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 문명 -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문명(civilization)은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키비스(civis)' 와 도시를 뜻하는 '키빌리타스(civilitas)' 에서  유래한 말이다. 문화비평가 김창남은 "문화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뛰어난 정수로 본다면, 여기에는 예술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통한 정신적 완성의 추구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종종 문화(culture)와 문명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으로 파악되거나 문화의 특수한 한 형태로 파악되어 서로 연결되거나 혼용되어 사용되는 등 실제 사용에 있어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문화가 정신적인 발전 상태(가치)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문명은 물질의 발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인류학의 영향으로 문화 가운데 도시적인 요소, 고도의 기술, 작업의 분화, 사회 계층 분화를 갖는 복합문화(문화의 복합체)를 큰 단위로 파악한 총체를 문명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권용립 선생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이 책
"미국의 정치문명"에 저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와 미국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니, 나의 서재에는 미국 관련 서적들이 책꽂이 두어 칸을 빼곡이 채울 정도가 되었다. 하워드 진, 리처드 O. 보이어, 노암 촘스키, 이냐시오 라모네, 리오 휴버만,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외국 학자들과 국내 학자들의 책들이 그것이다. 책 많다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 같은 책들과 권용립의 이 책은 상당히 다른 책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책들이 미국의 역사, 경제, 사회, 외교 정책 등등에 대한 책이라면 권용립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의 정치 문명에 대해 규명하고, 분석하려 한 책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1880년대 후반에 촬영된 서울의 미국 공사관 모습(출처.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권용립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것은 1882년이지만 미국이 한반도의 정치적 운명과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부터다. ...<중략>... 해방 이후의 한국에 엘리트를 공급하고 재생산하는 본거지였으며, 한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아본 사람들이었고 미국과 어떤 종류든 내연의 커넥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미국은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타인의 나라'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피안'이었고 '세계'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본문 29쪽>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에
"이산 가족"이 존재했다면,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인 1970년대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 안에는 "이민 가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민족 공동체인 북한보다 심정적으로 미국이 더 가깝게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닌 내연의 깊은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대표 신헌과 미국 해군의 로버트 윌슨 슈펠트 제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1876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에게 고종이 미국의 위치를 묻자 김기수는
“서양의 서쪽, 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두리뭉술하게 답해야할 정도로 잘 알지 못했던 먼 이역의 나라 미국은 그저 오랑캐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받아 온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단박에 뒤집어진다. “예의로 나라를 세웠기에 남의 땅과 백성을 탐하지 않으며, 굳이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는다.”는 미국에 대한 일방적 찬사가 가득 담긴 이 책은 러시아의 침략성을 과장되게 표현하면서 이를 막고자 한다면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약소국 편에 서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부강한 나라, 미국의 이미지가 우리 위정자들의 뇌리에 새겨진 건 아닐까?


서유럽과 다른 정치 문명 - 미국


권용립은 책 머리에서 서구적 비전으로 바라볼 때, 대개의 학자들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등의 문명론에서 서유럽과 미국을 동일한 문명권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최근 우리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충돌' 역시 미국을 별도의 문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선 토인비 등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권용립은 미국과 서유럽의 정치 문명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 별도의 문명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미국이 서유럽의 정치 문명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농축된 기억의 유무이다.


역사시대의 긴 세월을 수많은 굴절과 변화 속에서 보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국가를 설계한지 불과 150여년 만에 세계 최강의 공화국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해냈다. 서유럽 국가들이 상상의 공동체든, 아니든 간에 실제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계해놓고 그런 뒤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의 이민을 통해 건설된
(기억을 제조해낸)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국가 설계 과정을 담당한 담론이 미국의 건국 신화가 되고, 이것이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즉, 이것이 미국의 이데올로기이고, 미국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현재의 미국 속에서 정치적 응집력을 제공해주는 담론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재의 미국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므로, 이데올로기를 제거할 때 미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


저자는 미국의 역사와 역사학의 계보를 엮어내면서 19세기 미국 애국주의 역사학의 대부 뱅크로프트의 주장을 보여준다. 뱅크로프트는 미국을 전 세계 문명을 융합한 결정판으로 미화하며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합작한 신대륙 탐험과 발견, 프랑스가 지원한 독립전쟁,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그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에서 기원한 문화,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대의 제도,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연방제 원리와 사상적 관용의 정신"을 하나로 녹여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로 묘사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 가 의미하는 상상이 만약 담론에 의해 구축된 고도의 상징 체계를 의미한다면, 정치적 담론과 정치적 자의식의 산물이란 점에서 미국 국민(American Nation)은 이 정의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전세계의 인권과 자유를 노래한 측면에는 이런 미국인들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즉, 미국의 국가 정체는 인류의 정의를 담보한 가장 보편적인 정치 체제이기 때문에 타자(민족, 국가)들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식 문명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현대 외교사를 살펴보면 비합리적일 정도로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모두 '도덕주의적 외피'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다. 실제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power politics)'를 추구하는 현실주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교의
(doctrine, 이 말은 정치학의 주의, 공식 외교 정책을 뜻하지만 그보다 먼저 종교의 교의(敎義), 교리를 의미한다)를 선포하면서 미국의 외교를 정당화하려 한다. 물론 역사 이래 모든 강대국들이 자국의 힘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써왔고, 이런 선민 의식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계도할 소명을 타고났다는 확신 속에 극단적 개입주의의 함정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대륙의 타락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로 태어난 미국이야말로 국제 정체 세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도덕을 솔선수범한다고 믿었다. 즉, 다른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자격과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이런 자의식은 제국주의 혹은 사회진화론적이다. 거기에 캘빈주의적 소명의식이 곁들여지면서 미국의 강자중심주의는 다시 도덕주의적 절대주의가 된다. 즉, 미국의 외교적 행위
(전쟁을 포함한)는 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국제 정치 행위는 반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해방자로서의 힘,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된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독립전쟁 직전의 잠시를 제외하곤 봉건성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롭게 태어났기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봉건 잔재와 투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스스로가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 - 봉건성과 싸워야 하는 나라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바깥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된 지리적 혜택 등으로 인해 마치 배부른 부자가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절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얼마만큼 모방하는지 그것을 척도로 해서 다른 나라들을 평가하는 경향으로도 알 수 있다.



결어 -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을 버려라!


권용립은 정치 문명으로서 미국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 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 즉,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미국 국민 개개인의 개별 정신 영역에 일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다수 미국인들이 믿는 그 무엇, 미국 국민이나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의식에 편승한다고 본다. 그러나 먼저 미국과 같은 방식으로 건국된(설계된 국가)의 정신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설계의 이념을 밝혀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의 얼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의 독자적 정치문명을 이해하고 그 집단 정신의 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래야만 브레진스키나 헌팅턴
(혹은 조지 W. 부시, 라이스와 같은 네오콘)이 보여주는 너무나 미국적인 사고, 즉 한국을 미국의 파트너가 아닌 외교적 액세서리로 보는 브레진스키의 태도나 미국의 어떤 정책도 한국의 자유를 무조건 신장시킬 것이라는 헌팅턴의 아전인수격 메시지에 충격을 받거나 분노하는 새삼스러운 일도 없어질 것이라 말한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하다가는 다시 배신감을 토로하는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이 사라져야만, 우리는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환멸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울, 기대에 따른 미국의 모습이지 실재하는 미국의 모습이 아니란 것이다.


▶ "자, 소망의 거울이 우리 모두에게 무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설명해주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보니까 말이다. 도움이 됐니?"
해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걸 보여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구나." 덤블도어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넌 네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네 주위에 그들이 서 있는 걸 보았고, 론 위즐리는 항상 형들에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형들보다 더 잘되어 혼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본 거지. 그러나 이 거울은 우리에게 지식이나 진실은 보여주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이 거울이 보여주는 게 진짜인지 혹은 심지어 가능한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본 것에 넋을 잃거나 미쳐서, 이 거울 앞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냈지.
이 거울은 내일 다른 장소로 옮겨질 예정이란다, 해리. 그러니 이것을 다시는 찾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그리고 만일 이 거울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게다. 꿈에 집착해서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에는 "소망의 거울"이 등장한다. 주인공 해리 포터는 마법의 학교에서 소망의 거울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선다. 해리가 찾아낸 거울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한 기억들만을 보여주는 거울에 빠져 인생을 허비해버린다. 해리가 거울 앞에서 선지 삼일 째 되는 날 덤블도어 교수가 나타나 말한다. "너도, 앞서 다녀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소망의 거울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한 게로구나. 꿈에 집착해서 현실의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이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 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지금 우리들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 혹은 그 거울에 비춰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혹시 그와 같은 것은 아닐런지....


* 권용립 교수의 "미국의 정치문명"과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은 지금껏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우리나라 학자의 미국학 저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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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독일은 전유럽을 석권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만 독일에 굴복한다면 유럽의 통합은 오늘날 EU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이룩될 뻔 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한 유럽의 역사에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곧 유럽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 나치즘에 경사되었던 까닭, 그것은 유럽이 하나의 강력한 문명권으로 재통합하여 다시 세상의 주도 문명(패권)을 이루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렇듯 유럽을 힘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여러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시도되지 않았던 역사 평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대결로서 더 의미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규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1940년 6월까지의 독일은 분명 문제가 많은 폭력적 국가이긴 했으나 특별히 인류의 적이라 규정당할 만큼 사악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나치즘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나 서구문명에서 한 인종에 대한 잔학한 멸종 정책의 원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치즘이나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문명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성취된 이후에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그들은 다른 인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부분은 게르만인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종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인디언 멸종에 이르는 과정,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애보리진 멸종에 이르는 과정과 비교하자면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말살정책은 오히려 덜 잔인한 측면이 있다. 최소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 대화는 했으니 말이다.

 

 

파시즘이 유럽에서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보다 더 정교하게 규명해볼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유럽 혹은 서구(미국을 포함한)에서 파시즘(나치즘)을 바라본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유럽문명을 수호할 하나의 중요한 정신 혁명으로 보거나, 전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공산주의보다는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까닭에 슈펭글러나 하이데거와 같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나치즘을 지지했고, 독일 이외의 국가들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유대인 혐오와 함께 히틀러를 격찬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헨리 포드뿐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대단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치즘과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 파트너로서 격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이 지배하는 독일을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능한 방패로 인식했고, 독일이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만한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과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지한 소련의 스탈린이 수 차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춰를 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 것을 요청했음에도 이들 국가들은 도리어 소련을 고립시켰다. 소련이 강력한 반공을 주장하는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파수견 입장보다는 좀더 쓸만하고 구미에 맞는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제2의 정복왕 윌리엄을 꿈꾼 히틀러

거기에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찌되었든 독일은 서부 유럽의 패자이자, 유럽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프랑스를 단번에 패퇴시키는 위용을 거두었고, 독일 공군(Luftwaffe)는 일찌기 찰스 린드버그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의 공군력은 전유럽 제국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우군 하나 없이(미국은 이 당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국이자, 공군국인 독일을 상대로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방공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나는 전투를 지휘하겠다. 그리고 만일 침공이 시작된다면 이 의자가 내가 앉을 자리이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격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내 시체를 끌어낼 때까지 나는 저 자리를 고수하겠다." 이 말은 당시 영국이 처해 있던 고립무원의 상황을 너무나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무렵 독일은 영국진공계획인 "강치(시라이온)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도버 일대의 벼랑 동쪽에 있는 램즈 게이트에서 와이트도 서쪽의 라임만까지 거리로 약 320km에 달하는 장대한 영국의 해안선에 25만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 정복에 나설 때 상륙한 바로 그곳이었다. 독일은 영국 점령 이후 체포할 유명인사들 - 영국수상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등 - 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논 상태이고, 독일공정부대원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버킹검궁 강하 직후 체포할 영국왕에게 건넬 인사말까지 준비시켰다. 모든 것은 치밀한 독일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폭이 40km에 불과한 도버해협이긴 했지만 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이 보장되어야 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는데는 필수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시작 - 제공권을 잡아라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공군들을 섬멸해야 했다. 히틀러에 이어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에게 이건 닭을 비트는 일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스페인 시민전쟁 때부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점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적의 전투 경험을 쌓은 강력한 공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1선에 배치된 항공기만 4,500대에 이르렀지만, 영국은 제2선급 항공기(여기에는 수송기, 중폭격기)까지 모두 긁어모아야 고작 2,900대 공군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 2:1의 약세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시민전쟁을 비롯한 수않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인데 비해 영국 공군 파일럿들은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들이었고, 그나마 파일럿의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모자라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을 공중에 모두 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도저히 영국은 독일의 거센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영국인들이 이런 비교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0년 6월에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협상을 권유한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고, 그로부터 독일의 가혹한 대공습을 견뎌내는 "불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Battle of Britain"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 말로 번역한 "영국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1940년 6월부터 시작해서 1941년 5월 10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공군대 공군 사이의 대혈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때를 다룬 영화이다.

 

 

자유를 수호한 영국의 찬가

미국에게 "지상최대의 작전"이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사수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찬가라면, 영국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공군대전략)"은 그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럽과 자유 진영을 사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그들만을 위한 찬가이다. 그런 까닭에 "지상최대의 작전"에서 미국과 할리우드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라면, "배틀 오브 브리튼"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제작한 영화이다. 감독은 "007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톤(Guy Hamilton)"이 맡았고(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자가 007시리즈의 제작자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영국 출신의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이 앞장서고 있다(이 영화의 서플먼트에 따르면 이 배우들은 모두 제각각 가장 적은 출연료라도 감수하면서라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고 한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트레버 하워드 (Trevor Howard), 커드 저진스 (Curd Jurgens), 해리 앤드류스(Harry Andrews), 이안 맥쉐인, 케네스 모어, 나이젤 패트릭,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 로버트 쇼, 패트릭 위마크, 수잔나 요크 등 모두 주연급으로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주인공은 영국 공군 대장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경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숨기고 출연해 "배틀 오브 브리튼"의 명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에 대해 여러 찬사들이 있으나, 이 영화 역시 "지상최대의 작전"처럼 수많은 유명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승리 요인들

이 영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어떻게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가를 살피고 있다. 그 요인들은 우선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한 휴 다우딩 장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략에 있었다. 다우딩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견하고, 처칠에게 더이상의 영국 공군을 도버 너머로 파병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 때 처칠은 프랑스 수상에게 더 많은 영국 공군의 파병을 약속해 논 상태였지만, 다우딩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영국은 더이상의 공군력 손실없이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우딩은 영국의 모든 공업력을 항공기, 그 중에서도 전투기 제작에 최우선을 두도록 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에 도시를 내어주면서까지 자국의 공군력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운영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다는 우위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 공군의 주력기인 Me-109는 먼거리를 비행해 영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최소 10분에서 최대 20분의 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는 짧은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 공군은 레이더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공군이 프랑스의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대기하였다가 그네들이 도착한 시점에 비로소 요격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늘 시간과 연료에 쫓기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이 보유하지 못한 신형 무기인 레이더 기술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으므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레이더 기술에 걸려 기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지상최대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실제 전쟁에서 쓰였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실제로 공중전을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기동전술, 편대 비행, 전투 기술을 보이면서 촬영된 영화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전투기(일부 모델)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실사 영화이다. 그렇게 고증에 철저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승리의 요인은 당시 영국군은 독일군의 군사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승리의 요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공군 파일럿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불굴의 정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칠은 "배틀 오브 브리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데이"는 그들이 세계를 구원한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1년 5월까지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만 127회였고, 이 때 영국 민간인 총 6만명이 사망했으며, 8만 7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공습과 폭탄을 독일에 떨어뜨려렸고, 무차별폭격을 가해 더욱 많은 독일의 도시들을 불태웠고,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그 이후 바뀌지 않는 민간인 학살 - 무차별폭격의 역사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승무원으로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폭격했던 지역을 여행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는 다만 한 개의 점으로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그가 떨어뜨린 폭탄이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떨어져 일반 시민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워드 진은 폭격 임무 참여할 당시 폭격기 날개 밑에서 터지는 고사포탄의 검은 색 구름을 제외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물론 적진을 비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자유에 대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항공전의 승리는 그 뒤에 치뤄질 무지바한 대량공습과 무차별폭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수행방식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제 전쟁은 더욱 가혹해졌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욱 가혹해졌는가? 그것은 전방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런 전쟁 수행 방식은 이후부터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수와 양을 능가했고, 베트남전은 다시 이를 경신한다.

 

 

* 이 DVD는 두 장의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본 영화를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두 번째 타이틀 역시 매우 재미있다. 하나는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생생한 증언, 영화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휴 다우딩 장군과 독일의 에이스이자 나폴레옹 이후 유럽 최연소 장군이었던 아돌프 갈란드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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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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