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시대의 일상사 -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국가규모의 범죄집단은 폭력과 공포만으로 지배하는가?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스펙터"와 같이 국가적 규모를 갖춘 범죄집단은 과연 가능할까? 어떤 만화나 영화들을 보면서 가끔 설명이 불충분하더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도 나는 심각하게 궁리할 때가 있다. 앞서 말한 스펙터같이 국가와 경쟁할 수 있는 범죄집단의 가능성이 그렇고, 영화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유인원 인류가 사용하는 자동소총(혹은 반자동소총)이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문명 수준에서 개발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들이 그렇다(세계 최초의 반자동소총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M1소총이었다).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원숭이들의 문명 수준이 당시 미국의 문명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이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총 한 자루 만드는 것에도 그에 합당한 기술 수준이란 것이 있으니까. 007 시리즈뿐만 아니라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 폭력집단(유사국가 혹은 국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이 단순히 폭력과 억압을 이용한 공포만으로 국가라는 조직과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소규모 폭력조직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국가 단위의 폭력구조를 유지하는 일은 구태여 그람시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폭력과 공포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역사란 "과거의 의미있는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간 의미없음으로 치부되어 왔던 일상의 역사적 진실을 들춘다. 저자는 독일 나치 시대를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여 나치의 인종주의와 같은 중세적 야만성이 선진사회에서 돌출할 수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론삼아 저자의 주장을 미리 말하자면, 이것은 결코 돌출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성, 선진 사회가 내세우는 '진보' 안에 내재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Detlev Peukert)는 독일의 역사가로 '나치 시대 공산당의 저항운동' 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그가 81년에 저작한 것으로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선구적으로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포이케르트의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며, 부제로 되어 있는 세 가지 "순응, 저항, 인종주의"란 맥락 가운데 좌파의 역할은 "저항"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제3공화국의 기억과 제3제국의 기억

평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유럽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들이 존재했던 독일에서 어떻게 나치즘과 같은 극우파 정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책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그런 의문이 모두 해갈된 것은 아니나 상당 부분 도움을 얻게 되었다. 포이케르트는 우선 "순응"이란 측면에서 나치즘이 폭력적인 권력 탈취 방식을 일부(?)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내 중산층과 부르주아지들이 이에 순응했기 때문으로 규정한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저자의 지적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뼈아픈 일침이 된다.


제3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당시 유행하던 사형 혹은 가스실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특수한 형태의 테러, 즉 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데 테러 방식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도둑맞지 않았다는 판에 박힌 좋은 기억이 "절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집시들이 수용소에 수감된 것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303-304쪽 중에서>


질서를 위한 폭력을 권장하는 세력들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제3공화국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독일 제3제국 히틀러에 대한 독일 노인들의 향수는 어딘지 모르게 일탈 행위를 그나마 용납해주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이런 판에 박힌 기억은 과거 독재 시대를 미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전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극우파들과 일부 교회의 목사들이 성조기를 나부끼며 벌였던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개신교 총감독 디벨리우스가 "포츠담의 날"에 행한 설교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가사의 새로운 장은 언제나 폭력과 더불어 열립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결정, 새로운 지향, 변화, 전복은 언제나 한 편에 대한 다른 한 편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경우, 국가 권력은 안을 향해서든 밖을 향해서든 강력하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 국가가 국가질서를 파괴하는 자들, 특히 더럽고 비열한 언어로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신앙을 경멸하는 자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목숨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 질서가 수립되면 다시 정의와 사랑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날 광화문에서 있었다는 쿠데타 선동 발언에 버금가는 말이다. 독일 개신교 세력이 모두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배경에는 독일 개신교 세력의 은근한, 때로는 적극적인 지지가 작동한다. 그들은 좌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리어 나치즘을 선동하고 나섰다. 1933년 초 몇달 동안 독일 내 좌파들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억압 상황에서 독일의 일반 국민들은 이것을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좌파에 대한 공포로 반공에 대한 공포를 잠시 잊은 결과 독일 국민은 최악의 전쟁을, 최악의 패배를, 최악의 생존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제3제국의 신화

오늘날까지 독일 제3제국의 신화는 여전하다. 인터넷상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나치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들이 보여준 절도와 형식에 깊이 매료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전쟁 발발 이전의 나치 시대는 부흥과 복지의 시대로 미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대공황과 전쟁동안, 전후(제1차 세계대전)의 질식할 듯한 궁핍과의 비교를 통한 것일 뿐이다. 실제 나치가 집권한 뒤인 1930년대의 경제 분위기도 낙관적이진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경제의 호전 기미만으로 이를 반가워했고, 이를 곧바로 경제호황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연계시켰지만, 여전히 생필품은 치명적으로 부족했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처해있다. 국가차원에서 보았을 때 경제는 여전히 나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수경제가 살아나지 않아 실질경제는 불황 속에 처해 있는 현실은 전적으로 언론의 탓이라 할 수는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언론의 부풀리기가 경제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히틀러가 실업문제를 조속히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 제3제국의 현실이 아니라 나치의 선전이란 측면에서만 그러했다. 현실에서 수치와 통계로 드러난 실업자 감소 추세는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5.16직후 군사정부가, 1978년 오일쇼크 이후 급증한 실업자 문제를 제5공화국이 해결한 방식은 이미 1930년대 독일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임금만을 받고 노동봉사대와 긴급노동대로 결성되어 체제 위신용 건물 건설에 동원되었다. 실업자 수치 자체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실질적인 실업자 감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 독일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36년 무렵 전시 경제에 접어들어 군수산업이 폭발적인 호황을 누린 뒤부터이다.


다른 하나의 신화는 독일 (나치)관료 집단이 청렴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실이다. 공직과 권위를 충분히 획득한 그들은 관료로서 권력과 직위, 특권을 마음대로 전용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과거 비판해 마지 않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공무원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니 더욱 부패해 있었다. 그럼에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인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그가 최초의 권력기반으로 삼았던 돌격대를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해체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초기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에른스트 룀과 그의 사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돌격대는 나치의 중요한 권력기반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해 더이상 사병집단이 필요없어진 히틀러에게 그들은 골칫거리이자 장차 그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비춰졌다.


히틀러는 재빨리 룀을 제거함으로써 권력기반을 공고히하는 결과를 나았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묘하게도 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일로 비춰지기 보다는 독일의 골칫거리가 된 자신의 신뢰하는 수하들인 돌격대를 국민들을 위해 제거한 것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알기만 한다면 이를 악물고 부패한 자신의 수족을 잘라낼 만큼 결단력있고, 공정한 총통으로 비춰졌고, 실제로 그렇게 선전되었다. 독일 국민들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그 순간까지도 독일 국민들의 총통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승만이 모든 실정의 근간이자, 부패의 근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이 이기붕과 자유당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는 나치당의 모든 부패와 실정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었다. 과연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상관없이 집권당만 실책을 거듭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도 물어보아야 한다.


새로운 고전의 기미를 엿볼 수 있었던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단 생각이 들고, 이미 어느 정도는 고전의 지위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이 책의 단점이랄까, 아쉬움이 남아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독일 내 좌파들의 맥없는 몰락에 대해 저자의 "일상사"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독일 내부의 문제만으로 독일 좌파의 몰락이 빚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이 저자의 주된 연구 분야이므로 저자의 다른 책을 보노라면 더 세세한 지적들이 있을 것이고, 이 책의 주제가 일상사이므로 국제사적인 맥락을 짚기는 어려웠겠으나 당시 독일내 좌파가 나치에 대한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실책(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 소련 고립정책을 타개할 방편으로, 나치 독일이 프랑스와 우선적으로 경쟁할 것이란 판단에서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을 금지시켰고, 독일 좌파는 사분오열되고 만다.), 영국과 프랑스의 오판 등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쉽다.


그러나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저자의 단명이다.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살아 있었다면 좋은 연구 업적들을 보다 많이 남겨주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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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오브 워 - 앤드류 니콜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전 세계적으로 5억 5천만 정 이상의 화기가 유통되고 있어. 12명 당 한명 꼴이지. 문제는, 나머지 11명을 어떻게 무장시키느냔 거야.”

영화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2005)>의 첫 장면에서 무기밀매상(Private Gunrunners) 유리 오를로프가 자조적으로 내뱉는 대사다. 그가 딛고 서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에는 탄피들이 즐비하고, 007시리즈를 알리는 유명한 오프닝 장면처럼 카메라는 총구가 되어 전투의 현장들을 겨냥한다. 마침내 ‘탕’ 한 방의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카메라는 빠른 속도로 달려가 역시 AK-47소총을 들고 있는 아프리카 소년병의 머리를 관통해 버린다. 영화에선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소년의 머리를 과녁 삼아 관통해버린 탄환은 AK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일 확률이 가장 높다.

유리 오를로프는 과거의 통계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전 세계에는 대략 6억정의 소형화기들이 널리 퍼져 있고, 그 가운데 최소한 7,000만 정에서 1억정이 미하일 티모셰예비치 칼라시니코프가 발명한 AK-47과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들이다. 최근에 나는 『인물과 사상』(2009년 8월호)이란 잡지에 <현대의 일상을 창조한 사람들>이란 시리즈를 기획연재물로 싣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인물로 선정한 사람이 칼라시니코프였다. 이 시리즈는 우리의 현대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현상의 근원들을 어떤 한 인물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시스템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나는 AK-47소총이란 가볍고, 반동이 적으며,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자동소총의 탄생이 현대의 일상에 끼친 영향과 그 배후를 함께 다루고자 했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무기밀매라는 형태로 세계 각지의 분쟁 지역에 널리 퍼진 불법무기 거래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나는 이 영화와 영화에 수록된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랜 내전을 치르고 있는 한국은 베트남전 이후부터 ‘자주국방(自主國防)’이라는 슬로건 아래 무기산업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그 결과 신흥공업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생산이 불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던 M-16의 자체 생산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2위를 다투는 고성능 자주포 K-9을 비롯해 기본훈련기 KT-1, 고등훈련기 T-50 등을 수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98년부터 최근 2007년까지 한국의 무기산업 수출총액은 28억 199만 달러로 연평균 약 2억 8천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중에서 항공 34%, 탄약 23%, 함정 15% 등을 차지하고 있다. MB정부의 출범 이전부터 방위산업을 ‘신성장동력산업’으로 육성하자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산업이라 할 수 있는 무기 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나 경계는,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미의존도가 높은 군사 분야에서는 역으로 ‘자주국방’과 ‘안보’논리에 밀리고, 이제는 경제성장논리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뉴질랜드 출신의 앤드류 니콜(Andrew Niccol) 감독은 DNA조작에 의한 미래사회의 계급차별을 다룬 영화 <가타카(Gattaca, 1997, 미국)>의 감독이자 - 이 영화에 대해서는 내 홈페이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http://windshoes.new21.org/film-gattaca01.htm )에서 다룬 바 있다 - <트루먼쇼>의 대본을 쓴 작가로 사회성 짙은 영화예술인(cineaste)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그가 대본, 연출을 모두 맡은 영화로 유리 오를로프 역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와 <가타카>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은 맞춘 에단 호크가 무기밀매상 오를로프를 뒤쫓는 국가기관의 요원으로 등장해 재미를 더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거래에는 흑막이 있기 마련이지만 무기거래의 내막을 살펴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어려움의 근원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한눈에 살펴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니콜 감독 역시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미국 비평계로부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을 만큼 문제작이었지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흥행에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비록 유리 오를로프의 인간적 고뇌를 담은 스토리로 ‘당의정(糖衣錠) 효과’를 얻고자 했으나 <트루먼쇼>와 같은 흡인력과 재미를 동시에 갖춘 휴먼드라마를 기대한 이들은 흡혈귀 무기밀매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한 바탕 시원한 액션 활극을 기대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의 런닝 타임과 동일한 시간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고 해도 무기 밀거래의 흑막과 배경, 원인을 살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니콜 감독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은유를 통한 사회현상의 고발이라는 드라마적 재미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다큐멘터리라면 결코 보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무기거래의 진정한 배후가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영화가 되었고, 그것이 <로드 오브 워>가 지닌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신생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무려 4조원의 재래식 무기가 사라졌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대의 무기 실종 사건이었지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되지 않았다. 미소양국은 물론 냉전 체제 아래 있던 세계 각국에 비축된 재래식 무기는 냉전 기간 동안은 물론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 할지라도 모두 소모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냉전 해체로 필요 없는 재고가 된 재래식 무기들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구 유럽의 보관비용만 늘려가고 있는 실정이었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틈새로 무기밀거래가 독버섯처럼 번졌고, 국가기관 역시 암암리에 개입했다. 결국 이들 국가에서 번져나간 무기들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분쟁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이 아닌 내전 기간 동안 죽어야 했다. 원제명인 “Lord of War”는 그런 의미였다.




냉전 기간 중 유대인으로 신분을 속인 아버지 덕분에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족인 유리 오를로프는 우연히 목격한 러시아 마피아들간의 총격전 장면을 보면서 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죽지만 누군가는 그 무기를 팔아 이득을 본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유리 자신에게도 낯선 장면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거리에서 햄버거나 핫도그를 팔듯 그렇게 무기를 팔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무기를 판다는 죄책감은 마약을 판다는 죄책감보다 덜한 것이었다. 니콜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여러 무기밀매상들을 인터뷰하고, 널리 알려진 몇몇 사람의 생애를 유리 오를로프라는 가상의 인물에 녹여내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유리 오를로프는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또 한 편으론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록 남동생이지만 형제에 대한 집착은 알 파치노가 주연 했던 <스카페이스>, 훗날 에바 폰테인(브리짓 모나한)에 대해 유리가 어렸을 때부터 보인 집착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 떠오르고, 성공의 정점에서 결국 소중한 가족을 잃는 모습은 얼핏 <아메리칸 갱스터>가 떠오른다. 독창적인 스토리인 듯 보이지만 이처럼 익숙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기밀거래가 영화를 밀고 가는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을 형성하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그로 인한 혼선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영화적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 내전의 자금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면 - 당신의 결혼반지와 휴대폰엔 아프리카의 피가 묻어 있다 - 앤드류 니콜 감독의 <로드 오브 워>는 실제 서아프리카 내전을 주동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배치하면서 그들이 다이아몬드와 휴대폰의 필수적인 부품재료인 콜탄을 팔아 무엇을 구입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나는 칼라시니코프에 대해 글을 썼다고 했는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고기 다지는 기계 앞에서 칼라시니코프를 희생양 삼아 그가 이 모든 비극의 배후라고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이 기계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볼트나 너트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밀거래상들 역시 그저 기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재료를 공급하거나 기계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윤활유 정도의 기능을 할 뿐이다.



유리 오를로프는 아프리카의 독재자를 비롯해 무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무기를 공급하고 싶어하는 모든 정부와 친밀한 거래를 주도했고, 그 결과 어릴 적부터 흠모했던 여인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거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니 실제로는 이제까지 소모된 재래식 무기 보다 좀더 무기의 화력과 수준을 높이길 희망하는 무기산업자본의 노력으로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진다.

올초에 개봉한 영화 <인터내셔널>은 어떤 면에선 <로드 오브 워>의 후속편이거나 유리 오를로프를 추적하던 요원 잭(에단 호크)의 시선으로 그려진 무기 거래의 이면을 그린 영화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인터내셔널>에선 재래식 불법무기 거래에서 첨단 무기 거래로 넘어가는 새로운 무기 산업의 양상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의 양극화는 물론 세계의 경제적 양극화 또한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인데, 양극화의 가장 극심한 사례가 바로 무기 생산과 소비의 양극화다. 전 세계 무기 공급의 3분지 2는 미국과 러시아가 담당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는 유럽연합 국가들이 책임지고 있다. 2005년 현재 무기 생산업체의 무기 판매액은 2,680억 달러에 달하고, 이 매출액의 절반은 세계의 다국적 자본인 5개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다. 물론 이들 다국적 기업들이 생산하는 것이 무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전자레인지, 세탁기를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유리 오를로프는 말한다.

“최후의 순간에 지구를 상속받게 될 자들이 누군지 알아? 바로 무기상들이지.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느라 너무 바쁘거든. 살아남는 비결은? 전쟁을 하지 않는 거야, 특히 자기 자신과는 절대로….”

전 세계가 미국발 금융파생상품의 파산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 배후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며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무기 거래의 진정한 배후는 영원히 흑막 속에 가려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세기라는 20세기 동안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보다 제노사이드(민간인학살)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억 7천만 명으로 더 많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양 비춰지는 동안, 어쩌면 당신이 연말 보너스처럼 수익을 기대하며 넣은 해외펀드는 군수산업을 살찌우고, 당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양 팔을 정글도로 잘라내고 얻은 것일지 모른다. 물론 내가 쓰고 있는
삼성 휴대폰에도 아프리카 콩고산 콜탄이 필수 부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스 바이스와 클라우스 베르너의 책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광석의 판매는 콩고 반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삼성 경영자는 이 불순한 거래를 비밀에 부칠 것임을 보장했다. 설령 다음과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 광물은 다시 시장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바로 삼성 자체 수요로 전자업 쪽에서 가공될 겁니다.”

삼성은 원료가 의심스러운 곳에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모른 체 한다. 우리가 이 무서운 불법무기 거래를 차단하고, 더이상 학살을 못 본 체 눈감지 않기 위해서는 오를로프의 말과 반대로 우리 자신과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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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오는 데에는


-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1897 - 1982)



죽음이 오는 데에는
거의 일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때
알몸의 손이 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은 되돌려주었다
내 손이 잃었던 색깔을
내 손의 진짜 모습을
다가오는 매일 매달
광활한 여름의
인간들의 사건에로 업무에로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항상 몸을 떨고 있었던
나에게 나의 생활에
바람과 같은 커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나를 가라앉히는 데는
두 개의 팔이면 족했던 것이다

그렇다 족했던 것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만으로
잠결에 갑자기 나를 만지는

저 가벼운 동작만으로
내 어깨에 걸린 잠 속의 숨결이나
또는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

밤 속에서 하나의 이마가
내 가슴에 기대며
커다란 두 눈을 뜬다
그러면 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이 나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황금빛의 보리밭처럼

아름다운 정원의 풀 속에서
그러면 죽어 있는 것과 같았던
나의 마음은 숨을 되찾아
향긋한 향기가 감돈다
상쾌한 그림자 속에서


*

최인훈의 『광장』에서 나오는 이 대목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광장』에서 이명준은 <광장>을 찾아 월북했지만 그곳에서도 꿈꾸던 광장을 발견하지 못한다. 명준은 대신 무용수 은혜를 만나 그 여자의 다리를 베고 눕는 것으로 절망과 허무를 이기고자 했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그는 사랑에서 그 자신이 超克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절망과 허무를 극복하려고 들었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1950년대 소위 먹물근성이라 해야할까. 티토가 끝끝내 소비에트를 버리지 못했던 까닭, 스탈린이 끊임없이 그의 제거를 염원했음에도 스탈린주의를 말끔히 치워버리지 못했던 까닭, 그건 스탈린주의를 경험한 좌파든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파든 상관없이 그들이 살아왔던 과거가 현재보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온힘을 다해 성취한 현재의 소비에트, 현재의 반공주의에 입각한 국가 안보, 천박한 자본주의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


루이 아라공....

나는 그가 "미래의 노래"에서 보여준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미래의 노래 - 첫번째 연>

이런 대책없는 낙관주의를 사랑한다. 심지어 응당 시인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인이 자기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독자들에게 대책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아니, 심지어 경멸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루이 아라공의 경우엔 그것이 대책없는 낙관주의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던 듯 싶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싶다. 왜냐하면 그에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러시아 태생의 엘자 트리올레트를 만나 결혼했고, 아내로부터 끊임없는 영감을 받았던 시인. 루이 아라공...

왜 아니겠는가?

그에겐 전 소비에트를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아니 결단코 바꾸지 않으리라 생각한 엘자 트리올레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조차 그녀의 두 팔이 다가와 안아주기만 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

루이 아라공은 아내 엘자의 이름을 건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엘자의 눈
나에게는 엘자의 파리밖에 없다

애처가였을까? 남자라서가 아니라 어떤 인간은 둘이되 결코 둘이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들국화의 노래처럼...

"혼자는 너무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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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티토 - 재스퍼 리들리 지음 |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2003)


뛰어난 전기 작가의 세 가지 덕목


오늘날 전기 작가가 주는 인상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돈나 같은 인물의 뒤꽁무니를 추적해 이들이 구태여 감추고 싶은 것들을 파헤쳐 가십거리를 양산해내는 옐로우 페이퍼를 연상하거나 아니면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에게 고용된 대필 작가들이 쓰는 자서전 형태의 전기들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나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은 일반 대중의 흥미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소위 잘 알려진 이들의 배꼽 아래 이야기와 같이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들에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 전기문학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런 인식에 변화를 주게 된 것은 체 게바라 평전의 성공 이후 일어난 변화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 쓰인 여러 종의 책들을 읽어 보았으나 지난번에 성공을 거둔 ‘장 코르미에’ 판 체 게바라 평전이 거둔 인기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흡함이 많은 책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의아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까닭이 책 자체가 주었던 것이기보다 ‘체 게바라’ 자신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탓이 더 크다고 여긴다.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당시 게바라의 행적만을 무미건조하게 추적했을 뿐, 게바라의 활동이 가진 사회적 의미나, 당시의 시대 상황이 게바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의 대응이 빚어낸 결과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부족한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인식의 한계를 꼬집곤 하는데,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겠으나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 못한 전기 작가의 저술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뛰어난 역사가이자 동시에 뛰어난 문학작가였던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기 작가들, 예를 들어 ‘플루타르코스’나 ‘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일급 전기 작가들은 역시 일급의 역사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다루려고 하는 역사 속 인물들을 단지 개인의 삶을 추적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그네들의 삶과 역사를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듯 서로 긴밀하게 결합시킨다. 뛰어난 전기 작가는 문학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취재기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기 혹은 평전 같은 장르에 대해 우리 문학은 거의 전혀 관심이 없는 편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학은 시와 소설만을 의미한다. 에세이 역시 일부 삶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나 즐기는 시중한담으로 치부된다. 이래서는 철학적 에세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에세이는 힙합이 그러하듯 한국에 와서 그저 미셀러니 수준으로 격하되며, 기자들의 르포 문학 역시 문학비평은 다루지 않는다. 잭 런던이나 조지 오웰의 르포가 서구에서는 정식 문학 장르 안으로 포용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다. 심지어는 작가나 시인이 저술한 산문집도 문학비평에서 제외되는 협소한 장르가 문학이다.


시와 소설만이 문학의 순수성을 담보해주는 장르로 머무는 동안 한국 문학은 계속 외국 이론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 상황에 놓일 것이고, 폐쇄적인 학문사회가 서로 인접한 학문의 교차를 금지하는 것처럼 서로의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노벨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라). 한국에서 소위 일급 문학가들이 집필한 전기문학들은 문학적으로는 평가받을지 모르나 역사학자들에게는 고증의 가치조차 없는 것들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이는 문학가들의 전기문학인 탓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전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급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있으나 유고슬라비아 국민은 없다


우리의 근대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미완의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남과 북은 그들의 태생만큼이나 상이한 체제를 구축했고, 북의 정치 지도자 김일성의 행보는 호치민식 민족주의, 티토의 비동맹외교노선, 카스트로의 반미와 일부분은 겹치고, 일부분은 다른 그들만의 모습을 보여 왔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은 냉혹한 국제질서의 격동기 속에서 각기 다른 민족과 극심한 분열 속에 놓였던 유고가 어떻게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와 그의 리더십을 통해 봉합될 수 있었던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시기적으로 구분하자면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요셉 브로즈가 유고 공산당의 정치지도자로 부각되는 단계, 2단계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숙청을 피해 유고지도자가 된 티토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우스타샤, 체트니크의 협공으로부터 승리하여 유고의 실질적 지도자로 인정받는 단계, 3단계는 스탈린의 공격으로부터 유고 지도자의 지위를 지속시키고 유고의 독립성을 수호하는 단계, 4단계는 외부적으로는 비동맹 외교의 중추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들로 부터 유고식 사회주의를 지켜내는가로 구분된다. 이렇듯 20세기 가장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정치지도자 티토에 대한 평가가 단지 위대했다는 한 마디만으로 규정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가능하다.


제1단계는 티토가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는가를 살피는데는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과거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1892년 5월 7일 크로아티아 쿰로베츠 계곡에서 태어난 요시프 브로즈는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 이르기까지 그가 진짜 요시프 브로즈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북의 김일성이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처럼 말이다. 우리가 흔히 "티토"라고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사실 무수히 많은 가명을 지닌 사내였고, "티토"라는 이름 역시 그의 무수히 많은 가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에 불과하다.


▶ 대독항쟁 기간 중 자신의 오른 팔이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모사(mosa pijade)와 함께 한 요셉 브로즈 티토. 모사는 함께 옥중에 갇혀 있는 동안 티토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쳤던 인연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티토가 통치하던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나라는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진정한 의미의 유고슬라비아 인들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티토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몬테네그로인, 코소보인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지명 속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경계선상에서 종교적으로도 가장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었다. 거기에 비잔티움 제국을 함락시킨 투르크 제국과 기독교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종교간의 대립 양상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


"제스퍼 리들리"가 집필한 "요셉 브로즈 티토"의 평전은 매우 뛰어난 전기 작품이자, 나에겐 그간 궁금했으나 충분한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었던 지난 역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담긴 책이었다. 우리에게 유고슬라비아는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제3세계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자 시금석 역할을 해주는 나라이지만 이에 대한 접근은 통제되고 있었다.


내가 지닌 여러 궁금증 가운데 하나인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파시즘에 저항한 주된 세력은 좌파였으나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까닭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총체적으로도 궁금한 부분이었으나 각국의 사례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총론적 접근방식으로야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책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발칸 반도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각론적 접근이 가능한 책은 현재도 태부족인 상황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그리스"를 우리는 오로지 "신화의 땅"으로만 이해하지만 그리스 올림푸스에는 제우스와 아프로디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에 저항한 수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뛰어난 활동을 보인 다수는 좌파였으며 이들은 전후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복귀한 그리스 왕정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하여 많은 수가 유고슬라비아로 탈출하게 된다.

▶ 반파시스트 전선의 동맹군으로 한때 대독투쟁에 나섰으나 극우 민족주의 성향으로 인해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고 티토의 빨치산을 공격했던 체트니크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za Mihajlovic). 유고슬라비아가 해방된 뒤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된 세계질서 속에서 과거의 강대국들 영국과 프랑스, 미국들은 그들의 정치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은 반면, 신흥독립국들이나 약소국가들은 대개 두 가지 혹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의 발전 양상을 보인다. 이것을 유럽이라는 지역으로 한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와 같이 좌파의 몰락이 기존 정치체제의 부활로 이어지고, 이것이 표면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태로 전이되었다가 군부쿠데타와 연이은 파시즘적 군부독재로 이어졌다가 다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가는 형태이거나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과 같이 이전의 정치체제가 파시즘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소련공산주의 체제로 갔다가 소련의 몰락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이되는 양식이다. 물론, 제3의 방식엔 과거 동서 냉전 시절 비동맹외교를 주도했던 네루의 인도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있다. 이들 두 국가의 발전 양태나 정치 체제, 외교는 이 두 정치 지도자의 과거 행적의 차이만큼이나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이들 두 사람이 오랫동안 구금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만큼이나 흡사하다.


티토는 공산주의자였는가?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이후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코민테른의 악명 높은 실책들만 엮어도 책 10권은 족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티토를 비롯해 당시 혁명에 가담했던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신념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 생각했고, "사회주의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위한다"는 믿음을 위해 기꺼이 동지의 손에 죽어가는 길을 택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나치즘이 소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것이라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침묵했고, 중국에서는 마오쩌뚱 대신에 장개석을 유일한 중국 내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학살당했지만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를 죽인 나라는 다름 아닌 소련이었고, 그들은 레닌의 사후, 트로츠키의 몰락 이후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공산주의 이념을 이용했다.


티토는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뒤 내분에 휩싸여 있던 모스크바로 간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고 장담한다. 그러자 기업가들이 수많은 정치 헌금을 헌납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실제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해 테러에 나서자 독일 공산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하인츠 노이만은 공산주의자들도 앉아서 당하지 말고, 파시스트를 공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1931년 여름 노이만이 스탈린을 만나 나치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활동을 설명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게 되면 서방세계를 휩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 소련이 한숨 돌리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노이만은 하는 수 없이 한 발 물러났다. 이 무렵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큰 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밀어낸다면 그 틈을 노려 프랑스를 압박해 동맹체제를 구축할 요량이었다.


티토는 그 시절 국제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그가 소련에서 머무는 동안 스탈린의 후계자로 추앙받던 키로프가 암살되는(실제로는 스탈린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혐의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숙청당한다. 숙청은 이 두 사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 와 있던 국제공산주의자들에게도 시행되었다. 비밀경찰들이 밤마다 이들이 묶고 있던 숙소로 들이닥쳐 체포해간 뒤 이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아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훗날 이 때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른 스탈린과 소련을 지지한 이유를 묻자 티토는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했을 법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르주아들의 형무소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한 경험이 있던 소수의 골수 공산주의자들은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소련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중략>... 우리는 오랫동안 낮에는 강제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독이 엄습하는 숨막히는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 때 우리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 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과 우정이 충만하며, 성실성이 인정받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 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이런 말을 대신하여 생각해볼 만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보면 티토에게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무렵 만약 소련과 스탈린을 거부한 혁명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최악의 경우 트로츠키처럼 멕시코 산골의 오두막에서 스탈린의 자객이 보낸 피켈에 정수리를 찍혀 죽거나, 아니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정치적 위상과 활동 공간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국내의 현실에서 죽산 조봉암이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뒤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포기한 많은 이들이 훗날 파시스트가 되어 더욱 가혹한 억압자로 나선 것을 생각해볼 때 티토의 이 말은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민테른을 신뢰하지 않은 티토는 스탈린의 시선 밖에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침묵했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켰고, 벨기에, 네덜란드 , 프랑스를 함락시켰고,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유고 공산당에서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다면서 다른 공산당원들의 숙청을 실시했지만, 티토는 "불만 당원이라도 교화시키면 됐지 죽일 필요는 없다"며 이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에 대해 내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단 하나 그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짜르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단 하나의 목적, 러시아의 패권 유지"란 차원에서 국제공산주의를 이용했다. 책을 읽는 내내 티토에게 쏟아내는 스탈린의 증오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나라가 70여 년 동안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도리어 의문스러웠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본래 러시아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인민의 대의를 위한 그들의 이상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혁명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 우울하고 슬픈 역사 아닌가. 티토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도살자인가? 유고 통합의 지도자인가?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을 포용하는 유고 내부의 유일한 정치 세력이기도 했다. 티토 자신은 크로아티아 출신이었고, 그는 파르티잔 세력 못지않게 모두의 미움을 받은 이슬람교도들을 포용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파르티잔 세력 안에는 유고 내부의 잡다한 민족구성과 이념적 다양성을 두루 포괄하고 있었다. 그런 티토조차 전후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 세력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내전을 경험했다. 북의 김일성은 신흥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신흥학살의 역사적 진실은 북한군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신흥의 우파 세력이 들고 일어나 좌파들을 숙청하면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이후 다시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우파를 다시 제거하는 피의 악순환이 벌어졌지만, 김일성은 신흥 학살 사건을 미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일소해버린다. 내부의 적 대신에 외부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적으로는 왜곡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티토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다. 우스타샤와 체트니크의 악행이 워낙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데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파르티잔 집단이 이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티토 역시 이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이후 서구에 의해 티토의 공격에 종종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블라소프와 코자크인들의 경우 그들이 영국의 관할 지역으로 넘어왔으나 그들은 영국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되돌려 보내졌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국제정세의 미묘한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 요셉 브로즈 티토의 세 번째 아내 요반카(Jovanka Broz)


다음의 일화를 보자.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한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랴나를 입양한다. 미랴나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냉혹한 인종청소로 악명 높았던 밀로셰비치가 바로 이 사람이다. 티토가 죽은 지(1980년) 10여년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가혹한 내전을 경험하며 분열된다. 유고가 다른 동구 국가들이 걸었던 공산화의 길과 다른 공산화의 길을 걸었던 것을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빚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소련이 건재할 당시 이들의 위성국가였던 알바니아나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는 소련의 몰락 이후 그나마 국가의 분열이나 인종청소와 같은 갈등을 겪지 않은 반면에 당시로서는 서구와 동구 사이에서 그네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유고가 티토의 사망 이후 동구 해체 과정을 겪으면서 나토(NATO)와 미국의 집중 폭격을 받을 만큼 가혹한 해체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여러 방면에서 가능하다. 우선 평전인 만큼 요셉 브로즈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만 치중해서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티토가 궁극적으로 보냈던 충성의 대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의 전개 과정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고, 영화화되기도 했던(리처드 버튼이 1971년 티토 역을 맡은 영화) 그의 파르티잔 시절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비동맹 외교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이 책이 티토의 개인적 삶은 물론이고, 역사를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전기 출간 붐을 타고 판매되는 수많은 평전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책을 단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책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도 몇 가지 단점이 보인다. 우선 이 책의 저자 제스퍼 리들리는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란 부제를 통해서도 이미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티토에 대한 존경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티토의 모습이 객관성이 결여된 그에 대한 상찬으로 거듭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는 오해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저자가 티토에 대한 존경을 보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장점에 어긋나는 몇몇 부분들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흐루시초프가 집권 이후 티토와 유고 공산당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럴 개연성도 있지만, 그것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전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유고가 유럽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고와 티토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까지 영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두고 싶다. 미국과의 관계 부분이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그 이외에 이 책은 번역이나 기타 편집 부분에서 역자인 유경찬 선생(그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도 번역했는데)의 깔끔한 번역 솜씨에 힘입어 흡족한 수준이지만, 무려 53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 그것도 20세기 초엽인 제1차 세계대전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기나긴 시대를 다루는 책에서 책 말미에 인명, 지명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과 편집자 주, 옮긴이 주와 같은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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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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