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重慶森林)
- 감독 : 왕가위  출연 : 임청하, 양조위, 왕정문, 금성무 등


'해가 뜨면 사랑이 끝난다'라는 노래가 있다.

내 심정이 지금 그렇다
어떻게 메이를 잊지?
난 혼자 약속을 했다
바에 제일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했다.


<키노(KINO)>란 잡지가 정확하게 언제 창간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키노>에 내가 몰입하게 된 것은 실연과 함께였다. 7년을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을 때 나는 미친듯이 영화를 보았다. <중경삼림>엔 이런 대사가 있다.
"실연당한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참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땀이 흐른다. 수분이 다 빠져 나가버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거라 믿기 때문이다."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실연당했을 때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며 미친듯이 남아도는 시간을 소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알포인트>란 영화로 오랫동안 꿈꿔오던 감독으로 입봉한 공수창 선생 밑에서 영화 시나리오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지금 그나마 영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잡스러운 지식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그 무렵의 남아돌았던 시간이 내게 베풀어준 혜택이라고 해두자. 마음 둘 것 없어 정붙인 것이 영화였고, 그 무렵 날 가장 아프게 했던 것들 역시 영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녀와 헤어질 무렵 가장 각광받던 시네아스트는 바로 '왕가위'였으니까.


왕가위의 영화들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로 이어지는 동안 내겐 나만의 여자가 없었다. 오랫동안 한 여자를 사랑해오다가 누구의 것도 아닌 남자가 된 것이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였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 시간들 동안 그닥 행복하지 않았으며 자유를 느낄 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부유하는 먼지처럼 .... 세상 모든 것이 하찮았다. 페이왕(왕정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량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왕가위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건 참 재미없는 일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수없이 많은 수다들을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수다에 수다를 더한다는 건 재미없다. 그의 영화들은 모두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영화가 청춘남녀들에게 그토록 가슴저리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들모두가 한때 기억에 기대어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실연당해본 적 없는 사람은 이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왕가위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들만의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모두는 실연 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어째서 자신만 슬픈 척하느냐고 묻는 것은 과도한 비판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이는 광각렌즈의 일그러진 왜곡과 엿보는 자의 관음증이 어색하지 않다. 비틀거리고 닫힌 영혼들이 흔들리는 사각의 화면 속에서 금붕어처럼 유영한다. 세상 모든 만물에는 유통기한이 없지만, 유독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사랑에 대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동안 당신의 유통기한은 아직 연장되고 있다.


"..언제든지, 어떻게 하든지, 물건들에겐 유통기한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정어리도... 빵도... 랩마저도 기한이 있다.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물건은 없는 것인가?"


왕가위 자신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다르다고 단언한다. 그는 고독하고 불안정하고 사랑에 버림받은 현대 도시의 젊은이들을 많이 그려왔지만 자신은 쾌활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며 선글라스 뒤에 가려진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린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외롭지만... 그는 "나는 외로운 사람은 아니며 단지 재미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다. 19살때 만나 오랫동안 연애한 여자와 7년전 결혼, 아들 하나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그는 인생에서 외로웠을 때가 두번 정도 있었다고 한다.



첫 외로움의 경험은 5살때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겪은 낯선 도시의 삶이었다. 상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자신만을 데리고 홍콩으로 온 후 문화혁명 때문에 국경이 막혀 형과 누나와 헤어져 살았다. 광동어를 모르던 그는 낯선 홍콩에서 외로움을 느꼈으며 당시 BBC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시그널뮤직을 벗삼아 외로움을 달랠 수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다음 외로웠다고 느낀 적은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를 촬영할 때. 아내가 아이 때문에 미국에 가있어 혼자 호텔생활을 했다.


세계는 점점 좁아져서 모든 도시가 비슷해지고 있다. 어딜 가나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가 있고 편의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이야기라도 그건 홍콩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가던 우리들의 이야기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기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연당한 젊은이들의 비탄이야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살이란 건 하나도 극적이지 않다. 영화에서처럼 인생에 배경음악이 깔리는 법도 없고, 지하철 안에서 총격전을 벌일 일도 없으며, 서점에서 우연히 옛사랑과 마주치는 요행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풍문처럼 옛사랑이 딸 둘을 낳고, 남편이랑 그럭저럭 잘 살고 있으며, 올가을엔 새로 운동을 시작해볼까 궁리하며 두둑해지는 뱃살을 두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늙는다. 그러므로 극적인 반전과 사건들을, 그런 삶을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흐뭇한 상상이던가.


"우리 서로가 매일..어깨를 스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언젠가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쳤던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밖에 안되었다.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요행히도, 요행히도 인생에 뭔가 극적인 순간이 찾아와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순간이 찾아와서 극적인 고백을 통해 사랑을 얻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들, 메마르고 척박하며 기대했던 일들조차 아니, 노력하고 공들여 오던 일조차 너무나 쉽사리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세상에 우리는 있다. 우리는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는 사막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사막보다 아름답지 않고, 때로 아무리 헤매어도 발견할 수 없는 오아시스가 있을 뿐이다. 왕가위의 사각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면서 한때 사랑했으나 이제 더이상 사랑받을 수 없게 된 옛 연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
중경삼림>처럼 끝이 허무한 영화가 좋다.

주인공들 모두가 격렬한 총격전 끝에 죽어버려도 좋다. 아무리 달려가도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므로... 그 뒤에 어떻게 되었네? 하며 그들의 안부를, 미래를 묻지 않아도 좋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종결되었으므로...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다. 우리가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할 뿐... 또 혹시 아는가? 어느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소갈머리없이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이 오게 될지... 그래서 황지우는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닌지.... 중경삼림(重慶森林)의 어디에도 삼림(森林)은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에 등장하는 삼림이란 따지고 보면 도시의 정글에서 자라난 사람들... 우리가 스쳐가던 시골길의 어디멘가에서 무심히 스쳐가던 바로 그 나무들처럼 자라난 바로 우리들이니까.



이해한다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별개이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던 사람이
내일은 다른 것을 좋아하게 될 테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
중경삼림>의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주시하지만 끝끝내 마주서지 않는, 그리하여 결코 서로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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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살바도르 (Salvador)
감독 : 올리버 스톤
출연 : 제임스 우즈
제작 : 1986 영국, 미국, 122분

올리버 스톤의 실질적 감독 데뷔작 <살바도르>

올리버 스톤의 감독 데뷔작은 1981년의 공포영화 <악마의 손(The Hand)>이었지만, 그를 할리우드의 이단아, 숨겨진 뇌관으로 만든 데뷔작은 <살바도르>였다.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작업들과 그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조망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자, 미국적이지 않은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현대사의 명암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감독은 아니었다. 그의 데뷔작인 <악마의 손>은 컬트적인 구성이 돋보이긴 했으나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나 인정  받는 작품이었고, 그는 일찍 감독 데뷔를 했으나 이후엔 감독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로 더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감독상을 받기 전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로 먼저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카페이스>, 마이클 치미노와 <이어 오브 드라곤> 등을 촬영하며 전형적인 장르영화에 충실한 각본을 썼다. 이 무렵 그리고 이후에 다소 약화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인종차별적인 묘사와 지나친 폭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한 때 한국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들에게 한국적 인권 상황을 생각하게 해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리버 스톤 자신도
“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국수주의자였으며 총을 숭배했다”며 당시 자신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새로운 감독 데뷔작(?)이 된 <살바도르>는 그런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종군 기자 리처드 보일(제임스 우즈)에 투사해내고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보일은 한때는 그나마 잘 나가던 카메라 기자였고, 영화 <킬링필드>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드니 쉔버그와 함께 캄보디아 취재 기자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냉소와 좌충우돌하는 기질 때문에 그를 고용해주는 통신사 하나 없이 시시껄렁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아내는 넌덜머리나는 결혼 생활을 끝장내버리고, 그는 밀린 아파트 월세에 쪼들리다 못해 통신사에 전화를 해대며 취재거리를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엘살바도르 - 바나나공화국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결국 리처드 보일은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내전이 한창인 엘살바도르에 간다. 이 영화는 엘살바도르 내전(1980-81년) 당시의 종군 기자였던 보일의 자서전적 기록을 재구성한 영화다. DVD에는 그의 실제 회고 일부가 담겨 있지만 아쉽게도 자막이 없다. 영화 초반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된 배경이 되는 엘살바도르는 어떤 나라인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엘살바도르는 1856년 독립하지만,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었던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꿈은 미국과 같은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염려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제국들의 방해, 내부적으로는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지주계급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종속을 강화해나간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약소국들을 일컬어 '
바나나공화국'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유나이티드 프루츠와 같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냉소 섞인 풍자이다. 미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소수 지주계급은 부를 축적하여 전국토의 56%를 14개 문벌에서 차지할 정도로 엘살바도르의 빈부 차는 극심했다. 결국 1932년 농민을 이끌고 파라분도 마르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농민군 3만 명의 참살로 끝나고 만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집단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 출신으로 과거 반란을 주모했던 혁명가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저항, 아니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 FMLN(Frente Farabundo Marti de Liberación Nacional)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 전선은 1980년 8월에 4개의 게릴라가 모여 결성한 무장 혁명 조직으로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익 쿠데타세력에 맞섰던 게릴라 저항조직이다. UN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엘살바도르 내전은 18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난 2009년 FMLN은 항쟁 20년만에 엘살바도르 대선에서 승리하여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전체에 커다란 자극을 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쿠바가 소모사 정권을 전복시키는 혁명에 성공했고, 베트남이 거대한 코끼리인 미국의 밑창에 구멍을 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란에서는 팔레비 정권이 강력한 비밀경찰과 미국의 지원을 물리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런 연이은 혁명의 성공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1970년대부터 엘살바도르 안에서도 군부독재에 대한 좌익 게릴라 조직의 저항이 시작된다. 그리고 1980년 분열되어 있던 게릴라 조직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로메로 대주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엘살바도르 내전은 더욱 극렬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FMLN은 1983년에 이르러서는 엘살바도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나지만 그 와중에 엘살바도르 군부는 '
죽음의 군단'이란 퇴역군인과 치안경찰 등 우익 민병대를 조직해 무수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기자 정신과 보여주
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국 언론

영화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FMLN의 결성과 로메로 주교의 암살, 새로운 람보 - 레이건의 등장이란 극적인 순간의 엘살바도르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우즈는 그의 연기사상 거의 최고의 연기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 자신이 리처드 보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했다. 영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의 소국 엘살바도르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배하는가를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대단하단 생각이 들만큼 잘 지적해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한때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하야시킬 만큼 대담한 비판정신과 공정성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의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교묘하게 자본의 검열을 받는가를 살필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군사적 패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내부의 전쟁에서 패한 것, 언론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 고도의 정치전, 심리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군사적인 패배로 생각지 않는 까닭은 미국이 세계 도처의 전쟁에 참전한 이래 거듭되는 그들만의 산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기실 이런 전통은 인디언 헤드 헌터식 산술법이란 지극히 미국적인 산술법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 헤드헌터들의 방식, 인디언 머리 가죽을 벗겨오면 가죽 당 얼마씩 달러를 지불하는 것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귀를 잘라 수집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국은 전사자의 시체 수로 전투의 승리를 가늠한다. 미군 전사자보다 많은 베트콩을 죽인 전투라면 그 전투는 승리한 것이고, 이런 식의 전투에서 미국은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보일은 엘살바도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베트남전 이후 새로운 보도 정책과 검열 방식을 채택한 미국에서는 취재는 가능할지 모르나 이를 보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사망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이제 미군을 수행하는 종군기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거나 에어컨디셔너에 의해 기온이 조절되는 안락한 브리핑 룸에서 미군 보도통제관이 전해주는 뉴스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매번 최고의 민간인 학살 수치를 갱신하는 미군의 전투 수행 방식을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과학적인 첨단 전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군은 그네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줌으로써 남북전쟁 당시 브로디의 사진처럼 전쟁은 일어났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 시신도 발견할 수 없는 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보일은 미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파티 석상에서 이런 기자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러나 보일 자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우익 지도자에게 밉보여 자신의 친구인 수녀일행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


엘살바도르와 광주, 1980년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988년에 보았다. 87년의 후폭풍을 겪고, 88올림픽을 앞둔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된 상징으로 코스타가브라스(Constantin Costa-Gavras)의 영화 <Z>와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를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80년 5.18 광주로부터 8년 뒤에 다시 보는 1980년 엘살바도르의 상황은 광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극장의 어두운 공간에서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광주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은 수녀들의 시체가 어둠 속에서, 흙 속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장면을 보며, 나는 욕지기를 느꼈고, 광주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둔덕 속에 묻혀있을 시신들이 떠올랐었다. 레이건의 등장이 전혀 다른 새로운 미국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 이래 지속되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1980년의 봄은 그런 미국의 저강도전쟁이란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소리 없는(?) 학살들이었다.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전쟁이고, 학살이었으며, 단지 그 나라 독재정권이 한 짓들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래 직접 개입하는 방식 대신 그들의 하수인을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리처드 보일은 엘살바도르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하여 살바도르를 빠져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달한 직후 국경감시대에 의해 그 여인은 다시 엘살바도르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녀를 실고 떠나는 국경감시대 차량을 향해 보일은 외친다.
“너희들은 되돌려 보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영화 역시 올리버 스톤의 작품들에 대해 쏟아지는 일반적인(인종 편견적이라거나, 미국 비판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미지의 미국, 인권국가, 자유로운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영화인들 혹은 감상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 우리는 이 영화보다 조금 더 나은 영화를 만들었는가? 만들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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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 김성진/ 황소자리(2004)


세계의 분쟁지역에 대한 괜찮은 브리핑

"야만의 시대 -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에는 칭찬할 점과 비판할 점이 공존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의 제목 "야만의 시대"는 좀 손쉽게 붙은 제목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이 분명 전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야만의 시대"라는 거창한 제목에 부응할 만한 심도를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부제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이 제목에 좀 더 어울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개 "세계의 분쟁"이라고 하지 않나? 세계 속 분쟁이라고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것이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들었던 첫번째 의문이다. 저자인 김성진, 동덕여대 교수인 그는 연합통신 외신부 기자를 거쳐 시사저널, 중앙일보의 외교전문기자를 했다고 하는데, 약력 소개와는 달리 글에서는 현장 체험이 별로 묻어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지만 작년(2004년)에 읽었던 전선기자 정문태의 "전쟁취재 16년의 기록(한겨레신문사)"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먼저 이 책의 장점 몇 가지를 이야기해본다면, 동서냉전 해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여러 분쟁들에 대한 비교적 최신 브리핑(briefing)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리핑이란 건 간결하게 요약된 보고를 의미하는 것처럼 이 책은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분쟁들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동서냉전 시기엔 이데올로기에 묻혀버렸던 민족분쟁들을 다룬다. 우선 최근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우리들에게도 익숙해진 쿠르드족, 러시아의 골칫거리인 체첸, 중국의 두 얼굴을 보여주는 티베트, 유럽의 영원한 불씨인 발칸, 현재까지 계속되는 열전의 현장 이라크, 마약왕국의 대명사 콜롬비아, 동서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오랜 분쟁의 현장 북아일랜드, 그리고 전세계의 화약고 팔레스타인이다.

 

기획은 돋보이지만 어딘가 미진한...

이 지역들은 종종 외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뉴스들은 있으나 우리들 자신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생각에서 혹은 외신 자체도 그다지 집중 보도를 하지 않는 탓에 쉽게 알기 어려운 지역들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몇몇 사실들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많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황소자리" 출판사는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와 같이 과거에 출판(아마도 정신세계사에서 나왔던가)되었던 책을 재출간하면서 최근에 등장한 출판사다. 그러고보니 류비셰프를 포함해, "위대한 남자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이 책까지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3권 읽었다. 사실 모리시타 겐지의 "위대한 남자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를 읽으며 들었던 아쉬움이 이 책에도 거의 고스란히 적용된다. 모리시타 겐지의 책도 적당히 재미있었고, 적당히 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뭔가 아쉽고 심도가 얕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 역시 그렇다.

 

즉, 이 분야에 대해 거의 처음 접하게 되는 일반인에겐 좋을 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들, 이 분야에 관심이 좀 있는 이들이 읽기엔 좀 엷은 향과 맛이다. 그런 점은 신생 출판사로서 상업적인 고려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왜 느닷없이 그런 출판사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 중 하나가 출판사의 기획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의 프롤로그에 보면 2003년 열린사이버대학교에 개설했던 강좌를 들은 수강생 중 한 명이 출판기획자로 변신한 뒤 출판을 제의해서 책으로 엮게 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 중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대개, 출판에서 편집자가 큰 역할을 하며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든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런 류의 책이다. 시집이나 소설의 경우엔 창작자의 몫이 편집자보다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편집자가 관여할 몫이 그만큼 적은 편인데 비해 이런 류의 책은 편집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런 편집자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여러 곳에 삽입되어 있는 각각의 개념 설명과 뒷부분에 부록으로 포함된 분쟁일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부분들은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로 읽는 분쟁? 분쟁으로 읽는 영화?

하룻밤 침대에 누워 재미있게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의 몇몇 단점들이 걸렸다. 우선 국제정치를 전공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파워게임의 측면에서 읽으려는 측면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제법 도드라져 보인다. 거기에 기자 출신 필자들의 문장이 지니는 건조한 문체가 책의 재미를 좀 덜하게 만든다. 물론 문장 자체야 흠잡을 데 없지만 재미는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영화로 읽는" 이라고 하는 이 책의 컨셉 부분인데, 분쟁이라는 국제정치,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야 할 부분을 영화라는 소재를 채용해 드러내보인다는 컨셉 자체야 이를 데 없이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vs. 분쟁이라고 보았을 때 사실상 영화는 분쟁에 종속되어 있는 편이다. 물론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영화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고, 대개의 독자들 또한 그러하리란 점을 고려해보면 이 양자 사이에서 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분쟁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라면 그다지 재미없는 책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발칸분쟁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영화 "세이비어" (국내에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화 자체는 무척 잘 만들어졌다)는 영화의 내용만 따라가더라도 발칸분쟁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이 책에선 그 줄거리가 과감하게 생략되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비디오나 DVD로 이 영화를 따로 구해보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분쟁은 이해해도 책 내용은 실감나지 않게 된다. 책의 완성도를 상대적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이 세계의 분쟁을 많이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프리카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점 역시 지적해둘 만하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들이 이 책의 커다란 흠결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책의 완성도란 점에서 다소 미진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야만의 시대를 계획한 배후는 누구인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저자의 시각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 "야만의 시대"라 하는 거창한 주제에 걸맞지 않는, 혹은 프롤로그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안이해보이거나 분쟁의 원인을 분석하는 부분에서 일면적이거나 미국의 책임을 분명히 언급해야 하는 부분이 누락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괄호 안의 글은 내가 딴지를 거는 부분들이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어째서 점령이란 단어를 썼을까? 침공과 점령은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보인다. )은 미국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해온 시리아와 이란에게 언제라도 초라한 후세인의 몰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암시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세계 2위의 산유국인 이라크를 점령하는 것은 자원민족주의의 관점에서도 정말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로 이어지는 새로운 친미벨트의 형성은 21세기의 새로운 강국 중국을 압박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했음 직하다.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매달리다보니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해 나갔다. 미군에 잡힌 이라크 포로들은 이슬람교도로서는(그건 비단 이슬람교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성적 학대는 종교와 관련없이 그 누구에게나 죽음보다 더한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성적 학대를 감내해야 했다. 세계의 경찰국가로, 매년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감시해 발표하는(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영화 "착한 쿠르드 나쁜 쿠르드"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인권은 그들이 친미적이냐, 반미적이냐, 미국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가로 구분될 뿐인 인권이다) 인권의 최후 보루로 자임해온 국가의 군대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자행한 포로 학대여서 그 충격은 더하다(솔직히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람이 충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리어 충격이다.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미국은 늘 그래왔지 않나?). ...<중략>.... 이 시대 최고의 문명국가임을 자임해온 미국이 이럴진대 과연 인류의 역사가 정말 발전해온 것인지에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본문 10-11쪽>

 

세계의 분쟁지역을 살펴보면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이 미국과 과거 유럽의 식민지배 혹은 그들의 식민지배 질서의 영향이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발칸 지역의 분쟁의 한 원인은 물론 대세르비아주의임에 틀림없지만 그 안엔 가까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나치를 등에 업은 민족주의자들인 우스타시의 대세르비아 학살, 인종청소(이 책에 따르면 35만명을 학살)가 보다 자세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덧붙여져서 티토의 사망 이후 서유럽이 종교적, 인종적으로 자신들에게 가까운 몇몇 나라들의 독립을 부추겨 유고의 해체를 촉진한 사실도 언급되어야 하는데 이 책엔 그런 부분은 누락되었다.

 

판쉬르의 사자, 마수드의 암살 배후가 오사마 빈 라덴
- 그런데 왜 미국이 좋아하는 거지...



마찬가지로 판쉬르의 사자. 마수드의 암살과 그 배후에 대해 저자는 철저하게 미국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수드를 직접 인터뷰한 바 있는 정문태는 "전쟁취재 16년의 기록"에서 마수드의 암살 배후에 미국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요지의 글을 쓴바 있는데, 이 책의 저자 김성진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일부의 주장인 오사마 빈 라덴과 탈리반 암살설을 거의 정설로 취급한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불특정다수를 향한 목적없는 살해를 제외하고는 대개 사건의 배후를 지목할 때, 그가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얻는 집단, 개인이 누구인가를 추측하는 것에서 초등수사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물론 마수드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는 구소련의 침공 당시부터 수도 없이 있었던 일이며, 마수드의 명성만큼이나 그의 죽음을 원하는 집단도 많았다. 그런 이유에서 마수드 자신도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안과 검색에 철저함을 기했다.

 

탈리반도 그들과 대립하는 북부동맹의 마수드가 눈엣가시였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구태여 그의 죽음을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할 까닭도 없다. 그만큼 오랜 적이었으니까 부인할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수드 암살에 책임이 없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마수드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정문태는 그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미국이라는 것이다. 마수드의 암살은 탈리반이 축출된 후 가장 큰 정치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가장 확실한 지도자의 제거를 의미한다. 이 땅의 해방 정국에서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이 비명에 간 것, 그들의 암살 배후에 누가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추측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너무나 손쉽게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로 지목한다. 그것은 바미안 석굴의 파괴 과정에서 정문태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 탈리반 지도자인 물라 오마르는 오랫동안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을 사용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언론들은 이 자금이 오사마 빈 라덴의 지원이라고 손쉽게 규정하지만 오랫동안 탈리반을 무자헤딘으로 칭송하며 이들에게 자금을 댄 것이 미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바미안 석굴의 파괴과정 역시 정문태는 탈리반 지도자인 오마르는 오랫동안 바미안 석불을 볼모 삼아 미국과의 거래를 원했으나 결국 이 과정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명분 쌓기를 위해 바미안 석불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책 "야만의 시대"는 분명 우리들에게 세계 전역의 무수한 분쟁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명확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별 셋 이상을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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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 눈: 비극의 중심에 있지 않은 자의 한계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의 영화 <호랑이와 눈(The Tiger and the Snow, 2005)>이 때늦게 개봉된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뒤를 잇는 두 번째 감동”이란 홍보 문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생은 아름다워>와 닮은 꼴 영화인 <호랑이와 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지난해 모 영화잡지의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의 100대 영화’ 중 18위에 당당히 랭크될 만큼 국내 영화팬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로베르토 베니니는 일부 영화 마니아들에게만 인정받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코미디 영화감독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그에게 기대 이상의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주었고, 그 결실이 너무 달콤했던 탓인지 이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영화 <피노키오>가 실패하면서 베니니는 또다시 가장 비참한 기억의 현장에서 휴머니티와 사랑의 달콤함을 환기시키는 영화 <호랑이와 눈>으로 돌아왔다.

<호랑이와 눈>은 요설(饒舌)과 환상, 교묘하게 배치된 우연들이 어우러지는 베니니의 영화  미학이 잘 드러나고 있는 영화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 많은’ 대사에도 불구하고, 베니니의 요설에 질리지 않는 것은 그의 영화가 극적 아이러니들로 포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위장’, ‘은폐’를 뜻하는 ‘에이로네이아 eironeia’란 어원을 가진 아이러니는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난 진술이 실제의 속뜻과 다른 의미를 지니며, 표면과 내면이 서로 괴리돼 긴장을 유발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극적 아이러니’, ‘비극적 아이러니’라는 것은 배우의 연기나 대사, 때로 극 자체가 표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극중 배우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함으로써 서로 모순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거나 확인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대개의 극작가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상황 자체를 눈치 챌 수 있도록 한다. 베니니의 코미디와 영화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바로 이 같은 비극적 아이러니의 세계다. 때때로 그의 영화들은 텍스트를 넘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광주의 기억이 새롭게 환기됐다. 만약 '1980년 광주'를 코미디로 만들려 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 것인가? 불가능하다고? 그렇다. 현재로서 그건 불가능하다. 학살의 기획자이자 총책임자가 29만 원에 불과한 통장 잔고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후원자들을 대동한 채 골프장을 찾는 나라, 현역 정치인들이 철마다 인사를 여쭙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민주공화국'에서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니니는 어떻게 역사가 남긴 가장 뼈아픈 기억이자 비극인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를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하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었고, 사회적 의미가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인 조건 외에도 <인생은 아름다워>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지닌 힘은 인종학살의 비정한 현실 속에서도 다섯 살 난 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 상황을 즐거운 게임이라 말하는 베니니의 낙관성에서 나온다. 비록 주인공의 아들은 사실을 모르지만 관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의 힘이 홀로코스트란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코미디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게 했다.

<호랑이와 눈>은 우리 시대 또 하나의 비극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 영화의 도입부는 주인공 아틸리오(로베르토 베니니)가 밤마다 반복하는 꿈속의 결혼 장면으로 시작된다. 베니니의 영화는 때때로 데칼코마니처럼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놓여 이는 우연들이 교묘한 대칭을 이루고 반복되면서 희극과 비극의 가교 구실을 하도록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결혼식 장면에 등장하는 아름답게 빛나는 로마의 달빛이 있다면, 영화 중반부에서 주인공은 친구 파드(장르노)와 함께 포화가 번뜩이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바그다드의 달빛을 바라본다. 또 두 딸 아이와 함께 서커스단에서 낙타를 타는 즐거운 장면은 사랑하는 여인 비토리아를 위해 약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아틸리오는 이라크 출신의 시인 친구와 함께 로마에서의 꿈처럼 낭만적인 바그다드의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두 사람이 같은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생각과 감상도 같은 것이었을까? 아틸리오가 아내 비토리아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친구 파드가 집 정원에서 홀로 목 매달아 자살한 까닭은 무엇일까? 동포들이 숱하게 죽아가는 현장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이라크인)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도 감수하는 그(이탈리아인). 얼핏 한쪽은 무능력하고, 무력해 보이고, 다른 한 편은 낭만적인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도리어 이 부분이 베니니 감독이 그려내는 가장 현실적인 장면(아이러니)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다운 바이 로>(짐 자무시 감독, 1986)에서 함께 출연했던 탐 웨이츠(Tom Waits)가 등장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감미로운 탁성으로 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입부의 결혼식 장면만으로도 <호랑이와 눈>은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다. 니콜라 비오바니와 탐 웨이츠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악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결혼식에 등장하는 하객들의 면면을 살피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만약 당신이 영화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 대목에서 웃었다면 그건 하객들 중에서 아르헨티나 환상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이탈리아의 대표 시인 에우제니오 몬탈레(Eugenio Montale), 주세페 웅가레티(Giuseppe Ungaretti),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Marguerite Yourcenar)의 얼굴이 삽입된 것을 알아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베니니의 영화엔 코미디 특유의 우연들이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고, 영화를 끌어가는 복선으로 작용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숨은 그림(기호)찾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베니니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해온 주제는 분명히 ‘사랑의 기적’이라고 명명할 만한데, 실제로도 그의 아내 사랑은 거의 팔불출 수준이다. 아틸리오가 밤마다 열망하는 신부 비토리아 역을 연기하는 니콜레타 브라스키(Nicoletta Braschi, 베니니와 1991년 결혼했다)는 베니니의 감독 데뷔작 (1983)에 첫 출연한 이래 그의 영화 거의 대부분에서 주요 상대역을 맡고 있다. 아틸리오는 언제나 비토리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니면서 열렬한 사랑을 바친다.

두 딸의 자상한 아버지이며 기발한 교수법으로 제자들의 사랑을 받는 유능한 교수이자 낭만적인 시인이지만, 현실의 일상에서 그는 자기 차를 주차해둔 곳을 몰라 헤매는 사람이고, 남의 옷을 자기 옷인 줄 알고 바꿔 입고, 변호사에게 매일 독촉당하는 현실부적응자다. 비토리아도 전 남편 아틸리오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의 시(詩)에 나오는 것처럼 ‘로마에서 호랑이가 눈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기 전엔 절대 결혼할 수 없다’며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비토리아가 아틸리오를 사랑하면서도 거부하는 것은 언제나 냉정한 현실 세계보다는 그의 시에서나 등장할 법한 낙관적인 환상의 세계에 머물기를 원하는 아틸리오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반부가 지극히 평온한 일상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의 결합을 이루지 못하는 이탈리아에서의 에피소드라면, 후반부는 비록 치열한 전쟁터에서지만 사랑하는 이를 치유하고 간병하는 아틸리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이라크에서의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베니니는 사랑과 낙관적인 믿음으로 무장한 아틸리오를 통해 사랑의 힘만이 폭력과 증오를 극복하고, 현실의 전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는 사랑의 묘약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계보학적으로 살폈을 때 <호랑이와 눈>이 <인생은 아름다워>의 뒤를 잇는 두 번째 영화인 것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잘 짜인 베니니 영화 특유의 장르 미학이 살아있긴 하지만 <호랑이와 눈>이 주는 감동의 힘은 전작에 비해 함량 미달이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이라크침공이 현재 종료된 사건이 아니라 진행 중인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로서 중요한 부분은 그가 비록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에 반영된 고통 받는 주체의 심정적 거리가 <인생은 아름다워>에 비해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는 한계 때문이다.




전장의 위험 때문에 적십자사의 구호물품이 바그다드로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아틸리오는 직접 적십자사를 찾아 의료물품을 시내로 반입하려다가 자살테러범으로 오해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아틸리오는 목을 놓아 소리친다. "I'm Italian!" 만약 그가 나는 이라크 사람이라고 소리쳤더라도 미군들은 사격하지 않았을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고통의 당사자(주체)는 홀로코스트의 직접 피해자였던 유대인 ‘귀도’였고,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와 눈>에서 ‘아틸리오’는 친절한 이라크 의사를 비롯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친구 파드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위기 상황에서도 “I'm Italian!”이라 외치면 구원받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 베니니가 제 아무리 사랑으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그는 피 흘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라는 점에서 베니니의 코미디가 지닌 비극적 아이러니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다시 말해 베니니가 말하는 사랑의 기적이 위대하긴 하지만 <호랑이와 눈>이 그려내고 있는 현실은 결국 비극의 현장에서 피 흘리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의 표현이란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은 1990년 걸프전 직후부터 2003년 이라크 침공까지 10여년이 넘도록 존재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에 엄청난 경제제재를 가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수준 높은 공공의료체계를 유지했던 이라크의 보건의료체계가 심각하게 붕괴되면서 매달 4,500에서 6,000명에 이르는 5세 미만 어린이가 죽어갔다. 현실이 이토록 찬란한 비극일 때 웃음의 빛깔은 바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FILM2.0 제 353, 354 합본호  (2007.09.18 ~ 200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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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 문화학교서울 지음, 문화학교서울(1995)


요새 소장함을 들춰보며 이것저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문득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란 책에 눈길이 머물렀다. 아, 1995년 무렵 나는 무얼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에 그 무렵의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나는 매년 일기장에 제목을 붙이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데, 1995년의 일기 제목은 "또 다른 별에서 한 세상을 살고 있는...나!"였다. 아, 너무 비웃지들 마시라. 나는 저무렵 아직 20대 중반에 불과했다구.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무척 아팠었다. 졸업여행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더니 졸업한 뒤 거의 6개월 가량을 누워서 지내야 했다.

문제는 허리였는데, 아픈 곳은 머리였다. 졸업한 뒤 아무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는 백수 생활을 한다는 거, 게다가 기약없이 몸져누운 상태라는 거 멀쩡한 정신으론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낸 뒤 알바자리가 나서 출판사에서 알바를 하며 지내다가 정식 직원으로 취직했다. 출판사 알바를 한 6개월여 하다가 나중에 광고쪽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직장은 신사동에 무슨 극장 맞은 편에 있었는데, 그 덕분에 영화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이 해는 영화 탄생 100주년이기도 했다. 이 책을
구해 읽은 것도 아마 그 무렵의 일이었을 거다. 방 구석 어딘가 돌아다니다가 누가 집어가서 없어져서 나중에 다시 힘들게 서점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 영 입맛이 씁쓸하다. 묵은 일기장을 뒤적이는 것처럼.... 사실 영화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서울의 대표적 시네마 테크인 '문화학교 서울'에서 발간한 이 책은 어딜보더라도 80년대 이념과 더불어 영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 청춘들의 가열찬(?) 의지에 비해 이를 뒷받침하는 능력은 아직 그에 못 미치는 아마추어 티가 팍팍 느껴지는 책이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제목부터 "불타는 필름..." 아닌가?

사실 이 책의 제목은 1960년대 군부독재 치하의 아르헨티나를 세밀하게 기록한 페르난도 솔라나스(Fernando E. Solanas)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La Hora de Los Hornos)>에서 따온 것이다.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이 옥타비오 게티노(Octavio Getino)와 공동으로 각본을 써서 좌파 페론주의자들이 결성한 시네 리베라시옹의 작품으로 1969년에 완성될 때까지 무려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전두환 군부독재 체제 아래에서 비밀리에 광주 비디오가 유포되고, 비밀리에 상영되었던 것처럼 4시간 20분에 달하는 대작이었지만 이 영화 역시 비밀리에 사영되었고, 중간에 상영을 멈추고 관객들에게 이런 현실에 대해 논쟁하라고 권유하는 등 영화상영과 관람이 또다른 정치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부제명이 "신식민주의의 폭력과 해방에 관한 기록과 증거"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요새는 문화가 시대의 주된 흐름인 만큼 작정만 한다면 이보다는 훨씬 더 폼나게 책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은 참 폼이 안 난다.
이미지 중심의 책도 아닌데, 판형은 거의 예전 영화잡지들 크기로 뻘쭘하니 크고, 두께는 영화주간지 한 2권 정도밖에 안 되니 폼이 안 난다. 게다가 인쇄를 한 건지 마스터를 돌린 건지 모를 인쇄하며, 종이용지 역시 우리가 흔히 서적지로 보게 되는 미색모조 80g이 아니고, 백색모조지를 사용해서 조악한 활자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게다가 글의 수준도 들쭉날쭉이다. 1995년은 나에게도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이 해 나는 대학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 전해에도 한 명의 친구가 사고로 죽었는데, 내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은 이듬해에는 또 한 명의 동기가 죽었다. 이번엔 자살이었다. 해마다 한 명씩의 동기가 젊은 나이에 죽는 경험을 한다는 건, 제 아무리 어려서부터 주변 지인들의 죽음을 익숙하게 접해왔던 나라고 할지라도 충격이었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나에겐 불타는 청춘의 연대기와 우연히 겹친다. 이 책은 영화 기점을 뤼미에르 형제로 잡아서 1895년으로부터 1995년에 이르는 영화, 필름의 연대기를 시대의 배열, 장르 영화의 소개, 각국가별 영화적 특색, 작가주의 감독 소개, 사조 등의 배열로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 선정하고, 배치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오늘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이 책의 흔적은 곳곳에서 보인다. 이 책을 그 사람들이 죄다 사서 읽고, 일일이 타이핑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정보들이 이제는 얼마나 흔해졌는가를 알 수 있다. 다행히 이 책은 절판되었다. 영화에 대해 좋은 책들이 연일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 시대 우리 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영화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인 만큼 그와 관련한 대중의 호기심과 이를 충족시켜주고자 하는 출판자본의 행복한 결합이 질좋은 용지를 사용하고, 세련된 편집의 디자인, 양질의 이미지들을 담아 출판되고 있다.

문득 시네마테크인 '
문화학교 서울'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어쩐지 안심이다. 음악을 흔히 시간의 예술이라 하고, 연극을 순간의 예술이라고 한다. 인간의 연령을 이와 흡사하게 비교해본다면 확실히 청춘은 순간의 예술에 속한다. 그럼에도 청춘의 시간은 더디기만 하다. 뉘 반항할 곳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 청춘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도 있지만, 이 책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가 출판될 무렵만 하더라도 우리 영화가 오늘날의 이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영화탄생 100주년이라는 화려한 축하의 계절이 지나간지도 어느덧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해진다. 어떤가? 그 세월,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책 한 권을... 퇴물로 만든다. 이 책을 처음 만들던 불타는 영화광들도 어느덧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이 책을 만들 때 이 책이 지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렇게 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당시에 예상했을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오래가기를 희망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이 책 자체는 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그 첫 인상이 주었던 강렬함만큼 - 아니 어쩌면 그것은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의 영화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 여러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는지 지금도 여러 행사들에서 차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노력이 한 권의 책을 만들고, 다시 이 책에서 불을 붙인 영화학도들이 세상에 나와 새로운 영화들을 만든다. 그들의 작업이 과연 10년전보다 나은 영화를, 이 책을 처음 만들던 이들이 생각했던 한국 영화의 미래, 영화예술의 미래를 추구하고, 만들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뿜어내었던 그 무렵의 문제의식과 발상만큼은 이 책의 작가들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영화에 들씌어진 온갖 미사여구들 이른바 '예술 영화'니 '컬트'니 하는 영화의 허상을 깨고, 영화를 바로 세우고, 땅에 발딛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에 대한 온갖 찬사와 거짓말 같은 담론의 거품을 빠고 조용히 그러나 진지하게 스크린과 우리들의 거리를 재보았습니다. 그 위치 조정이 성공한다면, 우리의 영화 환경은 매우 달라질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 후편이 궁금하다.

이 무렵 나는 일기에 시인지, 낙서인지 모를 글 하나를 끄적여 두었는데 일부만 소개해본다면 내용인즉... 이랬다.


쓸쓸한 날에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히 잘 살고 있는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며
쥐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허풍떠는 꼭 그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쥐처럼 천장벽지에 가끔 오줌도 찍 갈기며

책도, 활자도, 인생도 시간과 승부한다. 책과 활자는 한 번 인쇄되어 나오면 세월과 함께 변치 않는다. 다만 쇠락해간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저주인가.... 나도 한 때 영화를 꿈꾸었으니...


* 그 무렵의 나는 한국문화예술의 능력을 100이라고 했을 때 이들의 모든 관심이 온통 영화 같은 영상매체로만 쏠려있는 것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10여년 사이 나의 이런 비관은 그저 그런 전망쯤으로 돌아와 있다. 한국 영화가 가고 있는 길이 겉보기만큼 화려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다른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그 저변이란 것은 극히 취약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영화를 만드는 나라에 제대로된 시네마 테크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여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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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 작전명 발키리 (Valkyrie)/ 감독 브라이언 싱어/ 출연 톰 크루즈/ 제작 2008 미국, 독일



난제 -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재구성하는 일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어렵다.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어느 신문 기자던가, 평론가가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썼다가 인터넷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스포일러를 유포했다고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인지, 평론가인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 덕분에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大聖) 공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데, 뉘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서이든, 원작을 통해서이든 누구나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는 보배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널리 전파된 이야기란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로 장르 전이(轉移)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바꾸긴 매우 어렵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익숙한 이야기 스타일이 대중에게 이미 숱하게 검증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릴러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던 신예감독 브라이언 싱어였지만, 이후 <엑스맨> 1편과 2편, 그리고 <수퍼맨 리턴즈>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제2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꿔왔던 브라이언 싱어로서는 선배가 <쉰들러 리스트>로 보여 주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진해서 영화 <발키리>의 감독을 맡았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매력적인 인물과 유난히 끌리는 사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깊이 매료되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에 저항했던 숄 남매의 <백장미단>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과 거의 동시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했다.

-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톰 크루즈


결과를 빤히 아는 역사영화(EPIC)를 보는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생전에 모두 42차례의 암살 기도(『독재자들』, 교양인, 2009)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아마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으리라 싶은데,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현대문학, 2008)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6차례의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늑대 무리는 조직적으로 사냥감을 공격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냥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국가조직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암살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수단 중 하나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를 비롯해서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이라는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은 성공유무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런 사건들이 수많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누군가 한 개인의 죽음이 시대의 향배를 어긋나게 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까닭 역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당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위인(偉人)인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大衆)인지는 역사학의 오래된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어찌되었든 역사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인류의 생애사 속에 포함되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란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과연 나폴레옹이 불면증과 위장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역사 속 작은 국면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되짚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 한국의 역사에 대입시켜봄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의 문제와 한계 등을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영화 <발키리>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했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극적인 요소가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슈타우펜베르크 vs. 김재규
정치적 수장을 제거하는 암살의 상당 부분은 브루투스와 케사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측근에 의해 실행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삼엄한 경호를 받기 때문에 암살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암살의 성공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암살이 암살만으로 정치적 의도까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면 한 개인에 불과한 정치인의 암살을 통해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던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의도는 로마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겨냥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김재규의 의도와 달리 그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는 없었다. 현대적인 국가조직은 ‘관료제’라는 단단한 배후조직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영화 <발키리>에서 암살 음모의 주동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논의에 답답해했던 이유는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비록 규모나 역사적 의의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와 김재규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이 두 사람을 닮은꼴이라 비교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하게 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출발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 분단, 부정부패, 경제난 등으로 최악의 위기 속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이후 형식상으로는 민주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최대 업적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3선 개헌에 성공한 뒤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뒤이어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저항 속에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에 살해당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제정을 대신해 출범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무능과 볼셰비즘의 발흥에 위기를 느낀 독일의 일부 민족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과 결합해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을 독일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킨다.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과 독일제국의회 방화사건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비견할 만한 ‘비상대권’을 차지하고 독일 내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유신체제가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만으로 처벌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차지한 독일 역시 나치 체제와 총통에 대한 어떤 비방, 비판도 처벌의 대상이었다.

서민적 독재자와 귀족적 민주주의자

내가 아는 한 독일 역사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한 빌헬름 제정을 물러나게 한 키일 군항의 반란은 있었지만 그것은 쿠데타라기보다는 혁명이었다. 어떤 이는 독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을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독일에선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일컬어 ‘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독일은 국가구조 속에 군대의 전통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군부가 민간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고려 무신정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 군대를 통해 습득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통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이다. 민주공화정의 주인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동안에도 대통령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풍경을 즐겨 연출한다.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최고통치자들의 실생활이 서민적이지는 않지만 서민적이라는 인상을 줄수록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윤보선이나 장면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두 사람과 달리 서민적인 풍모와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최고통치자였던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지배엘리트들과 달리 매우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물론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계급 출신이었다. 하사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귀족계급이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무리로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가 에르빈 롬멜을 총애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전 라이프치히 시장)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까닭에 대해 영화 <발키리>는 유대인학살 등 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내 자본가들과 중산층,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식 교육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청교도적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계급적 뿌리와 이반된 사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접한 귀족적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의 통치로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했던 대다수 독일 서민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쿠데타로 나치지배가 종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이자 가장 꺼리는 질문은 “만약에~”란 것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건을 찾아내 인과관계와 그 의미를 찾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거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발키리>로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 <발키리>는 역사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역사 영화들이 지닌 문제점의 상당수는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키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다(물론 다큐멘터리도 허구이며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나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저항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이런 의도는 톰 크루즈라는 대중적인 스타에 의해 충분히 담보되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발키리>의 장점은 이처럼 진지하다는 데 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왜 진지해져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역사 속의 사건이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관객 모두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히틀러 암살이란 대의에 목숨을 거는 요 인물들의 당위적 결의는 영화 내부에 있지 않고, 관객들의 영화 외부에서 배운 역사에서 나온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영화 서두에 이미 히틀러의 제거를 결심한 사람이었고, 베를린의 히틀러 암살 음모 세력 역시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보고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한 등장인물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발키리>자체가 지닌 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해버리면 역사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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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천국의 아이들Children of Heaven>


감독 / 마지드 마지디
출연 / 알리(아미르 파로크 하쉬마인), 자라(바하레 세디키)

간혹 "세상살이가 다 비슷하다"는 말엔 인생의 고단함을 위무받고자 하는 이의 간절한 소망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세상살이가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혹시 비디오 가게에 가서 이 비디오 테잎을 발견하고 들었다 났다 하며 그냥 골치 아픈 데 액션 영화나 한 편 때리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말고 이 영화를 한 번 보도록 권하고 싶다. 거기엔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는 알리와 자라, 오누이가 있고 나와 당신의 어린 시절이 있고, 이제는 운동화가 떨어지기 전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부유함 속에 잊혀져 버린 우리들이 있다.

알리(아미르 파로크 하쉬마인)는 몸이 아픈 엄마의 심부름으로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방 수선한 여동생 자라(바하레 세디키)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집에 새 신발을 살 여유가 없다는 생각과 무서운 아빠에게 혼날 걱정에 알리는 자라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당장 내일 신고 갈 신발이 없는 자라는 눈물을 글썽이는데... 결국 신발 찾기를 포기한 알리는 동생 자라와 한가지 묘안을 떠올린다. 오전반인 자라가 알리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오면 오후반인 알리가 그 신발을 갈아 신고 학교에 가기로 어린 남매 사이의 비밀스러운 협정이 맺어진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한편, 자라는 전교생이 모인 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다른 소녀를 발견한다. 자라는 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 소녀의 집까지 뒤를 밟지만 그 소녀의 아버지가 앞을 못보는 장애인인 것을 보자 단념하고 돌아선다. 며칠 후, 알리는 3등상에 새 운동화가 상품으로 걸려있는 어린이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것을 알고 대회에 참가한다. 동생에게 꼭 3등상을 받아서 운동화를 선물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나선 마라톤 대회. 오로지 3등상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 달리는 알리. 과연 알리는 3등을 해서 새 운동화를 탈 수 있을까?

사실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되고 비디오 출시된 것은 올해의 일이지만 우리가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영화였다. 국내에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드링 일부 매니아 게층에만 호평을 받고 대중적인 호응은 받지 못한 데 반해서 이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비교적 흥행에도 성공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에 비해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논할 수는 없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의 아름다움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인 <자전거도둑>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실제 영화 속에 보면 알리와 알리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부유층이 사는 거주지역의 정원사 노릇을 해주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계속 허탕을 치다가 알리의 아버지는 한 집에서 정원사 일을 해주고 거금을 건네 받는다. 그러나 그런 행운도 잠시 알리의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고장나 이들은 가로수를 들이받는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 과연 천국일까? 운동화 한 켤레가 없어서 오누이가 번갈아가며 신을 갈아 신어야 하는 가난이 넘쳐나는 이곳이 과연 천국이고 이 아이들은 천국의 행복한 아이들일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가 어쩌면 이슬람 선전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리우드 영화들에 나오는 그 괴기스러운 이슬람 전사들(테러리스트)의 모습만 신물나게 보아온 우리들에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네들 사는 모습 역시 우리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선전효과는 미흡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극장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이 영화를 보았다는 미국인들이 지금은 저 높은 하늘에 신처럼 군림하고 앉아 알리와 자라가 뛰어가던 그 골목길에 거대한 폭탄들을 떨구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쩌면 그는 이미 미국이 마음 먹었을 때 죽었던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사마 빈 라덴은 죽은 것일까?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그 선택할 권리의 유무에 달려 있다. 미국인들이 수만킬로 떨어진 이국의 아이들에게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게 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미국이 계속 그런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동안엔 절대로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엇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천국의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정말 저 아이에게 신발 하나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절해진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에 선생님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알리의 커다란 눈망울과 오빠를 야단맞게 하고 싶지 않아 불편함을 감수하는 동생 자라. 자신의 신발을 찾았지만 눈먼 맹인의 딸임을 알고 그냥 참는 그 아이 자라의 얼굴을 보면서....

언젠가 그 어느 골목에서 자랐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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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2001)



감독 : 송일곤
출연 : - 혜나(김혜나), 유진(임유진), 옥남(서주희)


- "슬픔과 희망 사이 그곳엔 신비한 힘이 있다." 라는 카피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 영화 <꽃섬>.
단편 영화들로는 이미 유명한 감독인 송일곤의 첫번째 장편 영화이다. 사실 나는 <꽃섬>을 보기 전에 몇 차례 송일곤 감독의 영화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명성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단편 영화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허세 같은 것.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영화는 영화로서의 생명이 절반 이상 뚝 떨어진다는 나의 단견이라면 단견이 그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 속 배우들은 어쩐지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은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나 역을 맡았던 김혜나는 아직 배우는 학생이었고, 두 명의 다른 배우들 역시 영화 연기자라기 보다는 연극으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 촬영 방식을 택해서 시나리오를 나누고, 분할하여 촬영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이야기 순서대로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같은 장소에서 촬영할 일이 별로 없는 로드 무비의 성격상 그 방법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었다.

<꽃섬>
이 영화에 대해서 그다지 길게 말할 기분은 아니다.
각기 다른 삶의 고통과 질곡을 안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이 그들의 슬픈 감정을 잊기 위해 혹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슬픔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하는 꽃섬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일들을 이 영화는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때로는 연극 무대를 스케치한 듯 그렇게 주섬주섬 챙겨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칫 지루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른 호흡에 익숙해진 탓이다. 일생동안 모든 동물이 하는 호흡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렇게 햇 각 동물들의 평균수명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 호흡 수와 심장 박동수가 빠르면 빠를 수록 동작도 빠르고 성격도 급하다고 하는데 그 예를 들어 코끼리와 생쥐의 심장 박동수는 코끼리가 생쥐보다 훨씬 더디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은이런 영화를 자주 보게 되면 오래 산다인가? 글쎄, 사람에 따라서는 느릿느릿 말하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사람들도 있고 보면 반드시 호흡의 빠르고 느림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송일곤 감독은 시종일관 관객들로 하여금 그저 지켜보도록 만든다. 감독은 아마 고집이 무척 센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관객은 누구나 극중의 어느 한 인물을 골라 자신과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극중 배우 누구하고도 쉽사리 동화될 수 없는 자신을, 감독은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섣부른 페미니즘 영화처럼 남성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도록 부추기지도 않는다. 어떤 면에서도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주로 여성이라고 해서 이 영화가 페미니즘적인 영화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나의 생각엔 우리에게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페미니즘 설화. 이어도의 전설이 자꾸만 생각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란 사상에도 계급과 동서양을 나누는 어떤 구분이 있다면(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양의 그것과 서양의 그것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듯하다. 그것은 마치 토종벌들이 꿀을 채집하여 집에 가져갈 때 머리를 집 입구에 받고, 그 안에 채집해온 꿀들을 저장하는 풍경과 서양벌들이 꿀을 채집하여 꿀을 저장할 때 항상 외부 적의 침공에 대비하여 머리를 밖으로 하여 꿀을 저장하는 모습처럼 다른 것이다.

토종꿀벌을 이용한 꿀통 근처에 양봉꿀벌이 나타나면 토종꿀벌들은 서양꿀벌의 습격으로 금새 전멸하게 된다고 한다. 서양의 페미니즘 신화가 아마존의 여전사들로부터 비롯되었다면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의 페미니즘 신화는 어쩌면 이어도 전설에서 발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존의 여전사들은 남자들의 대륙을 공격하고, 그로 인해 아마존의 여왕이 헤라클레스에게 굴복당하고 마는 데 반해서, 우리 이어도 전설의 여자들은 그저 남자가 없는 평화로운 섬으로 존재한다. 적극적인 네거티브가 아니라 떠남으로 해서 혹은 도착함으로 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이 영화 <꽃섬>을 보며 일부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 <꽃섬>에서는 가장 반항적인 캐릭터인 '혜나'마저도 엄마의 친구가 따라주는 맥주 한 잔을 넙죽 마시고 더이상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묻지 말라는 말에 변변한 말대꾸 없이 물러서고 마는 순둥이이다. 그리고 포구에 드러누워 꺼이꺼이 목놓아 운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지만 그 누구의 탓도, 책임도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거나 자신탓이라고 자책하지도 않는다. 혹은 신에게 갈구하여 얻은 목소리를 잃은 '유진' 정도가 자학하여 스스로 자살하려고 하지만 혜나와 옥남에게 구출된 뒤로는 누구보다도 조용한 사람이 되고만다.


<꽃섬>이 나에게 올해 본 10편의 좋은 영화 안에 들게 된 까닭은 상처입은 사람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에 대한 좋은 해답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상처입은 사람을 질질 끌고 꽃섬에 갈 의사는 없다. 다만 지켜볼 뿐이다.

때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극도의 무기력함,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죽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사랑하는 나머지 상대방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감이 배반당하는 순간, 그리고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그 많은 일들에 대해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으로서 느껴야 하는 고통 역시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에 얹어진 돌덩이 같이 무거운 마음 하나 나눠짐으로 해서 함께 함으로 해서 우리는 영화 속의 유진처럼 죽음조차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 <꽃섬> 한 편만으로 송일곤 감독의 미래를 점쳐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미래를 기대해볼 뿐이다. 그리고 참고로 알려드리자면 꽃섬은 남해에 실제하는 섬이다.

* 2001년 12월에 썼던 리뷰라 현재 송일곤 감독의 미래와는 상관없는 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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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런(Chicken Run, 2000)



존재하지 않는 세계 - 유토피아(Utopia)

   영국의 인문주의자이며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저술하여 유명해진 - 오늘날엔 읽는 사람보다는 인용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은 기이한 고전이 되어가고 있지만 -『유토피아』는 본래 그 유래가 그리스어의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으며 영향을 받아 이 책을 저술했는데, 책의 내용은 당시의 유럽, 특히 16세기 무렵 영국사회의 여러 병리 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꿈꾼 것이지 전혀 실제 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하기사 공화정제, 전 시민이 교대로 농경에 종사, 노동시간은 6시간, 나머지 여가는 교양시간,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로이 꺼내 쓸 수 있으며 남녀는 혼인하기 전에 미리 서로의 나체를 볼 수 있도록하고,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그의 유토피아가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쉬운 것은 아니다)만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가 고민했던 사회적 모순들은 오늘날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모어가 살던 16세기 영국은 자본주의 생성 초기로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양을 사육하기 위해 농민들은 대대적으로 농경지로부터 쫓겨나야 했고, 모어는 이를 가리켜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기이한 세상이라고 했다. 현실은 오늘날에도 대동소이하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대량해고 및 실직 사태에 직면해 있고, 과거와는 형태만 달라진 빈곤이 계속 된다.

  <치킨 런>은 죽음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의 탈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애니메이션들이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하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예술작품치고 지옥에 비해 천국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예를 찾긴 매우 어렵다. 천국이란 그 상상의 세계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그에 대해 반대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지는 일종의 대안적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지옥은 현실의 축쇄판이기 때문이다. 누가 애써 비난받을 짓을 저지르겠는가? <치킨 런>에는 조지 오웰식의 <동물농장>이 그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양계장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유사하다는 분석을 할 수는 있다. 거기에 애써 기호학적인 분석 어쩌구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치킨 파이 자동 제조기'를 '대처리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던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바라보던 간에 양계장이 지배와 억압의 세계, 암탉 진저의 탈출 시도가 그에 대한 일탈을 말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진저가 꿈꾸는 이상세계가 원시적이고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사람들은 좀더 친근감을 느끼고 쉽게 동의하게 된다. 이 말은 천국은 모호할수록 좀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논리적 제약을 무시하고 말한다면 유토피아는 그런 까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에서 진저와 록키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무사히 닭들의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동화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듯이 아들 병아리, 딸 병아리를 낳아 인간들에게 발각되기 전까지 당분간은 행복하게 산다는 타협을 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현실 속의 닭들은 과연 어떻게 사는지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충고이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관적인 현실론의 일단에 자리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 약육강식'이란 말이다. 19세기에 등장한 다아윈(Charles Darwin)과 월리스(Alfred Wallace)의 진화론을 사회학에 접목시킨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론이 그것이다.‘적자생존’,'자연도태',‘강자우월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사상은 결국 생물학적 다양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비서구 사회들을 결국 서구사회와 같은‘문명화(Civilizing)’된 사회로 강제 진화시킬 필요가 있는 미개한 야만사회로  규정하도록 했다. 나는 서구 합리주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막다른 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회진화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 자연은 타자화된(정복할) 대상이었으며 자신들의 문명·문화라는 편협한 잣대로 보았을 때 그들과 다른 문명권은 오로지 정복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냉장고

  어두컴컴한 밤. 갈증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연다. 마치 SF영화의 한 부분처럼 혹은 공포영화의 살인 장면이 벌어지기 직전처럼 갑자기 열린 냉장고 속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원시시대였다면 동굴 역할을 했을 법한 냉장고, 그 환한 전구 불빛 속으로 여러 식료품들이 보인다. 그린 자이언트 옥수수 캔, 동원 참치 캔, 플라스틱 밀폐 용기 속에 담긴 방울 토마토, 비닐랩에 싸인 오이, 햄, 소시지, 그리고 달걀. 우리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이야기로부터 참신한 발상의 전환을 증명해주는 '콜럼부스의 달걀'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에 달걀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닭은 인류가 길들인 가장 오래된 가금(家禽)류 중 하나였다. 물론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어린왕자와 여우'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길들인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만약 여기서의 '길들임'이 전자의 길들임이라면 어린왕자는 여우의 고기와 모피를 얻기 위해 여우의 생명을 난도질해야 한다.



  냉장고 속의 달걀이 닭의 살아있는 난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달걀 프라이를 해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기름에 튀겨낸 생선 대가리의 쾡한 눈동자가 마치 나를 쏘아보는 듯해서 섣불리 생선 살에 손을 대지 못했던 기억처럼 말이다. '존재의 응시'란 나 이외의 타자를 나와 동등하게 대우할 때만 가능하다. 냉장고 속의 달걀은 과연 얼마나 그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중 달걀 썩은 냄새를 맡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냉장고 속의 달걀은 한 달 이상 그 싱싱함을 유지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달걀 자체의 생명력이라거나 냉장고의 탁월한 보관력 덕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걀이 그토록 오랜 기간 보존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먹을 거리로 삼고 있는 달걀이란 생명의 유통기한 아니,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부은 항생제 덕분이다.

한 알의 달걀이 닭이 되기까지

  우리가 길들인 닭은 다시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와 고기를 얻기 위한 육계, 달걀을 얻기 위한 산란계로 구분된다. 재래(자연방임 상태로 살았던)의 종계들은 보통 1년에 120개에서 140개의 알을 낳는데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며 기온이 내려가면 털갈이를 하면서 알을 낳지 않는다. 현대의 산란계들은 완벽한 공기순환구조와 온도를 유지하는 시스템이 보호(?)하는 계사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닭들은 계절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24시간 켜진 불빛 아래 밤낮없이 알을 낳다가 1년쯤 후 산란율이 떨어지면 폐닭이 되어(산란계들은 몸을 너무 혹사한 나머지 육질이 좋지 않아 프라이드 치킨이나 부위별로 판매될 수가 없어서) 노상의 장작불 구이 신세가 된다.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장에서 나온 알들은 인근의 완전자동화된 부화장으로 옮겨져 20여일의 부화 기간을 거쳐 태어난다. 이중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병에 걸린 것들은 사료로 쓰이거나 박스째 헐값에 팔려나간다. 내가 국민학생 때 샀던 병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걸러진 병아리들은 수천마리씩 컨베이어 벨트로 쏟아져 나오고 숙련된 인부들이 병아리들의 목덜미를 잡고 여러 가지 백신 주사를 놓는데 시간당 3천 마리까지도 예방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한 차례 소동을 겪은 병아리들 중 육계로 팔려나가는 닭들은 아직 산란능력도 생기기 전인 생후 30-35일만(이걸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10살이 겨우 넘은 나이인 셈인데, 재래종에 비하면 3배나 빠른 성장속도)에 시장에 나가게 된다. 유난히 '영계'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인 까닭도 있고, 우리 육계 농장의 질병 오염도가 너무 높아서 체중을 1.6kg 이상 기르면 그만큼 폐사율(20%)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병아리를 30일만에 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료도 남달라야 한다. 사료에는 주로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첨가되어 있는데,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 따르면 법적으로 사용가능한 항생제만도 3백 50여 종이 넘는다. 걔 중에는 이 엄청난 성장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는 병아리들도 생겨난다. 날개를 펼쳐볼 수도, 마음껏 훼를 칠 수도 없을 만큼 좁디좁은 양계장에서 운동부족과 약물남용의 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팔려나가는 닭의 90%가 백혈병이나 암 등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거짓은 아닌 셈이다. 



  패스트푸드점의 매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손님회전율이라는 것이 적용된다. 즉, 좀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빨리 먹고, 빨리 나가줘야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손님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Ray Kroc) 같은 이들은 패스트푸드점의 실내 인테리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유심히 통제(맥도날드에 들어서는 고객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치밀한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된다. 우선 규격화된 메뉴, 제한된 소스 종류, 줄서기 시키는 주문 카운터,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 빨리 먹고 나가야 하는 분위기, 지정된 퇴식구와 쓰레기통 등 고도의 통제 구도 하에서 놓이게 된다)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의 의자가 유난히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보고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빨리 먹고, 빨리 나가달란 뜻이다. 이런 법칙은 양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닭들은 마치 패스트푸드점의 손님처럼 빨리 먹고, 빨리 성장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하기 때문에 30일 동안 고도로 농축된 성장호르몬과 항생제가 범벅된 사료를 먹고 도계장으로 실려나간다.


날 수 없는 새와 레드스킨

   닭의 운명은 그들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 되었던 시절 혹은 그렇게 길들여지기 시작하면서 결정된 것이었을까? 신은 과연 닭을 인간의 먹을 거리로 삼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인가.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들 사이의 해묵은 논쟁을 이곳에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바람구두는 분명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순전히 식욕이 당기기로 말하자면 서구인들 못지 않게 육류 소비를 즐기는 축에 속한다. 오늘날 육식이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는 것은 담배의 해로움과 마찬가지로 이제 의학적 상식 축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채식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이 채식과 더불어 육식을 하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지난 몇년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광우병 파동처럼 인류는 좀더 풍요로운 사회, 기아 걱정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미명 아래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자 지구상의 생명 다양성 중 분명 한 축을 담당하는 가축들을 매우 비자연적,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육한다. 인류의 재앙으로까지 불린 광우병 파동이란 결국 좀더 많은 고기와 우유를 얻고,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완전 채식 짐승인 소에게 단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도태시킨 숫컷 병아리와 소와 양의 내장, 잡고기, 뼈 등을 갈아만든 사료를 먹여 육식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계장으로 실려간 닭들은 커다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싣고 간 닭들을 쏟아낸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옮겨지는 닭들은 일일이 사람들 손에 붙들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쇠꼬챙이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다. 죽음의 사슬에 엮인 닭들은 이렇게 도계장에서 대량으로 도륙되는 닭들은 마치 <치킨 런>의 치킨 파이 자동제조기와 흡사한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60볼트의 전기침 세례와 목 뒤의 경동맥을 자르는 칼날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닭들이 우리가 흔히 어렸을 때 시장통에서 보았던 것처럼 닭의 모가지를 단칼에 딴다거나 잘라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기계가 닭의 머리를 있는 대로 쭉 잡아당겨 끊어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닭의 머리를 끊어내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식도와 내장기관까지 끌려나와 세 사람 정도의 인력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출된 내장은 닭똥집만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물로 팔려나간다.



  <치킨 런>의 진저와 록키처럼 이런 과정을 모면한 닭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 집 마당에 작은 철망 닭장을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닭들은 밤이 되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알을 낳는 항문 부위에는 신경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밤새 휏대에 올라가 잠들지 않은 닭 중엔 닭장에 침입한 생쥐가 항문 부위를 죄다 파먹어도 모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 '닭 대가리'라는 오명을 붙여준 것은 이렇게 항문을 파먹혀 피를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도 평화롭게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을 바라보는 주인의 기막힌 심정이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닭 도축 작업을 주로 밤에만 했다고 한다(물론 닭서리를 해본 분들은 더 생생하게 기억하겠지만). 어쩌다 도축 컨베이어 벨트의 전기침과 칼날을 피해 살아난 닭들은 공포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레드스킨(Redskins) 현상이 나타나는데 육질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 온몸이 붉어져 팔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날아라 병아리, 중독된 소비 사회를 넘어

   현대의 물질문명은 더 이상 기아에 대한 맬더스의 예측이 옳다고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과학이 이루어낸 농경기술의 발달은 식량 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제 굶주림은 분배의 문제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기아선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아이스크림 메이커 '베스킨 라빈스'의 유산상속자였던 존 로빈스는 "매해 기아로 죽어가는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물의 양이 1,200만 톤인데 이 1,200만 톤은 미국인들이 소고기 소비를 10%만 줄이면 얻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말한다. 육류 소비를 억제하고 그 사회적 비용으로 채식을 한다면 좀더 많은 이들에게 풍족한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다만 고민되는 문제는 그렇게 얻게 된 1,200만톤의 곡류를 과연 굶주린 이들에게 앞장서 전해줄 정부와 사회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나는 우선 우리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소 종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식량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소박한 대안은 당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소비란 인간의 삶과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건, 일반 소비재이건, 기호품이건 간에 결국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지본주의가 구축해놓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체제는 소비를 강요한다.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경기변동을 초래해 때로는 경기 부흥을 위해 소비를 촉진한다. 마치 비만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빅맥을 먹으며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하는 것과 같이 낭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 중독되어 있다. 이제 소비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도구이고, 인간은 소비를 통한 자본축적의 수단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과 욕구에 따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프로그램(거대기업의 의도와 광고와 유행 등에서 나타나는 패턴)에 따라 소비한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구자원의 무한정한 소비와 그에 따른 공해. 그로인해 우리 인류의 생존기반이자 물질생활의 토대인 지구를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물론 그전에 항생제 남용과 축적으로 인한 새로운 전염병의 유행이나 호르몬계 이상 등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욕망의 무한 질주인 자본주의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민할 일도 더 이상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2/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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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봄날은 간다(One Fine Spring Day, 2001)


감독 허진호의 영화는 이로써 두 편을 보게 되었다. 어제 만난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작자 오기민 씨는
"최근 한국영화의 돌풍의 뒤에는 나날이 작아지는 감독들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고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한국 영화들은 영화 자체의 흥행 성적은 둘째로 하더라도 감독의 이름만큼은 뚜렷이 남았던 것 같은데 최근의 히트한 한국영화의 감독들 이름을 나는 모르겠다. 가령 <조폭마누라> 등등. 어쩌면 이제 영화는 정말 감독의 작품이기 전에 그저 상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든 이의 이름을 모르듯이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허진호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연출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의 이름 석자는 나의 기억에 또렷이 새겨질 것이다. 그의 첫번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나는 잔잔하며 순간을 놓치지 않는 그의 연출력에 놀라워 한 적이 있다. 그는 화면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없는 대신에 어떤 화면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는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 연결. 관객의 기대와 호흡을 적절히 끊어 놓고 이어주는 그 연출력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영화아카데미 6기 출신이다. 이만하면 한국 영화아카데미는 한국영화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봄날은 간다> - 가지 말라 해도 그날들은 간다.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나는 사실 두려워서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나의 절친한 친구가 말하기를 "너는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말하면서도 "절대로 누군가랑 같이 보지 말고 혼자 보라"는 그 말이 나에겐 두려움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극장에서 혼자 보았으면 너무 슬펐을 영화를 집에서 마눌과 함께 보았다. 첫사랑의 흔적을 현재 함께 살 맞대고 사는 여자와 함께 확인하러 간다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 사랑의 흔적이 나만의 것일 수 있을까. (그 내숭덩어리가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첫 사랑은 혹여 존재하는 것이 아닐런지.)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며 떠오르는 상념들이 많았다는 것. 친구 녀석이 말하기를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누구하고도 같이 보지 말고 꼭 혼자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던 이유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이다. 간혹 어떤 영화들은 정말정말 보고 싶은데 그와 꼭같은 이유로 죽어라 보기 싫은 영화들이 있다. 내게는 이 <봄날은 간다>의 경우가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그렇게 말해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옆에 누워 영화 보는 내내 재잘거리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녀가 내 곁에 있음으로해서 나는 저 영화를 보면서도 이렇게 슬프지 않을 수 있구나. 아, 이 여자가 내 옆에 있어줌으로 해서. 만약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제 얘기같아요, 라고 말한다면 화낼 사람들 많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돌아가고 싶은 시기. 그러나 너무 아파서 차마 돌아가고 싶다는 마법의 주문을 끝까지 읊조릴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바로 그런 사랑의 마법에 걸린 연인들을 그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깊이라는 면에서는 <줄 앤 짐>의 잔느 모로를 능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영애라는 배우의 매끄러움을 훑어간다. 너무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자.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마치 손아귀에 쥐고 있는 한줌의 모래알들처럼 힘주어 쥐려 할면 할수록 어느새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세상에는 아무리 갖고자 소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분명히 사람의 마음 일 것이다. 사랑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고, 사랑하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랑이란 것도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사랑의 층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다양하다. 가령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자. 두 주인공은 예정된 파멸의 길로 나간다. 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랑을 택함으로써 그 파국을 애처롭지만 지켜보는 아픔을 택한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이제는 일종의 클리셰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모습이다. "버스와 여자는 지나간 뒤에는 잡지 않는 법"이란 충고를 손주에게 해주던 할머니의 연분홍 치마는 바람에 날린다. 그리고 나에게 이 영화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이영애가 강릉의 자기 아파트 창가에 머리를 내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앞으로 숙이는 장면이다. 아주 묘한 느낌을 전해주는 장면인데 나는 이 장면이 이 두 연인의 다가오는 파국을 잘 보여주는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글쎄, 명확히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어렵겠지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멀리서 흔들리는 깃발, 혹은 무지개처럼 끝없이 도달할 수 없는 먼 미지의 무엇이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영애의 행복에 겨운 그러나 동시에 나른한 듯한 포즈는 잡힐 듯 잡을 수 없는 집 나간 고양이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느껴진다.


"라면 먹고 갈래요."

그리고 잠시후


"자고 갈래요"

그리고 다시 잠들었던 유지태가 깨어나 이영애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자 얼마간 서로를 애무하던 이영애(음, 배우의 이름으로 그냥 쓰려니까 영 어색하네.)는 유지태를 밀어내며 말한다.

"다음에 좀 더 잘 알게 되면...우리 그때 해요"

우리는 이때 극중 한은수(이영애)가 '냉정한 불'이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물론 극중에서 한은수가 이혼녀라는 방식으로 그녀에게도 나름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대어 진행된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이라는 동종의 짐승이 아니라 아예 서로 다른 종이란 것이다. 그들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오랜 세월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통하지 않을리 없지 않은가?) 생각하는 방식도 심지어는 먹이의 종류도 다르다(연인과 함께 식사할 때 남자와 같은 메뉴를 시키는 여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봄날은 간다>는 슬픈 영화다. 나는 영화 <줄 앤 짐>을 보면서 상당히 비통해 했고, 잔느 모로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영화 <봄날은 간다>를 유쾌하게 보았다. 옆에서 시종일관 잔소리를 늘어놓는 마누라의 등을 긁어주며 오랜 친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 때문에 가슴 아픈 이들이여! 세월이 약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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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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