에 고엽제 피해자가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비무장지대(DMZ)에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가 대량으로 살포되었다는 사실 역시 오랫동안 비밀로 감춰져 왔지만 당시 고엽제 살포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았던 전 주한 미군 병사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발함으로써 국내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은 당시 전투 지역이었던 베트남은 물론 우방인 한국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할 당시에도 이미 고엽제의 심각한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 미국과학자연맹에서는 미국이 에이전트 오렌지를 이용한 생화학무기를 실험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었으며, 1966년에는 존 에드설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해 30여명의 과학자들이 에이전트 오렌지의 살포는 야만적 행위이며, 군인과 민간인 모두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라고 경고했었다. 또한 베트남 참전 미군 고엽제 피해자들의 소송을 담당한 뉴욕주 한 지방법원의 판결문에는 미국 대통령 과학자문위원이었던 맥도널드 박사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국에 살포되기 3년 전인 지난 1965년 백악관 회의에서 이미 고엽제가 인체에 끼치는 유해성에 관해 논의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지난 1968년 한국에 고엽제 살포를 승인했던 맥나마라 당시 미 국방장관도 참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고엽제 피해 소송대리인인 백영엽 변호사 역시 미국 정부는 물론 제조회사들도 월남전 이전부터 고엽제에 다이옥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과 다이옥신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캠프 캐럴, 고엽제 매몰의 진실과 그 결과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한 캠프 캐럴에 주한미군이 비밀리에 수천 킬로그램의 고엽제를 비밀리에 매몰했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백한 진위는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미 국방부는 베트남전 당시 사용하고 남은 ‘에이전트 오렌지’는 바다에 폐기했다고 주장해 왔지만, 만약 캠프 캐럴에 대한 증언이 사실이라면 미 국방부의 발표 역시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고엽제와 관련된 유독성은 물론 여러 사건들이 밝혀져 왔던 정황을 살펴볼 때 캠프 캐럴의 고엽제 매몰사건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베트남에서, 한국의 DMZ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의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한 번도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작전실태나 오염실태에 대해 밝혀낸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의 비무장지대(DMZ) 고엽제 살포 사실 역시 1968년 당시 동두천에서 주한미군 의무병으로 복무했던 병사가 통증과 소화기 이상, 암 등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 1999년 미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 피해보상판정을 받음으로써 처음 확인된 것이다. 스티브 하우스, 로버트 트라비스 등의 증언을 보도한 KPHO-TV는 애리조나 주립대 피터 폭스 교수의 말을 인용해 “매몰된 고엽제로 인한 지하수 오염 가능성”이 있으며 “오염된 지하수가 농업용수로 쓰였을 경우 음식물에도 들어갔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지역(캠프 캐럴)을 정화시킬 유일한 방법은 모든 지하수를 뽑아내는 것”이라며 “이런 화학물질을 제거하는 데 5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지금 한나라당의 텃밭으로 여겨지는 경북 영남 지역의 수백만 시민들이 사용하는 낙동강 상수원이 다이옥신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 치명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보도를 접한 한국 정부나 언론의 태도는 어쩐지 미온적이다.

정부는 환경부를 통해 ‘환경정보 공유와 접근 절차’에 따라 통보가 필요한 환경 사고의 경우 SOFA(주한미군지위협정) 환경분과위 협의를 통해 공동조사가 가능하다고 밝혔는데, SOFA 규정에 근거해 미군 측에 사실 확인을 촉구하고 공동조사를 요청하겠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진실을 밝혀낸다면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미국 정부를 통해 받아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실을 밝혀내기도 쉽지 않겠지만 설령 진실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이후 원인제공자인 미국 측의 사과와 보상은 받는 데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미 예전에 밝혀졌던 휴전선 인근 비무장지대의 고엽제 살포로 인한 후유증 환자들에 대해 미국 정부 측에서는 법적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윌리엄 코언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고엽제 살포가 한·미간 협의 아래 한국 정부가 결정한 일이므로 미국은 고엽제 보상의 법적 책임을 부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바 있다. 우리 정부 측에서는 한·미간 협의는 있었지만 살포작업이 미군의 요청에 따라 미군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 정부대로, 우리 정부는 우리 정부대로 피해 보상에 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사건에 대해 주한 미군 측이나 우리나라 국방부 측에서 합동조사반을 구성해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했어야 마땅하지만 양 측 모두 간간이 서로의 입장만 밝히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진상조사에 착수할 의지(한국 땅에 뿌려진 것이고, 피해자 대부분이 주로 한국 국민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 정부가 더욱 강한 의지를 보여야 마땅하겠지만)를 보이지 않는다.


1966년 7월 9일 한·미 양국 사이에 체결된 한미행정협정, SOFA는 한국 국민에겐 가시 방석이고, 주한미군에겐 여전히 안락한 가죽 소파(sofa)다.


이차대전 끝나고 / 유태인 학살 독가스 개발했던 / 독일의 제조사 사장은 / 재판 후 처형되었다


그런데 / 공포의 다이옥신으로 / 베트남의 선량한 국민과 / 참전 병사 그들의 자손들에게 / 치명적 피해를 떠안겼던 미국의 기업은 / 여전히 국제면책권 주장하며 / 큰소리 친다 / 고엽제와 관련된 어떤 소송에도 / 미국 법원은 빗장 걸었다


세월 흘러가도 / 풀 돋아나지 않는 민둥산 / 암과 기형아와 온몸 뒤틀리는 신경마비로 / 기약없이 앓고 있는 땅


그 베트남에서 / 무수한 양민 살상되고 / 생태계는 무참히 파괴되었는데 / 누가 보상할 것인가 / 누가 그들의 눈물 닦아줄 것인가


- 이동순, 「고엽제 6」 전문


이동순 시인은 시집 『베트남 시편』을 통해 고엽제와 베트남의 상처에 대해 저렇게 노래했는데, 지금 한국 국민들의 입장은 혈맹인 미국 보다 한때 적으로 싸웠던 멀고 먼 베트남 국민들의 입장과 더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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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KODEF 안보 총서 15 -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 | 임윤갑 (옮긴이) | 플래닛미디어(2009)

전쟁 종전일이 아닌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는 기묘한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동안 전쟁을 먼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왔던 오만의 결과일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했던 2010년 한 해 동안 전쟁의 기운이 검은 안개처럼 한반도에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학자로 연구에 전념해왔고,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의 편집자로 국제연합(UN)에서 정치국 국장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를 읽었다. 2009년엔 『전쟁의 탄생』 말고도,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다케나카 치하루가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도 출간되었는데, 전쟁 발발의 근본원인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은 이전(2007, 아카넷)에 나온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의 『인간 국가 전쟁(Man, the State and War)』과 함께 비교해가며 읽어볼 만하다.


전쟁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전쟁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 역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앞서 언급한 케네스 월츠는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 사회 또는 국가의 특성 그리고 국가체제의 구조적 특성을 연구함으로써 전쟁을 인간적 수준, 국가 ․ 사회적 수준 그리고 국제체제적 수준으로 분석’했다. 존 헤르츠(John Herz)는 국가 내부의 경쟁을 조율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국가 간의 경쟁을 조율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필요이상의 긴장이 고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고, 오르간스키(A. F. K. Organski)는 2위 국가가 1위 국가(헤게몬)로 전환하려는 가운데 전쟁 발발 가능성이 증대된다고 보았지만 전쟁의 원인은 인류 역사상 벌어진 전쟁의 숫자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 지금까지의 전통적 - 전쟁이 인간 ․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상황이나 인간 본성, 체제, 경제적 요인과 같은 근본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 - 인식을 대신하여 그것이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 중에서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리더)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란 국내 제목이 『Why Nations Go To War』라는 영어 원제보다 저자가 추구하려는 진실에 좀더 근접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라고 물을 때 ‘왜?’에 대한 답은 그때그때 경우에 달라지겠지만 ‘누가?’에 대한 답은 언제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집단적 범죄와 지도자의 결정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대학 국제외교학과의 존 G 스토신저 교수는 『전쟁의 탄생』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가지의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미국 중심의 주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판단하기 쉽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외부 요인 못지않게 해당 결정을 내린 지도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비춰지기도 쉽다. 게다가 ‘스토신저’라는 그의 성(姓)을 보면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처럼 그가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것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서장」에서 자신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지도자를 중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무렵 그의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살고 있었다. 스토신저의 계부는 히틀러 통치하의 오스트리아는 너무 위험하단 이유로 체코 프라하로 떠났지만 그마저도 점령당하자 어떻게 해서든 히틀러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중국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받아냈고, 소련을 통과해 일본까지 넘어가는 극적인 여행을 경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고 있던 스토신저 일가가 유럽의 집단적 광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판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로 평가받는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의 도움 덕분이었다.


존 G. 스토신저는 그와 같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범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둠의 시대에도 우리의 인간성을 재확인하면서 심지어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악마와 맞서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심연 속에서도 도덕적인 용기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항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개인적 체험은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 지닌 용기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신뢰하게 되는, 다시 말해 훌륭한 인간이 지도자가 된다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토신저는 정치나 경제적인 요인들이 전쟁의 ‘징후’를 몰고 올 수는 있어도 전쟁 수행의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지도자’들이 전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벌어지는 요인에 주목한다. 이 부분이 존 G. 스토신저를 이전의 다른 학자들과 구분되게 만드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적 엄밀성을 약화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에 이르기 까지

존 G. 스토신저는 전쟁 발발 요인을 지도자에게 주안점을 두어 분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만 묻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주요 전쟁의 배경과 개별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와 같은 상황들 속에서 지도자들이 전쟁을 결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피고 다시 이를 개념화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는 1장 「철의 주사위」 편에서 그는 장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개전 선언 이전까지도 이 전쟁이 수년간에 걸쳐 장기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하나가 당시 독일의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였음을 지목한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섣부르게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러시아 황제가 섣부르게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이런 기대와 달리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이 충분히 강력하고 길게 이어지면, 그 인식은 결국 사실이 된다.

위기상황에서 힘에 대한 인식은 특히 중요하다. 초기 단계에서 지도자들은 자국의 힘은 과장하고 적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빌헬름의 서약은 러시아 군사력에 대한 근본적인 경멸과 러시아 지도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신뢰했다는 방증이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해서 실제보다 허약하고 성가신 존재로 인식하고 멸시했다. <본문 63-64쪽>


이와 같은 인식을 토대로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이나 의지를 낮게 평가하면서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는 “우리는 지금 물러설 수 없다”라고 호언하는 것이 세르비아의 애국자들에게는 적나라한 침략으로 비출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러시아 지도부에겐 그와 같은 공언들이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전쟁 이외에 다른 대안을 강구할 수 없도록 몰아가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계획을 입안한 군부의 고위 인사들 역시 평화를 유지하기 이전에 자아의 보존을 좀더 중시하는 경향, 다시 말해 군부와 군부의 이해관계에 귀속되어 있는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피할 수 없게 될 막대한 희생에 대해 침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눈을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


2장 「바르바로사 - 히틀러의 소련 공격」은 가장 의심이 많고 교활하며 사악한 인간인 스탈린이 가장 비이성적인 히틀러의 이성적 행동에 대해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나쁜 악마가 같은 놈은 어쩌다 더 나쁜 악마에게 속았을까? 쯤 되는 물음을 던진다. 게다가 이 악마는 처음부터 슬라브족을 노예로 만들고 소련을 그들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포함시키겠노라 공언까지 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잇따라 전해지는 독일의 침공 예보(침공 직전 1년 동안 84번의 경고가 소련에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붉은 군대’ 장교의 10분의 1을 숙청했고,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예하부대 지휘관의 5분의 1이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존 G. 스토신저는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앞두고 소련 전투력의 중추를 꺾어버리는 숙청을 단행한 까닭으로 스탈린 자신이 소련 내부에서 차지해야 하는 권력의 안전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국가의 안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39년 맺은 독 ․ 소 조약은 소련에게 독소처럼 작용했지만 침공 직후였던 1940년 7월 스탈린은 소련 인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첫 방송에서조차 독 ․ 소 조약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전쟁의 행운이 그를 배반하고 소련으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에도 몇 번이고 군대를 증원했다. 반면 스탈린은 그의 초기 실책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본문 104쪽>


완전히 새로운 전쟁, 완전한 승리에 대한 유혹 - 한국전쟁

『전쟁의 탄생』은 여러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은 3장 「승리의 유혹 - 한국전쟁」편이다. 2009년에 번역된 『전쟁의 탄생』은 열 번째 판으로 저자인 존 G. 스토신저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롭게 추가된 사실들을 책의 내용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 역시 전쟁 발발 이후 현재의 핵 위기 상황까지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 중 하나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손꼽는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이 38선에 접근했을 때 그것을 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유엔군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무력 침략은 38선을 파괴한 행위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침략자에 대한 ‘맹추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유엔군의 임무가 단순히 ‘무력침략을 격퇴’하는 데 있다면 북한 침략 이전에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던 곳으로 유엔군을 진격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느냐의 문제를 누가 결정할 것이며 만일 그렇다면 그 목적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도 제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북경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K.M.Panikkar)는 “만일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보냈다. <본문 124쪽>


9월 하순에 개최된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의지에 따라 38선을 넘어 한반도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라고 결의한다. 10월 1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고, 미군도 10월 7일 북진을 시작했다. 10월 2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가, 10월 10일엔 중국의 외무장관 주은래 역시 “중국은 이 침략전쟁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미국과 맥아더 장군은 이것을 중국 특유의 허풍으로 받아들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만나 중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데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가능성을 희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 편으론 북진을 승인하면서도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면서 중국 달래기에 나섰다. 맥아더는 중국을 팽창욕구는 가득하지만 실제로 그럴 능력은 없는 국가로 평가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해서도 경멸에 가까울 만큼 낮게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의 중국 인민해방군을 1940년대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판단을 신뢰했고, 그의 판단을 신뢰한 결과는 매우 혹독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개입은 국제문제 인식의 다양함을 실제로 보여준 좋은 예였다. 이러한 인식은 실제상황을 인식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일단 상황이 명확하게 평가되면 특정 대안은 배제된다. 일반적으로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과는 화해가 어렵기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한국에 개입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힘을 무시할 정도라고 생각할 경우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일종의 허풍으로 치부했다. 자신과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상대방과는 좀처럼 타협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국과 중국은 재앙이 될 분쟁의 문턱에서조차 상대방의 국제적 역할을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한반도를 또 다른 18개월 동안 파괴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본문 133쪽>


트루먼이나 맥아더가 처음부터 북한 점령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켰고,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의지를 미국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유엔은 중재자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 이후 남북한 혹은 양대 진영 사이에서 국제적 중재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 결과 전쟁은 1950년 10월 1일로부터 2년 반 동안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미군 전사자 3만 4천 명, 남북한 130만 명, 중국이 대략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채 휴전했다.


남북한은 현재까지 어떤 심판자나 중재자, 완충 없이 완전무장한 채 60년간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김일성은 1994년 사망했고,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해 1994년 제네바에서 북한이 핵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2개의 경수로와 핵 발전 원자로 건설의 대가로 핵무기 개발계획을 폐기할 것을 약속하는 북 ․ 미간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면서 선제전쟁 전략에 대한 독트린을 발표한다. 예방전쟁, 선제공격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시 독트린의 발표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 상황 등을 지켜보며 북한은 이것을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선전포고)으로 인식했고, 2003년 NPT(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2003년 4월 북한은 NPT조약 체결 32년 만에 처음으로 탈퇴한 국가가 되었다.


2003년 6월 북한과의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점진적으로 북한과 한국 사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멀리 병력을 재배치하는 데 합의했다. 1,7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한국의 수도 서울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포병의 사거리 내에 위치했었다. 미국과 한국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군사력의 재배치는 양측 100만 명 이상의 군사력으로 항상 긴장을 유지해온 전쟁의 위험 상황을 다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달랐
다. 이들은 거대한 규모의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핵개발을 선택했다. <본문 137쪽>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가리켜 ‘최악의 독재자’라고 지칭하며 그 같은 최악의 독재자가 다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무기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이 핵무기를 갖도록 부추긴 결과만 빚고 말았다. 미국의 샘 넌(Sam Nunn) 전 상원의원은 “우리는 악의 축의 잘못된 끝에서 출발했다”며 부시의 악의 축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상대 지도자(국가)의 의지에 대한 오판과 자국에 대한 오만

20세기에 가장 길었던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투쟁한 기간은 장장 30년에 이른다. 한 세대가 흐르고 미국의 대통령 5명이 바뀌는 동안 미국은 상대가 지닌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 자신들과 겨루고 있는 베트남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고, 심지어 경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물론 미국 자신은 아시아 전반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베트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특히 존슨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수없이 많은 이념적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전쟁이 지닌 기본적 특성이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이념적 전쟁이기 보다는 식민주의에 대항한 전쟁,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혁명전쟁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거의 언제나 대부분의 전투에서 상대방보다 적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기꺼이 전투에 임했고, 죽음을 불사했다.


존슨과 미국은 호치민과 베트남을 마오쩌둥과 중국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로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옛 볼셰비키 당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에서 호치민은 마오쩌둥보다 앞선 원로 공산주의자였다.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하기도 했고, 우리에겐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로 잘 알려진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같은 이는 호치민을 가리켜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가진 완전한 베트남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언론은 그를 경멸적으로 묘사하여 “모스크바에서 기술을 익힌 염소수염의 선동가”라 불렀다.


오랫동안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승리를 거의 쟁취할 뻔했던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며 전쟁에 끼어들었던 미국은 정작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진구렁에서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이들이 1973년 파리에서 확인한 것은 이미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결정되었던 상태로 고스란히 되돌아갔음을 인정하는 일 뿐이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투하된 폭탄의 80배나 되며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배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폭탄들은 폭 25~50피트에 깊이가 5~20피트나 되는 폭탄 구덩이 2,000만 개를 남긴 것과 같았다. 폭격 후 베트남의 대부분은 달의 표면처럼 보였고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도 전쟁이 끝난 후 후유증이 심했다. 미국의 지도부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었으며 대학은 붕괴되었고 경제는 전시 통화팽창으로 부풀어 있었다. 5만 8,000명의 전사한 미군을 베트남에서 싣고 온 금속관이 전쟁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의미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산당의 초기 승리와 이 전쟁의 고뇌 중 어느 쪽이 희생을 덜 치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베트남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명의 미군도 인도차이나에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 길이 어느 쪽으로 인도되었을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베트남은 훨씬 일찍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의 형태는 모스크바와 베이징과는 다른 아마도 독립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민족주의 성격을 띤 티토주의적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산화의 연기의 대가로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의 생명과 300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1,500억 달러의 가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본문 185-186쪽>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었던 딘 러스크는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끝난 베트남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미국인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역사와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 - 유고내전

발칸반도 지역은 오랫동안 유럽의 화약고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에 값하듯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총성도, 20세기의 끝을 알리는 유고 내전도 모두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키신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세 종교적 집단 중 어느 것도 다른 집단의 지배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때때로 터키나 오스트리아 또는 공산세력과 같은 외부세력에는 굴종했으나 이들 상호간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1941년 나치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기간 동안 이 3개 민족은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 못지않게 서로에 대한 증오 역시 맹렬하게 불태웠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악명 높은 ‘우스타쉬(Ustashes)'를 만들어 비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체트니크(Chetniks)'를 만들어 비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들 모두와 투쟁하며 통일된 유고슬라비아를 세운 것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이었던 열쇠 수리공 출신의 빨치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는 대외적으로 ’형제의 단결‘이라는 슬로건 속에 통합되어 있는 듯 보였다.


티토 사후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내전, 처음엔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후 보스니아에 이르기까지, 인종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서로 혼인하고 바로 이웃에 살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로에게 총질을 하며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전쟁이었다. 물론 최악의 범죄자는 세르비아였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유일한 가해자도, 그렇다고 유일한 악도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그들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는, 그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과거에만 가 있었으며 미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학살의 주범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대해 존 G. 스토신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죽음과 배반의 그늘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자살했다. 그는 아내 미라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위한 피난처를 찾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밀로셰비치의 아내 미라는 유고슬라비아를 지배했던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조카이자 수양딸이었다.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라(미랴나)를 입양한다. 그녀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하는데, 이들에게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세르비아의 역사는 그들이 수호해야할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되찾아야 할 세르비아 역사의 성지는 코소보였다. 1389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진격에 맞서 코소보에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50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유고 국민이 아니라 과거의 원수들이었다.


실제로 그 장소에서 그 같은 전투가 벌어졌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민족과 종교 사이의 증오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터진 총성과 1994년 사라예보의 총성은 전혀 달랐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사건은 유럽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방아쇠가 되었지만 1994년엔 세계 열강 중 누구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죽임에 대해 개입하길 꺼려했다. 어느 강대국도 이 지역에 개입해야 할 이해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강대국들이 수수방관하는 동안 인종적, 종교적 증오에 휩싸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는 서로에 대한 증오를 맘껏 불태웠다. 결국 1999년 미국과 나토가 개입하면서 잔인한 학살극은 막을 내렸다. 영국의 역사학자 노엘 맬컴은 세르비아 측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1389년의 코소보전투에 대한 신화는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한 민족이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화는 그 자체의 진위 여부로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노엘 맬컴의 주장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기든 가틀립(Gidon Gottlieb)은 “민족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오직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의 공유뿐 아니라 역사, 잘못 저지른 실수, 희생을 포함해 정치술의 냉혹한 고려사항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을 움직인 상징이나 전설적인 요소에도 근거를 둔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1994년의 대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전쟁 -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

이외에도 존 G. 스토신저는 6장 「신의 전쟁」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현재까지 치르고 있는 오랜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7장 「성지에서의 60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그리고 8장 「후세인의 전쟁 - 이라크의 이란,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쟁」을 다루고 10장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 - 미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21세기 초엽 9.11테러 이후 부시의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의 양상과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저자는 이 모든 전쟁의 양태를 두루 살피는 와중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듯 서로 다른 전쟁이 결국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이며 전쟁은 결코 인간의 천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전쟁은 회피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는 무엇보다 전쟁은 지도자의 성격,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잘못된 지각’이 사실상 ‘전쟁의 시작과 평화 유지’라는 정책의 향배를 결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해 존 G. 스토신저 교수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역사상 벌어졌던 전쟁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전쟁이 사실은 하부 구조,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서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 의해 벌어진다는 주장을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남북한 경제협력, 특히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이 안전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데, 여기엔 한 가지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물론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전쟁이 양측의 이해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은 전쟁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좋은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양 측의 잘못된 오해와 인식 혹은 증오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성공단이 아무리 잘 돌아가고, 경제적으로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하더라도 증오의 물길이 파놓은 심연이 너무 깊다면 전쟁의 위기는 상존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존 G. 스토신저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을 통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길 바란다.


마지막 하나의 경고는 “우리가 들어왔던 어떤 전쟁이 과연 ‘불가피’했던 것인가?”였다. 이 단어는 내가 연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철의 주사위’를 다루는 순간부터 수없이 떠오른 질문이었다. 십자군들은 특히 그러한 주장을 좋아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역사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외교정책을 결정한다. 이들은 지혜롭게 혹은 어리석게 정책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책을 만든다. 전쟁 이후에 역사가들은 종종 전쟁을 뒤돌아보고 운명이나 불가피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결정주의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은유에 불과하가다. 결국 우리의 생에는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이 있을 뿐이다. <본문 537쪽>


다시 말해 그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란 없으며, 평화란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조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선택은 잘못된 인식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선택되는 것이며 전쟁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한 사람은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랜 고통 속에서 전쟁의 맨 얼굴을 직접 대면한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이 지닌 가장 큰 딜레마는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큰 스승이 곧 전쟁 그 자체라는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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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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