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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24 크리스마스(Christmas)에 대해 알고 싶은 서너 가지 (8)
  2. 2010.11.19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권혁범, 삼인(2004)

크리스마스(Christmas)에 대해 알고 싶은 서너 가지



한 해를 마감하는 연말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크리스마스는 어린 시절 한 번쯤 산타클로스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게 만드는 명절 아닌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선 우리나라에 국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종교적 행사를 어째서 국가공휴일로 지정(?)했는지 시비 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성스러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어째서 상업적인 행사인 양 떠들썩하게 치러져야 하는지 불만을 품고 크리스마스,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예수 탄생 이후 300년간 박해받았던 기독교
성탄절을 의미하는 크리스마스(Christmas)는 본래 ‘그리스도의 미사(Ch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말로 그리스도교의 축일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예수가 12월 25일에 탄생했다는 근거는 성서를 비롯한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이 날이 그리스도교의 축일은커녕 로마의 이교(異敎) 축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있는데요. 로마의 역서(曆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336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초기의 박해사에 대해서는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비롯해 여러 매체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수 탄생 이후 거의 300여 년간 박해받았던 기독교가 공인된 것은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반포한 밀라노칙령을 통해서였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50년간 18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던 극심한 혼란을 끝내기 위해 방대한 로마제국을 네 명의 황제들에게 분할하여 통치하도록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였던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은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기독교에 대해 관용의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임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과거 로마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교를 숭배했고,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미 제국의 하층민들뿐만 아니라 귀족, 학자, 군인 등 지배층에까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제국을 분할해 네 명의 황제가 통치하게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 로마제국은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가장 강력한 숙적 중 한 명이었던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을 앞둔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정오의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이겨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환영을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는 명확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세력의 지지를 얻어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물리쳤고,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죠. 황제는 즉위 직후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제국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승인했고, 그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지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학자 존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알렉산드로스도, 앨프레드도, 샤를마뉴도, 예카테리나도, 프리드리히도, 그레고리우스도, 콘스탄티누스만큼 ‘대제’라는 칭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고 평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탁월한 정복전쟁을 했거나 뛰어난 통치술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했다는 업적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습니다.


▶ 기독교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장-레온 제롬(Jean-Leon Gerome)


이교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날에서 출발한 크리스마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 탄생 이후 300여 년간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 신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지거나 산채로 불에 태워지고, 사잣밥으로 던져지는 등 모진 박해와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다신교를 숭배하던 로마의 사제들은 그리스도교 박해에 앞장섰는데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자 이번엔 그 반대의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는 어떤 이유나 목적에 관계없이 전쟁은 원칙적으로 죄악(Evil Sin)이라 하여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이로 보여준 비폭력, 무저항, 사랑, 희생의 정신으로 상징되는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후부터 전쟁에 관한 교리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서로마제국 교회에서는 상당 기간 전쟁을 악으로 간주해 왔었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이르면 ‘정당한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병사들의 전쟁 참여와 살상을 수용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후 그레고리 1세 대교황 시대 서로마에서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이나 이단자들을 합법적으로 기독교도로 강제 개종시켜도 된다는 이론을 채택합니다. 전쟁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변화가 교회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과 무관하게 기독교가 공인된 직후부터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 신전과 사제들이 기독교 사제들과 기독교 신자들에 의해 공격받았고, 점차 세가 위축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 프란치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사트루누스(Saturn), 1820-23, Oil on plaster, Prado Museum, Madrid

당시 로마에서는 농경사회 대부분이 그러하듯 추수가 끝난 뒤인 12월 24일부터 다음해 1월 6일까지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 하여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하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겨울이 유난히 길고 혹독한 지역에서는 동지를 전후해 커다란 축제가 연이어 벌어지기도 하는데 당시 로마의 ‘동지제(冬至祭)’ 축제 역시 범국가적인 행사로 거대하게 치러지는 행사였습니다. 동지는 낮 동안 해가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짧은 날로 이 날을 기점으로 점차 해가 길어집니다. 그런 까닭에 이 날을 태양의 탄생일이자 빛의 날로 기념하고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곧 봄이 올 것을 알리는 기쁜 날이었기 때문에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Saturn)에게 경배하는 날이었습니다.

한 편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요 1:9)’이라 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곧 세상의 빛이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이교도들이 12월 25일 ‘태양의 탄생일’로 정한 것처럼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일치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축제를 자신들의 축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선교를 좀더 쉽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도들의 축제일인 이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12월 25일은 단지 이교도들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었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12월 25일보다 1월 6일을 하느님이 예수의 탄생과 세례 때 나타난 날로 기념했고, 예루살렘에서는 탄생만 기념했습니다. 그러나 4세기경에 이르면 동방교회의 대부분이 점차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함께 기념하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크리스마스를 반대하던 예루살렘 교회 역시 결국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탄생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교회는 12월 25일 대신 1월 6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했습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었던 것처럼 기독교 역시 동서로 분열되어 각각의 입장과 교리에 따라 예수 탄생일을 기념했는데 동방교회는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지키게 된 뒤부터 1월 6일을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의공현대축일(주현절[主顯節], Epiphany)로 지켰으나 서방교회에서 주의공현대축일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날을 기념하는 축일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트리와 카드, X-MAS 그리고 캐럴과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의 상징물 중 가장 대표적인 크리스마스트리 관습 역시 기독교 본래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력 설날에 로마 사람들은 자기 집 안팎을 푸른 나무와 등불로 장식하는 관습이 있었고, 자녀들과 주변 이웃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관습은 이집트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게르만족들은 신성하다고 여기는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8세기 경 게르만족들에게 선교를 위해 파견된 선교사들이 떡갈나무를 신성하게 여기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 이들의 관습을 역으로 이용해 전나무를 가지고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하기 시작한 것에서 크리스마스트리의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나무는 전나무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구상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 구상나무가 완전히 한국산 토종은 아니고, 한국산 토종의 종자를 가져간 미국과 유럽의 종자회사들에서 종자개량을 통해 생육조건을 변화시켜 전 세계에 팔아먹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로열티 한 푼 받을 수 없으며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우리나라로 역수입되어 로열티를 지불해야만 하는 실정이긴 하지요.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가까운 친지와 이웃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풍습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다른 풍습들이 유례가 불분명한 것들이 많지만 카드만큼은 유례가 명확한 편인데요. 1843년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새로 관장으로 부임한 헨리 콜경은 너무 바빠서 크리스마스 편지를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편지 대신에 짤막한 메시지를 담은 카드를 만들게 되었는데 자신이 카드 속지에 쓸 편지를 쓰는 동안 미술가인 존 호슬리에게 크리스마스의 풍경들을 묘사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습니다(사실 그럴 여유가 있었다면 편지를 쓰는 편이 훨씬 더 간소했을 텐데요). 이렇게 만들어진 카드를 복사해서 보냈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년 뒤 미국에 무료 우편제도다 신설된 뒤 독일에서 이민 온 루이스 프랑이 미국의 크리스마스 카드 산업을 일으켰는데, 그는 바이에른에서 채석한 석회석을 사용하는 사치스러운 인쇄공정을 채택했는데 그 덕분에 그림 한 장에 17가지 색을 입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업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 카드는 가장 화려한 인쇄물 중 하나가 되었죠.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장식물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Christmas'라고 쓴 것도 있지만 좀 짧게 'X-MAS'라고 쓴 것도 있을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그리스도의 미사‘란 뜻이란 것은 앞서 말씀드렸지만 ’X-MAS‘는 'X'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그냥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말하는 ’X‘자는 영어 알파벳의 X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자인 '크스'자로 이 뒤에 미사를 뜻하는 MAS를 붙인 겁니다. 그래서 표기는 ’X-MAS‘로 하더라도 읽을 때는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맞습니다.

또 크리스마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습 중 하나가 캐럴(carol)인데 캐럴이란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사람들이 모여 둥글게 원 형태로 춤을 추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원무(圓舞)를 지칭하는 말 캐럴(carole)에서 유래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 후기 영국의 전통적인 노래 형식을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겁니다. 본래 영국의 캐럴은 절(V)이 하나의 후렴(B)과 교대하는 형식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날의 캐럴은 모두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노래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것이지만 14세기 무렵 영국에서 만들어진 캐럴들은 민중들이 만들고 부르는 종교적인 노래인 것은 맞지만 그 내용이 반드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캐럴을 지칭하는 말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데 독일에선 크리스마스이브의 노래란 뜻에서 바이나흐트 리트(Weihnacht lied) 라 하고, 프랑스에서는 노엘(Noël)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종교적인 노래로 불리어지다가 종교개혁 이후부터는 민중적 종교 음악이었던 캐럴이 사라지고 교회에서 정식으로 작곡된 찬송가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등의 청교도들은 엄격한 교리 원칙에 따라 모든 종교적인 축제를 부정했고, 크리스마스 축하행사 역시 금지시켰었는데, 지나치게 엄격한 탓이었는지 몰라도 청교도 세력이 약해지면서 크리스마스 축제가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지역의 장로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내지 않는 대신 1월 1일을 가장 큰 축제로 삼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신년예배를 드리는 것 역시 이런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만큼 크리스마스를 떠들썩하게 보내는 나라도 없지만 청교도들이 나라를 처음 세웠을 무렵엔 오늘날과 같은 크리스마스는커녕 크리스마스 자체를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크리스마스 캐럴도 없었지요. 그러나 1857년경 미국의 J.H. 흡킨스(Hopkins) 목사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작곡하면서부터 서서히 캐럴의 전통이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 1942년에 만들어졌던 영화 <홀리데이인(Holiday Inn)>의 삽입곡 'White Christmas'가 크리스마스 캐럴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1954년 빙 크로스비, 로즈마리 클루니가 함께 주연을 맡아 영화 <White Christmas>로 제작되기도 했다.

오늘날 캐럴은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캐럴과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캐럴로 구분되는데 거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상업적 캐럴의 대부분은 1942년 할리우드 음악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홀리데이인(Holiday Inn)>이 성공하면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들입니다. 아카데미 영화주제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영화 속엔 우리가 잘 아는 빙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가 수록되어 있었지요. 이때부터 1950년대까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Santa Claus coming to town>,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 > 등 캐럴의 대부분이 만들어지는 캐럴의 홍수가 일어나게 되지요. 오늘날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수많은 대중가수들이 캐럴을 만들어 부르지만 교회에선 이 노래들을 상업적인 캐럴이라 하여 부르지 않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날 만들어지는 상업적인 캐럴이 도리어 과거 민중적인 캐럴의 전통과 맥을 잇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산타클로스의 유래에 대해선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어째서 빈민구제에 앞장섰던 성 니콜라우스가 빨간 옷의 뚱뚱보 할아버지로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산타클로스의 탄생과 키즈 마케팅(Kids Marketing)

마케팅 전문가들은 로버트 우드러프가 청소년들이 미래의 새로운 소비자이며 , 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환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는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코카콜라의 경영자였던 로버트 우드러프는 광고담당자들에게 코카콜라가 뭔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며, 코카콜라를 통해 이상적인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들라고 다그쳤는데,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코카콜라는 단순한 탄산음료가 아니라 꿈과 환상의 아이디어를 파는 드림 웨어(dream ware)여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가장 미국적이며 세계적인 이미지로서의 산타클로스였지요. 1931년 코카콜라가 붉은 색 산타복장을 한 뚱뚱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산타클로스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산타클로스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3세기 경 소아시아에서 출생한 니콜라스(St. Nicholas) 성인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인데요. 현재 터키 지역의 주교를 지낸 그는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하여 어린이들 모르게 선물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성 니콜라스의 축일인 12월 5일에 즈음해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코카콜라는 상업용 일러스트 전문 화가였던 하든 선드블롬(Haddon Sundblom)에게 코카콜라를 위한 산타클로스를 그려달라고 의뢰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오늘날 성탄절의 대명사가 된 산타클로스였습니다. 이처럼 코카콜라에 의해 재탄생한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 레드(Coca-Cola Red)' 빛깔인 붉은 색 외투에 흰색 털을 단 옷을 입었고, 종교적인 인상 대신에 풍성한 흰 수염에 얼굴 가득 홍조를 띤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선드블롬이 탄생시킨 산타는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뒤 휴식을 위해 코카콜라를 마셨고, 착한 어린이들은 산타가 선물을 넣어주는 양말 속에 감사한 마음으로 코카콜라를 담아두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탄산음료의 비수기인 겨울철 매출 증진을 위해 구상된 코카콜라의 판촉 전략은 전 세계의 크리스마스 문화와 풍경을 변화시켰습니다. 어린이들은 종종 뚱뚱한 산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와 자신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는데, 사실 뚱뚱한 산타가 어떻게 굴뚝을 통과해서 내려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지 그 비법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지만 그가 왜 그렇게 뚱뚱해졌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코카콜라를 많이 마셨기 때문이지요.




자, 크리스마스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12월 25일에 세상에 오셨든, 아니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오늘 그 분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스스로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인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분의 삶을 올바르게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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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권혁범, 삼인(2004)



"무인도를 꿈꾼다"는 말 속에는 단지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은 아닐 게다. 그 말엔 존 레논의 소박한 무정부주의 찬가 "Imagine"의 노랫말처럼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서의 "천국"도, 딛고 올라서야 할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 오는 "지옥"도, 우리를 옭죄는 "국가"도, 탐욕을 부추기는 "소유"도 없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담고 있다. 나 하나쯤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서 세상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일탈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경우에만 아름답고, 즐거운 상상일 수 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공안기관 요원들에게 끌려가 욕조물을 흠씬 들이키다 목이 눌려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박종철). 그 누구도 민주주의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다 날아온 최루탄에 두개골이 함몰되어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끝끝내 숨을 거두고 싶어하지 않는다(이한열). 그 누구도 남편에 의해 홍콩의 작은 아파트에서 목졸려 숨지길 바라지 않는다. 더군다나 죽임 당한 뒤에 북에서 내려보낸 여 간첩으로 몰려 남은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길 바라는 일은 없다(김옥분). 그 누구도 이라크에서 길을 가다 자동소총에 난사당해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간신히 생존해서 귀국한 뒤에도 여전히 걷지 못하는 몸으로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오무전기 노동자들). 그 누구도 피납되어 살려달라는 애절한 호소를 무시당한 채 목이 잘려나가는 고통 속에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김선일).

더군다나 국가라는 추상적인 민족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인 희생이 아닌 타의에 의해 억울하게 맞이하는 죽음 같은 것은 원치 않는다. 죽은 뒤에 아무리 열사가 되고, 애국자가 되고, 순교자가 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의 책임 -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에서도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로마인에게는 종교도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는데 기독교의 침투로 말미암아 로마의 시민의식이 붕괴되어 로마인의 특성인 실용적인 기풍과 전투 의지를 약화시켜 그 결과 로마가 붕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로마라는 국가 자체를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신의 것으로 돌렸으므로 - 이라는 역사가들의 논리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정의를 빼버리고 크게 보면, 왕국이 범죄집단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범죄집단도 조그만 왕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범죄 집단은, 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에서, 협약에 따라 약탈품을 나눠 가지는 결사체에 의해 묶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만약 이 악행집단이 부도덕한 무리들로부터 많은 지원자를 획득하여 영토를 획득한 후 거점을 구축하고, 도시들을 탈취하여 사람들을 복속시킨다면, 그 집단은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왕국이라고 사칭하고, 침략의 비난이 아니고 정당성을 획득하여 그 왕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한 재치있고, 사려깊은 대답을 보자. 왕이 그에게 자신에게 대항할 때의 네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해적이 대답하기를 '세상을 정복할 때의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배로 그것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와 해적 집단 사이에는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고 도덕적인 차이는 없었다. 두 집단 모두 성공을 위해 내적 조화와 조직에 의존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취하고 파괴하는 그들의 능력에 의해 성공여부를 평가받는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체첸을 향한 러시아의, 이라크를 향한 미국의 행위를 보라.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일컬어 국가테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권혁범의 저서
"국민국가로부터의 탈퇴"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국가주의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불행한 국민들,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 혹은 이에 저항할 기력을 잃은 지식인들(혹은 중독되어 있는)에게 향하는 적절한 예방백신, 해독제 구실을 한다. 

립셋의 정의에 따르자면, 지식인이란
"문화, 즉 예술, 과학, 종교를 포함하는 상징세계를 창조하고, 배분하고, 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물질세계와 구분되는 정신세계의 창조자이자, 전파자이며, 실천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혁범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지적인 저술 행위와 실천으로서의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는 한 ‘비판적’ 지식인이, 우리 사회와 인간에 대해 그 나름의 이해와 소망을 담은 통찰이자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국민적/민족적 정체성"에 의한 것이다. 이런 국민적 정체성, 국민됨으로 사유하기는 다른 모든 정체성을 종종 압도해버린다. 현실정치의 테제인 "국가안보"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이를 위해 국민이라 불리는 집단이면서 동시에 해체해보면 개인일 수 밖에 없는 근대적 개념의 개인이 지닌 기본적 인권을 유보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근대성과 더불어 식민적 요소들, 전근대적 질서들이 혼재해 있다. 국민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기준 속에는 이렇듯 전근대적 가부장제, 혈통주의를 품는다. 국가라는 상상공동체는 종종 국경이 아닌 단일민족 신화와 같이 혈연에 의해 규정된다.

국가주의는 민족주의와 만나고, 민족주의는 보수와 진보라는 양 진영 사이에 다리를 놓고, 이 둘을 묶어주는 최소공약수가 되어준다.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반미민족주의는 종종 국가주의의 우산 아래에서 행복한 밀회를 즐긴다. 친미와 반미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하나의 회로판에서 신호
(사안, 사건)에 따라 서로 도체가 되었다가 부도체가 되는 반도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국익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다른 모든 개별적인 보편을 능가한다. 권혁범의 문제의식은 탁월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몇몇 요소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단지 이 책의 저자 권혁범만이 풀고 해결해나가야 할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우파 지식인들
(지식인은 결코 하나의 성향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에 대해 쏟아내는 비판과 동일한 강도의 비판을 마음속으로 동의를 보내는 지식인들에게도 보내야 한다. 지식인은 "권력(특히 근대국가), 시장(좁게 보면 지식시장), 여론(공론공간)" 사이의 긴장을 통해 자리매김되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에 대한 비판은 그가 한동안 속해있던 "당대비평"의 문제 제기들 "우리 안의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다. 권혁범의 비판들에 대해 구구절절이 다 옳다고 외치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허탈하기 쉽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우리가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 권력, 집단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도달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토피아"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권혁범의 비판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그의 근본주의적 비판은 더욱더 공허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국가주의와 파스즘으로 흐를 수 있는 집단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지만 그것을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설령,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이 크롬웰의 신성정치화될 가능성(즉, 또다른 폭력)이 열려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가 빠질 수 있는 공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논리적 프로그램만을 따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UN의 보고에 의하면 1991년 냉전해체 이후 2001년 9.11 이전까지 전세계 약 45개 지역에서 57번의 주요 분쟁이 발생하였다. 분쟁의 결과로 36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시기에 일어난 분쟁의 최대 희생자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고, 이들 민간인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분쟁의 또다른 특징들은 그것이 국가간의 분쟁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해체에 따른 국가권력의 부재상황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 국민주의를 회피할 필요는 여전히 인정된다 할지라도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명과 권리,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공동체의 존재의 필요성이란 고전적인 명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권혁범의 비판적인 주장들을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민족 단위, 국가 단위의 도덕으로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어려운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고전적인 명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장 자끄 루소의 고전
"사회계약론" 의 세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권혁범의 주장이 현실적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근대 국가의 역할 자체를 부인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이 어느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하며 공동체를 재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유럽공동체의 출범과 같이 민족에 기반한 근대적 국가개념의 해체와 새로운 물적 토대에 기반한 지역 공동체의 출현은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근대화의 숙제에 우리는 여전히 발목을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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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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