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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01 신동엽 - 담배연기처럼 (2)
  2. 2010.11.01 신동엽 - 진달래 산천 (1)
담배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가끔 철지난 느와르풍의 옛날 한국 영화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참 이국적(異國的)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프랑스와 미국의 느와르 영화풍의 미장센들이 난무하는 장면들, 중절모를 멋있게 쓴 남자 배우들의 건들거리는 연기를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마초적이지요. 사랑에 울고, 의리에 울고, 배신에 우는 ...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하던데, 그것이 비록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예를 들어 "아리조나 카우보이"란 노래 가삿말의  "인디안의 북소리"에 연이어 나오는 "주막집"이란 가사처럼, 그럼에도 옛시인의 얼굴을, 김수영이 중절모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입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사진 한 장이 주는 선연한 인상은 오래 남습니다. 비록 김수영 자신은 박인환의 댄디즘을 겉멋으로 평가절하했지만 지금의 우리 시각으로 보면 김수영도 은근짜하게 댄디 스타일을 자기 것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개폼도 몸에 착 붙는 사람이 있는데, 김수영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인환과 김수영이 부리던 개폼(댄디즘)의 차이는 그것이 얼마나 몸에 맞춘 듯 잘 들어맞는가에도 있지만 박인환과 달리 김수영은 자신의 개폼을 자기 검열하는 정도의 자의식을 늘 품고 있었다는데 있었을 겁니다.

요사이 포트레이트 사진에서 소위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는데, 신동엽 시인의 사진 가운데 널리 알려진 사진 중에서도 이른바 얼짱 각도의 사진이 있습니다. 상방 45도 각도에서 내려찍은 구도의 사진이죠. 신동엽 시인을 요새 청소년들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으로 아는데, 널리 알려진 그의 시들에 비해서 "담배연기처럼"은 상당히 센티멘탈합니다. 사실 신동엽 시인을 소개할 때 자주 붙는 말인 '민족시인'이란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엔 '민족시인'이란 말이 신동엽 시인이 지닌 여러가지 풍모들을 가리는 역효과를 발한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위의 시를 보면 마치 5-60년대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정서를 담아 남기는 유언 같은 느낌이 들어요. 죽음을 예감한 사내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라며 노래하고 있지요. 이런 서정적인 정조가 소시민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때도 있지만, 바로 그런 모습이 신동엽 시인을 오래도록 우리 가슴에 남게 만드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의 일생을 두고 가장 격렬했던 시기는 대략 분단 직후와 한국전쟁, 그리고 연애 시절, 4.19혁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려서 형제를 여럿 잃은 그는 친구들과 뛰어놀기 보다는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을 적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요. 어려서 공부를 잘해서 내리 1등만 차지했던 그였지만, 당시 지방의 공부 잘하는, 가난한 수재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전주 사범에 지원합니다. 지금도 교육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은 교육이 해방이 될 것인지, 통제의 수단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지만, 식민 치하에서의 교원이란 고민이 많은 자리였을 겁니다. 신동엽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매우 컸지만 해방 직후인 1948년 신동엽은 전주 사범을  중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해방 직후의 극렬한 이념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참여했던 까닭이 크리라고 추측하곤 합니다. 전주 사범을 중도에 그만두긴 했지만 워낙 어수선한 시기였던 터라 그에게 초등학교 교원 자격은 인정되어서 인근의 어느 국민학교에 부임했지만, 부임한 학교에서도 대립하는 사람이 있어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고향인 부여에 머물던 그는 국민방위군이란 것에 징집당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여러 곡절 깊은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건 중 하나가 국민방위군 사건이었을 텐데, 원래 국민방위군이란 것 자체가 중국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면서 이승만 정권이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자 혹시라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될지 모를 젊은 장정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서 급조해낸 일종의 예비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엄동설한에 소집된 장정들에게 피복이나 식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그나마 지급되어야 할 물품들은 중간 관리자들이 모조리 착복해서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장정들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두 사람 앞에 하나씩 지급되는 가마니 한 장씩을 덮고 자야했습니다. 그 결과 소집된 50만 명의 젊은 장정들 중 무려 5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고 말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때 신동엽 시인의 몸도 만신창이 폐인의 몸이 되었고, 간을 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상한  건강 때문에 훗날 그의 나이 40세도 되기 전에 요절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대전 전시 연합대학'을 졸업한 신동엽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일을 도우며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 해 초겨울 어느 따뜻한 날 신동엽은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던 단발머리 소녀 인병선(印炳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신동엽과 사별한 이듬해인 1970년 <여성동아>에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인과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서 한낮이 되자 나는 집 근처 책방으로 신간 서적을 사러 나갔다. 가끔 들러 주간지와 월간지를 사오던 서점이었다. 몇 가지 뒤적이다 찾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방 주인에게 "○○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책은 아직 못 갖다 놓았읍니다만 그 대신 이건 어떨까요?"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나는 책을 따라 자연히 그와 마주섰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 깊이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 크고 빛나는 눈! 비록 작달막한 키에 빛 바랜 허름한 군복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빛나는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눈빛은 너무 깊고 넓어 나의 온 가슴을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의 해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맵찬 눈매를 한 소녀가 가끔 들러 대중잡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예지 아니면 사상지 그리 어려운 학술 서적만 사가더란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해서 부여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매우 가난했고, 아내 인병선이 양장점을 개업하면서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비로소 신동엽은 시인으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예술가와 능력있는 아내의 결합이란 등식이 이 경우에도 성립된 셈인 거죠. 아내 인병선의 회고에 따르면 다정다감하고,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이긴 했으나 생활인으로서의 신동엽은 못질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 일을 했는데, 제자들에게도 매우 인기있는 스승이어서 교지를 만드는 학생들이 실시하는 앙케이트 조사에서 제자들이 선정하는 인기교사 순위에 늘 올라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늘 새로운 말들로 표현되는 법입니다. 만약 4.19가 없었다면, 신동엽도 없었다는 가정도 가능하겠지만 그와 반대로 신동엽이 없었다면 4.19혁명을 표현하는 새로운 말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 가운데 하나인 "껍데기는 가라"가 바로 4.19가 만들어낸,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진 4.19를 만들어준 시(詩)인 거죠. 신동엽 시인은 4.19혁명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실패를, 그가 사용했던 시어들, 비약의 언어로 혁명으로 승화시켜 줍니다. 우리가 4.19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개혁 실패로 인한 반동으로 기억하지 않고, 민중에 의한 혁명으로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힘, 시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69년 3월 중순, 40세의 신동엽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고, 그동안에도 그는 죽음을 예감한 듯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 입원치료 일주일만에 병원측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퇴원을 지시했고, 며칠 후인 4월 7일, 신동엽은 문병 온 작가 남정현의 품에 안긴 채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마침 신동엽 시인의 기일인 4월 7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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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진달래 산천

-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

보고 이제사 생각난 옛날 추억거리 하나.
나는 이 시 때문에 얻어터진 절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문제아였다는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낯선 여자를 꼬시는 이야기로 제격이라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 알고 보면 그것도 일종의 편견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좀더 시간이 지난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될 일이다... 알고보면 여자들 중에서 나보다 음담패설을 실감나게 떠들어 댈 줄 아는 친구들이 있다거나, 그도 아니면 나보다 더 멋지게 담배를 피울 줄 아는 이가 있다거나 팔씨름을 해서 날 이길 수 있는 여자가 있다거나 혹은 소주 병 뚜껑을 이(빨)로 멋지게 따서 한 잔 건네줄 수 있는 여자가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좀더 구슬프게 말하자면 군에 간 남자 녀석들 뒷바라지에 지친 나머지 백두산 부대가 강원도 어디쯤 주둔하고 있는지, '대대 ATT'가 무언지 더 소상히 알고 있는 여자도 있다. 어쨌든 알고 보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방청소도 안 하고, 자다가 머리 맡에서 나는 지린 냄새가 고뇬이 벗어 논 양말이나 팬티 등속을 뭉쳐 앉은뱅이 책상 밑에 구겨논 것이라는 사실, 남자들 보다 훨씬 더 지저분하게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의 나는 갓 알게 되어 사귀게 된 친구들 앞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무용담 아닌 무용담을 은근한 멋을 부려가며 늘어놓는 재주를 익혔다.

요는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신동엽 시인의 시 <진달래꽃>에 얽힌 일종의 무용담이라면 무용담이라는 것이다. 나는 86년부터 88년까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다들 아시겠지만 그 무렵엔 우리나라가 참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인근에서도 비교적 학풍이 자유로운 편에 속했는데, 남들에게 그렇게 보였던 까닭은 우리 학교의 축제가 그 인근의 모든 학교와 비교해도 비교적 규모가 크고, 활발한 동아리(당시엔 주로 써클이라고 불렀다)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일명 '카생'이라고 불리는 가톨릭학생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동시에 내가 몇몇 친구들과 비밀리에 만든 언더그룹('언더'란 말에서 '일진'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불온한 지하출판물 발간 모임이었다.)과 당시 비교적 진보성을 띤 단체인 흥사단 소속 풍물패가 결합한 '민속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출범시켰다. 87년 연말을 거치면서 88년에 우리가 고3이 되었을 때 나를 비롯한, 소위 사상적 문제아들은 대학을 본따 고등학교에서도 학생회장 직선제 쟁취를 위한 어쩌구저쩌구 활동을 했다. 당시로서는 학생의 대표기구로서의 학생회란 존재는 없었고, 전교에서 1,2,3 등 빼고(다시 말해서 서울대 갈 녀석들은 공부만 하라고, 제외하고), 연고대 정도 갈 수준인데 비교적 활달한 성격을 지닌 범생이들을 학교에서 임의로 선출하여 학생회장에 앉히는 것이 대체적인 관례였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학교측에서 임의로 선출한 학생회와 달리 동아리연합이란 조직이 있었다(어째 '화산고'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 동아리연합의 짱이 사상적 문제아였는데 그 녀석이 나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왜 그런 사이 있지 않은가?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그 녀석이 사라지면 살 맛 안 날 것 같은 - 그 관계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하여간에 동아리연합은 확실히 사상적 문제아들에게 장악된 상황이었고, 대외적으로는 그 조직을 중심으로 학생회장 직선제 안이 터져 나와 학교 당국을 당혹시킨 사건이 88년 초엽에 불거져 나왔다. 교사측과 학생측이 두 패로 갈려(이 무렵엔 아직 전교조가 공식 출범하기 전이라 그 전단계인 '민교협' 선생님들이 학교에 있었다) 서로 대치하는 형국이 벌어졌는데, 그 중 일부 교사들은 학생들 편이었다(이 분들이 나중에 죽도록 고생하셨던 전교조 선생님들이다). 결국 직선제관련 해서 학생,교사간의 간담회가 열리고 우리는 음악당에서 1,2,3학년 학생 대표들과 선생님(주로 학생부 소속)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전까지 음악당은 마치 예비군이나 민방위 교육장 같이 삼민투의 반국가성, 북괴의 인민민주주의 전술 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반공 강사들을 통해 강연되던 곳이었다.

학생과 선생이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주장을 펼치며 논쟁을 벌이는 모습은 참 아름다왔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훈련되지 않았다. 선생님도 늘 당신들 주장을 쳘치는데만 익숙했을 뿐이었고, 우리들도 쉽게 흥분하고 격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와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수학 선생님과 나의 충돌로 결국 간담회는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났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당한 수모(솔직히 내가 무슨 엄청난 모욕을 드린 것은 아니고, 당신이 느끼기에 많은 학생들 앞에서 면박을 당했다고 느낀 것 같았다.)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다닌 것으로 기억난다. 나중에 수업이 끝난 뒤 따로 불러 문을 걸어 잠그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학교측과 학생측은 이후로 수업분위기 조차 냉랭해질 만큼 서로 긴장하고 있었고, 하마터면 동맹수업거부까지 갈 수도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쉽지는 않았겠지만). 학교에서는 한 발 물러나 직선제를 수용하는 대신 일정한 등위 안에 든 학생에게만 입후보 자격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결국 그 정도 선에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이 학생회장이 우리의 기대와 얼마나 다른, 어떻게 활동하게 되었는가는 말이 길어질테니 이만 접어보자.

다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그 상황을 모두 잊었는데 선생님들은 그 상황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당시 학생 주임 선생님은 말이다.
사건이 터진 것은 인근에서도 이름난 우리 학교 축제 현장에서 벌어졌다. 나와 친했던 동아리 대표는 문학동아리에 있었다. 나 역시 문학동아리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문학이란 것이 떼로 몰려다니며 이바구나 떠는 재수없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해서 가입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 그룹 사람들하고는 친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문제는 이 문학동아리에서 시화전을 열었는데 그때 신동엽 시인의 이 시를 커다란 패널에 붙이고, 시회전 전시회장 바닥을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톱밥을 깔고 녹슨 철조망을 거둬다가 장식 해둔 것이 문제였다. 전시회장 안에는 신동엽 시인의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김남주, 양성우, 김수영 등의 시와 함께 그네들의 자작시가 걸려 있었다. 축제 중에 학생 주임 선생은 시화전 전시회장에 와서 이 시를 문제삼았다. 빨치산을 찬미한 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던 것 같은데, 이에 굴하지 않은 것이 내 친구의 화근이었다. 결국 인근 학교 여고생들이 가득한 전시회장에서 그 친구는 학주에게 귓방망이를 얻어터지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신동엽의 시를 비롯한 몇몇 시들과 철조망이 철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 학생주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은 "국어"였다.
나는 신동엽 시인의 이 시 <진달래꽃>을 읽을 때 늘 그 날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많은 시들이 오늘날엔 고교생들의 문학교과서 18종에 골고루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교과서에 수록된다는 것이 이 시들의 확실한 신원복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 공공연하게 불리게 되었을 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감회도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는 한 마디에 담긴 여러가지 회한과 의미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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