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 <연말정산-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 - 포토텔링기획전




전시기간 : 2009년 12월 31일 - 2010년 1월 20일
참여작가 : 김성헌, 김수진, 이치열, 심현철, 이명익, 정택용, 조재무, 박선주, 한상훈
전시장소 : 사진전문갤러리카페 <포토텔링>
홈페이지 : www.phototelling.net



사진전문 갤러리 카페 포토텔링(Phototelling)은 사진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다는 모토로 만들어졌다. 이들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준비한 기획전의 제목은 <연말정산 -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광학 원리에 의해 사물을 포착해내는 카메라 렌즈에 의해 정착된 사진은 있는 그대로 재현된 광학원리의 결과물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바라본 이의 시선에 의해 포박된 기호(記號)이다. 사진 기호는 작가에 의해 촬영되고, 현상과 정착, 인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발화(發話)한다. 사진은 타인(감상자)의 시선에 다시 포박되는 과정을 통해 수화(受話)된다. 수신된 기호는 타인의 논리와 감정의 미로를 지나 또 하나의 심상(心象)이 된다. 세상의 모든 대화(對話)는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사진의 놀라운 재현성은 종종 화자에 의해 언술된 기호가 모두 사실(fact)일 것이라는 강박을 준다. 그러나 언어가 그러하듯 사진 역시 왜곡될 수 있으며 세상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줄 수 없다. 사진의 놀라운 재현성과 현장성은 그 힘이 강력하면 할수록 그와 반대로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강력한 회의에 부딪치게 된다. 한 장의 사진은 물론이요,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사건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구체적 보편'이다. 사회적으로 무수한 연쇄의 고리를 지니고 있는 구체적 보편의 연쇄 앞에서 한 장의 사진이 구체적 해답이나 대답을 주기엔 너무나 약소하다.




한 장의 사진은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만 한다. 이들의 사진은 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구체적 보편의 연쇄 앞에서 구체적 해답(혹은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 과연 지금도 우리 안의 모순들과 대면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또 사진 속에 담겨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연민이 과연 진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증명사진과 존재증명

문학에서 ‘자서전’이 그러하듯 미술에서 ‘자화상’이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그려 그것을 후세에 남긴다는 의미보다 자신(존재)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의 투쟁을 담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 본질을 묻는 작업이다.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외양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의 온전한 모습을 집약하고자 노력한다. 자화상은 세계에 투사된 자아의 이미지이자, 존재의 확인이며 동시에 세상과 대결하는 자신을 노출하는 첨단(尖端)의 일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획전이 담아낸 우리 시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비록 성긴 모양에 그칠지라도 그 윤곽을 살피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시선을 - 기륭전자(비정규직), 뉴타운, 미디어 법, 세종시, 대통령 서거, 쌍용차 등 -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의 자화상, 대한민국의 증명사진은 참담하다.




1997년 IMF외환위기를 전후해 우리는 ‘희망퇴직’이란 말을 즐겨 들었다. ‘희망’과 ‘퇴직’이란 어울리기 어려운 두 단어가 결합된 형용모순은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 당한 사람들보다 좀 나은 행운을 누렸다는 의미가 되었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우리는 ‘희망의 빈곤’ 시대를 살았다. “잘 살아보세. 누구나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상징하듯 국가가 제시한 근대화의 아젠다는 폭압적이고 봉건적인 노동통제의 시대를 거쳐 근대 포디즘적 노동통제 시대로의 전환기 동안 ‘하면 된다’는 희망을 통해 빈곤을 인내하도록 했다. ‘희망’을 품고 있는 동안 ‘빈곤’은 그래도 견딜 만 했다. 그러나 생산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노동통제를 곧 자율, 자기계발이란 허울 좋은 논리로 전환시키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강제하는 빈곤을 자기계발하지 못한 이들의 자기 책임으로 귀결시켰다. 이제 빈곤은 단순한 절망과 박탈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적 무능력자들의 책임이 되었다.

사회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자 약자들은 자신보다 더 약한 처지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박탈하여 엄혹한 시대를 견디려 한다. 광우병 촛불시위 현장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비롯한 온갖 구호가 나왔으나 ‘비정규직 문제’로 넘어가면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이 아니면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앞에 우리는 모두 잔인한 동맹의 구성원이 되었다. 국가권력, 기업권력 앞에서 모두가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왕따’였다.




이등시민의 사회 - 박탈과 배제의 일상화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처럼 황국시민과 후레이센진(不逞鮮人)처럼 일등시민과 이등시민으로 양분되고 있다. 이런 차별은 단순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만이 아니라 언제 누가 될지도 모를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제의 원리를 관철시킨다. 쌍용자동차는 거친 세계화의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한 이들의 투쟁으로, 세종시는 지역이기주의로, 미디어법은 그동안 안전한 고용의 테두리 속에서 고임금을 누려온 이들의 제 밥그릇 지키기로 폄훼된다. 5.18 광주 민주항쟁 이후 권위를 의심받았던 대한민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거치며 ‘오! 대한민국’으로 찬란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집권여당이 2년 내 정규직으로 전환하란 법 규정을 4년으로 바꾸지 않으면 해고대란이 일어난다며 도리어 난리 치는 국가다. 우리는 빈곤하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빈곤하다. 한 사회가 이처럼 조직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짓밟으면서도 OECD 10위 안에 드는 생산력, 경제력, 경쟁력을 누린다 한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담고 있는 우리 시대 초상의 몇몇 구체적인 진면목을 살펴보자. 1990년 6월에 설립된 기륭전자(Kiryung electronics)는 한국의 위성방송 수신기를 제작, 생산하는 업체로 이 업체가 생산하는 제품들 - 디지털 셋톱박스, 디지털위성 라디오, 네비게이션, 지상파 DMB, HD Radio 등 - 은 대부분 외국에 수출된다. 제조업으로 분류되는 기륭전자지만 이 업체는 지난 2002년 이후 생산직 정규노동자를 한 번도 고용하지 않았다. 2005년 6월 30일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노동부에 기륭전자와 파견업체 휴먼닷컴에 대해 불법파견이라며 진정서를 냈고, 다음달 5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기륭전자는 생산 물량을 중국의 외주업체로 빼돌린 뒤 물량감소를 이유로 계약직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노동부는 불법파견을 이유로 기륭전자에게 개선명령을 내렸지만 기륭전자는 비정규직 중 1년 미만 노동자 전원을 해고한 뒤 이들을 도급으로 돌리겠다며 개선이 아닌 개악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이는 법적으로는 불법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점거농성을 시작하자 공권력이 투입되었고, 조합원 전원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1,000일이 넘는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기륭전자는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지만 끝끝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파견된 사람일 뿐, 기륭전자의 정규직 사원이 아니므로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기륭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비정규직이 무조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고, 이제는 한국에 공장도 없기 때문에 정규직화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륭전자는 이름만 바꾼 다른 공장을 통해 제품생산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용산참사’. 정식명칭은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사건이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5시 33분, 대한민국 수도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 경찰과 용역 직원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경찰특공대 1명, 철거민 5명이 목숨을 잃었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 시절부터 추진했던 뉴타운과 도시정비사업의 결과였다. 서울시가 도시환경정비라는 목적으로 추진했던 도시정비사업은 서울 곳곳에서 벌어졌고, 그중에서 용산 4구역은 한강로3가 일대 5만3,442평방미터를 재개발하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재개발로 인해 인근의 땅값이 크게 올랐고, 그 결과 이 일대 지역에서 상가를 임대받아 장사를 하던 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도시정비사업 관련 법률은 도시개발법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토지 보상법 등 여러 법률체계에 얽혀 있어 일반인들은 설명을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며 복잡한 법률체계의 틈바구니에서 법률이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행정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게 되어있다.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철거현장마다 아수라장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법률체계의 문제다. 그리고 이런 법률체계의 틈새를 이용해 공공연한 불법행위들이 자행된다. 문제는 행정 권력이 토지소유주들의 입장과 세입자들의 입장 사이에서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도시정비사업의 한 주체로서만 인식한다는 데 있다. 서울시와 용산구는 도시정비를 통한 땅값 상승과 이를 통한 세비 증대 등을 이유로 도시정비사업을 강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서울시와 용산구는 토지보상법에 규정된 주거이전비를 철거지역 세입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이들을 강제로 내쫓으려 했고, 저항하는 이들을 범법자로 몰았다. 국가권력은 세입자들을 내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용역들에게는 관용을, 이에 대항하는 세입자들은 범법자로 대했다. 범법자가 된 세입자들 가운데 생계를 위협받게 된 이들이 옥상 건물 위에 망루를 설치하고, 경찰과 용역 철거반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과 신너, 돌을 준비했다. 경찰은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사전에 최소한의 안전대책 마련이나 협상 없이 곧바로 경찰특공대를 진입시켰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용역들을 대동하기도 했다. 화재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에 대해 일각에서는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져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판에 나온 경찰특공대원은 “진압 당시 화염병 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 내부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인터넷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용산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철거민과 조합간의 보상비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이에 주목해 이것을 사회문제가 아닌 세입자와 조합 사이의 문제만으로 축소해서 보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용산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며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도록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구속처벌하고, 범대위 위원장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 역시 마찬가지의 시선이다. 용산참사를 국가권력과 시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세입자와 조합, 세입자가 조합에게 좀더 많은 이주보상비를 뜯어내기 위해 벌였던 시위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UN사회권 규약위원회에서는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이 원치 않을 경우 겨울철과 같은 악천후에는 퇴거를 수행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용산4구역은 2008년 11월부터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국제사회는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고 있다. 검찰은 수사기록 등의 열람, 등사를 거부했고, 법원이 요구한 수사기록 3천 쪽 역시 변호인단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변호인단이 수사기록이 전면 공개될 때까지 공판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끝내 거부되었고, 변론을 거부하자 재판부는 국선 변호인들로 하여금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겼다. 이에 반발한 피고인 9명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운찬 신임 총리는 10월 3일 전격적으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해 자연인으로서 무한한 애통함과 공직자로서 막중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총리로서 사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지만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기는 어렵다면서 당사자 간 원만한 대화가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꼬리를 붙였다. 무한한 애통함과 막중한 책임을 뒤로 한 채 용산참사의 피의자들은 모두 1심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구형한 검찰이나 검찰의 구형 그대로 형을 선고한 법원이나 모두 비인정(非人情)이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곧 만 1년을 맞이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등에 새겨진 짧지만 강렬한 문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외침일 것이다.

“함께 살자”

함께 살자는 기륭전자의 외침, 용산의 외침,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외침을 외면하고서는 올해의 연말정산은 불가능하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후, 2004)』에서 매스미디어를 바라보며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행위, 살아남은 혹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로 고통의 근본원인은 그대로 둔 채 단지 연민하는 포즈만 취하는 것이 주는 가증스러움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실천 없는 연민’은 ‘자기 연민’이자 ‘자기애’의 발로이고, ‘연민 없는 논리’는 잔인하다.



‘엄살’이란 ‘아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보태어서 나타내는 태도’를 일컫는다. 엄살이란 전체를 뜻하는 ‘온(온 세상의 온)’과 ‘살갗’이 합쳐진 ‘온살’이란 말이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준비한 작가들은 그들이 이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온살(엄살)쟁이’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타인이 얼어 죽어도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 살 수 있다. 파업을 주도할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언론인이 일요일 오전 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잡혀가도 누군가는 여전히 평온한 아침을 맞이한다.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아니므로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다면 엄살이란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 혼자만 도덕적인 척 한다거나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엄살'이란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이다. 연인과 다툰 뒤 전화를 받지 않아 애태우던 불통의 기억, 가난하여 차별받았던 기억, 급작스러운 실직으로 고통 받았던 기억, 이런 기억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 엄살의 힘이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우리는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을 통해 내 일이 아닌 일에도 내 일처럼 아파할 수 있다. 인간이 꿈의 세계에서 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꿈꾸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론이야말로 상상력 부재의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의 답답함을 의미할 뿐이다. 손톱 끝에 박힌 가시 하나에서 온 몸의 통증과 불편을 체험하듯 이 사회의 작은 일부가 아플 때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처럼 느낀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포박하여 그려낸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자신이 바라보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진짜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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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촬영금지 - 구와바라 시세이 / 눈빛(1990)


지난 2005년은 여러모로 흥미 있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한 해였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이자, 1905년의 을사조약 100년인 해이다(그 외에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Don Quixote)』가 세상에 나온 지 4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안데르센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거기에 우리가 일본과 한일청구권협정(1965년)을 맺은 지도 40주년이 된다. 우리에게 해방과 지배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복원이라는 의미를 담는 사건들이 같은 끝자리수를 갖는 해에 모두 일어났다는 것은 시간차를 두고 생각해볼 여러 가지 것들을 던져준다.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 1936년생이니 어느덧 칠순이 넘은 사진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사진들은 낯설지 않은 풍경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런 만큼 그의 작품들 역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눈빛에서 출판된
촬영금지 : 한국 - 격동의 4반세기에 수록된 사진들은 1964년부터 촬영된 우리시대의 초상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째 장의 제목은 <1. 반일(反日)과 친일(親日)의 틈새에서>이다.

1965년, 한국은 하나의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조국의 독립으로부터 20년,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12년째의 일이다. 수도 서울과 지방의 대학에서 한일 국교 수복의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학생 데모로 혼란했고, 급기야는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그것은 1950년 이승만 정권을 와해시킨 4.19혁명에 이은 민중의 봉기라고 할 수 있는 격동의 시기였다. 한일 국교 수복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도 과거 36년간에 걸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상기시키고, 민중의 이념과 일본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일합병은, 한국인의 토지와 언어, 심지어는 이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았다. 이 가혹한 역사를 경험해야 했던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일본과의 국교 수복은 너무나 빨랐고, 그만큼 충격도 컸다. <본문 27쪽>

1965년 4월 19일 4.19혁명 5주년 기념일엔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얼굴을 적시며 도로 위를 걷는다. 그 옆으로 "헌병"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군용 지프와 트럭에 철모를 쓴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들은 침묵 속에 거리를 걸으며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다음 페이지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진 한 장이 펼친 페이지 구성으로 들어 있다. 비에 흠뻑 젖은 대학생들이 모두 비감한 표정으로 손에는 책을 쥐고, 우산을 들었으나 펼쳐 쓰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걸어온다. 누구하나 웃지 않는다. 다음 장에는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기동대에 쫒겨 달아나던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시궁창 속에 빠져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다. 연이어 민족의 굴욕을 상징하듯 시궁창물로 더럽혀진 태극기를 펼쳐 보이는 이들이 서 있다. 굴욕외교에 맞선 시위대와 시궁창물을 뒤집어쓴 태극기.

▶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서울, 1965, Kuwabara Shisei.

그것이 1965년 한 일본인 사진작가가 대신 바라본 대한민국의 얼굴이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1936년 일본 시마네에서 출생하여 1960년 동경종합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다. 그가 일본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1962년 일본사진비평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신인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다. 이 해 그는 ‘미나마따병’을 주제로 개인사진전을 열었다. 그는 일본 구마모토와 가고시마 두 지역에서 발생한 괴질인 미나마타병을 오랫동안 취재해 왔다. 1956년 첫 환장의 발병 사례가 보고된 이래 신일본질수수유공장의 폐수에 다량 함유된 수은중독이 원인으로 판명되기 까지 일본 기업은 이를 부인해 왔다. 원인모를 괴질로 지역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원인 규명은커녕 진상조사조차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 평화롭던 어촌은 죽음의 마을로 변해간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집 『미나마타병 1960-70에 관해서』로 1971년 일본사진가협회상을 수상한다.

▶ 미나마타, Kuwabara Shisei.

그의 첫 해외여행지는 한국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저는 1964년 7월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저에겐 최초의 외국방문이었죠. 방문 목적은 일본의 그래픽저널 월간지인 「타이요(太陽)」의 '분단 한국'이란 특집 기획기사를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한 ․ 일간에 외교관계가 열리지 않았던 때로, 일본인들이 방문하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저는 특파원자격으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구와바라 시세이는 50여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며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우리의 모습을 일본인인 ‘구와바라 시세이’가 담아낸 것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어두운 모습일 수 있고, 부끄러운 역사일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촬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 『촬영금지』는 특히 그런 모습들이 많다. 그가 보도사진을 촬영하던 당시는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1989년 9월 서울에서 열렸던 그의 사진전에서도 실제로 이런 항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왜 이처럼 가난한 한국의 모습을 찍어 전시하는가, 그것도 일본인이..."


◀ 청계천, 1965, Kuwabara Shisei.


이에 대해 구와바라 시세이는
"사진, 특히 보도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찍히는 쪽에 상처를 입히는 냉혹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찍히는 사람이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얼굴을 돌려버리는 사람.... 나는 어쩌면 많은 한국인에게 상처를 입혀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 행위는 아니었다. 다만 사라져 없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과연 우리는 이 노작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앞의 인터뷰에서 88년까지 한국 사진을 촬영한 뒤 이후에는 한국에서 작업을 별로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예, 한국에도 이젠 젊고 유능한 사진가들이 많이 등장해서 외국인인 제가 기록할 필요가 없어진 것도 이유입니다. 그리고 좀 모순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에는 별 매력을 못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한국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제겐 큰 행운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사진들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가난한 약소국, 과거 그가 속해있는 나라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 대한 비판이나 편견이 아닌 말없는 따뜻함과 애정이 배어나온다. 그 역시 보도사진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Feature Photo(기획사진)’이라고 한다는데, 기사에 보도탐사라는 분야가 있듯 ‘기획사진’이라는 것은 사진에 스토리가 담긴 것을 의미한다. 즉, 현장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사건 하나, 인물 하나를 추적하며 연속적으로 담아내는 사진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순간의 긴박함이 배어나오는 사진들에서조차 뭔가 정적인 느낌들이 묻어난다. 그는 『촬영금지』의 넷째장인 <4. 한국인의 얼굴과 발자취>에서 한국인들, 한국의 민중들에 대해 더할 수 없는 애정을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취재를 통해서 한국이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와 민중들의 꾸밈없는 삶을 기록하고자 했다. 최근까지 한국이 이루어온 고도의 경제성장이나 근대화를 찬양하거나 반대로 비판하는 것은 용이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배후의 이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의 희생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쉽지 않다. 나는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된 이들의 오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본문 89쪽>


청계천, 1965, Kuwabara Shisei.


구와바라 시세이와 한국의 인연이 따뜻했던 것만은 아니다. 두 번째 한국 체제 기간 중이던 1965년 12월 그는 강제출국조치 당해 한국을 떠나야 했고, 이후 3년간 그의 출입금지조치는 풀리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관광 비자를 얻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그 이후엔 다시 한국행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다. 이런 그를 돕기 위해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재일교포 친구 이강 씨가 나섰다. 그는 한국에 취재차 들를 때마다 여러 곳에 구와바라 시세이의 선처를 호소했고, 덕분에 그의 한국행은 다시 가능해졌다. 그러나 1971년 10월 15일 한국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강은 검은 지프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그에게 북한을 왕래하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간첩행위를 했다는 죄명이 쓰인 것이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그가 과연 북한에 갔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김대중이 입후보한 대통령 선거를 취재할 때, 김대중이 일본에 들렀을 때 그와 함께 회식했던 인연으로 연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1975년 2월 1일 구와바라 시세이의 친구 한 명이 또 한국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고 반년,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기 3개월 전인 1975년 1월 1일 재일교포 김달남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에게 씐 혐의는 북한에 밀항, 비밀공작원이 되어 한국에서 파괴활동을 한 북한의 비밀공작원이란 것이었다. 그에겐 사형이 구형되었고, 그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순간, 재일교포 김달남, 일본명 타츠오의 목숨을 구명해준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1978년 크리스마스 아침, 김달남 씨는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구와바라 시세이가 직접 경험한 우리의 근현대사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 열차편으로 포항에서 부산군항으로이동하는 청룡여단 병사들, 1965, Kuwabara Shisei.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15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상황은 유신독재의 장거리 터널을 건너고 있었다. 그는 1980년 광주를 촬영하지 못한데 대한 뼈아픈 소감을, 광주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동안 그는 계엄군의 보안 통제 속에 광주에 진입하지 못한 그 소감을 밝힌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남녘땅 빛고을에서 빚어진 피의 참사를 그 당시 서울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성스러운 선혈이 뿌려진 광주로부터 직선거리로 268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 있으면서도 광주의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갈 것을 갈구하면서도 갈 수 없었던 보도사진가에게는 단 한 장의 사진조차 없다. 역사의 현장에 참가할 수 없었고, 그것을 기록할 수 없었던 분함은 패배감에서 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의 좌절이었다.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한국의 젊은이들, 특히 다큐멘터리에 뜻을 둔 제군들에게 나의 과거의 체험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보도 사진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상을 기록하는 일에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한다. 현장을 밟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말할 자격이 없는 한낱 패배자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의 사회는 열려있지 않은가. 온돌방에 언제까지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자! 밖으로 나가자." 라고 말한다.

사진평론가 이영준은 구와바라 시세이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
과거에 담긴 현재적 의미'라고 말한다.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은 지 40년 만에 공개된 정부의 협정문서 일부가 그때의 진실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TV드라마를 통해 그때의 독재자는 갑자기 근대화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당시 대일협정의 밀사는 제2의 이완용을 각오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애국열사가 되는 현실, 대학생들이 가장 복제하고 싶어 하는 정치지도자 1위, 그 자식이 가장 큰 야당의 당대표로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준의 말대로 "그의 사진에 나타난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고 건물들이 우중충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어두웠던 60년대를 찍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대사의 모순이 여전히 진행되는 상태, 그 무거운 현실이 여전히 촬영금지의 그늘 속에서 우리들을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의 사진은 과거에 종료된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더럽고, 치사한 현재의 우리들에게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증을 막아주는 의미로 현존한다.

* 노대가(老大家) 구와바라 시세이. 이제는 그 자신도 세월의 흐름을 빗겨갈 수 없어 앞으로는 긴박한 사건의 현장보다는 문화적인 내용의 사진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이 책 『촬영금지』는 한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구하기 매우 힘든 책이었다. 혹시 그 시대와 사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이 책을 꼭 구해서 읽기 바란다. 그리고 만약 재고가 모두 떨어진다면 제발 이 소중한 사진집을 절판시키지 말고, 좀더 양질의 인쇄와 도판으로 개정판을 출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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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사진가 4인이 바라본 전쟁의 표면 - 성남훈, 이상엽, 이성은, 노순택
2007. 5.2. ~ 6.19(5.24 휴관)
평화공간 SPACE*PEACE
주최: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재현된 전쟁의 표면과 재구성해야 할 전쟁의 진실

영구혁명은 하나의 유토피아지만 영구전쟁은 하나의 현실이다. 1914~1985년 사이에만도 주요한 전쟁을 꼽자면 제1차 세계대전, 모로코전쟁, 스페인내전, 제2차 세계대전,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전쟁, 알제리전쟁, 소위 '냉전' 등이 벌어졌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영웅적인 기억과 치욕스러운 기억 그리고 인위적으로 재구성된 기억, 남을 죽이도록 명령받거나 허용된 끔찍한 순간 또는 살인의 면책을 부여받은 순간 등이 뇌리에 잡은 것이다. - 제라르 뱅상


1854년 12월, 수염을 기른 신사와 두 명의 조수를 태운 마차가 5대의 카메라와 7백 장에 이르는 촬영용 유리판을 가득 싣고 크리미아 지방으로 향한 이래, 거의 대부분의 전쟁은 사진에 의해 증언되어왔다. 당시 변호사로서 상류계급의 일원이었던 로저 펜톤이 이듬해 6월까지 촬영한 360장의 사진은 이후 영국 각지에서 전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이끌어냈다. 비록 전사자의 시신은 담지 말라는 엄격한 촬영조건이 있었으나 이전까지 회화가 독점해 오던 전쟁 기록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로 옮겨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신뢰한다. 그 이유는 사진이 언제나 존재하는 실체를 담아내고, 재현(representation)한다는 고정관념에서 기인한다. 이전까지 전쟁의 기록을 담당했던 미술, 전쟁회화는 그것이 아무리 전쟁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려는 의지를 담았다 하더라도 대중에게 회화는 본질적으로 관념적인 추상이다. 그에 비해 사진은 사진가의 시선, 뷰파인더 저 너머로 실제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실체를 상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진은 문서 ․ 증서를 의미하는 다큐멘터리의 어원인 라틴어 ‘도큐멘텀(documentum)’에 좀더 가깝다.

"연출되지 않았단 이유로 진실을 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진은 언제나 진실을 재현하는가? 우리는 그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전쟁을 표현한 유명한 전쟁사진들이 있다. 조 로젠탈이 이오지마의 격전 끝에 미 해병대 병사들이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사진, 예프게니 칼데이가 불타는 베를린에서 소련 병사들에 의해 독일제국의회 건물 꼭대기에 적기를 게양하는 사진들은 작가들이 현장에서 촬영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사진들이 연출된 사진들이란 사실 역시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가 성남훈은 현재 1991년부터 루마니아, 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세계의 분쟁현장을 찾아 이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아마도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성남훈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96년의 사라예보, 1997년의 자이레, 1999년의 알바니아, 2000년의 에티오피아, 2003년의 이라크에 있었다. 그러나 성남훈의 사진이 연출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 모든 전쟁과 살육, 학살과 강간, 빈곤과 기아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보스니아, 사라예보. 1996년. ⓒ성남훈

1992년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은 1995년 말 파리에서 열린 ‘데이튼 협정’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4년 동안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전체 인구 400만 명 가운데 40%가 난민이 되었다. 비록 내전은 끝났지만 스레브레니차에서 암매장된 시신 2만여 구가 발견되는 등 곳곳에서 시신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보스니아와 마찬가지로 유고연방에서 독립하고자 했던 코소보는 비폭력저항을 계속 했으나 데이튼 평화협상에서 의제로 다뤄지지 못했다. 폭력만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판단한 코소보 해방군 지도자들은 세르비아를 자극했고, 예상대로 세르비아는 무자비한 진압을 강행했다. 1999년 한 해 동안 조직적인 인종 학살과 집단 강간으로 1만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86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99년 3월24일부터 6월11일까지 나토(NATO)는 78일간 3만 8,000여 차례 출격해 1만500회의 공습을 퍼부었다. 나토군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으나 공습기간 동안 코소보와 세르비아의 민간인 피해는 급증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군은 코소보 남동부에 400만 평의 땅을 빼앗아 군사기지인 본스틸 캠프(Bondsteel Camp)를 건설했고, 인종 학살을 수수방관하던 유럽의 주요 국가들 역시 UN을 등에 업고 트레프차 광산 등 코소보의 국가기간산업을 헐값에 매각하거나 차지했다.

"소비되는 전쟁, 사진가들은 왜 무모한 시도를 계속하는가"

다른 한 편, 아프리카의 르완다에서는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후투족이 투치족을 무차별학살하기 시작했다. 정부군(후투족)과 반군(투치족)의 갈등이 민간인에 대한 보복 행위로 이어지면서 1994년 4월 9일부터 100일 동안 80만 명이 학살당했다. 보스니아, 코소보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사회는 이를 방관했고, 학살이 잦아진 뒤에야 비로소 UN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르완다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승리한 투치족 반군 세력을 피해 후투족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3만여 명의 정부군, 르완다 국민 814만 명 중 250만 명이 난민으로 떠돌게 되었다. 이들은 인근의 자이레(현 콩고민주공화국)를 비롯해 우간다, 탄자니아, 부룬디 등으로 피신했으나 부룬디, 자이레 등에서 내전이나 분쟁에 휘말리며 20만 명이 실종되거나 학살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연도 표기와 지명, 희생자 통계수치가 전쟁의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가.

로저 펜톤이 습판 콜로디온법으로 담아낸 전쟁 영상이 일반 대중에게 보여지기 까지 정확히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동영상을 통해 좀더 적나라한 전쟁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1854년의 대중들보다 전쟁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그 시절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는 언제나 TV 모니터와 현장이라는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시대, 같은 순간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학살당하는 자와 그것을 지켜보는 자라는 간극을 극복할 수 없다.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 그리고 곧 죽을 자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오늘날 차고 넘친다. 로버트 카파는 “종군기자란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 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전쟁의 내장은 그 어느 때보다 속속들이 파헤쳐지고 있다. 우리에게 전쟁은 스펙타클한 세계의 일부로서 소비될 뿐이며, 그로인해 총성은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전쟁은 표면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진가들은 여전히 전쟁의 진실을 담아내려는 무모한 작업을 계속하는 것일까?

"절망에 직면한 '사진'이 책임질 것은 아직 남아 있다"

아도르노는 1951년 자신의 저서 『문화비판과 사회』에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인간들은 아우슈비츠의 진실 이후에도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 죽이는 행위는 죽는 인간만 시체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인간조차 다른 인간으로 변화시킨다. 그 같은 변화의 이면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던 한 명의 인간, 사진가가 바라보고, 재현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구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앞에 서있는 성남훈의 사진들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참혹하지 않다. 이것은 학살과 기아를 저지할 수 없었던, 거듭 반복되는 우리들의 무기력과 무력함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적나라한 참혹보다 더욱 진실에 가까운 슬픔일 것이다. 우리는 그 적나라함을 대신해 젤라틴 프린트의 저 편에서 일어난 참혹한 현실의 체험을 상상적으로 재구성(restructure)해야만 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1996년 ⓒ성남훈

우리는 어째서 이것을 성남훈의 사진을 통해 재구성해야 하는가? 나는 그 까닭을 다시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싶다. 아도르노는 “절망에 직면해 있는 철학이 아직도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인식이란 구원으로부터 지상에 비추어지는 빛 외에는 어떠한 빛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에서 철학을 성남훈의 사진으로 바꾸어보자. 15년간 고통스러운 현장을 찾는 두려움과 의문, 외로움 속에 항해를 계속해온 성남훈의 외눈박이 행위는 사실 ‘동무여 이제 바로 보마’라는 김수영의 시론과 닮아있다. 학살이 계속되듯 삶 역시 지속된다. 비록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절망일 뿐이더라도 우리는 바로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다만, 바로 보는 일의 주체는 사진가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그것은 참혹하지 않아서 아니, 도리어 아름답기까지 하여 더욱 참혹한 사진 앞에서 잠시 멈춰서는 일, 표면의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서 시작된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출처 : <전. 쟁. 표. 면.> 展에 쓰인 글

이 글은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에 "이제 사진이 던지는 질문에 답할 때"라는 제목으로 "2007-05-04 오전 11:15:24"에 다음과 같은 편집자 주와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사진은 갈 수 없는 곳의 풍경을 전해준다.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관해서도 우리는 몇 장의 사진을 보며 상황을 짐작한다. 그러나 '사진가에 의해 선택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놓인 그 사진들이 생사가 오가는 전쟁의 실상을 말해줄 수 있을까.
  
  지난 2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서울 인사동 평화공간 스페이스피스(SPACE*PEACE)에서 진행되는 사진전 <전. 쟁. 표. 면>은 이 같은 물음에서 출발한다. 성남훈, 이상엽, 노순택, 이성은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진가 4인이 각기 다른 전쟁을 다룬 작품을 내놓았다.
  
  이들은 전시에 앞서 "보이지 않는 것은 필름에 담기지 않는다"라며 사진이 가진 한계를 고백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만 사진은 그 표면 뒤에 숨은 내면에 대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며 "죽은 자의 모습에서 그를 죽인 자를 짐작할 수 있듯 우리는 사진을 통해 전쟁이 벌어진 이유와 전쟁의 참극, 그리고 모순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에서 보스니아 전쟁(성남훈의 'Made in Man'), 실크로드 고대 전쟁(이상엽의 '고대 전쟁의 흔적, 생태 혹은 문명 사이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대학살(이성은의 '경산 코발트 폐광 대원골 유해 발굴 현장, 2005'), 5.18 광주민중항쟁(노순택의 '망각 기계') 등 4개의 전쟁을 접하게 된다.
  
  특히 각 작가들이 다룬 전쟁에 관한 전문가들의 기고가 작품과 함께 전시돼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문건영 변호사, 노용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김태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큐레이터가 필자로 참여했다.
  
  <프레시안>은 이 중 보스니아 전쟁을 다룬 성남훈 작가의 작품에 관해 쓴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의 글을 소개한다. 전 편집장은 '영구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앞에 서 있는 성남훈의 사진들은 우리의 예상처럼 참혹하진 않다"며 "이것은 학살과 기아를 저지할 수 없었던, 거듭 반복되는 우리들의 무기력과 무력함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그것이 어쩌면 적나라한 참혹보다 더욱 진실에 가까운 슬픔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편집자>

오는 31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홈페이지(www.peacemuseum.or.kr)에서 알 수 있다. 오는 12일에는 '작가와의 대화'도 마련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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