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 후지메 유키 지음 | 김경자 | 윤경원 옮김 | 삼인(2004)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싼 논쟁과 성의 역사학

- 새로운 혹은 해묵은 논쟁의 관점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부제가 충분히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신체를 국가가 어떻게 관리(통제)하여 왔는가? 그것은 근대의 틀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고, 억압되어 왔는가를 마르크스적인 관점과 페미니즘의 관점을 이용해 연구고찰한 결과물이다.


후지메 유키는 근대공창제는 군대, 군사주의, 근대국민국가 체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도는 군대 위안과 성병 관리를 기축으로 한 국가관리 체계이며, 근대국가 건설, 특히 강력한 군대 건설의 이익과 결합해 탄생한다. 성병 검진을 통해 질병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여성을 창부로 등록시킨 이 제도의 목적은 성병에서 남성, 특히 장병을 보호하는 것이다. 캐서린H.S.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드러난 사례(1965년)를 요약해보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병사들의 약 84%는 성매매를 경험했으며, 성매매의 주요원인은 동료의 압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성매매와 성병을 관리하는 것은 전쟁과 전쟁 준비에 저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관리할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입장에서 살폈을 때 이런 제도는 거리의 여성들에 대한 시민권의 전적인 폐지를 국가가 공인하는 최초의 정책을 의미했다. 전쟁 기간 동안 병사들이 걸리는 가장 많은 질병 1위는 성병이고, 2위가 감기였다고 한다." 근대국민국가의 거의 모든 성매매 관련 법안은 남성고객과 성매매 여성의 처벌에 차등을 두었고, 알선업자와 포주는 체포되지도 않는 법률이었다.


또한 저자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본국과 식민지에 공창제를 도입하는 과정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산업혁명의 유럽 대륙 및 미국으로의 파급, 선진자본주의 각국에 의한 식민지 분할, 상품경제의 침투에 따른 사회변동 등을 배경으로 전통 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와 해외로 미증유의 인구이동이 발생하고 무산계급 여성들에게 부단히 성매매 여성화의 압력이 가해지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결국 부르주아 사회가 사회제도로서 성매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버나드 쇼는 성매매를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도록 요구하면서 "실제로 도덕성의 근저에는 경제문제가 있다. 성매매는 여성의 타락이나 남성의 방종이 아니라 여성들의 저임금, 과소평가, 과중 노동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이 아주 가난한 여성들에게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성매매에 매달리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성매매 여성이 인신매매 등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으로서의 성매매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후지메 유키는 성매매금지운동에 대해 여성주의 진영이 "여성 전체가 억압당하면서도 특히 노동자계급 여성들이 성매매 여성화되는 강한 압력 속에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성매매 여성의 오명을 쓴 동성(同性)이며 함께 연대해서 싸워야 할 동등한 자매"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폐창운동의 헤게모니를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 잡고, 공창제(성매매) 폐지로 나아가는 것은 "해방을 지향한 것이 억압을 입법화"하는 것이며, "당연히 성매매 여성들과 연대해야 할 이들이 성매매 여성을 폭력에 강제된 희생자, 저능이기 때문에 타락한 자로 보고 구제, 교화, 배척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을 경계하도록 요구한다. 성매매 여성을 피해여성으로만 규정하는 것을 "계급을 뛰어넘어 자매로 이어줄 끈"을 끊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를 쓴 원미혜 선생의 "나는 성을 팔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제기되는 '왜 굳이 성을 파는가?'라는 질문과 성을 팔고 있는 세계에서의 '왜 팔면 안되는가?'의 반문 사이에서 만들어진 좁고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어느 세계에서도 시원스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며 반복되고 있다.


근대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구미국가들의 사례들과 비교하며 성과 생식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가지 점에서 논쟁적일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이 일본의 사례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논쟁적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2005년 1월 5일. 올해 들어 첫 수요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한일 양국의 문제가 어째서 현재진행형의 논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저자인 후지메 유키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1990년대에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전개한 저의를 요구하는 운동은,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관점을 결여한 '일본 여성사'가 얼마나 일면적이며 오만한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있는가 하는 점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군 '노예'제가, 1930년대에 시작된 전쟁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근대의 군국주의.식민지주의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 국가폭력 제도, 즉 공창제가 가장 흉폭한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고 말한다.


둘째로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계급적인 관점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의 몸과 근대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를 공창제, 낙태죄 체제, 산아조절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계급적 관점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두루 이용하고 있는데,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주로 계급적 관점을 동원해 여성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이다. 고백하건대 나자신은 비록 여성주의적 자세 일부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후지메 유키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 - 공창제, 낙태를 포함한 산아조절 문제 등 - 은 계급적 관점만으로는 해석하기 힘든,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란 지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지메 유키의 비판에 대해 대체로 동감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만 여성주의적 관점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그 지향점을 지나치게 계급적 관점에만 치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여성주의적 관점은 방법론적인 부분에서만 차용하고, 그 지향점에선 소외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부분은 논쟁으로 남을 만하다고 느꼈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1차 페미니즘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구미 사회에서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교육의 확대, 취업기회의 확대, 민법 개정,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같은 여성의 시민적 권리를 추구하며 국제적으로 폭넓게 전개"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만, "제1차 페미니즘에서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도전한 것은 소수파"였으며, "여성을 존경할 만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이원화한 점, 근본적으로 이성애 중심이었음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이런 부분은 긍정할 수 있었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성과 생식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제안했는데, 페미니즘이 드디어 권력의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 제2차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성과 생식의 문제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 정치학의 문제로 삼아 "개인적인 것은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던 남녀관계, 성애, 출산, 육아, 산아조절 등의 문제에 정치성을 부여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였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선진자본주의의 국가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중산층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비백인 여성과 제3세계 여성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2차 페미니즘은 백인중산층의 시야와 동기에 규정되기 쉬운 점을 들어  "제국의 페미니즘"으로 비판한다.


흑인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싸운 여성들은 여성 억압이 민족(인종) 억압과 계급 지배와 일체를 이루며 여성 사이에는 계급과 인종(민족)에 근거한 차이와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지배집단의 여성(비록,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할지라도)이 획득한 것은 피지배집단 여성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비판이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이 어려운 까닭은 이해가 쉽다, 어렵다는 차원의 어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최근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의 여러 층위들이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여성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들, 논쟁들, 시위를 어느 한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언어가 사람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일상사에서 이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드물다고 생각될만큼 성을 사고 파는 행위를 규정하는 단어들은 "윤락, 매춘, 매매춘, 성매매, 성 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접근해 들어가면 과연 성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란 질문으로부터, 성을 사고 파는 일은 올바른가? 이것을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들, 성매매에서의 자발성이란 인정할 수 있는가? 와 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각한 선택과 판단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마치 실제 성매매가 일어나는 집창촌의 좁디 좁은 골목길과 미로처럼 얽힌 방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현재까지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 혹은 성노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

는데, 아직까지도 그 미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이 책은 나에게 해답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라 보다 많은 고민 속에 처박아 버린 꼴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느낀 한 가지는 저자 "후지메 유키"라면 현재 우리 사회의 성매매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 어떤 선입견도 갖지 말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 그들 스스로가 그들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소외시키고, 타자화하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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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르 클레지오 지음 | 신성림 옮김 | 다빈치(2008)




"이 출발이 기쁜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 프리다 칼로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에서 "석기 시대의 인간이 동굴의 벽에 그렸던 고라니 동물은 하나의 마법의 도구이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신령들(Geister)에게 바쳐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벤야민의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대입시켜 보면 그녀가 그렸던 스스로의 모습들은 고대 제의(Liturgia)의 주술들에 해당한다. 물론 이 작품들이 누구에게 바쳐진 것인가를 해독하는 건 우스운 일이며, 그 대상을 한정 짓는 행위 자체가 비난 받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 대상을 "디에고 리베라"라고 말한다면 말이다.
 
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을 지닌 한 소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가 있었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남자친구 알레한드로(그는 프리다 칼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오빠뻘 되는 친구로 프리다는 그에게 열렬히 빠져있는 상태로 스스로 그의 약혼녀 혹은 정부로 자임할 정도였다)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 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고 훗날 술회했던대로,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내가 프리다 칼로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10년 안쪽의 일로 친구가 말해주기 전엔 알지 못했다. 나에게 멕시코 화가는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당시 멕시코 벽화운동가들이 전부였고, 디에고 리베라와 관련해 그의 부인으로 일자 눈썹을 한 여자 '프리다 칼로'란 사람이 있었다 정도였지, 특별히 이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곤 감상해볼 기회도 없었다. 아마도 대개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셀마 헤이악이 동명의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 "프리다"가 국내에 개봉되기 전까지는, 그 덕분에 갑자기 프리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당시 우리 말로 인터넷에 올려진 거의 유일한 사이트였던 내 홈페이지에 프리다 칼로를 검색하다 찾아든 낯선 네티즌들 숫자가 상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의 저자 " J.M.G. 르 클레지오"는 우리에게도 "조서(調書)"란 작품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소설가다. 르 클레지오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접하게 된 것은 그가 1970년대 멕시코의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면서다. 그는 이곳에서 '비둘기와 식인귀(食人鬼)의 만남' 이라고 그 스스로가 표현한 대로 특별한 열정과 사랑, 증오로 똘똘 뭉쳐져 있던 이들 부부에 대해 관심갖게 된다. 르 클레지오는 프리다에게서 멕시코의 신화적 세계를 발견했다. "프리다는 고대의 멕시코였다.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창조적 영혼 그 자체였다. 신화의 피를 뒤집어 쓰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흔들리는 그녀의 영혼은 서구 세계에서 무언가를 배워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살 속에서 뽑아내기라도 하듯 스스로의 내부에서 아주 옛날부터 존재해 온 정신의 편린을 길어 올렸다."

 

책 제목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 프리다 칼로도,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도 아니다. 비록 르 클레지오가 어느 한 쪽은 비둘기로, 다른 한 쪽은 식인귀로 말하긴 했지만 이들 부부의 어느 한 쪽의 부도덕함을 지탄하기 위해 이 평전을 쓴 것은 아니란 뜻이다. 예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부부 모두가 예술가일 때 비교적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재즈나 블루스 가수들이 마약이나 빈곤, 차별로 인해 요절하지 않은 사례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예술가들의 이미지에 주술적인 이미지를 덧칠해 신비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접해온 실제 예술가들의 삶 혹은 그네들의 정신 세계를 엿본 경험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라는 일종의 계약 관계에 충실할 수 없는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들은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훔쳐 본 죄로 사슴으로 변해 사냥개의 습격을 받고 온몸을 갈갈이 찢기운 악타이온의 화신이자, 자연과 미풍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내의 오해를 받아 실수로 아내를 죽이고 만 케팔로스 같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타인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거나 소유할 수는 있어도, 타인에게 종속되거나 소유되긴 어려운 인물들이란 말이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끼리 만난 경우, 거기에 같은 장르에 종사한다고 했을 때 그 관계가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은 눈앞에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 로댕과 까미유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아서 조지아 오키프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사례들도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건 예술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례들이 이런 경우를 더욱 돋보이게 할뿐이란 거다.

 

어린 프리다가 그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디에고는 벌써 꽤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연인인은 루프 마린이었는데 그녀는 디에고의 주변 여자 관계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루프 마린은 그 주변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때 작업장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어린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해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 볼리바르 강당의 작업대 위에서 '인간의 창조'를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 초안을 잡고 있던 디에고는 자신을 지켜보던 소녀를 마주 보았고, 작고 어린 소녀 프리다는 이 거인에게 '그가 일하는 모습을 좀더 지켜보고 싶으니 작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를 통해 디에고 리베라가 그녀와의 만남을 매우 신비로운 것이며 운명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어떻게 해석하든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필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는 여인의 삶과 살을 탐닉하던(디에고 리베라에게 식인귀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퍼뜨린 이야기. 의대에서 해부학 수업 중 죽은 여인의 인육을 먹었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 편력 탓이 더욱 크다), 산을 뽑아 옮길 수 있건 없건 간에 거인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바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프리다 칼로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수 있을까? 1970년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스탈린주의자 그외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다.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들이대면 그녀가 맞닥뜨렸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20세기 여성들이 맞닥뜨린 세계의 한계였다고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은 과연 자신의 육신과 정신으로 홀로 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프리다 칼로가 보여준 대답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보잘것없는 평가에 그쳐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되살려 낸 것은 여성주의 비평가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프리다 칼로는 때로 <쥴 앤 짐>의 '잔 모로'나 '바람같은 베티'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에게 드리워진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었던 프리다 칼로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프리다 칼로는 결코 비둘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코요아칸의 하늘 위로 유유히 떠 있는, 아름답고 매서운 한 마리 매였다. 그녀에게 가장 행복하고 불행한 사실은 그 매서운 눈초리가 바라본 것이 언제나 디에고 리베라였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그가 배반의 칼날로 자신을 후벼 판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디에고와 헤어져서 몇 달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디에고는 이 일을 자랑삼아 떠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1937년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1941년 초 디에고는 더 이상 프리다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리다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샌프란시스코로 불러 두 번째 청혼을 했다. 1949년 디에고 리베라의 창작활동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최된 성대한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글을 발표했다.

 

"나는 내 남편 디에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게 되겠지요. 디에고가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인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를 아들처럼 다루며 이야기한다면 그건 디에고에 대해 묘사한다기 보다 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일일 뿐입니다."

 

푸른 집(코요아칸의 집을 이렇게 불렀고, 프리다 기념관이 되었다)과 철제 코르셋(척추의 부상으로)의 견고한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결국 경배를 보낼 나란 존재가 없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광명의 빛이었으며 메마른 대지로부터 솟아오르는 한줄기 감로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적금 통장을 털어 달아나듯, 신과 자연과 생명의 넘쳐나는 사랑을 인간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디에고 역시 프리다 곁을 떠나고자 했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곁을 진정으로 떠나고자 했던 것(바람을 피웠다거나 외도가 잦았다는 것은 프리다에게도, 디에고에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음을 전제하고)은 그의 평생동안 단 한 차례의 일이었고, 그 한 번이 프리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이들 부부의 재결합 이후에도 디에고는 여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놀라운 창작열을 보였고, 다른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남자들의 혁명은 죽음을 부르는 권력이었고, 그것은 여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혁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삶의 고통과 사랑을 책임으로 짊어지웠다.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디에고,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디에고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녀의 푸른 집과 철제 코르셋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오른발의 회저병이 도져 결국 오른발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프리다는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수술이 끝난 후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정신적 충격과 형액순환마저 바꿔놓은 불균형이다. 수술한지 일곱달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누워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종종 어떤 예술가들의 평전은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 의해 정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학자나 학문적 연구자 혹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널리스트 보다는 차라리 다른 예술가의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될 때가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삶을 다룬 르 클레지오의 이 평전이 그렇다. 정제된 문체로 정리된 두 사람이자 하나의 영혼으로 연결된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감동받는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 감동의 대부분은 프리다에게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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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동맹 속의 섹스(Sex among allies) - 캐서린 H.S. 문 | 이정주 옮김 | 삼인(2002)


대부분의 우리 역사를 통해 '조국'은 나를 노예처럼 다루어 왔다. 조국은 내가 교육을 받거나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해 왔다. '우리' 조국이란 만약 내가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더 이상 내 조국이 아니다. '우리' 조국은 스스로 나를 보호하는 수단마저 부정하며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내년 거액의 돈을 남에게 지불하도록 강요한다. 그러고서도 나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나를 또는 '우리' 조국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당신은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성적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내가 공유해 오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결코 공유하지 않을 이익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진지하게 또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나의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나 자신이나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여성인 내게는 조국이란 없다. 여성으로서는 나는 조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여성으로 내 조국은 전세계이다. - 버지니아 울프, "3기니" <동맹 속의 섹스, 본문 220쪽에서 재인용>

 

마치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연상케 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저 말은 우리 사회에서 혹은 국제 관계(한미동맹) 속에서 여성이 처하고 있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동맹 속의 섹스"는 여성으로 한 개인의 삶이 사회와 국가, 한미 외교정책, 더 나아가 국제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리 매김 되고, 틀지어지는가를 기지촌 여성의 삶이란 하나의 고리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캐서린 H.S.문의 이 책은 미국 클라크 대학 여성학 교수인 "신시아 인로(Cynthia Enloe)"의 연구방법과 주제 의식을 한국의 기지촌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시아 인로 교수는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클라크 대학에 여성학과를 직접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국제정치와 군사주의, 군수산업이란 거대 시스템이 여성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 등에 주목해 군사주의와 성별정치학을 연구해왔다. (이 책의 저자 캐서린 H.S.문은 신시아 인로가 자신의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학자로 인정하는 이이며, 신시아 인로는 이 책의 발문을 쓴 권인숙의 논문 지도 교수였다.)

 

"일상"의 개념은 특히 여성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간으로 재해석되었다. 의미 있는 시간으로 역사가 주목하는 시간이 권력을 장악한 남성들의 시간이었던 데 반해서 일상은 여성의 시간으로 이는 "소외"와 의미의 궤를 같이한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시간으로서의 일상은 바로 여성의 시간이자, 동시에 의미 없이 소모당해야 하는 여성의 감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소외된 시간으로서의 일상이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간으로 부활하자 이런 일상의 정치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여성주의의 명제가 되었다. 신시아 인로의 연구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국제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라는 명제까지 나아간 것이고, 캐서린 H.S.문은 바로 그 명제를 한국의 기지촌 연구로 증명해 보인다.

 

불과 10여년 전만하더라도 한국의 가장 진보적이라는 학자, 운동가들 가운데 누구도 기지촌 여성의 문제를 사회 문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이는 여성의 몸에 관한 것, 특히 성행위에 대한 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었으며, 이런 지극히 사적, 개인적인 문제가  짙은 색 정장을 입은 남성 엘리트들의 국제정치나, 외교정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여성문제(성문제)에 대한 재인식은 때로 우리 사회에서 '윤금이 씨 피살사건'과 같이 끔찍한 형태로 부각되면서 국내 문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외부의 문제, 외국, 외국인, 외국 주둔군의 문제로 그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진보는 종종 민족주의와 혼돈되어 나타났는데, 이런 인식이 기지촌 여성의 문제, 성매매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동맹 속의 섹스"는 2002년 6월 15일자 초판이고, 내가 이 책을 구한 것도 역시 이 무렵의 일이었다. 거의 2년여 동안 나는 이 책을 서재에 두고 묻혀만 두고 있었는데, 최근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책을 읽기고 결심했다. 첫째 이유는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이 법안을 어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고, 둘째 이유는 역시 첫째 이유와 이어진 것인데, 그런 고민 속에서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을 읽고 새삼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동맹 속의 섹스"가 지역적으로는 한국과 미국을, 국제관계 속에서  해석하고 연구한 책이라면, "성의 역사학"은 지역적으로는 일본의 문제를, 서구 제국들의 근대화 경험 속에서의 집창촌 문제와 낙태 문제를 국가주의와 근대를 고민하며 다루고 있는 책이다. 두 책의 공통점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를 고민하고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동맹 속의 섹스"는 머리말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과 그 군속들을 포함한 다수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있는 연구논문이다. 캐서린 H.S. 문은 기지촌 여성들을 "도마 위의 고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21세기에 시행된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싼 여러 의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을 둘러싼 논의들이 서구에서의 근대화 이후 본격적인 직업 성매매 여성이 출현한 이래 논의되었던 담론 및 주장들과 지독하게 일치한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바라보는 주요 시각들은 단순명쾌한 이분법 혹은 불가항력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기 일쑤였다. 이는 부르주아 사회가 필연적으로 사회제도로서의 성매매를 동반하는 현실을 부인하거나 묵인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며, 성매매를 한 개인 - 남성의 성적 방종이나 여성의 타락에 기인하는 - 적 책임으로 전가시킨다. 성매매 여성은 종종 윤리적으로 타락한 여성이거나 육체적 쾌락을 바라는 수지 웡(Suzy Wong)으로 묘사되거나 인식된다. 즉, 과거에나 현재에나 성매매 여성은 여전히 여성들의 저임금, 과소평가, 과중한 노동으로 야기되는 것임에도 이런 제반 환경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자발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거의 모든 매춘 여성들이 기지촌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빈곤, 낮은 사회적 지위, 신체적, 성적, 감정적 학대가 얽힌 생활을 경험했다. 그들은 이미 '타락한 여성'이었다. 처녀성도 잃어버리고 가족과의 연계도 거의 끊어지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한 이 여성들은 종종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들은 이미 "도마 위의 고기"였다. 김연자 씨는 1950년대 후반 다른 여성들과 달리 고등학교까지 마쳤는데, 그녀는 자신이 기지촌 세계로 들어온 이유로 11살 때 사촌에게 강간당했던 일을 종종 이야기한다. 강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어머니가 집에 있어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었더라면 자신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까닭에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행상일 을 해야만 했다. <본문 48쪽>

 

다른 문제는 이것을 '필요악'으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 여성들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냔 의식이다. 저자는 이런 기지촌 여성들이 어째서 오랫동안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추방되었는가에 대해 다루며 "기지촌 여성들은 파괴, 가난, 전쟁의 살육, 전쟁으로 인한 가족과의 분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상징"이었으며, "남북한의 지리적. 정치적 분단과 남한 군대의 불안, 그리고 미국에 대한 끊임없는 종속의 살아있는 증언"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이런 굴욕은 형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아우로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몫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한국인의 눈에, 매춘 여성은 두 가지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 기능이란 한국사회에 끼칠 외국의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들을 견제하고, '존중받을 만한' 소녀와 여성들이 미군에 의해 매춘과 강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본문 69쪽 - 70쪽>

 

여기에는 진보를 가장한 민족주의 담론들도 한 몫하고 있다. 논개는 조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순결과 삶을 희생한 여인으로 칭송받는다. 이런 담론들은 미군 전차에 의해 죽임당한 두 여중생을 순결한 민족의 꽃으로 승화시킨다. 다소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한 윤금이 씨와 두 여중생은 본질적으로 '순결한' 이란 부분 즉, '존중받을 만한' 이란 부분에서 정확하게 갈린다. 대한민국은 기지촌 여성들을 필요악으로 대할 때도 있지만, 이들을 "국가방어와 GNP성장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는데, 1973년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은 도쿄를 방문했을 때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 만하다"고 하여 한일 양국의 여성 단체들과 언론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파월 한국군 장병들이 벌어들인 달러만 경제개발계획의 밑천이 된 것은 아니었다.

 

미8군의 한 정보장교는 군대가 1960년대 남한 GNP의 25%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1987년 미군은 남한 경제에 10억 달러를 기여했으며, 이것은 전체 GNP의 약 1%에 해당한다. …<중략>… 1978년 한국 경제는 매매춘을 통해 일본인으로부터 7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본문 76쪽 - 77쪽>

 

저자는 이와 더불어 기지촌 여성 박 양의 사례를 제시한다. 박 양은 기지촌 클럽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인에게 성을 팔았는데, 남자 형제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인에게 성을 팔기로 선택한 경우이다. 그 이유는 본인이 한국인 남성에게 성을 팔 경우 언젠가 남자 형제들의 앞길을 막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들 자신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왔음에도 1988년 말지 보도에 따르면 한 명의 전직(기지촌) 성매매 여성은 등에 업힌 이민으로 평균 15명의 친척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며, 그럴 수 없는 경우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부친다고 보도했다.

 

캐서린 H.S. 문은 한국의 경우는 여성에 대한 외국의 통제와 지배가 가변적이며, 국가간 관계와 여성의 억압 사이의 마르크스주의적 상관관계가 이런 가변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해석하면서, 사회적으로 아무리 박탈당한 위치에 놓인 여성들일지라도 세계정치학의 역할자로 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저자는 이 부분을 제일 강조하고 있음에도, 이 부분이 두드러지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사실이 약간 아이러니지만) 하고, 국가간의 관계의 역동성과 여성들의 삶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해 강대국과 군대, 자본주의적 여러 이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가와 비정부 엘리트들은 소위 '국가 이해'를 추구하기 위해 종종 다른 계급과 집단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나는 이 책을 읽었던 두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성매매특별법은 그 법안의 존폐 유무를 논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성매매특별법은 그간 분명히 우리 사회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처럼 행동해왔던 "성매매" 문제를 최초로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가 성과 관련한 책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성매매특별법 자체에 주목하기 때문이기 보다는 우리 사회 속에서 성매매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복잡하지만 놀랄 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맹 속의 섹스"는 기지촌이라는 특수한(미군이 주둔하는 아시아적인) 환경에 주목한 연구로 성매매 일반에 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성매매 문제를 국제관계 속에서 연구하든, 국내적인 문제로 한정하든 그 본질은 주변부화 된 여성들의 문제, 그들을 국가 이해, 국가 안보, 사회를 위한 중요한 자원(사람이 아닌)으로 간주하는 시스템을 해체하는 데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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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99주년 세계여성의 날과 KTX 승무원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 99주년입니다. 직원들이 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서 우리 국장님에게 뜬금없이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성인데도 잘 모르시더군요. 제가 “오늘은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했더니 함께 식사하시던 다른 분이 “요즘은 365일이 모두 여성의 날인데, 별도로 여성의 날이 필요하냐?”고 하더군요. 연세 많은 분들이 요즘 대한민국 사회와 여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1년 365일이 매일 여성의 날이란 표현이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수도 있단 생각은 저도 합니다.

2004년 9월에는 “성매매방지와 피해자 보호에 대한 법률과 성매매알선 처벌에 대한 법률”이 시행되었고, 지난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 규정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성계의 50년 오랜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가 이루어졌던 같은 해 6월, 여성정책과 가족정책을 총괄 기획하는 정부부처로 여성가족부까지 출범하면서 우리 사회 여성의 지위가 한층 더 강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대중문화가 표상하는 여성의 이미지도 이전과 달리 훨씬 더 건강해지고 당당해졌습니다. 연상녀와 연하남 커플은 물론, 이혼녀에 대한 표현도 어느 때 보다 긍정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요즘 같으면 365일 여성의 날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올해로 99주년을 맞은 세계여성의 날은 지금은 세계 최고의 산업도시이자 문화적으로도 첨단을 달린다는 뉴욕의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행사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교과서나 다른 책들을 통해 방적기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의 사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사진은 루이스 W. 하인(Lewis Wickes Hine)이 1908년 미국의 공장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 속의 소녀는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그녀의 어머니는 어째서 이렇게 어린 딸을 공장에 보냈을까요?




1870년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는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변화 양상은 마치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의 열풍과 다르면서도 흡사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인구 비례가 역전되고, 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당시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한 자본 축적, 생산의 집적이 대기업, 대자본에 집중되면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계급에게 압력이 가중되어 오늘날 우리가 중산층이라 부를 만한 부르주아지, 도시와 농촌의 중간층이 몰락하여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결과였습니다. 1900년대 접어들어 미국의 노동자는 1,000만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30년 전의 수준과 비교해보면 세 배에 이르는 수치였습니다.

이런 현상 가운데 여성노동자도 함께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됩니다. 1908년 즈음에는 섬유산업 분야에서 남성노동자보다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앞서는 역전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이 같은 일이 빚어진 까닭은 당시 섬유산업이 과당경쟁 상태에 놓이면서 남성노동자 보다 강도 높은 노동을 싼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여성노동자를 다수 고용한 결과였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여성들을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가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작업장 속에서 하루 12시간 노동, 심지어는 16시간까지 일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종사해야 했습니다.(여성들 뿐만 아니라 아동노동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연령 제한조차 없었습니다. 1880년 당시 미국의 공장에는 18만2천 명의 어린이가 일했는데, 이 수치는 산업노동자 총수의 6.7%에 해당합니다. 1895년 독일의 조사에 따르면 14세 이하 어린이 21만 5천 명이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과 가정에서 시달리면서 억압과 빈곤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족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남성노동자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지기 시작했으나 여성들은 여전히 선거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이소선 여사가 계시다면, 미국에는 또 한 명, ‘어머니(Mother)’라 불리는 메리 존스(Mary Jones)가 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는 1910년 당시 80세였던 메리 존스가 80세의 나이로 밀워키의 한 양조공장에서 일하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상스러운 욕을 퍼부어대는 야수 같은 십장들에게 둘러싸여 신발과 옷은 흠뻑 젖은 채 세척실에서 노예처럼 일하도록 운명지어진 …… 불쌍한 소녀들은 시큼한 맥주의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서 45킬로그램에서 70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술병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한다 ……. 류마티즘은 만성병 중 하나이고 으레 폐병이 뒤따른다……. 십장은 심지어 여자애들의 화장실 사용시간까지 통제한다……. 여자애들 대부분이 집도 없고 부모도 없이 …… 일주일에 3달러로 …… 의식주를 해결해야만 한다.

1908년 미국의 한 블라우스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노동자 146명이 불에 타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분노한 만 오천의 여성노동자들이 뉴욕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동조건 개선과 여성참정권 인정 등을 내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이들은 “노조 결성의 자유를 달라!”, “여성에게 참정권을!”, “미성년자의 노동을 금지하라!”, “10시간 노동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무장한 군대와 경찰과 맞섰습니다. 이날의 투쟁은 전 의류노동자의 총파업으로 번졌고 마침내 1910년 ‘의류노동자연합’이라는 조직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0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독일의 사회주의운동가 클라라 제트킨은 이들 여성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여성의 날’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였고, 전세계 17개 국가에서 모인 100여 명의 여성들이 만장일치로 제정했습니다.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해마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내걸고 시위를 계속해왔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물가안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1917년 이탈리아에서, 1918년 오스트리아에서, 그리고 193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80만 명의 여성들이 모여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진보와 자유”를 외쳤습니다. 1974년에는 베트남에서, 1979년엔 칠레에서, 1981년엔 이란에서 5만 명의 여성들이 부르카 착용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고, 1988년엔 필리핀에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여성들의 촛불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세계여성의 날’도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물론 그 사이 세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77년 유네스코는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선포했고, 1985년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여성대회에서는 20세기말까지 국제사회와 각국의 정부들이 성취해야할 성평등 행동지침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UN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빈곤 인구 12억 중 70%가 여성과 어린이며, 취학연령에 이르러서도 학교에 갈 수 없는 여자 어린이는 8천 5백만 명에 이릅니다. 이 수치는 학교에 갈 수 없는 남자 어린이 4천 5백만 명의 두 배에 이르는 수치입니다. 세계 빈곤인구 중 적절한 음식, 물, 위생, 건강,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성의 숫자는 4억 명입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엔 그 두 배에 달하는 7억 명에 이르며 성인 여성의 문맹률은 67%입니다. 이것이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작은 별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그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일부 사람들이 여성과 여성운동, 여성주의 일반에 대해 공공연히 말도 안 되는 분노를 내뱉습니다. 사실 여성가족부는 처음 출범 과정부터 많은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여성부가 존재한다면 남성부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부터 여성계 내부에 이르는 우려 섞인 걱정까지 참으로 다양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연말 여성가족부가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남성들에게 회식비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 역시 황당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라는 명칭이 이미 다양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앞장서 출산장려운동을 하는 등 이른바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에 대한 국가주의적 관리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간 여성운동 내부에서 논의되고, 힘써왔던 다양한 가족의 공동체의 복지와 인권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한 편입니다. 지금과 같은 흐름으로 보았을 때, 여성가족부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해 있는 운동의 관료화라는 암초를 피해가기 어려울 듯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모 대학의 여성총학생회가 보여준 성급한 문제제기와 미숙한 대응 방식으로 인해 여성계 전체가 매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는 문제점이 여성계라고 빗겨갈리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여성부만을 대상으로 부처 폐지를 거론하고, 그 예산을 국방비로 전용하라고 주장하거나 같은 여성 의원이 여성부가 이 나라 남성들을 모독했다고 나서는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기 까지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난 해 3월 8일. 어쩌면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세계여성의 날이었던 이 날, KTX 여 승무원 90여 명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습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였던 이들을 직위해제하겠다는 철도공사의 문자메시지였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인지 어느새 만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2월 24일은 술자리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성추행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1심 재판에서 최 의원은 1심 법정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선고와 사회지도층으로서 부적절한 범죄행위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국회의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사건 발생 5개월 후 국제부로 자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술집 여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는 국회의원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최근 삼성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불법증여사건이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계속 연기되는 것처럼 그 역시 임기를 모두 채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자라면 일반인들에게는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해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에 속한다고 인정받는 이들입니다만, 그 같은 이들을 생각하는 국회의원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6~70%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그 가운데 70%가 여성인 현실이 별다르게 느껴질리 없습니다. KTX 여 승무원들이 모 대학에서 헸던 강연을 동영상으로 한참을 다시 보고 들었습니다. 예쁘냐고요? 물론 예뻤습니다. 그들의 얼굴도, 몸매도 참으로 예뻤습니다. 그러나 얼굴이나 몸매 보다 그들의 마음이 예뻤고, 그들의 의연한 태도가 예뻤습니다. 이제 스물 대여섯의 젊은 처자들이었습니다. 다들 제 막내 동생 보다도 어린 친구들이었습니다. 장장 1년여에 걸친 투쟁이었고, 언제 해결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한명숙 전 총리가 다음 대선에서 유력한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명숙 총리는 30여년간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 여성운동을 해온 훌륭한 여성의 표본이었고,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였습니다. 한명숙 총리 지명자는 방송인터뷰를 통해 “여성 총리가 나온다면 정치 발전에 새 지평을 열고, 여성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지명자로 내정되었단 소식이 전해졌을 때, KTX 승무원들은 한명숙 총리 지명자와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들이 한명숙 총리에게 받은 화답은 경찰에 의한 강제연행이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께 드리는 편지

새벽부터 비가 천막을 내리쳤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비를 머금고 울컥이고 있었습니다. 파업농성 50일째인 4월 19일 우리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주최 비정규직 관련 토론회를 마치고 ‘국무총리 내정자’인 의원님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의원님이 여성민우회 출신이고 여성노동자의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KTX 승무원 문제에 대해 해결의지를 보이셨다고 해서 한편으로 무례할 수도 있지만, 다음날 새로운 자회사인 KTX관광레저의 신규승무원 합격자 발표와 24일 승무사업개시라는 일사천리의 계획 앞에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무총리실 노동사회수석 비서관이 와서는 철도공사가 합리적인 안을 내놓았는데 왜 승무원들이 그걸 받지 않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며, 대우자동차 파업 때도 300명만 정리해고 하자고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노조집행부 때문에 1700여명이 해고돼서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실의 노동사회수석이라는 분이 우리가 왜 이렇게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잘못된 집행부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관광레저가 감사원에서 지분매각하라는 부실 자회사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긴 하나, 근본적인 원인은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은 있지만 그 문제를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당사자가 없는 위탁방침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철도공사의 직접고용을 주장하고 있고,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해고해버리겠다고 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규직을, 그래서 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한참을 하니 노동사회수석님의 자세도 조금은 숙연해지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히 좀 전에 자신이 한 얘기는 잘 몰라서 한 것이니 취소하겠고, 자세한 얘기를 좀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도노조를 통해서 초기에 들었던 내용밖에 몰랐고 그 이후에는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갖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소관이 아니라고? 노동사회수석의 소관이 아니라고요?
노동자의 문제가 소관이 아니라는 노동사회수석님께서는 당장 면담을 잡기는 어려우니 자신과 다시 한 번 만나고 다시 면담을 잡아보자고 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 여성노동자의 차별에 누구보다 애쓰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총리로 임명되신 걸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자가, 특히 힘이 약한 여성노동자로서는 총리님을 비롯한 저희 노동자의 문제를 같이 풀어주실 분들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20대 여리고 여린 승무원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것까지 각오하고 국회까지 들어오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 노동자들이 왜 자꾸 투사처럼 변해 가는지, 이런 투사를 양산하는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총리로 임명되시면서 바로 이런 어려운 문제를 안겨드려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발 이 나라의 총리로써 저희를 외면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006년 4월 20일
한명숙 의원님 면담을 요구하다 경찰서로 연행된 80여 명을 면회하러 떠나며 정지선 올림


사진출처 : 전국철도노조

이들을 해고한 철도공사 사장 이철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그래서 KTX 승무원 사건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어떤 이들은 KTX 승무원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합니다. 바로 위의 편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대우자동차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 전 해고되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희망자에 한해 전원 복직되었다는 뉴스를 들으셨을 겁니다. 그날 KTX 승무원의 강연 내용을 들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법률적인 절차를 밟아 합법적으로 투쟁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승무원은 자신은 인천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지도 몰랐다. 법대로 하라는데 법대로 하면 3년, 5년, 8년이 걸린다. 어느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무임금으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겠어요. GM대우의 파업이 5년을 끌었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20명이 1,700명을 복직시킨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많은 수가 다른 곳에 취직을 한 상황이라 실제로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는 아이 젖 달라고 우리가 삭발하고, 점거하고 불사르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승무원은 “다른 작은 노동조합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행복한 편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저는 이 분들, KTX 승무원들이 참으로 예쁘다,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380명으로 시작된 KTX 승무원들의 싸움은 1년여가 지나는 동안 100명 정도의 승무원들만 남아서 싸움을 계속 해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 철도공사가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는다며 선전해 고시를 치르듯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아리따운 젊은(현재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모든 미덕을 갖춘)  아가씨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학생이 “모두 능력 있는 분들인데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찾아가지 않고 계속 싸우는 이유가 뭐냐?”를 묻자 “그렇게 하면 저 한 사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후배들, 동생들, 이 땅의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 다음 세상에 태어날 우리의 아이들은 또다시 우리처럼 불행한 일들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감히 ‘집단이기주의’를 말하는 당신이 바로 이기주의자입니다.

오늘은 99주년을 맞이한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저는 이 날이 투쟁이 아닌 축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해마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뻬빼로데이라는 정체불명의 상업 파티들은 온갖 뉴스와 상업 자본의 호사를 누립니다. 그러나 철모르는 눈발이 펄펄 날리는 대한민국의 봄, 끝나지 않은 엄동설한이 지속되는 한, 이 땅의 여성들은 여전히 비정규직, 이등시민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 투쟁의 현장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1년 365일 중 하루만 여성의 날이 아니라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200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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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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