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오브 워 - 앤드류 니콜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전 세계적으로 5억 5천만 정 이상의 화기가 유통되고 있어. 12명 당 한명 꼴이지. 문제는, 나머지 11명을 어떻게 무장시키느냔 거야.”

영화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2005)>의 첫 장면에서 무기밀매상(Private Gunrunners) 유리 오를로프가 자조적으로 내뱉는 대사다. 그가 딛고 서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에는 탄피들이 즐비하고, 007시리즈를 알리는 유명한 오프닝 장면처럼 카메라는 총구가 되어 전투의 현장들을 겨냥한다. 마침내 ‘탕’ 한 방의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카메라는 빠른 속도로 달려가 역시 AK-47소총을 들고 있는 아프리카 소년병의 머리를 관통해 버린다. 영화에선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소년의 머리를 과녁 삼아 관통해버린 탄환은 AK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일 확률이 가장 높다.

유리 오를로프는 과거의 통계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전 세계에는 대략 6억정의 소형화기들이 널리 퍼져 있고, 그 가운데 최소한 7,000만 정에서 1억정이 미하일 티모셰예비치 칼라시니코프가 발명한 AK-47과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들이다. 최근에 나는 『인물과 사상』(2009년 8월호)이란 잡지에 <현대의 일상을 창조한 사람들>이란 시리즈를 기획연재물로 싣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인물로 선정한 사람이 칼라시니코프였다. 이 시리즈는 우리의 현대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현상의 근원들을 어떤 한 인물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시스템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나는 AK-47소총이란 가볍고, 반동이 적으며,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자동소총의 탄생이 현대의 일상에 끼친 영향과 그 배후를 함께 다루고자 했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무기밀매라는 형태로 세계 각지의 분쟁 지역에 널리 퍼진 불법무기 거래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나는 이 영화와 영화에 수록된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랜 내전을 치르고 있는 한국은 베트남전 이후부터 ‘자주국방(自主國防)’이라는 슬로건 아래 무기산업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그 결과 신흥공업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생산이 불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던 M-16의 자체 생산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2위를 다투는 고성능 자주포 K-9을 비롯해 기본훈련기 KT-1, 고등훈련기 T-50 등을 수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98년부터 최근 2007년까지 한국의 무기산업 수출총액은 28억 199만 달러로 연평균 약 2억 8천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중에서 항공 34%, 탄약 23%, 함정 15% 등을 차지하고 있다. MB정부의 출범 이전부터 방위산업을 ‘신성장동력산업’으로 육성하자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산업이라 할 수 있는 무기 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나 경계는,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미의존도가 높은 군사 분야에서는 역으로 ‘자주국방’과 ‘안보’논리에 밀리고, 이제는 경제성장논리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뉴질랜드 출신의 앤드류 니콜(Andrew Niccol) 감독은 DNA조작에 의한 미래사회의 계급차별을 다룬 영화 <가타카(Gattaca, 1997, 미국)>의 감독이자 - 이 영화에 대해서는 내 홈페이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http://windshoes.new21.org/film-gattaca01.htm )에서 다룬 바 있다 - <트루먼쇼>의 대본을 쓴 작가로 사회성 짙은 영화예술인(cineaste)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그가 대본, 연출을 모두 맡은 영화로 유리 오를로프 역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와 <가타카>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은 맞춘 에단 호크가 무기밀매상 오를로프를 뒤쫓는 국가기관의 요원으로 등장해 재미를 더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거래에는 흑막이 있기 마련이지만 무기거래의 내막을 살펴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어려움의 근원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한눈에 살펴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니콜 감독 역시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미국 비평계로부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을 만큼 문제작이었지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흥행에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비록 유리 오를로프의 인간적 고뇌를 담은 스토리로 ‘당의정(糖衣錠) 효과’를 얻고자 했으나 <트루먼쇼>와 같은 흡인력과 재미를 동시에 갖춘 휴먼드라마를 기대한 이들은 흡혈귀 무기밀매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한 바탕 시원한 액션 활극을 기대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의 런닝 타임과 동일한 시간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고 해도 무기 밀거래의 흑막과 배경, 원인을 살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니콜 감독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은유를 통한 사회현상의 고발이라는 드라마적 재미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다큐멘터리라면 결코 보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무기거래의 진정한 배후가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영화가 되었고, 그것이 <로드 오브 워>가 지닌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신생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무려 4조원의 재래식 무기가 사라졌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대의 무기 실종 사건이었지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되지 않았다. 미소양국은 물론 냉전 체제 아래 있던 세계 각국에 비축된 재래식 무기는 냉전 기간 동안은 물론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 할지라도 모두 소모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냉전 해체로 필요 없는 재고가 된 재래식 무기들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구 유럽의 보관비용만 늘려가고 있는 실정이었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틈새로 무기밀거래가 독버섯처럼 번졌고, 국가기관 역시 암암리에 개입했다. 결국 이들 국가에서 번져나간 무기들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분쟁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이 아닌 내전 기간 동안 죽어야 했다. 원제명인 “Lord of War”는 그런 의미였다.




냉전 기간 중 유대인으로 신분을 속인 아버지 덕분에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족인 유리 오를로프는 우연히 목격한 러시아 마피아들간의 총격전 장면을 보면서 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죽지만 누군가는 그 무기를 팔아 이득을 본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유리 자신에게도 낯선 장면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거리에서 햄버거나 핫도그를 팔듯 그렇게 무기를 팔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무기를 판다는 죄책감은 마약을 판다는 죄책감보다 덜한 것이었다. 니콜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여러 무기밀매상들을 인터뷰하고, 널리 알려진 몇몇 사람의 생애를 유리 오를로프라는 가상의 인물에 녹여내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유리 오를로프는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또 한 편으론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록 남동생이지만 형제에 대한 집착은 알 파치노가 주연 했던 <스카페이스>, 훗날 에바 폰테인(브리짓 모나한)에 대해 유리가 어렸을 때부터 보인 집착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 떠오르고, 성공의 정점에서 결국 소중한 가족을 잃는 모습은 얼핏 <아메리칸 갱스터>가 떠오른다. 독창적인 스토리인 듯 보이지만 이처럼 익숙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기밀거래가 영화를 밀고 가는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을 형성하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그로 인한 혼선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영화적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 내전의 자금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면 - 당신의 결혼반지와 휴대폰엔 아프리카의 피가 묻어 있다 - 앤드류 니콜 감독의 <로드 오브 워>는 실제 서아프리카 내전을 주동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배치하면서 그들이 다이아몬드와 휴대폰의 필수적인 부품재료인 콜탄을 팔아 무엇을 구입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나는 칼라시니코프에 대해 글을 썼다고 했는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고기 다지는 기계 앞에서 칼라시니코프를 희생양 삼아 그가 이 모든 비극의 배후라고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이 기계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볼트나 너트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밀거래상들 역시 그저 기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재료를 공급하거나 기계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윤활유 정도의 기능을 할 뿐이다.



유리 오를로프는 아프리카의 독재자를 비롯해 무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무기를 공급하고 싶어하는 모든 정부와 친밀한 거래를 주도했고, 그 결과 어릴 적부터 흠모했던 여인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거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니 실제로는 이제까지 소모된 재래식 무기 보다 좀더 무기의 화력과 수준을 높이길 희망하는 무기산업자본의 노력으로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진다.

올초에 개봉한 영화 <인터내셔널>은 어떤 면에선 <로드 오브 워>의 후속편이거나 유리 오를로프를 추적하던 요원 잭(에단 호크)의 시선으로 그려진 무기 거래의 이면을 그린 영화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인터내셔널>에선 재래식 불법무기 거래에서 첨단 무기 거래로 넘어가는 새로운 무기 산업의 양상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의 양극화는 물론 세계의 경제적 양극화 또한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인데, 양극화의 가장 극심한 사례가 바로 무기 생산과 소비의 양극화다. 전 세계 무기 공급의 3분지 2는 미국과 러시아가 담당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는 유럽연합 국가들이 책임지고 있다. 2005년 현재 무기 생산업체의 무기 판매액은 2,680억 달러에 달하고, 이 매출액의 절반은 세계의 다국적 자본인 5개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다. 물론 이들 다국적 기업들이 생산하는 것이 무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전자레인지, 세탁기를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유리 오를로프는 말한다.

“최후의 순간에 지구를 상속받게 될 자들이 누군지 알아? 바로 무기상들이지.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느라 너무 바쁘거든. 살아남는 비결은? 전쟁을 하지 않는 거야, 특히 자기 자신과는 절대로….”

전 세계가 미국발 금융파생상품의 파산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 배후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며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무기 거래의 진정한 배후는 영원히 흑막 속에 가려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세기라는 20세기 동안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보다 제노사이드(민간인학살)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억 7천만 명으로 더 많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양 비춰지는 동안, 어쩌면 당신이 연말 보너스처럼 수익을 기대하며 넣은 해외펀드는 군수산업을 살찌우고, 당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양 팔을 정글도로 잘라내고 얻은 것일지 모른다. 물론 내가 쓰고 있는
삼성 휴대폰에도 아프리카 콩고산 콜탄이 필수 부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스 바이스와 클라우스 베르너의 책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광석의 판매는 콩고 반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삼성 경영자는 이 불순한 거래를 비밀에 부칠 것임을 보장했다. 설령 다음과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 광물은 다시 시장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바로 삼성 자체 수요로 전자업 쪽에서 가공될 겁니다.”

삼성은 원료가 의심스러운 곳에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모른 체 한다. 우리가 이 무서운 불법무기 거래를 차단하고, 더이상 학살을 못 본 체 눈감지 않기 위해서는 오를로프의 말과 반대로 우리 자신과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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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르 클레지오 지음 | 신성림 옮김 | 다빈치(2008)




"이 출발이 기쁜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 프리다 칼로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에서 "석기 시대의 인간이 동굴의 벽에 그렸던 고라니 동물은 하나의 마법의 도구이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신령들(Geister)에게 바쳐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벤야민의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대입시켜 보면 그녀가 그렸던 스스로의 모습들은 고대 제의(Liturgia)의 주술들에 해당한다. 물론 이 작품들이 누구에게 바쳐진 것인가를 해독하는 건 우스운 일이며, 그 대상을 한정 짓는 행위 자체가 비난 받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 대상을 "디에고 리베라"라고 말한다면 말이다.
 
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을 지닌 한 소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가 있었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남자친구 알레한드로(그는 프리다 칼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오빠뻘 되는 친구로 프리다는 그에게 열렬히 빠져있는 상태로 스스로 그의 약혼녀 혹은 정부로 자임할 정도였다)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 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고 훗날 술회했던대로,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내가 프리다 칼로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10년 안쪽의 일로 친구가 말해주기 전엔 알지 못했다. 나에게 멕시코 화가는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당시 멕시코 벽화운동가들이 전부였고, 디에고 리베라와 관련해 그의 부인으로 일자 눈썹을 한 여자 '프리다 칼로'란 사람이 있었다 정도였지, 특별히 이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곤 감상해볼 기회도 없었다. 아마도 대개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셀마 헤이악이 동명의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 "프리다"가 국내에 개봉되기 전까지는, 그 덕분에 갑자기 프리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당시 우리 말로 인터넷에 올려진 거의 유일한 사이트였던 내 홈페이지에 프리다 칼로를 검색하다 찾아든 낯선 네티즌들 숫자가 상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의 저자 " J.M.G. 르 클레지오"는 우리에게도 "조서(調書)"란 작품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소설가다. 르 클레지오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접하게 된 것은 그가 1970년대 멕시코의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면서다. 그는 이곳에서 '비둘기와 식인귀(食人鬼)의 만남' 이라고 그 스스로가 표현한 대로 특별한 열정과 사랑, 증오로 똘똘 뭉쳐져 있던 이들 부부에 대해 관심갖게 된다. 르 클레지오는 프리다에게서 멕시코의 신화적 세계를 발견했다. "프리다는 고대의 멕시코였다.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창조적 영혼 그 자체였다. 신화의 피를 뒤집어 쓰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흔들리는 그녀의 영혼은 서구 세계에서 무언가를 배워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살 속에서 뽑아내기라도 하듯 스스로의 내부에서 아주 옛날부터 존재해 온 정신의 편린을 길어 올렸다."

 

책 제목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 프리다 칼로도,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도 아니다. 비록 르 클레지오가 어느 한 쪽은 비둘기로, 다른 한 쪽은 식인귀로 말하긴 했지만 이들 부부의 어느 한 쪽의 부도덕함을 지탄하기 위해 이 평전을 쓴 것은 아니란 뜻이다. 예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부부 모두가 예술가일 때 비교적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재즈나 블루스 가수들이 마약이나 빈곤, 차별로 인해 요절하지 않은 사례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예술가들의 이미지에 주술적인 이미지를 덧칠해 신비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접해온 실제 예술가들의 삶 혹은 그네들의 정신 세계를 엿본 경험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라는 일종의 계약 관계에 충실할 수 없는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들은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훔쳐 본 죄로 사슴으로 변해 사냥개의 습격을 받고 온몸을 갈갈이 찢기운 악타이온의 화신이자, 자연과 미풍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내의 오해를 받아 실수로 아내를 죽이고 만 케팔로스 같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타인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거나 소유할 수는 있어도, 타인에게 종속되거나 소유되긴 어려운 인물들이란 말이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끼리 만난 경우, 거기에 같은 장르에 종사한다고 했을 때 그 관계가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은 눈앞에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 로댕과 까미유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아서 조지아 오키프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사례들도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건 예술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례들이 이런 경우를 더욱 돋보이게 할뿐이란 거다.

 

어린 프리다가 그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디에고는 벌써 꽤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연인인은 루프 마린이었는데 그녀는 디에고의 주변 여자 관계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루프 마린은 그 주변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때 작업장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어린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해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 볼리바르 강당의 작업대 위에서 '인간의 창조'를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 초안을 잡고 있던 디에고는 자신을 지켜보던 소녀를 마주 보았고, 작고 어린 소녀 프리다는 이 거인에게 '그가 일하는 모습을 좀더 지켜보고 싶으니 작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를 통해 디에고 리베라가 그녀와의 만남을 매우 신비로운 것이며 운명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어떻게 해석하든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필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는 여인의 삶과 살을 탐닉하던(디에고 리베라에게 식인귀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퍼뜨린 이야기. 의대에서 해부학 수업 중 죽은 여인의 인육을 먹었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 편력 탓이 더욱 크다), 산을 뽑아 옮길 수 있건 없건 간에 거인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바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프리다 칼로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수 있을까? 1970년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스탈린주의자 그외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다.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들이대면 그녀가 맞닥뜨렸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20세기 여성들이 맞닥뜨린 세계의 한계였다고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은 과연 자신의 육신과 정신으로 홀로 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프리다 칼로가 보여준 대답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보잘것없는 평가에 그쳐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되살려 낸 것은 여성주의 비평가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프리다 칼로는 때로 <쥴 앤 짐>의 '잔 모로'나 '바람같은 베티'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에게 드리워진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었던 프리다 칼로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프리다 칼로는 결코 비둘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코요아칸의 하늘 위로 유유히 떠 있는, 아름답고 매서운 한 마리 매였다. 그녀에게 가장 행복하고 불행한 사실은 그 매서운 눈초리가 바라본 것이 언제나 디에고 리베라였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그가 배반의 칼날로 자신을 후벼 판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디에고와 헤어져서 몇 달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디에고는 이 일을 자랑삼아 떠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1937년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1941년 초 디에고는 더 이상 프리다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리다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샌프란시스코로 불러 두 번째 청혼을 했다. 1949년 디에고 리베라의 창작활동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최된 성대한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글을 발표했다.

 

"나는 내 남편 디에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게 되겠지요. 디에고가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인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를 아들처럼 다루며 이야기한다면 그건 디에고에 대해 묘사한다기 보다 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일일 뿐입니다."

 

푸른 집(코요아칸의 집을 이렇게 불렀고, 프리다 기념관이 되었다)과 철제 코르셋(척추의 부상으로)의 견고한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결국 경배를 보낼 나란 존재가 없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광명의 빛이었으며 메마른 대지로부터 솟아오르는 한줄기 감로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적금 통장을 털어 달아나듯, 신과 자연과 생명의 넘쳐나는 사랑을 인간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디에고 역시 프리다 곁을 떠나고자 했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곁을 진정으로 떠나고자 했던 것(바람을 피웠다거나 외도가 잦았다는 것은 프리다에게도, 디에고에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음을 전제하고)은 그의 평생동안 단 한 차례의 일이었고, 그 한 번이 프리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이들 부부의 재결합 이후에도 디에고는 여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놀라운 창작열을 보였고, 다른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남자들의 혁명은 죽음을 부르는 권력이었고, 그것은 여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혁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삶의 고통과 사랑을 책임으로 짊어지웠다.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디에고,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디에고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녀의 푸른 집과 철제 코르셋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오른발의 회저병이 도져 결국 오른발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프리다는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수술이 끝난 후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정신적 충격과 형액순환마저 바꿔놓은 불균형이다. 수술한지 일곱달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누워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종종 어떤 예술가들의 평전은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 의해 정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학자나 학문적 연구자 혹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널리스트 보다는 차라리 다른 예술가의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될 때가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삶을 다룬 르 클레지오의 이 평전이 그렇다. 정제된 문체로 정리된 두 사람이자 하나의 영혼으로 연결된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감동받는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 감동의 대부분은 프리다에게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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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독일은 전유럽을 석권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만 독일에 굴복한다면 유럽의 통합은 오늘날 EU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이룩될 뻔 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한 유럽의 역사에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곧 유럽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 나치즘에 경사되었던 까닭, 그것은 유럽이 하나의 강력한 문명권으로 재통합하여 다시 세상의 주도 문명(패권)을 이루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렇듯 유럽을 힘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여러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시도되지 않았던 역사 평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대결로서 더 의미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규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1940년 6월까지의 독일은 분명 문제가 많은 폭력적 국가이긴 했으나 특별히 인류의 적이라 규정당할 만큼 사악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나치즘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나 서구문명에서 한 인종에 대한 잔학한 멸종 정책의 원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치즘이나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문명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성취된 이후에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그들은 다른 인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부분은 게르만인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종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인디언 멸종에 이르는 과정,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애보리진 멸종에 이르는 과정과 비교하자면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말살정책은 오히려 덜 잔인한 측면이 있다. 최소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 대화는 했으니 말이다.

 

 

파시즘이 유럽에서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보다 더 정교하게 규명해볼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유럽 혹은 서구(미국을 포함한)에서 파시즘(나치즘)을 바라본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유럽문명을 수호할 하나의 중요한 정신 혁명으로 보거나, 전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공산주의보다는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까닭에 슈펭글러나 하이데거와 같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나치즘을 지지했고, 독일 이외의 국가들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유대인 혐오와 함께 히틀러를 격찬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헨리 포드뿐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대단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치즘과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 파트너로서 격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이 지배하는 독일을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능한 방패로 인식했고, 독일이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만한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과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지한 소련의 스탈린이 수 차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춰를 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 것을 요청했음에도 이들 국가들은 도리어 소련을 고립시켰다. 소련이 강력한 반공을 주장하는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파수견 입장보다는 좀더 쓸만하고 구미에 맞는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제2의 정복왕 윌리엄을 꿈꾼 히틀러

거기에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찌되었든 독일은 서부 유럽의 패자이자, 유럽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프랑스를 단번에 패퇴시키는 위용을 거두었고, 독일 공군(Luftwaffe)는 일찌기 찰스 린드버그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의 공군력은 전유럽 제국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우군 하나 없이(미국은 이 당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국이자, 공군국인 독일을 상대로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방공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나는 전투를 지휘하겠다. 그리고 만일 침공이 시작된다면 이 의자가 내가 앉을 자리이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격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내 시체를 끌어낼 때까지 나는 저 자리를 고수하겠다." 이 말은 당시 영국이 처해 있던 고립무원의 상황을 너무나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무렵 독일은 영국진공계획인 "강치(시라이온)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도버 일대의 벼랑 동쪽에 있는 램즈 게이트에서 와이트도 서쪽의 라임만까지 거리로 약 320km에 달하는 장대한 영국의 해안선에 25만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 정복에 나설 때 상륙한 바로 그곳이었다. 독일은 영국 점령 이후 체포할 유명인사들 - 영국수상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등 - 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논 상태이고, 독일공정부대원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버킹검궁 강하 직후 체포할 영국왕에게 건넬 인사말까지 준비시켰다. 모든 것은 치밀한 독일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폭이 40km에 불과한 도버해협이긴 했지만 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이 보장되어야 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는데는 필수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시작 - 제공권을 잡아라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공군들을 섬멸해야 했다. 히틀러에 이어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에게 이건 닭을 비트는 일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스페인 시민전쟁 때부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점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적의 전투 경험을 쌓은 강력한 공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1선에 배치된 항공기만 4,500대에 이르렀지만, 영국은 제2선급 항공기(여기에는 수송기, 중폭격기)까지 모두 긁어모아야 고작 2,900대 공군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 2:1의 약세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시민전쟁을 비롯한 수않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인데 비해 영국 공군 파일럿들은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들이었고, 그나마 파일럿의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모자라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을 공중에 모두 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도저히 영국은 독일의 거센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영국인들이 이런 비교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0년 6월에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협상을 권유한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고, 그로부터 독일의 가혹한 대공습을 견뎌내는 "불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Battle of Britain"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 말로 번역한 "영국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1940년 6월부터 시작해서 1941년 5월 10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공군대 공군 사이의 대혈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때를 다룬 영화이다.

 

 

자유를 수호한 영국의 찬가

미국에게 "지상최대의 작전"이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사수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찬가라면, 영국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공군대전략)"은 그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럽과 자유 진영을 사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그들만을 위한 찬가이다. 그런 까닭에 "지상최대의 작전"에서 미국과 할리우드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라면, "배틀 오브 브리튼"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제작한 영화이다. 감독은 "007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톤(Guy Hamilton)"이 맡았고(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자가 007시리즈의 제작자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영국 출신의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이 앞장서고 있다(이 영화의 서플먼트에 따르면 이 배우들은 모두 제각각 가장 적은 출연료라도 감수하면서라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고 한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트레버 하워드 (Trevor Howard), 커드 저진스 (Curd Jurgens), 해리 앤드류스(Harry Andrews), 이안 맥쉐인, 케네스 모어, 나이젤 패트릭,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 로버트 쇼, 패트릭 위마크, 수잔나 요크 등 모두 주연급으로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주인공은 영국 공군 대장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경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숨기고 출연해 "배틀 오브 브리튼"의 명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에 대해 여러 찬사들이 있으나, 이 영화 역시 "지상최대의 작전"처럼 수많은 유명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승리 요인들

이 영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어떻게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가를 살피고 있다. 그 요인들은 우선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한 휴 다우딩 장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략에 있었다. 다우딩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견하고, 처칠에게 더이상의 영국 공군을 도버 너머로 파병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 때 처칠은 프랑스 수상에게 더 많은 영국 공군의 파병을 약속해 논 상태였지만, 다우딩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영국은 더이상의 공군력 손실없이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우딩은 영국의 모든 공업력을 항공기, 그 중에서도 전투기 제작에 최우선을 두도록 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에 도시를 내어주면서까지 자국의 공군력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운영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다는 우위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 공군의 주력기인 Me-109는 먼거리를 비행해 영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최소 10분에서 최대 20분의 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는 짧은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 공군은 레이더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공군이 프랑스의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대기하였다가 그네들이 도착한 시점에 비로소 요격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늘 시간과 연료에 쫓기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이 보유하지 못한 신형 무기인 레이더 기술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으므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레이더 기술에 걸려 기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지상최대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실제 전쟁에서 쓰였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실제로 공중전을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기동전술, 편대 비행, 전투 기술을 보이면서 촬영된 영화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전투기(일부 모델)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실사 영화이다. 그렇게 고증에 철저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승리의 요인은 당시 영국군은 독일군의 군사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승리의 요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공군 파일럿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불굴의 정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칠은 "배틀 오브 브리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데이"는 그들이 세계를 구원한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1년 5월까지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만 127회였고, 이 때 영국 민간인 총 6만명이 사망했으며, 8만 7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공습과 폭탄을 독일에 떨어뜨려렸고, 무차별폭격을 가해 더욱 많은 독일의 도시들을 불태웠고,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그 이후 바뀌지 않는 민간인 학살 - 무차별폭격의 역사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승무원으로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폭격했던 지역을 여행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는 다만 한 개의 점으로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그가 떨어뜨린 폭탄이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떨어져 일반 시민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워드 진은 폭격 임무 참여할 당시 폭격기 날개 밑에서 터지는 고사포탄의 검은 색 구름을 제외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물론 적진을 비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자유에 대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항공전의 승리는 그 뒤에 치뤄질 무지바한 대량공습과 무차별폭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수행방식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제 전쟁은 더욱 가혹해졌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욱 가혹해졌는가? 그것은 전방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런 전쟁 수행 방식은 이후부터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수와 양을 능가했고, 베트남전은 다시 이를 경신한다.

 

 

* 이 DVD는 두 장의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본 영화를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두 번째 타이틀 역시 매우 재미있다. 하나는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생생한 증언, 영화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휴 다우딩 장군과 독일의 에이스이자 나폴레옹 이후 유럽 최연소 장군이었던 아돌프 갈란드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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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 김동춘 | 창비(2004)



현재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동춘 교수는 그간 우리 사회의 굵직한 이슈마다 중요한 이론적 잣대를 제공해온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시민단체로 자리 잡은 "참여연대"의 창립(1994)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창립 등 그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이 아닌 행동하는 진보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 왔다. 이 책은 그가 숨 가쁘게 지내온 뒤 찾아온 2003년 연구안식년을 맞이해 미국 UCLA대학의 박사후 연수를 마친 산물로 저술된 것이다.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이란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물론 미국을 패권국가라고 부르는 인식에는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공통된 인식이다. 다만, 미국을 과거 대영제국과 서구 선진국의 식민지 경영을 일컫는 말 “제국”으로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일부 사람들에겐 다른 문제인 듯싶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열흘 정도가 지날 무렵 알자지라 방송은 럼스펠드를 인터뷰하며 미국이 “제국 건설(empire building)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럼스펠드는 “우리는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서 미국에 대한 기본적 오해의 출발은 ‘고립주의’라고 배운 “먼로 독트린”부터라고 생각해왔다. 엄밀히 말해 먼로독트린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유럽에 대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주장한 선언이다. 즉,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국제정치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독점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유럽에 알린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으로 오해해 왔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의 네 가지 주제

김동춘 교수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될 무렵 그는 미국에 있었다. 그는 TV토론 프로그램의 "한 백인 시청자가 전화를 해서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자국내 흑인들은 '반역자'라고 공격"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미국의 분위기를 전한다. '자유와 관용의 땅' 이라 생각해온 미국에서 듣는 '반역'이란 언사가 주는 문제의식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김동춘 교수는 국제관계학이나 정치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이다. 미국 유학파가 아닌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그가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어 보이는 미국에 대한 연구와 책을 낸 것은 그간 우리 사회에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우리 사회에서 바라보는 미국은 친미와 반미라는 두 가지 잣대만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가장 냉정한 현실론자임을 자부하는 이들로부터 미국에 반대하는 이상론자들이 주장하는 양극단의 스펙트럼 사이에 놓인 일반인들을 헤매고 만든다. 이런 극단의 논리 속에서 미국은 점점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 되어 왔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은 그런 양극단의 논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기술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간 김동춘 교수가 보여 온 면모를 살핀다면 이 책에도 그의 관점은 분명히 녹아있고,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세계가 현실론자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저자는 양극단의 논리 속에서 미국의 현실,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세계의 현실, 무엇보다 미국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고 있다. 이 책은 주와 참고문헌을 포함해 모두 368쪽,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제 혹은 목적은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주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간 "한국 사회가 생각해 온 미국이란 국가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책머리에서 "이 책은 주로 미국의 좋은 점만 알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지만, 미국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과 반감을 갖고 있다가 미국에 직접 가서 보고 겪고 나서는 그 엄청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기가 질려버리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실체와 문제점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뜻"도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는 제목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 암시하듯, 미국의 시스템 혹은 국가 동력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주제가 미국의 탄생으로부터 팽창, 제국에 이르는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라면 두 번째 주제에 해당하는 부분은 미국을 기존의 국제정치, 국제역학관계로 바라보는 방식을 배제하고, 사회학적 틀을 이용해 미국 사회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와 그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경험하고, 미국 현지의 자료들을 직접 접하면서 분석한 결과에 해당한다. 이때 그가 발견한 미국의 주요 동력원은 "전쟁" 혹은 전쟁을 통해 보장받고, 확대될 수 있는 시장이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배경을 찾는다.

 

앞서 말한 “전쟁과 시장”이란 미국의 주요 동력원의 문화적 구성 방식과 역사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세 번째 주제에 해당한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듯, 미국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아니 우리 사회보다도 더 선진화된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미국 사회가 어째서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보수 우익의 메커니즘에 종속되어 있는가? 혹시 "전쟁과 시장"의 맥락 이면에 실재하는 미국의 보수 우익의 메커니즘은 미국 시민들로 하여금 세계 시민이 아닌 제국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강요하거나 이에 자발적으로 동조하도록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미국 사회의 내부를 보다 면밀하게 파고든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국제정치질서 속에서 미국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내부를 사회학적 시각으로 고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패권국가로서의 면모를 숨기지 않는 현재 미국과 앞으로의 미래를 예견해 보고, 우리의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다. 과거 또는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측하고, 그 모델을 제공하는 학문의 역할은 사회학의 몫이 아니라 미래학(futurology)의 몫이다. 더구나 현재 유일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역할을 감안할 때 미국의 붕괴 혹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해체되는 상황을 예견해보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넘겨다보는 것처럼 불온 혹은 불경해보이기까지 한다.

 

친미, 반미적 관점을 떠난 냉정한 관찰

오늘날 가장 많은 교포, 이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물론 가장 많은 유학생들, 가장 많은 박사 학위가 미국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미국을 잘 알고 있을까. 김동춘 교수가 고백하고 있듯 미국에 대한 특집, 기획 등을 준비하노라면 뜻밖에 미국에 대한 전문가가 태부족이란 사실을 절감해야 할 때가 있다. 미국 전문가를 자임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과의 현실, 혈맹 관계를 강조하다 보니 우리의 입장 보다는 미국의 시각이 앞서는 이 혹은 논리적 근거보다는 감정적인 부분이 앞서 냉정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에 주장이 앞서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친미적 관점, 반미적 관점과도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지난 20세기 미국이 세계 문명을 주도하게 된 것, 그 문명의 혜택을 우리 한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누려왔던 현실을 모두 부인하거나 부정해 버리고 출발하는 것도, 미국이 실제 자국의 이익에 충실하여 전쟁을 벌이고, 시장을 개척하는 차원에서 원조했던 사실을 망각하고 이를 마치 구원자의 손길로 인식하는 것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맞서 유럽을 구원한 것은 사실이고, 한국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함께 알고 있어야 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까닭 가운데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미국이 철저한 반파시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은 아니다. 미국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를 용인했고, 독일에서 히틀러, 나치의 등장과 집권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 당시 월스트리트의 자본가들은 히틀러의 나치당을 지원했고, 헨리 포드는 그들이 반유대적이란 점을 들어 히틀러와 협력했다. 전후 미국은 뉘른베르크와 동경의 전범 재판에서 구파시즘 세력을 선별하여 미국 이주를 허용하고, 트루먼의 냉전 전략은 전세계 특히 한국과 그리스에서 구파시즘 세력을 파트너 삼아 이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김동춘 교수는 "미국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들조차 이라크 선제공격이 마치 미국 역사상 최초의 일인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가까운 과거인 1961년 쿠바 피그만 침공 작전, 1983년 레이건 정부 당시 그라나다 침공,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파나마 무력 침공 등 미국은 수많은 전쟁을 선전포고 없이 단지 ‘경찰 행동’ 차원에서 해 왔다. 그라나다 침략의 명분은 그곳에 거주하는 미군이 위협에 처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라나다의 미군은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었고, 파나마 침공 역시 독재자 “노리에가”의 제거가 명분이었으나 누가 보더라도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미국이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제공격전략(예방공격)은 냉전이 미국의 공세적 소련 봉쇄 전략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처럼,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쟁전략이었다.

 

"미국이 전쟁을 먼저 벌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에는 오직 의회만이 전쟁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1950년 북한의 남침에 맞서 미국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전화 한 통으로' 개입했고 이는 이런 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된다. 이것은 전쟁이 국민의 동의에 기초하기보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서, 그리고 은밀하게 추진되었다는 뜻일 게다.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한 것만 전쟁이라 한다면 한국전쟁도 미국의 주장했듯이 전쟁이 아니라 '경찰행동'이고, 베트남 전쟁도 전쟁이 아니다." <본문 82쪽>

 

1950년 당시 한국전 파병을 앞두고 미 국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19세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85차례나 전세계 각 지역에 파병했고, 전쟁을 벌여왔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를 위한 전쟁

미국의 건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대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물론 미국 시민들은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느끼는 것 못지않은 자부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미국은 이런 선조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전세계를 향해 자유와 인권의 수호국을 자부한다. 우리가 미국을 연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자유의 여신상과 세계 최고의 인권국가임을 상기해볼 때 어쩌면 미국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입장이다.

 

미국이 처음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의 이유는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걸프전 이래 12년간 미국의 경제봉쇄로 사실상 전쟁 상태에 있던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도, 대량살상무기를 만들 재정도, 대량살상무기를 만들 의지도 없었다. UN조사단 역시 이라크에서 아무런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전쟁의 이유를 다시 이라크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 민주화로 돌렸다. 후세인이 쿠르드 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독가스는 미국제품이었다. 죄 없는 민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할 무렵 이라크를 방문해 후세인을 격려한 인물이 바로 현재의 국방장관 럼스펠드였다. 이라크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한 핼리 버튼의 총수가 현재 미국 부통령인 딕 체니였다. 핼리 버튼이 총수로 재직할 당시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가장 많은 무기를 이라크에 수출했다. 미국은 한 때 무자헤딘이라 부르며 무기를 지원한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뒤 자신들이 이슬람의 율법에 갇힌 아프간 여성들을 해방시켰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은 여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강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있는 이란에서 여성들은 차도르를 쓰기는 하지만 사무실에서 남성들과 함께 근무한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전까지는 직접적인 무력개입을 자제해왔다. 국제 정세가 미국의 직접 개입을 용인하지 않은 탓에 미국은 현지에 수립한 정권과 CIA의 공작을 통한 '작은 전쟁(저강도 전쟁)'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50여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1970년대 후반의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민간인 학살, 멀리 갈 것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를 상기했을 때 미국이 주장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는 선별된 대상에 의한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세상 더할 것 없는 독재라 하더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그것이 민주주의였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 역시 미국의 팽창 전략에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중동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예를 보자. 최근 MBC에서 방송한 5부작 다큐멘터리 “중동”에서 네탄야후 전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중동에 평화가 오지 않는 이유를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불법 점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지역은 “6일 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 팔레스타인인, 기독교도, 이슬람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철수할 것은 요구한 UN결의를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며 유대인 지역을 넓혀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전략은 바로 미국의 전략을 고스란히 추종한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란 미국의 원하는 것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가 따르는 것이다. 미국의 평화 전략에 따르면 상대에게 보다 빠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핵을 사용하거나 무차별 융단 폭격을 실시하는 것도 평화를 위한 길이 되고, 이런 전쟁조차 평화를 위한 전쟁이 된다. 그것이 지금까지 미국이 벌이고 치른 전쟁 가운데 ‘평화를 위한 전쟁’ 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미국 최고의 대박사업은? 전쟁!

미국의 많은 이들이 매달 이라크에서 사용하고 있는 40억 달러면 전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에릭 홉스 봄은 "극단의 시대"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 육군은 5억 1,900만 켤레 이상의 양말과 2억 1,900만 벌 이상의 바지를 주문했고, 독일군은 1943년 한 해만 440만 개의 가위와 620만 개의 군대용 스탬프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고, 애초에 미국은 이라크 전비와 재건 비용을 세계 매장량의 11%를 차지하고 있는 이라크의 석유를 팔아 충당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이 이토록 많은 돈을 이라크에 퍼붓고 있는 이유는 과연 이라크인들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을까. 미국은 어째서 이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서는 것일까. 그것은 미국을 움직이는 엔진이 “전쟁과 시장”이기 때문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서 미군 18명이 전사(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하자 미국에는 외국에 미군을 파견하지 말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국익에 결정적이지 않은 전쟁에는 한 명의 미국인도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명분이 인권, 세계 평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도적인 이유만으로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언제라도 무력 개입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전쟁을 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인식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박을 터뜨린 전쟁사업은 2차 대전 참전과 전후 복구를 위한 마샬플랜 그리고 냉전전략일 것이다. 2차 대전으로 미국은 세계 총생산의 반을 차지하는 경제적 초강대국이 되었다. 흔히 뉴딜이 미국자본주의를 공황에서 구해냈다고 말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2차대전이 미국 경제를 살렸다. 전쟁은 자본 이득을 증가시켰으며 투자 기회를 확대했다. 고용문제나 경제난이 전쟁으로 한방에 해결됐다. 더구나 자기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니 인명손실을 제외하고는 별로 손해본 것이 없었다. 2차대전 개입 후 미국은 전쟁 호황에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이 전쟁으로 미국 사람들은 전쟁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아챘다. 더구나 파시즘을 멸망시켰다는 명분도 얻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본문 124쪽>
 
이후 미국의 전쟁은 명분은 무엇이 되었든 실제로는 시장개척을 위한 전쟁(프론티어)가 되었고, 고조되는 무력분쟁 위기는 미국의 무기 수출을 위한 좋은 호재였다. 지난 2002년 미국의 무기 판매고는 133억 달러로 전년도 121억 달러에 비해 크게 늘어났고, 2위 국가인 러시아(50억 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이는 세계 전체 무기 판매고의 45.5%에 해당한다. 그중 86억 달러는 중동 국가들에게, 36억 달러는 미국의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평가받는 중국이 수입했다. 단일 국가 규모로는 중국이 1위, 한국이 2위(19억 달러)이다. 미국이 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 조성에 적대적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 지배 엘리트 육성

지난 대선 후보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이 인정한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은 건국 과정부터 미국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부 수립과정, 제헌 과정,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국방 등 우리 사회의 어느 한 분야도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대한민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004년 12월 1일자 프레시안 기사에서 노희찬 의원은 한 달 전 관저로 초청 받아 만난 모 주한유럽대사로부터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도 미국으로부터 썩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다. 걸프전이 끝난 이후 현재까지 13년 동안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소련 붕괴 이후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현재까지 전세계 35개 국가에 700여 개 이상의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만약 이것을 로마제국식으로 한정해 말하자면 로마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로마화가 진행된 것처럼, 미국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미국이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우리들의 짝사랑 이야기는 고종 황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야 하지만, 그 핵심은 광복 직후 단정 수립을 지지했던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 "일본과 달리 미국은 땅이 크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므로 우리의 영토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따라서 우리를 도와줄지언정 침략은 하지 않을 것"과 같다. 그러나 조병옥은 틀렸다. 그가 미국에 유학해 있던 1930년대 이미 미국은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바,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아이티, 니카라과, 필리핀, 파나마 등이 그들의 식민지였다. 미국은 로마 제국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질서를 구축했던 중화 제국과도 흡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단 이들과의 차이는 보다 타산적이고, 냉혹한 실리 계산에 따르되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시스템을 통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통치전략은 군사력을 동원해 이들 나라를 직접통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란 관념을 통한 것이었다. 미국은 직접통치 방식을 대신해 "나라만들기(state-builing)", 즉 법, 제도, 엘리트 이식작업을 통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통치한다. 그래도 못 미더운 나라들은 미군을 반식민지화한 중국의 상해처럼 치외법권화된 지역에 주둔시키는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나라만들기의 시작은 보통선거를 통한 대표자 선출인데, 미국의 사전정지작업을 통해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세력은 과감히 제거한다. 해방 직후의 남한과 현재 이라크 상황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성립된 신생 정부는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합법성을 인정받게 되고, 그런 뒤 현지의 지배엘리트들 가운데 선발해 미국 유학의 형태로 미국의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육시킨다.

 

이들이 귀국한 뒤엔 미국식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과거 로마 제국이 그러했듯 점령지역의 세력가들을 포섭하여 그들의 파트너로 육성하는 것이다. 과거 영국이 식민지 경영을 위해 자국의 관리들, 군인, 기업인들을 훈련시켜 보냈다면 미국은 현지 관리, 군인, 기업인을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미국식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무장시켜 그들로 하여금 지배엘리트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의 대학이 다른 선진국의 대학들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미국에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가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제3세계의 군부엘리트들을 그들의 군사학교에서 육성해 왔는데, 앞서 말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물론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 등도 모두 미국의 군부엘리트 학교 졸업생들이었다.

 

미국을 제국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방식이 아닌 그 본질로 파악했을 때의 제국주의(imperialism)를 한 국가의 정치, 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 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충동이나 정책이라 했을 때 미국의 본질은 제국에 가깝다.

 

우파국제주의자들의 발전전략 "영구전쟁론"

미국에도 내부 비판자들, 시민사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속적으로 제국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는가. 김동춘 교수는 미국이 실질적으로는 이념적으로는 일당독재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레이건 집권 8년 동안 미국 정치사회에서 중도좌파는 완전히 제거되고, 중도파가 좌파로 간주되고, 민주당의 정책 역시 지속적으로 우경화되는 정치 지형의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 같은 이는 민주당을 향해 "위선의 가면을 벗고 차라리 공화당과 합당하라"고 비판한다. 현재 미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거 좌파 국제주의의 정확히 반대 측면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미국의 주류는 우파 국제주의(세계화)에 해당한다. 과거 좌파 국제주의가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면 그들은 미국의 패권을 지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영구전쟁론’을 추진한다. 냉전 시대를 거치며 미국 우파는 유럽과 달리 집요하게 애국주의 담론, 반공 담론의 장에 민주당과 좌파들을 끌어낸다. 그 결과 미국의 정치집단은 스스로 국가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애국게임에 휘말리게 되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과도한 충성심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부시가 승리했지만 캐리가 당선되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선포하기 직전인 2003년 2월 미국 언론에는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부시와 파월, 럼스펠트 등 각료 사진이 크게 실렸다. 부시가 개신교도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교파에 속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공적인 자리인 각료회의 자리에서 다 함께 기도드리는 광경은 자유주의 국가 미국을 연상하는 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이다. 미국인들은 유대인들 못지않게 스스로를 신에 의해 선택된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닌 국가라고 생각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나는 신이 우리 미국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처럼 힘을 주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중동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 못지않게 미국의 정치 지형 속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베트남전을 경험하면서 미국의 가톨릭 우익, 유대교 우익과 합세하면서 "도덕적 다수, 기독교 연합" 등 적극적인 정치 세력화에 나섰고, 종교와 정치를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 미국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신이 보기에 합당한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미국 사회를 "기독교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런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워드 진”이나 “노암 촘스키” 같은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미국 사회의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판적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세대들은 우경화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아카데미 가둬두거나 전문가주의로 퇴보하면서 더 이상의 비판을 멈추고 있다. 어쩌다 나오는 이들의 비판적 발언조차 하워드 진에게 어느 어린 여학생이 "그렇다면 왜 미국을 떠나지 않는가"라며 비판한 것처럼 반애국적인 행위로 단정된다.

 

모든 제국은 팽창한다, 고로 제국은 붕괴한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의 제국들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제국은 팽창한다. 한 번 팽창하기 시작한 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팽창을 멈출 수 없다. 최대한 팽창한 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한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건설한 뒤로부터 몰락하기 시작했고, 중화제국의 최대 판도는 청조 시대의 일이었으나 이후 중국은 급격한 몰락을 경험한다(물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청나라보다도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며 전 세계 가솔린 소비량의 40%를 차지하는 나라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세계적으로 두 번의 미국화(Americanised)를 불러왔다. 한 번은 냉전을 통해, 다른 한 번은 세계화를 통한 것이었다. 이제 미국의 패권은 현재 절대적이다 못해 초월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김동춘 교수는 바로 지금이 '제국의 위기' 라고 진단한다.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악독한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핵심적인 부분은 미국은 바로 그들이 주장하고 전파한 "인권과 평화, 자유와 민주주의"로 인해 내부로부터 붕괴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적 불평등(세계화 혹은 자유무역)은 국가 단위를 해체하는 듯 보이지만 미국만큼은 철저하게 국가의 경계를 유지한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구대륙의 차별받던 시민들을 받아들여 국가의 동력으로 삼은 덕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편주의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제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엄격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 미국은 자국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입국조차 할 수 없도록 통제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노쇠한 제국이 빠지는 딜레마에 똑같이 빠져들고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가 공화국 수비대를 한 달도 못되는 기간에 붕괴시킬 수는 있지만 종전 선언 1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라크에서 총성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념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들이 지닌 돈과 힘에만 의존하는 국제질서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미국은 자본축적의 한계 혹은 자본주의 붕괴 시나리오에 의해 붕괴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붕괴”란 말은 너무 엄청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치 로마 제국이 게르만 용병대장의 손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붕괴가 이미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왔던 것처럼 미국의 붕괴 역시, 대영제국의 붕괴가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시절에 시작된 것처럼 그렇게 시작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미국의 붕괴는 당연히 소련의 붕괴가 가져온 충격파보다도 더한 충격을 가져올 것이다.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국방비를 합쳐도 미국보다 적은 현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은 참으로 맥 빠지는 일이며, 보수우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로마 제국의 붕괴가 중세의 어둠을 불러왔다고 믿는 이들에게 미국의 붕괴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예견 또한 가능하겠지만, 대영제국의 붕괴 과정처럼 조용히 올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우리가 미국의 패권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붕괴 또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 절대적 패권국가인 미국의 붕괴는 미국이 영원한 패권국가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부질없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로마가 그렇게 붕괴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 책이 좀더 일찍 나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 중 상당수는 이미 국내에 출간된 상당수의 미국 비판 서적들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에 대한 조선일보의 서평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보수우익이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전자는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 가장 최근의 미국 사회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학적으로 내부를 고찰하고 있다는 장점과 대중적으로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으로 상쇄되고, 후자의 경우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는 아니면 그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이들에겐 어차피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을 것이란 점에서 상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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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지음| 창비| 2004.

패권인가 생존인가 - 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 Hegemony or Survival : America's Quest for Grobal Dominance, 2003)|노암 촘스키 지음|오성환, 황의방 옮김 | 까치글방 | 2004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 김동춘(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가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될 무렵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사회를 분석한 결과물이다. 김동춘은 9.11 이후 이라크 전쟁에 이르며 본격적인 슈퍼 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미국이란 거대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전쟁과 시장이란 키워드를 통해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독창적인 언어학자이자 반전운동가인 노암 촘스키의 『패권인가 생존인가』는 냉전 해체 이후 초강대국으로 부각된 미국의 영속적인 세계 패권(global hegemony) 전략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9.11의 잿더미에서 제국을 선포한 미국
  김동춘과 노암 촘스키의 책은 9.11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부시2세의 재선 승리라는 결과를 앞에 놓고 미국의 과거로부터 시작해 현재와 미래를 묻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외에도 두 권의 책이 지닌 공통점은 또 있다. 9.11 이전의 미국 연구들은 대개 냉전 해체 이후의 미국을 좀더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국민국가(nation-state)들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고 있었던데 반해 김동춘과 노암 촘스키는 애초부터 미국을 제국(empire)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9.11의 잿더미는 미국이 새로운 제국으로 탈바꿈했음을 알리는 극적인 신호탄이자, 세계만방에 제국엔 제국의 작동방식이 있음을 공포하기 위한 막간극이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지 10일 정도 지난 2003년 3월 28일 아랍 위성방송인 알자지라가 럼스펠드를 인터뷰하면서 미국이 “제국건설(empire building)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럼스펠드는 마치 여자 속옷을 입고 있다가 들킨 사람처럼 “우리는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주의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화를 내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미국 내에서는 “그래 미국이 제국인 것은 맞지만 뭐가 잘못됐냐? 우리는 ‘비제국주의적 제국’ 아니면 ‘좋은 제국’이다”라는 공세적인 긍정론이 엇갈렸다. <김동춘, 165쪽>

  미국이 제국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이나, 옹호하는 이나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전제는 미국이 이미 제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언제부터 제국이 되어 있었던 것일까?

  2002년 가을, 가장 중대한 세계적 어젠다는 역사상 최강의 국가가 군사력 사용 및 위협을 통해서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한 것이었다. 국가안보전략에 대한 공식발표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군사력은 잠재적인 적들이 미국의 국력을 능가하거나 대등해지겠다는 희망하에서 군사력 증강을 추구하는 것을 단념하도록 할 만큼 충분히 강해질 것이다.”
저명한 국제문제 전문가인 존 아이컨버리는 이 같은 선언을 “미국이 대등한 경쟁자가 존재하지 않는 일극(一極)세계(a unipolar world)를 유지하겠다는 근본적인 공약에서 시작되는 대전략”이라고 설명한다. <노암 촘스키, 19쪽>

위대한 공화국의 '명백한 운명(manifiest destiny)'

  미국은 2002년 가을, 비로소 제국이 될 결심을 한 걸까? 김동춘에 따르면 ‘제국주의’라는 말은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1823년 미국은 흔히 ‘고립주의’ 외교정책으로 표현되는 먼로독트린을 내놓는다. 이후 미국은 실질적으로는 제국적 팽창을 지속하면서도 정치인들 스스로는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여 왔다. 노암 촘스키는 미국이 먼로주의를 주창할 때, 다른 남북 아메리카 국가들의 안전도 간간이 고려했으나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현직 대통령인 부시2세의 정치적 배경이기도 한 텍사스는 미국에서 2번째로 큰 주로 미국 전체 영토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친구를 뜻하는 인디언 말 ‘테하스(Tejas)’에서 유래했다는 텍사스는 석유 생산량이 미국 전체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멕시코 북동부 테하스주를 개척하고자 미국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토지를 양도해 주었고, 스티브 F. 오스틴이 모집한 미국 출신의 이주민들은 1822년 텍사스에 도착했다. 당시 텍사스는 멕시코 코아우일라주 소속의 영토로 대략 25,000명의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분리 독립을 원한 미국 이주민들은 1831~1832년 사이에 무력을 동원하여 멕시코측 세관과 요새들을 파괴하고, 1836년 2월 독립을 선언한다.

  개척을 위해 받아들인 이민이 주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이겠다며  일으킨 반란이 텍사스 독립전쟁이었다. 멕시코 정부와 산타 안나는 1836년 3월 6일 텍사스의 알라모 요새를 점령하지만, 4월 21일 산하신토(San Jacinto) 전투에서 패배하여 미국으로 압송당한다. 그후 산타 안나는 미국의 잭슨 대통령에게 텍사스의 독립을 약속하고서야 6월말 멕시코로 귀국할 수 있었다. 1836년 독립을 성취한 텍사스 공화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뒤인 1845년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부당한 전쟁으로 지목하며 멕시코 전쟁에 충당될 세금 납부를 거부해 투옥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장차 세계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인류의 모든 행위를 제어해야 할 운명을 짊어진 위대한 공화국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iest destiny)'은 이렇듯 제국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상의 공동체, 미국의 신화가 만들어낸 이미지
  권용립(경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은 『미국의 정치문명』(삼인, 2003)에서 우리가 흔히  서구 문명 속에 포함시키는 미국이 사실은 서유럽 국가들과 태생적으로 다른 정치문명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서유럽 국가들이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 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그 역순을 밟은 나라, 즉 국가와 이념을 먼저 설계해놓고, 그 이후 여러 인종과 민족을 받아들여 미국인이란 새로운 민족과 기억을 제조해온 국가라는 것이다. 그런 미국이기에 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기억보다는 국가의 설계과정을 담당한 지배담론이 신화가 되고, 이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상상의 공동체”이다.

  19세기말 미국이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 없는 명백한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했음에도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미국 민주주의의 변형된 한 형태로, 즉 미국의 역사적 예외성을 강조해왔다. 이런 태도는 비단 우파 지식인들만이 아닌 좌파로 분류되는 지식인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를 두고 나타난다. 촘스키는 이런 무의식적인 태도를 미국이 세계체제 구축과정에서 만들어낸 레토릭과 프로파간다라고 비판한다. 할리우드 영화 “알라모(The Alamo, 1960)”를 통해 멕시코 전쟁은 존 웨인으로 상징되는 서부 개척 시대의 영웅들이 압제자 멕시코 군을 맞아 싸운 전투로 뒤바뀐다. 비록 미국의 건국과정이 실제로는 인디언 학살로 점철된 피의 역사라 하더라도, 미국의 건국이 구대륙의 전제정치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다. 공화주의 전통 아래 생겨난 이런 자부심은 캘빈주의의 소명의식과 결합하면서 미국은 선택받은 나라라는 도덕적 절대주의를 만들어냈다.

  촘스키는 미국적 가치와 동일시되는 자유, 평화, 인권, 민주주의가 프로파간다와 레토릭에 의해 구축된 이미지+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미국의 본래 모습을 보기 위해선 이런 이미지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춘은 이라크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의 TV매체들이 사실상 정치선전자의 역할을 했으며 TV매체가 전황을 보도할 때면 언제나 “이라크 해방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란 구호를 화면 하단에 띄웠다고 한다. 세계로 송출되는 미국 TV매체에 의해 침공은 해방이 되고, 미국적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나라는 악의 축이 된다. 상대를 문명화 혹은 미국화(Americanized)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은 “전 세계를 미국과 같은 나라로”로 만들자는 윌슨 외교의 본질이었으며, 로마제국이 2,000여 년 전 갈리아 지방의 골족 수십만을 학살하며 주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김동춘은 미국의 이런 의식이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나는 신이 우리 미국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처럼 힘을 주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다. 중동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 못지않게 미국의 정치 지형 속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베트남전을 경험하면서 미국의 가톨릭 우익, 유대교 우익과 합세하여 "도덕적 다수, 기독교 연합" 등으로 적극적인 정치 세력화에 나섰고, 종교와 정치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다. 미국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신이 보기에 합당한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미국 사회를 "기독교 파시즘"화 되고 있다고 보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미국의 슈퍼 파워를 뒷받침하는 토대들
  미국이 스스로를 제 아무리 특별하고 예외적인 국가로 인식하고 있더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현실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그저 자부심이 강한, 약간 예외적인 국가로 치부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질서를 좌우할 수 있는 패권(hegemony)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 김동춘과 달리 촘스키는 토대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토대가 전쟁과 시장이라는데 별다른 이견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군산복합체로서 미국의 전쟁과 시장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걸까? 그 핵심엔 무엇이 있을까? 미국은 언제부터 이런 초강대국이 되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오래 전에 이미 미국은 역사상 세계 최대의 경제 강대국이었으나,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은 아니었다. 전쟁이 상황을 바꾸었다. 경쟁하던 강대국들은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악화된 반면 미국은 거대한 국력을 키웠다. 준통제경제체제에서 산업생산은 근 4배로 증가했다. 1945년 미국은 경제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안전보장 측면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노암 촘스키, 187쪽>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박을 터뜨린 전쟁사업은 2차 대전 참전과 전후 복구를 위한 마샬플랜 그리고 냉전전략일 것이다. 2차 대전으로 미국은 세계 총생산의 반을 차지하는 경제적 초강대국이 되었다. 흔히 뉴딜이 미국자본주의를 공황에서 구해냈다고 말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2차대전이 미국 경제를 살렸다. 전쟁은 자본 이득을 증가시켰으며 투자 기회를 확대했다. 고용문제나 경제난이 전쟁으로 한방에 해결됐다." <김동춘, 본문 124쪽>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냉전 해체 이후엔 위협 혹은 균형이 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역사상 유일한 제국이 되었다. 제국의 엔진인 전쟁과 시장을 가동시키는 연료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달러, 인터넷, 미사일, 그리고 할리우드일 것이다. 신영복 교수는 지난 2003년 계간『황해문화』와 가진 대담에서 1945년 이후 석유결제 화폐가 줄곧 미국 달러였음을 지적한다. 오일 달러가 미국의 금융과 증시를 뒷받침하고, 미국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메우는 재원이 된다. 석유결제 화폐가 달러라는 사실은 반대로 달러가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할 때, 미국 경제가 하루아침에 붕괴할 수 있음을 반증한다. 석유와 달러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제국의 생존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면, 미 국방성이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한 인터넷은 로마 제국의 아피아 가도(Via Appia)이다. 인터넷은 미국 상업의 심장부가 되고, 영어는 세계인의 언어가 된다. 할리우드의 문화상품들은 세계를 석권한다.

  로마제국 이래 모든 제국은 전쟁과 정복이란 수단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사실상 로마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정복은 창끝이 아니라 거대한 공중목욕탕에서 나왔다. 미국의 통치전략은 최근 이라크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군사력을 동원한 직접통치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란 관념을 통한 것이다. 비협력 세력을 과감히 배제하며 추진되는 미국의  "나라 만들기(state-builing)"는 친미 엘리트들을 지배계급으로 이식하는 작업이다. 해방 직후 남한과 현재 이라크 상황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식된 지배 엘리트들은 미국식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오늘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의 대학이 다른 선진국 대학들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가기 때문이다. 미국 군부는 오랫동안 엘리트 군사학교에서 제3세계의 군부엘리트들을 육성해 왔는데,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물론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 등도 모두 이 과정을 거쳤다.

So What? 을 넘어서
  김동춘과 촘스키의 분석이 아니라도 최근 우리 사회는 물론 국제적으로 미국에 대한 연구와 분석들은 숨가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개는 미국이 슈퍼 파워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인 정치, 군사,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책들을 읽노라면 국가의 정책 결정과정은 물론 개인의 일상까지 제국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고, 세계라는 ‘거대한 체스판’은 마치 미국의 음모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국은 너무나 거대한 제국이기에 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도리어 초월적 존재, 감히 도전할 의지조차 품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미국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해 영토를 지나치게 확장한 결과 제국이 해체되는 길로 접어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는 공화국 수비대를 한 달도 못되는 기간동안 전멸시켰다. 그런 까닭에 지금 미국의 세계질서에 반대하는 것은 마치 디즈니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걸리버를 포획하려는 소인국 사람들의 안간힘처럼 보인다.

  지난 20세기 세계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세력 균형에 힘써왔다. 제1차 세계대전은 당시 세계 패권을 장악한 유럽 국가들이 다극 지배 체제의 세력 안정에 실패한 결과이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양극 체제는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 국지적 분쟁을 조장해왔다. 그 과정들은 너무나 잔인해서 인간의 본성 자체가 살육과 학살을 즐기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인간은 본래 잔인한 존재이기에 미국과 이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미국을 정점으로 한 일극 체제가 도리어 팍스 로마나와 같이 힘에 의한 평화 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촘스키 같은 지식인은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가 아니며, 이념적으로 차이가 없는 민주당은 공화당과 합당하란 비난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So What?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는 냉소 섞인 반문을 피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김동춘과 노암 촘스키의 결론 혹은 대안은 본질적으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촘스키는 인류가 패권과 생존 사이의 명백한 선택을 강요당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으며, 이 상황에서 미국을 견제할 세력으로 저항과 비판 의식, 평화와 인권을 염원하는 ‘세계 여론(world public opinion)’이라는 제2의 초강대국을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김동춘은 국가나 시장은 19세기에는 인간을 해방으로 이끄는 수레바퀴였으나 이제는 인간을 예속하는 굴레로 변했다고 지적하며 시장의 법칙을 극복하고, 우리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자고 말한다. 두 사람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세계적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는 내부와 외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제국의 네트워크는 지구를 통째로 포섭하고 있으며 자율적인 개체의 민주적 연대인 다중은 이 ‘제국 기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전망이 밝지는 않다. 미국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위기와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런 저항을 도리어 자기 혁신의 에너지, 내적 동력으로 삼아버리는 놀라운 탄력성을 자랑하며 성장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만 냉소를 곱씹고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지난 역사들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는 있다. 모든 제국은 필연적으로 팽창하지만 한 번 팽창한 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팽창을 멈출 수 없다. 세계 가솔린 소비량의 40%를 차지하는 미국의 붕괴는 내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불평등(세계질서 혹은 자유무역)은 국가 단위를 해체하는 듯 보이지만 미국 자신은 철저하게 국가의 경계를 유지한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구대륙의 차별받던 시민들을 받아들여 국가의 동력으로 삼은 덕이지만, 미국의 보편주의는 점차 약해지고, 제국은 본래의 탄력을 잃어 폐쇄적인 사회가 되어 간다. 미국은 팽창한 모든 제국이 빠지는 똑같은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 저항은 제국의 포섭 양식 속에서 소통하고 있으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저항을 준비한다. 이제 미국이 즐겨 읊조리던 에드먼드 버크의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는 격언을 되돌려 줄 때다.

*출처 : 녹색평론 2005년 3~4월 - 통권 81호 | 녹색평론 편집부 (엮은이) |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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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500대 브랜드 사전 
(Die 500 bekanntesten Marken der Welt, 2004)
- 토리 차르토프스키 | 박희라 옮김 | 더난출판사(2006)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함민복, 자본주의의 약속, <전문> 

함민복의 시 <자본주의의 약속>은 자본주의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서민들의 삶 속에 자본주의란 체제가 얼마나 깊숙이 침윤해 들어와 있는지 각종 상호와 브랜드(Brand)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잘 보여주고 있다. '브랜드 파워'니, '국가 브랜드'니 해서 요즘 어딜 가든 '브랜드'란 말을 듣는다. 위키백과에는 "브랜드(Brand)는 어떤 경제적인 생산자를 구별하는 지각된 이미지와 경험의 집합이며 보다 좁게는 어떤 상품이나 회사를 나타내는 상표, 표지이다. 숫자, 글자, 글자체, 간략화된 이미지인 로고, 색상, 구호를 포함한다. 브랜드는 특히 기업의 무형자산으로 소비자와 시장에서 그 기업을 나타내는 가치를 나태낸다. 마케팅, 광고, 홍보, 제품 디자인 등에 직접 사용되며, 문화나 경제에 있어 현대의 산업소비 사회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정의하고 있다.  

영화 <기사 윌리엄>에서는 평민 출신인 윌리엄이 기사들만 출전할 수 있는 마상 창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가짜 귀족 행세를 하다가 들통이 나가 영국 왕의 특별한 혜택으로 결국 귀족 작위를 받는다는 해피 엔딩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취업을 위한 필수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른바 '스펙(spec)'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인데, 윌리엄 역시 마상창시합에 출전하기 위한 기초 스펙을 채우기 위해 반드시 '귀족'이란 스펙을 채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기사 윌리엄>은 14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한 편의 경쾌한 팩션을 읽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여성이지만 갑옷 장인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케이트(로라 프레이저)'가 윌리엄을 위해 만들어준 갑옷에 '나이키'를 연상시키는 로고를 각인하는 장면 등이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상표(브랜드)'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어떤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인 가축에 낙인을 찍는 것이 브랜드의 시초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가축의 낙인은 생산품(products)이란 의미가 아니라 소유물(property)의 개념이므로 브랜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다시 말해 브랜드란 소유물이 아닌 생산품의 표징이다. 1266년 영국에서 상표권과 관련한 최초의 법률이 정해졌는데, 상표가 보호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와서의 일이다.  

오늘날까지 청바지의 대명사인 '리바이스(Levis)'는 오랫동안 경쟁업체들이 자사 제품을 모방하는 통에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청바지(blue jeans)'는 미국의 황금광 시대, 광부들의 모직 바지가 쉽게 닮는 것에 착안한 '레비 스트라우스'가 돛과 포장마차 텐트 천으로 만든 바지가 청바지의 원조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청바지는 처음 만들어졌던 청바지의 천이 아니라 '데님'이란 천을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입고 있는 청바지는 광부들이 입던 바지에 비해 부드럽고 잘 닳는다.  


어쨌거나 리바이스는 경쟁업체들의 모방을 따돌리기 위해 천을 데님으로 바꾸고, 인디고 염료를 이용하는 등 여러 궁리와 시도를 했지만 경쟁업체들은 리바이스를 따라했다. 결국 리바이스는 바지의 주머니에 구리 리벳을 박아 주머니를 고정시키는 기술에 특허를 냈고, 경쟁업체들은 더이상 리바이스의 기술을 흉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특허에는 시효가 있다. 리바이스의 구리 리벳 특허는 20세기가 되기 전에 이미 끝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청바지 회사도 생산량이나 매출실적에서 리바이스를 능가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특허에는 시효가 있지만 상표권에는 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브랜드(상표)가 지닌 진정한 힘은 시효 만료 없이 스스로가 만들어낸 브랜드의 가치, 파워에 따라 자본의 수익을 가능하게 만든다는데 있다. 토리 챠르토프스키가 지은
"세계500대 브랜드 사전"은 사실 매우 간단한 발상에서 출발한 책이다. 영문 알파벳에 따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500대 브랜드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말 그대로 브랜드 사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이란 필요한 사람의 실용성이란 측면에선 모든 책 가운데 으뜸이지만, 필요 없는 독자에게 이보다 지루한 책은 세상에 또 없는 법이다. 또 모름지기 사전이란 수록된 색인의 개수에 의해 좌우되는 법인데 세계에 브랜드가 어디 500개밖에 없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자면 이 책은 사전으로 읽기엔 색인이 너무 적고, 재미로 읽기엔 사전이라서 딱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세계 500대 브랜드 사전""현대인이 꼭 알아야 할 브랜드 이야기"란 부제에게 걸맞게 엄선된 500대 브랜드로 충실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에 비록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몇몇 브랜드들로서는 아쉽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수록된 브랜드들 중 어느 하나를 빼고 이 브랜드는 반드시 들어가줘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충실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사전이 지닌 서술의 딱딱함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데, 저자의 높은 공력 덕분인지 책을 모두 읽어내는데 하루의 시간도 필요치 않을 만큼 술술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다.  

A: Adidas에서 Z: Zippo까지 이 책은 그 브랜드와 그 브랜드의 상품들이 어째서 세계 500대 브랜드 안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네슬레(Nestle)'의 경우, 이 브랜드가 어떻게 해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1초당 약 3천 잔의 네스카페가 소비될 수 있는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유래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사전이라는 분량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낸다
(네슬레는 세계 최초로 인스탄트 커피를 상품화한 회사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브랜드들은 Apple, Boeing, Chiquita, Citibank, CNN, De Beers, Diners Club, Disney, Dunlop, Esso, Ford, Gatorade, Google, Hilton, IBM, Intel, Jeep, Kalaschnikow(음, 왜 끝이 'w'로 표기된 거지? 독일어 표기라 그런듯), Levi's 등이었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SAMSUNG, LG, HYUNDAI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굳이 이런 책(경영이나 마케팅)을 읽어야 할까?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특히, 현대 사회를 소비 자본주의 사회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나를 포함해서) 이런 부류의 책들을 눈 아래로 깔고 보거나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두 발을 땅에 딛고 세상을 보고자 한다면 최소한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이름(브랜드) 정도는 알고 나설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필자가 소개하고 있는 'Chiquita(치키타)' 브랜드의 첫 단락을 살펴보자. 

이 유명하고 악명 높은 바나나기업만큼 기업의 역사 내내 악명을 떨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기업은 중부 아메리카에서 수십 년 동안 국가 안의 국가로 군림해왔다. 유나이티드 프루츠 컴퍼니United Fruits Company의 경영자들은 기업의 정책에 따라서 대통령을 권좌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끌어내리곤 했다. 그렇게 호의적이지못한 '바나나공화국'이라는 말은 유나이티드 프루츠의 일 처리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중남미의 독재자들은 미국의 비호 아래 어떤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녹색의 교황'이라고 불렀던 이 전지전능한 바나나 회사를 손봐주려고 할 때에는 그들도 불안감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의 경영진 및 주주 중에는 앨런 덜레스(1953-1961년까지 CIA국장), 그의 형 존 포스터 덜레스(1953-1959년까지 미 국무장관) 같은 명망이 높은 일련의 고위 미국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본문 88-89쪽> 

부끄럽지만 나는 유나이티드 프루츠 컴퍼니와 바나나 공화국에 대해 몇 차례의 글을 쓴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키타'가 이 기업의 브랜드인 줄 몰랐다. 혹시 '코스트코'나 다른 수입식품 매장에 갔을 때 중남미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작은 소녀, 치키타를 발견하시거든 물품을 구매할 때 한 번 더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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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Salvador)
감독 : 올리버 스톤
출연 : 제임스 우즈
제작 : 1986 영국, 미국, 122분

올리버 스톤의 실질적 감독 데뷔작 <살바도르>

올리버 스톤의 감독 데뷔작은 1981년의 공포영화 <악마의 손(The Hand)>이었지만, 그를 할리우드의 이단아, 숨겨진 뇌관으로 만든 데뷔작은 <살바도르>였다.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작업들과 그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조망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자, 미국적이지 않은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현대사의 명암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감독은 아니었다. 그의 데뷔작인 <악마의 손>은 컬트적인 구성이 돋보이긴 했으나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나 인정  받는 작품이었고, 그는 일찍 감독 데뷔를 했으나 이후엔 감독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로 더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감독상을 받기 전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로 먼저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카페이스>, 마이클 치미노와 <이어 오브 드라곤> 등을 촬영하며 전형적인 장르영화에 충실한 각본을 썼다. 이 무렵 그리고 이후에 다소 약화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인종차별적인 묘사와 지나친 폭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한 때 한국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들에게 한국적 인권 상황을 생각하게 해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리버 스톤 자신도
“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국수주의자였으며 총을 숭배했다”며 당시 자신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새로운 감독 데뷔작(?)이 된 <살바도르>는 그런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종군 기자 리처드 보일(제임스 우즈)에 투사해내고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보일은 한때는 그나마 잘 나가던 카메라 기자였고, 영화 <킬링필드>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드니 쉔버그와 함께 캄보디아 취재 기자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냉소와 좌충우돌하는 기질 때문에 그를 고용해주는 통신사 하나 없이 시시껄렁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아내는 넌덜머리나는 결혼 생활을 끝장내버리고, 그는 밀린 아파트 월세에 쪼들리다 못해 통신사에 전화를 해대며 취재거리를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엘살바도르 - 바나나공화국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결국 리처드 보일은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내전이 한창인 엘살바도르에 간다. 이 영화는 엘살바도르 내전(1980-81년) 당시의 종군 기자였던 보일의 자서전적 기록을 재구성한 영화다. DVD에는 그의 실제 회고 일부가 담겨 있지만 아쉽게도 자막이 없다. 영화 초반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된 배경이 되는 엘살바도르는 어떤 나라인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엘살바도르는 1856년 독립하지만,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었던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꿈은 미국과 같은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염려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제국들의 방해, 내부적으로는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지주계급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종속을 강화해나간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약소국들을 일컬어 '
바나나공화국'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유나이티드 프루츠와 같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냉소 섞인 풍자이다. 미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소수 지주계급은 부를 축적하여 전국토의 56%를 14개 문벌에서 차지할 정도로 엘살바도르의 빈부 차는 극심했다. 결국 1932년 농민을 이끌고 파라분도 마르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농민군 3만 명의 참살로 끝나고 만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집단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 출신으로 과거 반란을 주모했던 혁명가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저항, 아니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 FMLN(Frente Farabundo Marti de Liberación Nacional)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 전선은 1980년 8월에 4개의 게릴라가 모여 결성한 무장 혁명 조직으로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익 쿠데타세력에 맞섰던 게릴라 저항조직이다. UN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엘살바도르 내전은 18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난 2009년 FMLN은 항쟁 20년만에 엘살바도르 대선에서 승리하여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전체에 커다란 자극을 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쿠바가 소모사 정권을 전복시키는 혁명에 성공했고, 베트남이 거대한 코끼리인 미국의 밑창에 구멍을 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란에서는 팔레비 정권이 강력한 비밀경찰과 미국의 지원을 물리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런 연이은 혁명의 성공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1970년대부터 엘살바도르 안에서도 군부독재에 대한 좌익 게릴라 조직의 저항이 시작된다. 그리고 1980년 분열되어 있던 게릴라 조직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로메로 대주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엘살바도르 내전은 더욱 극렬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FMLN은 1983년에 이르러서는 엘살바도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나지만 그 와중에 엘살바도르 군부는 '
죽음의 군단'이란 퇴역군인과 치안경찰 등 우익 민병대를 조직해 무수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기자 정신과 보여주
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국 언론

영화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FMLN의 결성과 로메로 주교의 암살, 새로운 람보 - 레이건의 등장이란 극적인 순간의 엘살바도르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우즈는 그의 연기사상 거의 최고의 연기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 자신이 리처드 보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했다. 영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의 소국 엘살바도르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배하는가를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대단하단 생각이 들만큼 잘 지적해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한때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하야시킬 만큼 대담한 비판정신과 공정성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의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교묘하게 자본의 검열을 받는가를 살필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군사적 패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내부의 전쟁에서 패한 것, 언론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 고도의 정치전, 심리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군사적인 패배로 생각지 않는 까닭은 미국이 세계 도처의 전쟁에 참전한 이래 거듭되는 그들만의 산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기실 이런 전통은 인디언 헤드 헌터식 산술법이란 지극히 미국적인 산술법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 헤드헌터들의 방식, 인디언 머리 가죽을 벗겨오면 가죽 당 얼마씩 달러를 지불하는 것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귀를 잘라 수집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국은 전사자의 시체 수로 전투의 승리를 가늠한다. 미군 전사자보다 많은 베트콩을 죽인 전투라면 그 전투는 승리한 것이고, 이런 식의 전투에서 미국은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보일은 엘살바도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베트남전 이후 새로운 보도 정책과 검열 방식을 채택한 미국에서는 취재는 가능할지 모르나 이를 보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사망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이제 미군을 수행하는 종군기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거나 에어컨디셔너에 의해 기온이 조절되는 안락한 브리핑 룸에서 미군 보도통제관이 전해주는 뉴스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매번 최고의 민간인 학살 수치를 갱신하는 미군의 전투 수행 방식을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과학적인 첨단 전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군은 그네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줌으로써 남북전쟁 당시 브로디의 사진처럼 전쟁은 일어났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 시신도 발견할 수 없는 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보일은 미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파티 석상에서 이런 기자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러나 보일 자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우익 지도자에게 밉보여 자신의 친구인 수녀일행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


엘살바도르와 광주, 1980년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988년에 보았다. 87년의 후폭풍을 겪고, 88올림픽을 앞둔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된 상징으로 코스타가브라스(Constantin Costa-Gavras)의 영화 <Z>와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를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80년 5.18 광주로부터 8년 뒤에 다시 보는 1980년 엘살바도르의 상황은 광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극장의 어두운 공간에서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광주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은 수녀들의 시체가 어둠 속에서, 흙 속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장면을 보며, 나는 욕지기를 느꼈고, 광주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둔덕 속에 묻혀있을 시신들이 떠올랐었다. 레이건의 등장이 전혀 다른 새로운 미국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 이래 지속되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1980년의 봄은 그런 미국의 저강도전쟁이란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소리 없는(?) 학살들이었다.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전쟁이고, 학살이었으며, 단지 그 나라 독재정권이 한 짓들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래 직접 개입하는 방식 대신 그들의 하수인을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리처드 보일은 엘살바도르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하여 살바도르를 빠져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달한 직후 국경감시대에 의해 그 여인은 다시 엘살바도르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녀를 실고 떠나는 국경감시대 차량을 향해 보일은 외친다.
“너희들은 되돌려 보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영화 역시 올리버 스톤의 작품들에 대해 쏟아지는 일반적인(인종 편견적이라거나, 미국 비판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미지의 미국, 인권국가, 자유로운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영화인들 혹은 감상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 우리는 이 영화보다 조금 더 나은 영화를 만들었는가? 만들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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