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 - 사사키 다케시 지음 | 윤철규 옮김 | 이다미디어(2004)

세상에 제 아무리 좋은 책이 널렸다 하더라도 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인쇄된 종이에 불과하다. 영화 "투모로우"에서 도서관으로 대피한 청년들이 얼어죽지 않기 위해 벽난로 불쏘시개로 쓰는 것도 책이다. 그 도서관의 사서 역시 살아남기 위해 책을 불태운다. 이 때의 책이란 아무리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사서는 한 권의 책만큼 자신의 품에 꼭 품은 채 내놓지 않는다. 쿠텐베르크가 인쇄한 고인쇄물인 "성서"였다. 이 책이 "성서"라 불태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의 문명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할지라도 세상에 인류의 흔적으로 남기고 싶은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초등학교 4학년의 손에 잡힌 "에밀"을 나는 몇날 며칠에 걸쳐 다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 책이 잘 이해되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에밀"의 첫 구절이 내 가슴에 찌르르 와 닿았던 탓에 그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에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물주의 손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이 선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넘어오면 모든 것이 악해진다."

 

어린 나이에 읽은 "에밀"을 과연 잘 이해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후로도 틈틈이 "에밀"을 읽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에밀"을 잘 이해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에밀"이란 책의 말미에 소개된 "장 자끄 루소"의 생애가 날 또다시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런 근대의 탁월한 교육철학책을 쓴 장 자끄 루소가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태어나는 족족 고아원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은가. 책과 책의 저자가 위인전과 위인 만큼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계기였다.

 

나중에 대학에 간 어느날 우리를 가르치던 교수는 자신의 강의 시간에 강독한 소설 작품들 가운데 "앞으로 100년 뒤에도 여전히 읽히게 될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작품 하나를 선정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정리해서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100년 뒤에도 여전히 읽게 될 작품을 선정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선정하라니... 끔찍한 과제였다. 우리 근대문학의 역사를 이인직의 "혈의누"로 잡아도 2006년이 되어야 비로소 100년인데, 그로부터 100년 뒤에도 여전히 읽게 될 소설을 자신이 진행한 강의 시간에 강독한 10편 가량 되는 소설들 가운데 골라 보라니 끔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덕분에 나는 고전이란 무엇인지, 명작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고전이란 시간이란 숫돌에 연마하여도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빛나는 것들을 의미한다.

 

김명수 시인의 시 "하급반 교과서"에 등장하는 한 대목처럼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도 하나도 흐트리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를 하며, "참새 짹짹, 병아리 삐약삐약"을 외우듯 한국 최초의 개인 시집은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라고 외우지만 정작 "해파리의 노래"란 시집이 오늘날 고전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시집을 처음 손에 넣은 것이 불과 일주일 정도 전이란 사실을 구태여 상기해보지 않더라도 이 시집이 오늘날 김소월이나 윤동주가 누리는 것과 같은 영예를 누린다고 할 수는 없다(열린책들 초간본시리즈). 이 시집은 어떤 의미에선 고전이라기 보다는 문학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연구자료에 가깝다. 고전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 단지 오래된 책이란 의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고전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이라는 거창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 붙게 만드는 것일까?  '고전(古典, classics)'과 함께 책을 의미하는 몇 가지 명칭들을 이야기해보자. 우선, 정전(正典(canon)이란 말이 있고, 실라버스(syllabus)가 있고 텍스트(text)란 말이 있다. 앞의 것일수록 범위가 좁아진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텍스트란 것이 말 그대로 '해석(규정)되기 이전의 원본'을 의미한다면, 실라버스는 이런 텍스트들 가운데 특별한 목적과 제도로서 선별된 텍스트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쉽게 이해를 돕는다면 대학에서 어떤 강의 교재로 채택한 도서 목록이 있다면 그것은 그 강의의 실라버스라 할 수 있다. 정전(cannon)이라 하는 것은 갈대나 장대를 의미하는 고대 희랍어 kannon에서 유래된 말로 후에 '규칙' 혹은 '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말은 보다 발전하게 되어 다른 텍스트들보다 보존할 가치가 있는 어떤 텍스트들을 규정하는 말이 된다. 가령,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성서와 이를 해석한 신학 서적들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꾸란이,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사서 오경" 과 같은 책들이 정전이 될 수 있다. 정전이란 한 문화권이 위대하다고 동의하고 있는 혹은 간주하고 있는 작품들의 총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고전(classics)와 흡사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고전이란 말은 보다 확실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사용되는 말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정전이란 말은 보다 객관적인 용어로 쓰인다는 것이다.

 

만약 한 개인에게 내 인생의 의미있는 책 100권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정전이 될 수 있다. 그런 개개인이 100명이 모이고, 1,000명이 모이고, 다시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면서 서로의 정전이 겹치고 스며들면서 구성되는 것이 바로 그 사회의 정전이 되고, 세월과 함께 숙성되어 인정받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그러나 어떤 고전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들로 손꼽히는 이들치고, 그 백성들에게 가혹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은 왕이 없는 법처럼 종종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곤 한다. 즉, 존경받아 마땅한 고전들은 종종 교양(敎養)이란 이름으로 - 그것이 culture이든, bildung이든 상관없이 -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인간도 그 시대와 괴리된 채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교양이란 이름으로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교육받곤 한다. 교양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대의 상식을 얼마나 잘 꿰차고 있는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상식(common sense)이란 정상과 비정상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또다른 정전이기도 하다.

 

이 말은 상식이 바뀌면 고전이나 정전의 지위도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푸코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고전이란 지배계급의 경전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식을 장악함으로써 고전을 취사선택한다. 여기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이란 책이 있다. "절대지식"이다. 그것도 "교양으로 읽어야 할~" 이런 류의 책을 대할 때마다 주눅들기 십상이다. 읽었다고 해서 내것일리 없는... 비록 세상은 바꾸었을지 모르나 나 자신은 바꿀 수 없는... 그러므로 절대란 절대로 그렇지 아니하다란 뜻일 수도 있다. 절대로, 절대로란 말로 이루어진 사랑의 맹세를 절대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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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대학.중용 강설 - 이기동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6)


『소학(小學)』과 『대학(大學)』 그리고 독서정한(讀書定限)

  올해의 목표이자 내 나름대로 설정한 고전 독서의 첫 단추를 『대학(大學)』 공부로 시작하기로 결심했었다. 2008년 한 해의 결심이자 내 삶의 한 결절(結節)을 이루는 지점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유교문화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의 강설(講說)로 이루어진 『대학 ․ 중용 강설』은 유교 경전과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풀이한 강설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이다.


  이 시리즈가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논어(論語)』보다 앞서 『대학』을 첫 권으로 한 까닭은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기초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소학(小學)』을 떼고, 본격적인 공부로 넘어가는 첫 단계로는 『대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됨을 가르치는 교육의 첫 걸음은 물론 태교(胎敎)부터 시작되었지만 아이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우선 『천자문(千字文)』을 통해 한자를 배우고, 그 후에 『소학』과 『동몽선습』 등을 배우고 익혀 몸에 배도록 하였다. 서당이나 향교, 서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명심보감』, 『사서삼경』, 『사기』, 『자치통감』, 『당송문』, 『고문진보』 등으로 점차 경전에서 사서와 문학 작품에 이르는 폭 넓은 교육과정이 진행되었고, 같은 책을 읽더라도 강설의 수준이 높아져 가는 것이 일반적인 학습 방법이었다.

  『대학』과 대비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소학』은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시켜 당대에 유행하던 도교와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가 사회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년기부터 유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유학의 기본을 정리해 편찬한 책이다. 『소학』은 내편 4권과 외편 2권으로 모두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태교부터 시작하여 교육의 과정과 목표, 자세 등을 밝히는 입교(立敎), 인간이 지켜야 하는 오륜을 설명하는 명륜(明倫), 학문하는 사람의 몸가짐과 마음자세, 옷차림과 식사예절 등 몸과 언행을 공경히 다스리는 경신(敬身), 본받을 만한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한 계고(稽古) 등 모두 4권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편에서는 유교사회의 도덕규범과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자세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항들만을 뽑아서 정리하였다. 외편에서는 한나라 이후 송나라까지 옛 성현들의 교훈을 인용하여 기록한 가언(嘉言), 선인들의 착하고 올바른 행실만을 모아 정리한 선행(善行)의 2개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소년들이 처신해야 할 행동거지와 기본 도리를 밝혀 놓았다. 책의 구성은 내편 4권과 외편 2권으로 모두 6권이다.

  이 시대의 학습(學習)이란 말 그대로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었으므로 책의 모든 구절은 암기(暗記)하였고, 암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뜻이 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공부란 독서를 의미했고, 독서라는 것은 모름지기 숙독하여 암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했다.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는 “책이란 모름지기 숙독(熟讀)해야 한다. 이른바 책이란 물건은 한가지다. 그러나 열 번 읽었을 때는 한 번 읽었을 때와는 정말 다르고, 백 번 읽었을 때는 열 번 읽었을 때와는 또 전혀 다른 법”이라고 해서 책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주희(朱熹)의 가르침을 받들었던 조선의 선비들은 두루 여러 방면의 책을 읽되 대강이라도 읽어둔다는 뜻의 섭렵(涉獵) 보다는 한 가지라도 깊이 있게 파고든다는 숙독을 독서 중 으뜸의 방법이라 여겼다. 이 시대의 독서가들은 ‘독서정한(讀書定限)’이라 하여 자신이 스스로 정한 기한 내에 어떤 책을, 어떤 순서로, 몇 번이나 읽을 것인지 계획을 짜서 실천에 옮겼다. 서산(書算) 또는 서수(書數)라 하여 자신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헤아리는 생활 용품을 만들어 책 사이에 끼어놓고는 했다.

사서(四書)와 『대학(大學)』
  흔히 사서삼경(四書三經)이니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고들 하는데, 사서란 유학에서 확정한 네 권의 주요 경전인 『대학』, 『논어』,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과 ‘중용’을 합쳐서 ‘학용(學庸)’이라 하고, ‘논어’와 ‘맹자’를 합쳐 흔히 ‘논맹(論孟)’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공자와 맹자의 지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논어』, 『맹자』는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전해져왔지만 사서오경 중 하나인 『대학』은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은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 대(漢代)에 이미 오경이 기본 경전 중 하나로 전해져 올 만큼 중요한 경전 중 하나였다. 『대학』은 본래 49편으로 구성된 『예기(禮記)』 중 제42편에 해당하고, 『중용』은 제31편에 속해 있었는데, 주자가 송대에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 유학의 새로운 체계(性理學)을 집대성하면서 『예기(禮記)』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四書) 중심 체제를 확립했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송나라에서 급(伋:子思)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한나라 때 학자인 가규(賈逵)도 공급(孔伋)이 송에서 『대학』을 경전으로 삼고, 『중용』을 위(緯)로 삼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대학』은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자는 ‘경’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제자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주자는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라는 전통적인 오경 체제를 벗어나 사서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주석과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작업을 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와 도교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항하여 새로운 유교체계로서의 성리학을 세우는 작업이기도 했다. 사서가 체계를 갖춤에 따라 성리학은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과거 시험에 사서가 주요한 과목이 되면서 사서의 권위는 오경을 앞지르게 된다.

어째서 『대학』을 가장 먼저 읽는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서로 사서를 읽었던 까닭은 주희의 가르침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학』이 학문에 임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 목적은 무엇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의 핵심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이 이에 해당한다. 팔조목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하니라.
큰 가르침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과 하나 되는 것에 있으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에 있다. <『대학』, 經一章>


  이기동 선생은 강설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가”를 먼저 묻고, 그 목적은 의식주를 마련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일 것이라 말한다.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며 다른 물질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제한된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서로 투쟁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육체를 위해 추구해온 모든 것은 육체가 없어진 순간 그 가치와 의미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며 살아오면서 추구해온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괴로움과 고달픔을 참고 견디며 노력해온 공부의 대가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일생을 예견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살며,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보라는 것이다.

  주자는 사서 중에서도 특히 『대학』을 중시했는데,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교적 이상,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덕을 쌓는 길로 들어가는 첫 관문에서 각자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원했다. 질문을 통해 학문하는 이유와 뜻에 대해 묻고 답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남보다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선하고 밝은 덕성을 훌륭히 연마하고, 부단한 연마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밝은 덕을 더욱 밝게 하고, 이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대학』을 통해 ‘가서 머물러야 할 목적지를 알고(知止而后, 有定)’, 뜻을 정립한 연후에 『논어』를 배워 근본을 세우고, 『맹자』를 읽어 사리를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중용』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깨우친다는 것이 주자의 가르침이었다.

두 명의 대가(大家)를 앞세워 읽은 『대학(大學)』
  이기동 선생의 『대학․중용강설』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만 실제로는 『대학』만 읽었을 뿐 『중용』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으므로 지금 쓰는 글은 이 책에 대해서는 반쪽짜리일 뿐이다. 언젠가 『중용』까지 읽게 된다면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기동 선생의 강설을 읽었던 내 나름의 방식을 일부나마 우선 소개해본다. 이기동 선생의 강설은 한자의 독음은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자의 해석 순서를 번호를 매겨 소개하고 있으므로 순서에 맞춰 해석해보는 것이 좋았다. 거기에 덧붙여 나는 모로하시 데쓰지의 『중국고전명언사전』 중 『대학』 부분을 펼쳐놓고, 모로하시 데쓰지가 중요하게 언급해 놓은 부분을 함께 읽었다. 한 권의 텍스트를 놓고 두 분의 대가(大家)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셈이다.

  이기동 선생의 강설이 풍부하고 감동적이었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체크해가며 읽기에는 모로하시 데쓰지의 명언사전 역시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두 분이 약간씩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확인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대학』이 학문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또한 매우 정치적인 서술이기도 하다.

유가적 관념에 따르면 현실은 도리를 실현하는 장소이다. 정치는 바로 그 도리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행위이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비롯해 모든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만물을 낳기만 했을 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만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을 다듬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비로소 하늘과 땅의 만물창조가 의미를 갖게 된다. 문화를 창조하는 이런 행위가 정치이고, 정치가 바로 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본문 22쪽>


  김태완 선생이 엮은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에도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유교적 지배질서가 통치했던 조선시대의 문화, 정치란 그 자체로 도리(道理)를 밝히고 도리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이유로 『대학』은 통치, 다시 말해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책이기도 하다. 이기동 선생의 강설은 그간 신문 칼럼이나 단순한 고사성어, 명언록 따위에 간략하게 소개된 고전의 일부가 아닌 그 안에 담긴 깊은 뜻까지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만 맛보기로 소개해본다.

湯之盤銘에 曰苟日新하고, 日日新하고 又日新하라 하고, 康誥에 曰作新民이라 하며, 詩曰"周雖舊邦이나 其命維新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無所不用其極이니라.
탕임금의 세숫대야에 새겨진 명문(銘文)에는 “진실로 날로 새롭게 하고 날로날로 새롭게 하며 또 날로 새롭게 하라”고 하였고, 『서경』의 강고편에서는 “백성을 진작시켜 새롭게 한다”고 하였고, 『시경』에서는 “주(周)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통치이념과 기상이 계속 새롭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그 최선의 방법을 쓰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대학』, 傳二章>


  많은 이들이 “日新하고, 日日新하고 又日新하라”에 주목하여 날로 새롭게 한다는 사전적인 의미에만 집착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뜻은 “親民[친민]”에 있다는 것이 이기동 선생의 풀이다.

발전 과정이 투쟁과 혼란의 과정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 즉 백성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백성의 진정한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이론을 끊임없이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통치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지배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피지배자의 현실을 관찰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이미 백성들의 처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완전히 남과 하나가 된 상태, 즉 친민(親民)의 상태가 되어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남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지도자만이 백성들에게 필요한 참신한 이론을 끊임없이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서 볼 때 “진실로 날로 새롭게 하고 날로날로 새롭게 하며 또 날로 새롭게 한다”는 말이 친민의 설명이 됨을 알 수 있다.
신민(新民), 즉 새로운 사람이란 새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이론을 제공하거나 그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의 수는 처음에는 소수였다가 차츰 많아지게 되고 결국 전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소수의 신민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이를 진작시킴으로써 순조로운 발전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록 오래된 나라라 할지라도 그 나라의 통치이념은 계속 참신하고 계속 생동감이 넘칠 것이다.
그러므로 명명덕이 되고 친민이 된 상태에 있는 군자는 그 택하여야 할 최선의 방법, 즉 날로날로 새로운 방법을 택하여 쓰게 되는 것이다.<본문 41~42쪽>


읽노라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라 밑줄 긋고, 다시 읽게 되는 것이 『고전(古典)』이 지닌 진정한 힘이란 생각이 든다. 현대화되고, 민주화된 사회라지만 시정잡배(市井雜輩)만도 못한 정치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시대에 그들에게 『대학』을 달달 외우도록 하는 시험을 치른다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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