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2. 네팔과 카트만두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



▶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촬영한 카트만두 시내 모습


네팔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직도 눈앞에 히말라야와 카트만두가 아른거리던 12월 4일 아침, 우연치 않게 TV를 보게 되었는데 <퀴즈쇼 사총사>란 프로그램에 양준혁과 그의 친우 3명이 함께 출연해 퀴즈를 푸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양준혁을 비롯해 함께 야구중계를 진행하는 이용철 해설위원, 임용수 캐스터, 이광용 아나운서가 함께 출연했는데 이들 네 사람의 출연자가 한 팀을 이뤄 번갈아가며 출제되는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이었다. 이광용 아나운서의 차례에 나온 퀴즈 문제는 “다음에 나열된 각 나라의 수도를 해발고도가 높은 순서대로 열거하시오.”였다. 주어진 시간 내에 나열된 수도 이름을 해발고도가 높은 순서대로 호명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의 정답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약 3,600m)가 가장 높고, 그 뒤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약 2,600m),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약 1,800m),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약 1,600m),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약 1,300m)의 순서였다. 우리들의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광용 아나운서가 퀴즈를 푸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온갖 조합을 다 내놓았지만 시종일관 카트만두를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수도로 내세웠기 때문에 결국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참고로 서울은 평균 해발고도가 51m).


출제의 의도가 애초부터 출연자의 선입견을 노리고 낸 것이었겠지만 문제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던 셈이다. 아마도 그가 정답을 맞힐 수 없었던 것은 네팔이란 나라에 대한 우리의 무지(無知)와 선입견 때문일 텐데, 네팔하면 누구라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와 눈 덮인 히말라야를 떠올리게 되어 무조건 높고 춥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실제 네팔은 북위 27~30。 부근이라(한반도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위도가 북위 38。란 사실을 염두에 두자) 높은 고도로 올라가지 않는 한 이미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추위에 단련된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춥지 않다. 게다가 네팔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후로 해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6월~8월까지 3개월 동안이 우기(雨期)인데 이 기간엔 매우 더운 편이고,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가 건기(乾期)이다. 그런 탓에 네팔 트레킹은 대체로 건기에 집중되어 11월부터 이듬해 봄 3월까지가 네팔 관광의 성수기이다. 올해는 이상 기후 탓인지 11월 초순까지도 비가 내리는 등 일기가 좋지 못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네팔 기행을 시작하던 11월 하순에 들면서 다행히 날씨가 좋아졌다.


▶ 카트만두 국제공항의 모습이다. 네팔은 산업기반이 거의 없다시피해 자동차는 물론 대부분의 공산품들을 인도와 중국을 통해 들여오고 있다. 일본 차들도 많지만 현대, 기아차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붉은 색 차량은 현대자동차가 인도에서 생산하고 있는 i10이고, 그 뒤편으로 기아의 스포티지R이 보인다.


트레킹 성수기가 시작된 탓인지 때마침 카트만두 국제공항에 이착륙하려는 비행기들이 몰려 있어 연착하게 되었다. 센스 있는 기장의 특별한 배려였는지 몰라도 우리가 탄 비행기가 카트만두 북방 히말라야 부근까지 날아가 회항해준 덕분에 창가 좌석에 앉았던 승객들은 카트만두 북쪽에 위치한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여러 산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좌석이 한 가운데에 있어서 아쉽게도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말았다.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거나 트레킹에 나설 만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관광지 포카라에서 초경량항공기를 이용해 안나푸르나 일대를 돌아보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고, 마운틴 플라이트라고 해서 경비행기를 이용해 에베레스트, 로체 등지를 돌아보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원래 예정했던 시각보다 다소 늦게 공항에 도착했다. 1999년 처음으로 외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 목적지는 중국의 상해였다. 신공항이 푸둥(浦東)국제공항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 훙차오(虹橋)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처음 비행기에서 내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공항 주변의 풍경보다는 우선 중국 특유의 이국적인 냄새가 상해의 열기와 함께 훅하며 달려들어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하면 약간의 과장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중국은 그 냄새로 깊은 첫 인상을 남겼다. 네팔에 도착해서도 제일 먼저 이곳의 냄새는 어떨까 하는 긴장과 설렘을 품고 비행기 출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출구로 나오니 인천국제공항처럼 공항 라운지와 곧바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계단차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오며 네팔의 냄새를 맡아보니 기대했던 것과 달리 한국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냄새여서 나의 기대가 살짝 어긋남을 느꼈다. 카트만두의 매연이 장난 아니라고 하더니 석유난로에서 나는 매캐한 기름냄새가 느껴졌다. 공항버스가 공항 라운지까지 셔틀 운행하고 있었는데, 재미있었던 건 공항 라운지까지의 거리가 채 30m도 안 되어 보이는데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안전문제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행 중 한 명이 ‘그래도 네팔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찾아온 사람들을 처음부터 걸으라고 할 수 없어 그런가보다’고 농을 던져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상해에 도착해 한동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던 것은 한국과 달리 탁 트인 평야 지대라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 때문이었는데, 카트만두에서 받은 첫 인상은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네팔은 인도 쪽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는 한 어딜 가든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있는 산들을 볼 수 있는데 카트만두 역시 주변을 높고 낮은 ‘히말’ - 히말라야(Himalayas)란 말은 고대 산스크리트(梵語)에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가 결합되어 생긴 말로 본래 ‘눈의 집(거처)’란 뜻으로 네팔어로 히말은 ‘산’이라는 뜻이다 - 들이 둘러싼 분지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국의 대구광역시를 떠올리게 된다. 네팔 국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강남고속버스 터미널과 건축 스타일이 조금 비슷해 보였는데 공항 청사의 규모는 그보다 훨씬 작다. 굳이 네팔이 가난한 나라라는 선입견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1,700여 공항의 협의체인 국제공항협의회(ACI)가 제정한 ‘국제공항 명예의 전당’ 1호가 될 만큼 훌륭한 국제공항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어딜 가든 세계의 관문으로 인천국제공항이 주는 우쭐함을 살짝 즐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외국인으로 분리된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심사과정은 그리 까다롭게 보이진 않았지만 심사요원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심사대를 통과하는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행렬은 비교적 빠르게 통과하는데 다른 행렬은 그보다 조금 느리게 진행된다. 성질 급하기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 사람들인지라 일행 중에도 이쪽저쪽으로 눈치 바쁘게 줄을 바꿔 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차피 일행이 모두 통과해야만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말이다. 공항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터라 사진은 없지만 입국 심사요원들 중 남자들 몇몇은 네팔의 전통 모자 ‘토피’를 쓰고 있었다. ‘토피’는 원통형으로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초대 수상이 쓰고 있는 모자의 원형이라고도 하는데 내심 기념품으로 하나는 꼭 구입해야지 마음먹고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할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심사대를 통과한 뒤 입국장에서 미리 부쳤던 화물들을 찾아 공항 로비에서 앞으로의 일정을 이끌어줄 현지 가이드와 만나기 위해 잠시 대기하며 공항 근처를 잠시 배회했다. 공항 한 편에 중국에서 갓 넘어온 병아리들이 가득 담긴 박스가 포개져 쌓여있어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 우리를 안내해줄 현지 가이드와 만나 버스에 짐을 싣고 네팔에서의 첫 일정을 시작했다.


3개의 왕조가 번성했던 카트만두 분지
버스에 오르니 네팔 현지 가이드가 밝은 미소와 함께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 그의 이름은 아눕 쿠마르 구릉(Anup Kumar Gurung)이었는데 실제 나이(46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동안(童顔)이었다. 그는 한국에 1992년부터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로 6~7년간 일하면서 한국어를 익혔다고 하는데 중국에서 만났던 조선족 가이드들보다 우리말에 능숙하고, 무엇보다 사용하는 어휘가 다양하여 깜짝 놀랄 만큼 말주변이 좋아서 문화기행 내내 일행들에게 열렬한 인기를 누렸다. 여행은 만남이고, 만남은 결국 사람의 일이란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된다. 그는 한국 시간이 네팔 시간보다 3시간 15분가량 빠른데 손목시계를 우리가 흔히 보듯 12시를 기준으로 똑바로 세워서 보지 말고, 주먹을 앞으로 뻗어 보면 한국 시간을 네팔 시간에 별도로 맞추지 않고도 그대로 볼 수 있다며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 숴염부나트의 장난꾸러기 원숭이들


아눕의 이름에 붙은 구릉이란 말은 그의 부족을 뜻하는 말인데, 자신의 외모가 한국 사람들과 비슷한 것은 구릉족이 몽골계통의 부족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는 몽골어계 산지부족 중 하나인 라이 족 같은 경우엔 한국 사람들과 외모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고 했다(아마도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한국인과 구분되지 않는 외모 때문에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 노동자들은 그 덕을 보기도 하고, 슬픔을 겪기도 했다). 네팔에는 많은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크게 몽골계 산지부족(타망, 라이, 림부, 구릉, 마가르, 체반, 테칼리 등), 북인도계 저지대 부족(일명 ‘터라이’로 불리는 남부 저지대에 주로 살고 있는데 2~300년쯤 전부터 인도 갠지스 평원 지대에서 이주해온 인도인들), 네와르 부족(카트만두 분지에 도시문명을 세운 장본인들로 ‘네팔’이란 국명 자체가 카트만두 분지를 뜻하는 네와르어 ‘네팔’에서 유래), 티베트계 고지대 부족들이 혼재해 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 로비는 지방의 시외버스 터미널처럼 비좁은데 오가는 승객들로 부산하다. 공항 입구는 호객하려는 택시 기사들과 약속한 가이드를 만나려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인데 현지인들은 공항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 아마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공항 내부가 비좁아서 이들까지 들어와 손님을 맞는다면 그것도 참 어려운 일일 듯 싶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위장복 차림의 군인들이 FN-FAL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광경이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전투경찰 - 물론 한국의 전경처럼 시위 진압보다는 얼마 전까지 실제로 마오주의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였다 - 이란다.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체험을 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네팔 역시 우리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역사의 격변을 겪었다. 네팔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 크게 고대 릿처비 왕조(4~9세기 전후), 중세 말라 왕조(13~18세기), 그리고 근현대의 사허왕조(18세기~현대)로 구분되는데 이들 왕조들은 사방이 높은 산지인 네팔에서 카트만두는 1년 내내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고 비교적 넓은 농토가 있는 분지 지형이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어 네와르라는 도시문명을 이루며 번성할 수 있었다. 네팔 역사에 처음 기록된 릿처비 왕조 시대부터 이미 인도와 티베트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고, 문화적으로도 인도의 힌두문화와 티베트의 불교문화가 네팔 특유의 토착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네팔을 이루는 60여개 부족들이 함께 조화와 안정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 숴염부나트는 이른바 '원숭이 사원'이라 불릴 만큼 원숭이들이 많은데 때로 원숭이들의 짖궂은 장난 때문에 피해를 보는 관광객들도 있다. 



몽골이 아랍지역을 공략하자 밀려난 이슬람세력이 다시 인도를 압박하던 13세기 경 이슬람세력에게 밀려난 인도 힌두교 세력이 네팔로 대거 밀려들며 릿처비 왕조를 붕괴시키고 세운 것이 말라 왕조인데 이들 역시 토착문화와 힌두·불교문화의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네와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다.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말라 왕조는 1484년 카트만두, 랄리트푸르(파탄), 박타푸르의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카트만두의 역사유적지들 대부분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네팔 서부의 구르카(Gurkha) 지역 산기슭에 세워졌던 샤 왕조는 처음엔 작은 분파에 불과했지만 점차 세력을 확대해 18세기에는 카트만두 분지의 3왕조를 무너뜨리며 통일왕국을 세우게 된다. 네팔의 정복군주라 할 수 있는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1472년 구르카의 왕이 되기 전부터 카트만두 분지를 탐냈는데 1745년 처음 승리를 거두면서 카트만두의 북서쪽에 있는 누와코트를 점령했다. 그로부터 몇 차례의 패배와 승리가 이어졌지만 마침내 카트만두를 침공한지 23년만인 1768년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강한 국수주의자였던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자신의 왕국을 보호하고 교역에 있어 좀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외국인이나 선교사들이 네팔에 들어올 수 없도록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네팔은 1951년까지 쇄국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의 계승자들은 네팔 왕국을 점차 확장시켜 국경선이 카슈미르와 티베트 그리고 인도 동부의 시킴까지 뻗어나갔지만 1792년 티베트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토 확장이 중단되고 말았다. 구르카 왕국은 전통적으로 전쟁과 영토 확장의 대가로 군인이나 장교에게 토지를 하사했는데, 테라이(남부 저지대) 지역이 늘 우선 수위였다. 티베트와의 전쟁으로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이번에는 인도를 넘어 네팔로 밀려들어오는 서구 세력(영국 동인도 회사)과의 치열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1810년 네팔과 영국은 전쟁에 돌입했는데 처음엔 험준한 지리에 익숙치 못한 영국군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결국 네팔은 무기의 질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영국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샤 왕조는 점차 밀려드는 서구 세력(영국)에 맞서 1814년에서 1816년까지 네팔 전쟁, 이른바 구르카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네팔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던 구르카 병사들조차 패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네팔은 비록 영국에 의해 완전히 식민지화되는 수모는 피할 수 있었지만 영토를 할양하고 영국주재관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네팔의 행정·교육 등 많은 분야에서 영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샤 왕조와 구르카에 대해선 “존 버뱅크, 권태경 옮김, 『네팔(큐리어스 시리즈 46)』, 휘슬러, 2005, 28쪽 참조”.)


매연과 교통체증 그리고 민주공화국으로의 변신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의 첫 번째 일정은 카투만두 시내에서 서쪽 9시 방향으로 2㎞쯤 떨어져 있고,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대략 2000년 이상) 불교사원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였다. 카트만두 국제공항에서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길은 카트만두 시내를 관통해야 하는데 작은 분지에 몇 년간의 내전을 거치는 동안 급작스럽게 인구가 팽창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카트만두는 교통지옥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교통지옥이다. 몇 해 전 울릉도를 다녀오면서 산비탈 고갯길을 쌩쌩 내달리던 울릉도 버스 기사 아저씨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고난도 운전기술을 선보인다고 했었는데 네팔 카트만두의 운전기사들에 비하면 울릉도는 ‘새발의 워커’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우리가 탄 버스는 30인승으로 한국에서는 중형버스에 해당하는 크기인데 네팔 현지에서는 이런 버스 보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도로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버스는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네팔에 바다가 있는 곳은 유일하게 네팔 국기(國旗)뿐인 전형적인 내륙 국가이다. 네팔 국기는 특이하게도 두 개의 삼각형이 포개진 모양인데 이것은 고대 힌두교의 신들이 사용한 삼각형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가운데 그려진 달은 평화를 상징하고, 태양은 빛, 적색은 네팔, 청색 테두리는 바다와 하늘을 나타낸다. 이처럼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인 탓에 거의 대부분의 물류가 인도와 중국을 통해서 수입되고 있는데 석유는 거의 전량이 인도산이라고 한다. 가뜩이나 품질이 떨어지는 석유가 네팔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려는 중간 상인, 트럭 운전기사의 손을 타며 이물질이 섞여서 더욱 질이 낮아지게 되는데 그런 탓에 분지라 쉽게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카트만두 시내는 매연으로 찌들어 있었다. 그나마도 인도에 석유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간혹 석유 공급이 끊긴다고 한다. 네팔은 여전히 국제원조에 의지해 살아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카트만두를 히말라야 근방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던 우리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희뿌연 안개처럼 매연으로 가득한 거리는 우리나라의 5~60년대 거리 풍경과 비슷하다고 함께 간 어르신들이 말한다. 스와얌부나트 가는 길옆에 어떤 이들이 커다란 플랜카드를 내걸고 모여 있어서 저들이 뭐 하는 거냐고 현지가이드인 아눕 씨에게 물었더니 맞은편에 보이는 큰 건물은 네팔 국회의사당인데 그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거라고 설명한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현재 네팔은 오랜 왕정을 끝내고 새롭게 민주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본 네팔 국회의사당의 모습이다. 네팔 국회의사당은 중국에서 건립해주었는데 네팔의 도로들 중 상당수가 외국에서 무료로 만들어준 것들이기도 하다.


왕정체제에 반대한 민주화 시위는 1979년 전국 규모로 이어졌고, 1989년부터 반정부 시위가 빈발하면서 1990년 네팔의 왕정이 종식되고 입헌군주제가 수립되는 민주화가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더뎠고, 이에 불만을 품은 마오주의 반군들이 1996년부터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2001년엔 비렌드라 국왕 일가가 왕궁에서 무참히 살해되는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가넨드라 국왕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넨드라 국왕은 2002년 의회를 해산하고 2005년엔 군사쿠테타로 전권을 장악하며 과거로 회귀하려 들었다. 그러나 네팔 국민들과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며 결국 2008년 왕정이 폐지되면서 현재의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 되었다.


제헌의회선거가 실시되면서 2009년 마오주의 반군세력이 정권을 잡아 현재 네팔의 국회의원 601명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현재 네팔은 3개의 주요 정당을 포함해 21개의 정당이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는 중이다. 16차례의 선거 끝에 선출된 잘나라스 카날 총리가 6개월여 만에 물러나고 지난 8월 바타라이가 새 총리로 선출되었고, 11월초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수습단계에 들어섰지만 네팔의 정치적 미래는 카트만두의 뿌연 매연과 교통체증처럼 아직 예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만두를 비롯해 네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친절했으며 활기가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곳에 네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카트만두에는 집집마다 가장 높은 곳에 거룩하게 여기는 신상을 모셔두고 기도하는 작은 사원을 마련해 두고 있다. 사람들은 곳곳마다 신상을 세워놓고 붉은 염료와 주황색 꽃잎으로 장식해두고 있는데 이곳 네팔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을 신상 앞에서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참배의식으로 시작한다.


네팔의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 - 숴염부나트(Swoyambhu Nath)
얼마를 갔을까 어느덧 언덕으로 오르는 비좁은 골목길이 나타나 올라가다 보니 목적지인 스와얌부나트에 도달했다. 동남아 불교사찰들 중에는 ‘몽키 템플’이라 불릴 정도로 원숭이들이 많은 곳이 제법 있는데, 스와얌부나트 역시 원숭이들이 많아서 이른바 ‘원숭이 사원’이라 불린다. 인도의 간디는 ‘한 나라의 위대성과 그 도덕성은 동물을 다루는 태도로 판단될 수 있다’고 했는데 네팔 사람들은 특별히 동물을 집에 두고 기르면서 애완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길거리의 동물들을 보면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너무도 편안해 보였다. 아마도 힌두와 불교문화의 영향 때문일 텐데 환생을 믿는 사람들이다 보니 먹을 것이 있으면 동물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주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원숭이들을 비롯해 동물들이 사람을 자기들 친구쯤으로 여긴다. 스와얌부나트에 들어서기 전 현지 가이드 아눕은 사람들에게 사원에 들어서면 원숭이가 많은데 이곳 원숭이들은 남자들은 좀 무서워하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안경이나 모자를 주의하고, 특히 원숭이들이 보는 앞에서 먹을거리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빼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와얌부나트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마크 어빙 등이 지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도 당당히 수록되어 있는 세계 건축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탑(塔)이라고 하거나 탑파(塔婆)라고 하는 불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은 인도의 스투파에서 나온 말(梵語)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스와얌부나트는 거대한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가 특히 유명하다. 스와얌부나트로 오르는 365개의 계단 상층부에는 거대한 금강저(Dorjee)가 놓여있고, 그 맞은편에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가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고 하얗게 빛나고 있다. 이곳 사람들 중 불덕을 쌓고 싶은 이들은 시주를 통해 이 스투파에 하얀 칠을 하거나 장식을 덧대는데, 지름이 100m에 이르고, 높이가 36m로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인간의 마음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통찰의 영안(靈眼)’인 제3의 눈이 양미간(兩眉間)에 그려져 있다.



▶ 카트만두의 초록색 언덕에 피어난 하얀 연꽃. 숴염부나트



스와얌부나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이지만 민간에 유래되는 전설에 따르면 본래 이곳은 언덕이 아니라 호수였다고 한다. 호수 한 가운데 섬에 피어난 연꽃에 어느 날 대일여래(大日如來, Mahāvairocana, 摩訶毘盧遮那)가 나타나는 상서로운 일이 생기자 문수보살이 대일여래에게 바치는 스투파를 만든 것이 유래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본래 이 호수에 살던 거대한 검은 뱀의 악행에 시달리던 마을 주민들을 안타깝게 여긴 문수보살이 가지고 있던 검으로 초바르 산을 둘로 가르자 괴물은 호수와 함께 사라지고, 사람들이 살기 좋은 비옥한 카트만두 분지가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3만년 쯤 전에는 이곳이 호수였다고 하니 오래 전에 있었던 자연 현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신화와 전설이 된 모양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스투파와 경내를 참배할 때는 반드시 시계 방향(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오래된 전통으로 불교경전에 제자가 부처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존경심을 표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 동행한 현지가이드 아눕은 심장이 있는 왼쪽은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오른쪽은 신에게 내어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나름 낭만적인 해석을 내놓아 동행한 여성분들의 찬사를 받아내기도 했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경내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사원답게 다양한 건물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가되며 세워졌는데 사찰의 입구부터 각종 기념품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어 한 사람 당 200루피 쯤 한다는 입장료를 안 내고 싶은 사람은 스리슬쩍 섞여 들어가도 알아채지 못할 듯 싶다. 금강저가 놓인 자리 옆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날씨만 좋다면 네팔 시내가 잘 보일 듯 싶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날은 안개인지 매연인지 때문에 시내 전망은 보기 어려웠다. 처음엔 정신이 없어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건물들을 둘러보며 생각해보니 한국의 사찰에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大雄殿) 역할을 하는 것이 이곳의 스투파가 아닐까 싶었다. 13세기까지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성지였던 스와얌부나트이지만 15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가 후에 다시 건립되었다고 한다.


▶ 숴염부나트 스투파의 주변으로 마니(Mani)차가 있다. 내부에 경문을 인쇄한 종이를 넣을 수 있고 한 바퀴를 돌리면 그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믿는다. 휴대용으로 소형 마니차도 있다.



스와얌부나트를 내려오니 오랜 비행에 지친 탓인지 모두가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숙소인 하이야트 리젠시는 2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으니 금방 들어가 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과연 숙소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아마도 네팔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뜻을 알고 있으리.


▶ 숴염부나트의 유명한 대형 금강저 사이로 바라본 카트만두 시내 전경과 전망대에 선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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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KODEF 안보 총서 15 -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 | 임윤갑 (옮긴이) | 플래닛미디어(2009)

전쟁 종전일이 아닌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는 기묘한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동안 전쟁을 먼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왔던 오만의 결과일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했던 2010년 한 해 동안 전쟁의 기운이 검은 안개처럼 한반도에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학자로 연구에 전념해왔고,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의 편집자로 국제연합(UN)에서 정치국 국장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를 읽었다. 2009년엔 『전쟁의 탄생』 말고도,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다케나카 치하루가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도 출간되었는데, 전쟁 발발의 근본원인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은 이전(2007, 아카넷)에 나온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의 『인간 국가 전쟁(Man, the State and War)』과 함께 비교해가며 읽어볼 만하다.


전쟁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전쟁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 역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앞서 언급한 케네스 월츠는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 사회 또는 국가의 특성 그리고 국가체제의 구조적 특성을 연구함으로써 전쟁을 인간적 수준, 국가 ․ 사회적 수준 그리고 국제체제적 수준으로 분석’했다. 존 헤르츠(John Herz)는 국가 내부의 경쟁을 조율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국가 간의 경쟁을 조율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필요이상의 긴장이 고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고, 오르간스키(A. F. K. Organski)는 2위 국가가 1위 국가(헤게몬)로 전환하려는 가운데 전쟁 발발 가능성이 증대된다고 보았지만 전쟁의 원인은 인류 역사상 벌어진 전쟁의 숫자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 지금까지의 전통적 - 전쟁이 인간 ․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상황이나 인간 본성, 체제, 경제적 요인과 같은 근본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 - 인식을 대신하여 그것이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 중에서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리더)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란 국내 제목이 『Why Nations Go To War』라는 영어 원제보다 저자가 추구하려는 진실에 좀더 근접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라고 물을 때 ‘왜?’에 대한 답은 그때그때 경우에 달라지겠지만 ‘누가?’에 대한 답은 언제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집단적 범죄와 지도자의 결정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대학 국제외교학과의 존 G 스토신저 교수는 『전쟁의 탄생』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가지의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미국 중심의 주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판단하기 쉽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외부 요인 못지않게 해당 결정을 내린 지도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비춰지기도 쉽다. 게다가 ‘스토신저’라는 그의 성(姓)을 보면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처럼 그가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것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서장」에서 자신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지도자를 중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무렵 그의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살고 있었다. 스토신저의 계부는 히틀러 통치하의 오스트리아는 너무 위험하단 이유로 체코 프라하로 떠났지만 그마저도 점령당하자 어떻게 해서든 히틀러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중국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받아냈고, 소련을 통과해 일본까지 넘어가는 극적인 여행을 경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고 있던 스토신저 일가가 유럽의 집단적 광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판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로 평가받는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의 도움 덕분이었다.


존 G. 스토신저는 그와 같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범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둠의 시대에도 우리의 인간성을 재확인하면서 심지어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악마와 맞서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심연 속에서도 도덕적인 용기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항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개인적 체험은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 지닌 용기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신뢰하게 되는, 다시 말해 훌륭한 인간이 지도자가 된다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토신저는 정치나 경제적인 요인들이 전쟁의 ‘징후’를 몰고 올 수는 있어도 전쟁 수행의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지도자’들이 전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벌어지는 요인에 주목한다. 이 부분이 존 G. 스토신저를 이전의 다른 학자들과 구분되게 만드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적 엄밀성을 약화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에 이르기 까지

존 G. 스토신저는 전쟁 발발 요인을 지도자에게 주안점을 두어 분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만 묻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주요 전쟁의 배경과 개별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와 같은 상황들 속에서 지도자들이 전쟁을 결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피고 다시 이를 개념화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는 1장 「철의 주사위」 편에서 그는 장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개전 선언 이전까지도 이 전쟁이 수년간에 걸쳐 장기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하나가 당시 독일의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였음을 지목한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섣부르게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러시아 황제가 섣부르게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이런 기대와 달리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이 충분히 강력하고 길게 이어지면, 그 인식은 결국 사실이 된다.

위기상황에서 힘에 대한 인식은 특히 중요하다. 초기 단계에서 지도자들은 자국의 힘은 과장하고 적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빌헬름의 서약은 러시아 군사력에 대한 근본적인 경멸과 러시아 지도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신뢰했다는 방증이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해서 실제보다 허약하고 성가신 존재로 인식하고 멸시했다. <본문 63-64쪽>


이와 같은 인식을 토대로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이나 의지를 낮게 평가하면서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는 “우리는 지금 물러설 수 없다”라고 호언하는 것이 세르비아의 애국자들에게는 적나라한 침략으로 비출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러시아 지도부에겐 그와 같은 공언들이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전쟁 이외에 다른 대안을 강구할 수 없도록 몰아가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계획을 입안한 군부의 고위 인사들 역시 평화를 유지하기 이전에 자아의 보존을 좀더 중시하는 경향, 다시 말해 군부와 군부의 이해관계에 귀속되어 있는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피할 수 없게 될 막대한 희생에 대해 침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눈을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


2장 「바르바로사 - 히틀러의 소련 공격」은 가장 의심이 많고 교활하며 사악한 인간인 스탈린이 가장 비이성적인 히틀러의 이성적 행동에 대해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나쁜 악마가 같은 놈은 어쩌다 더 나쁜 악마에게 속았을까? 쯤 되는 물음을 던진다. 게다가 이 악마는 처음부터 슬라브족을 노예로 만들고 소련을 그들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포함시키겠노라 공언까지 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잇따라 전해지는 독일의 침공 예보(침공 직전 1년 동안 84번의 경고가 소련에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붉은 군대’ 장교의 10분의 1을 숙청했고,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예하부대 지휘관의 5분의 1이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존 G. 스토신저는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앞두고 소련 전투력의 중추를 꺾어버리는 숙청을 단행한 까닭으로 스탈린 자신이 소련 내부에서 차지해야 하는 권력의 안전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국가의 안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39년 맺은 독 ․ 소 조약은 소련에게 독소처럼 작용했지만 침공 직후였던 1940년 7월 스탈린은 소련 인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첫 방송에서조차 독 ․ 소 조약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전쟁의 행운이 그를 배반하고 소련으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에도 몇 번이고 군대를 증원했다. 반면 스탈린은 그의 초기 실책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본문 104쪽>


완전히 새로운 전쟁, 완전한 승리에 대한 유혹 - 한국전쟁

『전쟁의 탄생』은 여러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은 3장 「승리의 유혹 - 한국전쟁」편이다. 2009년에 번역된 『전쟁의 탄생』은 열 번째 판으로 저자인 존 G. 스토신저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롭게 추가된 사실들을 책의 내용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 역시 전쟁 발발 이후 현재의 핵 위기 상황까지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 중 하나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손꼽는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이 38선에 접근했을 때 그것을 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유엔군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무력 침략은 38선을 파괴한 행위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침략자에 대한 ‘맹추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유엔군의 임무가 단순히 ‘무력침략을 격퇴’하는 데 있다면 북한 침략 이전에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던 곳으로 유엔군을 진격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느냐의 문제를 누가 결정할 것이며 만일 그렇다면 그 목적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도 제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북경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K.M.Panikkar)는 “만일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보냈다. <본문 124쪽>


9월 하순에 개최된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의지에 따라 38선을 넘어 한반도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라고 결의한다. 10월 1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고, 미군도 10월 7일 북진을 시작했다. 10월 2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가, 10월 10일엔 중국의 외무장관 주은래 역시 “중국은 이 침략전쟁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미국과 맥아더 장군은 이것을 중국 특유의 허풍으로 받아들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만나 중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데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가능성을 희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 편으론 북진을 승인하면서도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면서 중국 달래기에 나섰다. 맥아더는 중국을 팽창욕구는 가득하지만 실제로 그럴 능력은 없는 국가로 평가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해서도 경멸에 가까울 만큼 낮게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의 중국 인민해방군을 1940년대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판단을 신뢰했고, 그의 판단을 신뢰한 결과는 매우 혹독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개입은 국제문제 인식의 다양함을 실제로 보여준 좋은 예였다. 이러한 인식은 실제상황을 인식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일단 상황이 명확하게 평가되면 특정 대안은 배제된다. 일반적으로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과는 화해가 어렵기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한국에 개입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힘을 무시할 정도라고 생각할 경우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일종의 허풍으로 치부했다. 자신과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상대방과는 좀처럼 타협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국과 중국은 재앙이 될 분쟁의 문턱에서조차 상대방의 국제적 역할을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한반도를 또 다른 18개월 동안 파괴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본문 133쪽>


트루먼이나 맥아더가 처음부터 북한 점령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켰고,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의지를 미국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유엔은 중재자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 이후 남북한 혹은 양대 진영 사이에서 국제적 중재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 결과 전쟁은 1950년 10월 1일로부터 2년 반 동안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미군 전사자 3만 4천 명, 남북한 130만 명, 중국이 대략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채 휴전했다.


남북한은 현재까지 어떤 심판자나 중재자, 완충 없이 완전무장한 채 60년간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김일성은 1994년 사망했고,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해 1994년 제네바에서 북한이 핵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2개의 경수로와 핵 발전 원자로 건설의 대가로 핵무기 개발계획을 폐기할 것을 약속하는 북 ․ 미간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면서 선제전쟁 전략에 대한 독트린을 발표한다. 예방전쟁, 선제공격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시 독트린의 발표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 상황 등을 지켜보며 북한은 이것을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선전포고)으로 인식했고, 2003년 NPT(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2003년 4월 북한은 NPT조약 체결 32년 만에 처음으로 탈퇴한 국가가 되었다.


2003년 6월 북한과의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점진적으로 북한과 한국 사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멀리 병력을 재배치하는 데 합의했다. 1,7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한국의 수도 서울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포병의 사거리 내에 위치했었다. 미국과 한국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군사력의 재배치는 양측 100만 명 이상의 군사력으로 항상 긴장을 유지해온 전쟁의 위험 상황을 다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달랐
다. 이들은 거대한 규모의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핵개발을 선택했다. <본문 137쪽>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가리켜 ‘최악의 독재자’라고 지칭하며 그 같은 최악의 독재자가 다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무기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이 핵무기를 갖도록 부추긴 결과만 빚고 말았다. 미국의 샘 넌(Sam Nunn) 전 상원의원은 “우리는 악의 축의 잘못된 끝에서 출발했다”며 부시의 악의 축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상대 지도자(국가)의 의지에 대한 오판과 자국에 대한 오만

20세기에 가장 길었던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투쟁한 기간은 장장 30년에 이른다. 한 세대가 흐르고 미국의 대통령 5명이 바뀌는 동안 미국은 상대가 지닌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 자신들과 겨루고 있는 베트남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고, 심지어 경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물론 미국 자신은 아시아 전반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베트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특히 존슨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수없이 많은 이념적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전쟁이 지닌 기본적 특성이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이념적 전쟁이기 보다는 식민주의에 대항한 전쟁,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혁명전쟁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거의 언제나 대부분의 전투에서 상대방보다 적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기꺼이 전투에 임했고, 죽음을 불사했다.


존슨과 미국은 호치민과 베트남을 마오쩌둥과 중국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로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옛 볼셰비키 당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에서 호치민은 마오쩌둥보다 앞선 원로 공산주의자였다.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하기도 했고, 우리에겐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로 잘 알려진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같은 이는 호치민을 가리켜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가진 완전한 베트남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언론은 그를 경멸적으로 묘사하여 “모스크바에서 기술을 익힌 염소수염의 선동가”라 불렀다.


오랫동안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승리를 거의 쟁취할 뻔했던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며 전쟁에 끼어들었던 미국은 정작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진구렁에서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이들이 1973년 파리에서 확인한 것은 이미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결정되었던 상태로 고스란히 되돌아갔음을 인정하는 일 뿐이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투하된 폭탄의 80배나 되며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배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폭탄들은 폭 25~50피트에 깊이가 5~20피트나 되는 폭탄 구덩이 2,000만 개를 남긴 것과 같았다. 폭격 후 베트남의 대부분은 달의 표면처럼 보였고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도 전쟁이 끝난 후 후유증이 심했다. 미국의 지도부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었으며 대학은 붕괴되었고 경제는 전시 통화팽창으로 부풀어 있었다. 5만 8,000명의 전사한 미군을 베트남에서 싣고 온 금속관이 전쟁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의미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산당의 초기 승리와 이 전쟁의 고뇌 중 어느 쪽이 희생을 덜 치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베트남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명의 미군도 인도차이나에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 길이 어느 쪽으로 인도되었을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베트남은 훨씬 일찍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의 형태는 모스크바와 베이징과는 다른 아마도 독립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민족주의 성격을 띤 티토주의적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산화의 연기의 대가로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의 생명과 300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1,500억 달러의 가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본문 185-186쪽>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었던 딘 러스크는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끝난 베트남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미국인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역사와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 - 유고내전

발칸반도 지역은 오랫동안 유럽의 화약고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에 값하듯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총성도, 20세기의 끝을 알리는 유고 내전도 모두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키신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세 종교적 집단 중 어느 것도 다른 집단의 지배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때때로 터키나 오스트리아 또는 공산세력과 같은 외부세력에는 굴종했으나 이들 상호간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1941년 나치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기간 동안 이 3개 민족은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 못지않게 서로에 대한 증오 역시 맹렬하게 불태웠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악명 높은 ‘우스타쉬(Ustashes)'를 만들어 비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체트니크(Chetniks)'를 만들어 비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들 모두와 투쟁하며 통일된 유고슬라비아를 세운 것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이었던 열쇠 수리공 출신의 빨치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는 대외적으로 ’형제의 단결‘이라는 슬로건 속에 통합되어 있는 듯 보였다.


티토 사후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내전, 처음엔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후 보스니아에 이르기까지, 인종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서로 혼인하고 바로 이웃에 살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로에게 총질을 하며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전쟁이었다. 물론 최악의 범죄자는 세르비아였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유일한 가해자도, 그렇다고 유일한 악도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그들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는, 그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과거에만 가 있었으며 미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학살의 주범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대해 존 G. 스토신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죽음과 배반의 그늘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자살했다. 그는 아내 미라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위한 피난처를 찾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밀로셰비치의 아내 미라는 유고슬라비아를 지배했던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조카이자 수양딸이었다.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라(미랴나)를 입양한다. 그녀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하는데, 이들에게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세르비아의 역사는 그들이 수호해야할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되찾아야 할 세르비아 역사의 성지는 코소보였다. 1389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진격에 맞서 코소보에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50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유고 국민이 아니라 과거의 원수들이었다.


실제로 그 장소에서 그 같은 전투가 벌어졌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민족과 종교 사이의 증오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터진 총성과 1994년 사라예보의 총성은 전혀 달랐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사건은 유럽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방아쇠가 되었지만 1994년엔 세계 열강 중 누구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죽임에 대해 개입하길 꺼려했다. 어느 강대국도 이 지역에 개입해야 할 이해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강대국들이 수수방관하는 동안 인종적, 종교적 증오에 휩싸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는 서로에 대한 증오를 맘껏 불태웠다. 결국 1999년 미국과 나토가 개입하면서 잔인한 학살극은 막을 내렸다. 영국의 역사학자 노엘 맬컴은 세르비아 측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1389년의 코소보전투에 대한 신화는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한 민족이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화는 그 자체의 진위 여부로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노엘 맬컴의 주장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기든 가틀립(Gidon Gottlieb)은 “민족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오직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의 공유뿐 아니라 역사, 잘못 저지른 실수, 희생을 포함해 정치술의 냉혹한 고려사항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을 움직인 상징이나 전설적인 요소에도 근거를 둔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1994년의 대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전쟁 -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

이외에도 존 G. 스토신저는 6장 「신의 전쟁」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현재까지 치르고 있는 오랜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7장 「성지에서의 60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그리고 8장 「후세인의 전쟁 - 이라크의 이란,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쟁」을 다루고 10장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 - 미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21세기 초엽 9.11테러 이후 부시의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의 양상과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저자는 이 모든 전쟁의 양태를 두루 살피는 와중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듯 서로 다른 전쟁이 결국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이며 전쟁은 결코 인간의 천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전쟁은 회피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는 무엇보다 전쟁은 지도자의 성격,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잘못된 지각’이 사실상 ‘전쟁의 시작과 평화 유지’라는 정책의 향배를 결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해 존 G. 스토신저 교수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역사상 벌어졌던 전쟁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전쟁이 사실은 하부 구조,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서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 의해 벌어진다는 주장을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남북한 경제협력, 특히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이 안전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데, 여기엔 한 가지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물론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전쟁이 양측의 이해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은 전쟁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좋은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양 측의 잘못된 오해와 인식 혹은 증오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성공단이 아무리 잘 돌아가고, 경제적으로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하더라도 증오의 물길이 파놓은 심연이 너무 깊다면 전쟁의 위기는 상존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존 G. 스토신저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을 통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길 바란다.


마지막 하나의 경고는 “우리가 들어왔던 어떤 전쟁이 과연 ‘불가피’했던 것인가?”였다. 이 단어는 내가 연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철의 주사위’를 다루는 순간부터 수없이 떠오른 질문이었다. 십자군들은 특히 그러한 주장을 좋아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역사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외교정책을 결정한다. 이들은 지혜롭게 혹은 어리석게 정책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책을 만든다. 전쟁 이후에 역사가들은 종종 전쟁을 뒤돌아보고 운명이나 불가피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결정주의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은유에 불과하가다. 결국 우리의 생에는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이 있을 뿐이다. <본문 537쪽>


다시 말해 그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란 없으며, 평화란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조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선택은 잘못된 인식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선택되는 것이며 전쟁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한 사람은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랜 고통 속에서 전쟁의 맨 얼굴을 직접 대면한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이 지닌 가장 큰 딜레마는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큰 스승이 곧 전쟁 그 자체라는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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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 김성진/ 황소자리(2004)


세계의 분쟁지역에 대한 괜찮은 브리핑

"야만의 시대 -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에는 칭찬할 점과 비판할 점이 공존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의 제목 "야만의 시대"는 좀 손쉽게 붙은 제목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이 분명 전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야만의 시대"라는 거창한 제목에 부응할 만한 심도를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부제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이 제목에 좀 더 어울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개 "세계의 분쟁"이라고 하지 않나? 세계 속 분쟁이라고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것이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들었던 첫번째 의문이다. 저자인 김성진, 동덕여대 교수인 그는 연합통신 외신부 기자를 거쳐 시사저널, 중앙일보의 외교전문기자를 했다고 하는데, 약력 소개와는 달리 글에서는 현장 체험이 별로 묻어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지만 작년(2004년)에 읽었던 전선기자 정문태의 "전쟁취재 16년의 기록(한겨레신문사)"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먼저 이 책의 장점 몇 가지를 이야기해본다면, 동서냉전 해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여러 분쟁들에 대한 비교적 최신 브리핑(briefing)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리핑이란 건 간결하게 요약된 보고를 의미하는 것처럼 이 책은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분쟁들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동서냉전 시기엔 이데올로기에 묻혀버렸던 민족분쟁들을 다룬다. 우선 최근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우리들에게도 익숙해진 쿠르드족, 러시아의 골칫거리인 체첸, 중국의 두 얼굴을 보여주는 티베트, 유럽의 영원한 불씨인 발칸, 현재까지 계속되는 열전의 현장 이라크, 마약왕국의 대명사 콜롬비아, 동서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오랜 분쟁의 현장 북아일랜드, 그리고 전세계의 화약고 팔레스타인이다.

 

기획은 돋보이지만 어딘가 미진한...

이 지역들은 종종 외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뉴스들은 있으나 우리들 자신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생각에서 혹은 외신 자체도 그다지 집중 보도를 하지 않는 탓에 쉽게 알기 어려운 지역들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몇몇 사실들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많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황소자리" 출판사는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와 같이 과거에 출판(아마도 정신세계사에서 나왔던가)되었던 책을 재출간하면서 최근에 등장한 출판사다. 그러고보니 류비셰프를 포함해, "위대한 남자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이 책까지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3권 읽었다. 사실 모리시타 겐지의 "위대한 남자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를 읽으며 들었던 아쉬움이 이 책에도 거의 고스란히 적용된다. 모리시타 겐지의 책도 적당히 재미있었고, 적당히 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뭔가 아쉽고 심도가 얕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 역시 그렇다.

 

즉, 이 분야에 대해 거의 처음 접하게 되는 일반인에겐 좋을 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들, 이 분야에 관심이 좀 있는 이들이 읽기엔 좀 엷은 향과 맛이다. 그런 점은 신생 출판사로서 상업적인 고려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왜 느닷없이 그런 출판사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 중 하나가 출판사의 기획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의 프롤로그에 보면 2003년 열린사이버대학교에 개설했던 강좌를 들은 수강생 중 한 명이 출판기획자로 변신한 뒤 출판을 제의해서 책으로 엮게 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 중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대개, 출판에서 편집자가 큰 역할을 하며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든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런 류의 책이다. 시집이나 소설의 경우엔 창작자의 몫이 편집자보다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편집자가 관여할 몫이 그만큼 적은 편인데 비해 이런 류의 책은 편집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런 편집자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여러 곳에 삽입되어 있는 각각의 개념 설명과 뒷부분에 부록으로 포함된 분쟁일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부분들은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로 읽는 분쟁? 분쟁으로 읽는 영화?

하룻밤 침대에 누워 재미있게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의 몇몇 단점들이 걸렸다. 우선 국제정치를 전공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파워게임의 측면에서 읽으려는 측면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제법 도드라져 보인다. 거기에 기자 출신 필자들의 문장이 지니는 건조한 문체가 책의 재미를 좀 덜하게 만든다. 물론 문장 자체야 흠잡을 데 없지만 재미는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영화로 읽는" 이라고 하는 이 책의 컨셉 부분인데, 분쟁이라는 국제정치,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야 할 부분을 영화라는 소재를 채용해 드러내보인다는 컨셉 자체야 이를 데 없이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vs. 분쟁이라고 보았을 때 사실상 영화는 분쟁에 종속되어 있는 편이다. 물론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영화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고, 대개의 독자들 또한 그러하리란 점을 고려해보면 이 양자 사이에서 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분쟁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라면 그다지 재미없는 책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발칸분쟁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영화 "세이비어" (국내에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화 자체는 무척 잘 만들어졌다)는 영화의 내용만 따라가더라도 발칸분쟁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이 책에선 그 줄거리가 과감하게 생략되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비디오나 DVD로 이 영화를 따로 구해보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분쟁은 이해해도 책 내용은 실감나지 않게 된다. 책의 완성도를 상대적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이 세계의 분쟁을 많이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프리카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점 역시 지적해둘 만하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들이 이 책의 커다란 흠결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책의 완성도란 점에서 다소 미진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야만의 시대를 계획한 배후는 누구인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저자의 시각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 "야만의 시대"라 하는 거창한 주제에 걸맞지 않는, 혹은 프롤로그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안이해보이거나 분쟁의 원인을 분석하는 부분에서 일면적이거나 미국의 책임을 분명히 언급해야 하는 부분이 누락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괄호 안의 글은 내가 딴지를 거는 부분들이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어째서 점령이란 단어를 썼을까? 침공과 점령은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보인다. )은 미국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해온 시리아와 이란에게 언제라도 초라한 후세인의 몰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암시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세계 2위의 산유국인 이라크를 점령하는 것은 자원민족주의의 관점에서도 정말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로 이어지는 새로운 친미벨트의 형성은 21세기의 새로운 강국 중국을 압박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했음 직하다.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매달리다보니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해 나갔다. 미군에 잡힌 이라크 포로들은 이슬람교도로서는(그건 비단 이슬람교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성적 학대는 종교와 관련없이 그 누구에게나 죽음보다 더한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성적 학대를 감내해야 했다. 세계의 경찰국가로, 매년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감시해 발표하는(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영화 "착한 쿠르드 나쁜 쿠르드"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인권은 그들이 친미적이냐, 반미적이냐, 미국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가로 구분될 뿐인 인권이다) 인권의 최후 보루로 자임해온 국가의 군대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자행한 포로 학대여서 그 충격은 더하다(솔직히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람이 충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리어 충격이다.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미국은 늘 그래왔지 않나?). ...<중략>.... 이 시대 최고의 문명국가임을 자임해온 미국이 이럴진대 과연 인류의 역사가 정말 발전해온 것인지에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본문 10-11쪽>

 

세계의 분쟁지역을 살펴보면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이 미국과 과거 유럽의 식민지배 혹은 그들의 식민지배 질서의 영향이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발칸 지역의 분쟁의 한 원인은 물론 대세르비아주의임에 틀림없지만 그 안엔 가까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나치를 등에 업은 민족주의자들인 우스타시의 대세르비아 학살, 인종청소(이 책에 따르면 35만명을 학살)가 보다 자세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덧붙여져서 티토의 사망 이후 서유럽이 종교적, 인종적으로 자신들에게 가까운 몇몇 나라들의 독립을 부추겨 유고의 해체를 촉진한 사실도 언급되어야 하는데 이 책엔 그런 부분은 누락되었다.

 

판쉬르의 사자, 마수드의 암살 배후가 오사마 빈 라덴
- 그런데 왜 미국이 좋아하는 거지...



마찬가지로 판쉬르의 사자. 마수드의 암살과 그 배후에 대해 저자는 철저하게 미국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수드를 직접 인터뷰한 바 있는 정문태는 "전쟁취재 16년의 기록"에서 마수드의 암살 배후에 미국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요지의 글을 쓴바 있는데, 이 책의 저자 김성진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일부의 주장인 오사마 빈 라덴과 탈리반 암살설을 거의 정설로 취급한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불특정다수를 향한 목적없는 살해를 제외하고는 대개 사건의 배후를 지목할 때, 그가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얻는 집단, 개인이 누구인가를 추측하는 것에서 초등수사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물론 마수드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는 구소련의 침공 당시부터 수도 없이 있었던 일이며, 마수드의 명성만큼이나 그의 죽음을 원하는 집단도 많았다. 그런 이유에서 마수드 자신도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안과 검색에 철저함을 기했다.

 

탈리반도 그들과 대립하는 북부동맹의 마수드가 눈엣가시였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구태여 그의 죽음을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할 까닭도 없다. 그만큼 오랜 적이었으니까 부인할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수드 암살에 책임이 없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마수드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정문태는 그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미국이라는 것이다. 마수드의 암살은 탈리반이 축출된 후 가장 큰 정치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가장 확실한 지도자의 제거를 의미한다. 이 땅의 해방 정국에서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이 비명에 간 것, 그들의 암살 배후에 누가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추측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너무나 손쉽게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로 지목한다. 그것은 바미안 석굴의 파괴 과정에서 정문태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 탈리반 지도자인 물라 오마르는 오랫동안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을 사용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언론들은 이 자금이 오사마 빈 라덴의 지원이라고 손쉽게 규정하지만 오랫동안 탈리반을 무자헤딘으로 칭송하며 이들에게 자금을 댄 것이 미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바미안 석굴의 파괴과정 역시 정문태는 탈리반 지도자인 오마르는 오랫동안 바미안 석불을 볼모 삼아 미국과의 거래를 원했으나 결국 이 과정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명분 쌓기를 위해 바미안 석불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책 "야만의 시대"는 분명 우리들에게 세계 전역의 무수한 분쟁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명확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별 셋 이상을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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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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