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르 클레지오 지음 | 신성림 옮김 | 다빈치(2008)




"이 출발이 기쁜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 프리다 칼로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에서 "석기 시대의 인간이 동굴의 벽에 그렸던 고라니 동물은 하나의 마법의 도구이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신령들(Geister)에게 바쳐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벤야민의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대입시켜 보면 그녀가 그렸던 스스로의 모습들은 고대 제의(Liturgia)의 주술들에 해당한다. 물론 이 작품들이 누구에게 바쳐진 것인가를 해독하는 건 우스운 일이며, 그 대상을 한정 짓는 행위 자체가 비난 받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 대상을 "디에고 리베라"라고 말한다면 말이다.
 
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을 지닌 한 소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가 있었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남자친구 알레한드로(그는 프리다 칼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오빠뻘 되는 친구로 프리다는 그에게 열렬히 빠져있는 상태로 스스로 그의 약혼녀 혹은 정부로 자임할 정도였다)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 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고 훗날 술회했던대로,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내가 프리다 칼로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10년 안쪽의 일로 친구가 말해주기 전엔 알지 못했다. 나에게 멕시코 화가는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당시 멕시코 벽화운동가들이 전부였고, 디에고 리베라와 관련해 그의 부인으로 일자 눈썹을 한 여자 '프리다 칼로'란 사람이 있었다 정도였지, 특별히 이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곤 감상해볼 기회도 없었다. 아마도 대개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셀마 헤이악이 동명의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 "프리다"가 국내에 개봉되기 전까지는, 그 덕분에 갑자기 프리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당시 우리 말로 인터넷에 올려진 거의 유일한 사이트였던 내 홈페이지에 프리다 칼로를 검색하다 찾아든 낯선 네티즌들 숫자가 상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의 저자 " J.M.G. 르 클레지오"는 우리에게도 "조서(調書)"란 작품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소설가다. 르 클레지오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접하게 된 것은 그가 1970년대 멕시코의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면서다. 그는 이곳에서 '비둘기와 식인귀(食人鬼)의 만남' 이라고 그 스스로가 표현한 대로 특별한 열정과 사랑, 증오로 똘똘 뭉쳐져 있던 이들 부부에 대해 관심갖게 된다. 르 클레지오는 프리다에게서 멕시코의 신화적 세계를 발견했다. "프리다는 고대의 멕시코였다.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창조적 영혼 그 자체였다. 신화의 피를 뒤집어 쓰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흔들리는 그녀의 영혼은 서구 세계에서 무언가를 배워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살 속에서 뽑아내기라도 하듯 스스로의 내부에서 아주 옛날부터 존재해 온 정신의 편린을 길어 올렸다."

 

책 제목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 프리다 칼로도,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도 아니다. 비록 르 클레지오가 어느 한 쪽은 비둘기로, 다른 한 쪽은 식인귀로 말하긴 했지만 이들 부부의 어느 한 쪽의 부도덕함을 지탄하기 위해 이 평전을 쓴 것은 아니란 뜻이다. 예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부부 모두가 예술가일 때 비교적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재즈나 블루스 가수들이 마약이나 빈곤, 차별로 인해 요절하지 않은 사례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예술가들의 이미지에 주술적인 이미지를 덧칠해 신비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접해온 실제 예술가들의 삶 혹은 그네들의 정신 세계를 엿본 경험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라는 일종의 계약 관계에 충실할 수 없는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들은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훔쳐 본 죄로 사슴으로 변해 사냥개의 습격을 받고 온몸을 갈갈이 찢기운 악타이온의 화신이자, 자연과 미풍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내의 오해를 받아 실수로 아내를 죽이고 만 케팔로스 같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타인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거나 소유할 수는 있어도, 타인에게 종속되거나 소유되긴 어려운 인물들이란 말이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끼리 만난 경우, 거기에 같은 장르에 종사한다고 했을 때 그 관계가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은 눈앞에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 로댕과 까미유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아서 조지아 오키프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사례들도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건 예술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례들이 이런 경우를 더욱 돋보이게 할뿐이란 거다.

 

어린 프리다가 그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디에고는 벌써 꽤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연인인은 루프 마린이었는데 그녀는 디에고의 주변 여자 관계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루프 마린은 그 주변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때 작업장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어린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해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 볼리바르 강당의 작업대 위에서 '인간의 창조'를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 초안을 잡고 있던 디에고는 자신을 지켜보던 소녀를 마주 보았고, 작고 어린 소녀 프리다는 이 거인에게 '그가 일하는 모습을 좀더 지켜보고 싶으니 작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를 통해 디에고 리베라가 그녀와의 만남을 매우 신비로운 것이며 운명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어떻게 해석하든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필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는 여인의 삶과 살을 탐닉하던(디에고 리베라에게 식인귀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퍼뜨린 이야기. 의대에서 해부학 수업 중 죽은 여인의 인육을 먹었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 편력 탓이 더욱 크다), 산을 뽑아 옮길 수 있건 없건 간에 거인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바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프리다 칼로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수 있을까? 1970년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스탈린주의자 그외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다.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들이대면 그녀가 맞닥뜨렸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20세기 여성들이 맞닥뜨린 세계의 한계였다고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은 과연 자신의 육신과 정신으로 홀로 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프리다 칼로가 보여준 대답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보잘것없는 평가에 그쳐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되살려 낸 것은 여성주의 비평가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프리다 칼로는 때로 <쥴 앤 짐>의 '잔 모로'나 '바람같은 베티'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에게 드리워진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었던 프리다 칼로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프리다 칼로는 결코 비둘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코요아칸의 하늘 위로 유유히 떠 있는, 아름답고 매서운 한 마리 매였다. 그녀에게 가장 행복하고 불행한 사실은 그 매서운 눈초리가 바라본 것이 언제나 디에고 리베라였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그가 배반의 칼날로 자신을 후벼 판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디에고와 헤어져서 몇 달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디에고는 이 일을 자랑삼아 떠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1937년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1941년 초 디에고는 더 이상 프리다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리다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샌프란시스코로 불러 두 번째 청혼을 했다. 1949년 디에고 리베라의 창작활동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최된 성대한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글을 발표했다.

 

"나는 내 남편 디에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게 되겠지요. 디에고가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인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를 아들처럼 다루며 이야기한다면 그건 디에고에 대해 묘사한다기 보다 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일일 뿐입니다."

 

푸른 집(코요아칸의 집을 이렇게 불렀고, 프리다 기념관이 되었다)과 철제 코르셋(척추의 부상으로)의 견고한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결국 경배를 보낼 나란 존재가 없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광명의 빛이었으며 메마른 대지로부터 솟아오르는 한줄기 감로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적금 통장을 털어 달아나듯, 신과 자연과 생명의 넘쳐나는 사랑을 인간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디에고 역시 프리다 곁을 떠나고자 했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곁을 진정으로 떠나고자 했던 것(바람을 피웠다거나 외도가 잦았다는 것은 프리다에게도, 디에고에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음을 전제하고)은 그의 평생동안 단 한 차례의 일이었고, 그 한 번이 프리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이들 부부의 재결합 이후에도 디에고는 여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놀라운 창작열을 보였고, 다른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남자들의 혁명은 죽음을 부르는 권력이었고, 그것은 여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혁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삶의 고통과 사랑을 책임으로 짊어지웠다.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디에고,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디에고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녀의 푸른 집과 철제 코르셋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오른발의 회저병이 도져 결국 오른발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프리다는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수술이 끝난 후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정신적 충격과 형액순환마저 바꿔놓은 불균형이다. 수술한지 일곱달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누워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종종 어떤 예술가들의 평전은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 의해 정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학자나 학문적 연구자 혹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널리스트 보다는 차라리 다른 예술가의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될 때가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삶을 다룬 르 클레지오의 이 평전이 그렇다. 정제된 문체로 정리된 두 사람이자 하나의 영혼으로 연결된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감동받는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 감동의 대부분은 프리다에게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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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불멸의 아티스트 17명의 초상) - 박명욱 | 그린비(2004)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란 말은 이 책에 수록된 17명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릭 사티가 한 말이다. 제목이 책 내용을 모두 설명해주는 책은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음이 또한 좋은 책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의 저자 박명욱이란 사람을 잘 알지 못하지만 출판사 "박가서장"의 책들은 몇 권 가지고 있다. 조병준의 책들이 그것이다. 물론 내 취향이라기 보다는 이 역시 아내의 취향 덕분에 나는 더부살이 독서를 한 셈인데, "나눔나눔나눔"이란 책과 "제 친구들하고 인사 하실래요?"란 책이 그것들이다. 조병준, 그는 시인 기형도와 친구다.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고 말했던 시인 기형도와 조형준. 그리고 원재길... 선량한 사람들은 선량한 사람들과 친구 네트워크로 맺어진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는 이들은 제 주변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박가서장의 이 책 "너무너무"는 1998년 초판이다. 그 이후에 재판을 찍는 일이 생겼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처음 이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동안 이 책이 절판되었으며, 매우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류의 책 가운데 내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시 제목을 따서 만든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란 책이다. 이 책 역시 매우 좋은 책임에도 절판되어 더이상 구할 수 없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출판관계자라면 한 번 잘 찾아서 다시 부활시켜 보는 것도 좋을 거다. 지금 읽어보더라도 결코 뒤처진 느낌을 주지 않을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너무"가 부활하게 된 것엔 아마도 이 책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닌 독자들의 힘과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 편집자의 눈썰미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암송해보는 건 싱거운 일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물론 모르는 이들은 모르고,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나도 지금껏 잘 모른다.) 우선 파울로 파졸리니, 그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다. 정치적으로 좌파이고, 삶의 양식으로 보자면 급진적인 인물이었고, 또 동성애자였으므로 만인의 혐오를 받는 자였다. 정치적으로 좌파, 급진, 동성애자... 그렇다면 살해당할 역사적 근거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는 살해당했다. 안토니오 가우디.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신의 건축가였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늘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웠던 그는 성장하면서 스페인의 불같은 대기와 붉은 대지에 깃든 성(聖)적 충만함으로 심폐를 가득 채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건축적으로는 매우 급진적이었던 그는 성가족 성당을 미완성으로 남겨둔채 달려오는 전차를 피하지 못하고 사고로 죽는다. 실비아 플라스. 미국 태생의 시인이자 3번의 자살 시도 끝에 성공리에 생을 마감한 아이들의 엄마, 영국의 계관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쇠같은 고집으로 타협을 모르는 생을 관철해낸 작곡가 에릭 사티. 그의 짐노페디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말 변태스럽다. 그래서 날 행복하게 한다.

 

이 책의 저자 박명욱이 선정한 17인의 예술가들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더이상 마이너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이다. 누가 오늘날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구스타프 클림트를, 로버트 카파를 마이너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이 지닌 사상과 생의 궤적들이 그러했을지라도 오늘날 이들은 충분히 메이저의 지위를 누린다. 물론 사후에 누리는 쓸쓸함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1998년으로부터 2005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문화적으로 우리는 매우 풍성한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누구나 코 끝의 안경처럼, 입 속에, 혀끝에 문화를 담고 살아간다. 그런 과정들이 마이너 아티스트들을 상업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로, 전문적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이들을 대중적인 아티스트로 변모시켰다. 그 과정이 우울한가? 천만에... 문화와 예술은 좀더 천해져도 괜찮다.

 

구판의 뒷표지에서 내 뒤통수를 잡아끄는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원칙주의자는 나중에 쓸쓸하다." 이 문장 하나로 나는 올가을을 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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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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