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12.09 시로 마사무네 - 『애플시드』
  2. 2010.09.13 치킨런(Chicken Run, 2000)


시로 마사무네 - 『애플시드』

 

사람들이 ‘오시이 마모루’와 그의 <공각기동대>에 열광할 때, 비애를 느꼈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까?


영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vs 만화.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는 일본 아니메의 열광적인 매니아이다. 그렇다고 일본 아니메의 작가 연보를 줄줄이 외우는 오타쿠적인 매니아는 아니고, 감상하길 즐기고, 기회가 닿는 대로(이 말은 "닥치는 대로"에 비해 얼마나 우아한가?) 수집하는 정도에 그친다. 일본 아니메에 열광하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작품 자체보다는 플라모델 조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건담 시리즈를 조립하면서 그 리얼한 작동에 경악했다. 그것은 건담 이전의 로봇들이 일종의 슈퍼 거대 로봇물이라 어린 내 눈에도 뭔가 어설퍼 보였기 때문이다. 철인28호, 마징가Z, 그랜다이저 류의 로봇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매사 새로운 것이 나올 때는 이전의 것들의 반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기에 하는 이야기다. 이런 슈퍼 로봇 류 장난감들은 조립하거나, 완제품 완구라 할지라도 워낙 처음의 설정 자체가 있었기에 건담과 같은 리얼 로봇 류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건담의 경우엔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검지 부분이 움직이고, 무릎 관절을 비롯한 각각의 관절이 좀더 인간적인 움직임에 맞도록 되어 있었다(지금 인터넷을 떠도는 구체관절인형의 원조가 건담이기보다는 일본의 전통적인 공예 가운데 일부가 완구 형태로 발전해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건담 정도의 움직임과 설정을 두고 슈퍼 로봇물 애호가들과 리얼 로봇물 애호가들 사이에 열띤 논쟁도 늘상 있지만, 결국 로봇물의 설정에서 <장갑기병 보톰즈>의 팬들에겐 건담 역시 비과학적이고, 궁색하기는 매일반이다(장갑기병 보톰즈는 내년 2월 무렵 일본에서 TV 시리즈와 OVA시리즈를 합쳐 DVD세트로 발매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일본 현지 가격으로 100만 원 정도 할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좀더 사실성에 근접한 혹은 극사실성을 궁극으로 추구한 오시이 마모루와 <공각기동대>에 이르는 SF에 이르면 이걸 단순히 로봇물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는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 <공각기동대(1989)>가 있다. 사실 일본 내에서 그의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엔 시로 마사무네가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그 까닭은 그의 작품들이 주로 해적판 형태로 먼저 소개되었고, 시로 마사무네 자신이 외부 노출을 굉장히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매체에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고, 시로 마사무네란 이름 역시 가명이다. 내가 처음 시로 마사무네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데뷔작인 <애플시드(1985)>의 해적판 만화를 통해서였다. 그 이후로 나는 시로 마사무네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오시이 마모루의 대표작이자,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공각기동대>는 원작자인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와는 몇몇 설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른 작품에 가깝다. 오시이 마모루가 <패트레이버2>를 만들고 난 뒤 차기작으로 <인랑>을 제작하려고 했지만, 반다이 측에서 이를 거부하고 그보다는 <공각기동대>의 애니메이션화를 제의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급작스런 제안이지만 워낙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세계를 좋아했기에(두 사람의 작품세계는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흔쾌히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대신 오시이 마모루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원작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들 자신이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원작의 작품성과 흥행성과 상관없이 이를 다른 장르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시이 마모루는 원작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옮기는 대신, 원작에서 설정과 내용의 일부만 차용해 자신만의 <공각기동대>를 만들기로 한다. 시로 마사무네는 이를 흔쾌히 승낙한다. ‘원작자는 신경쓰지 말고, 자유롭게 만들라’며 오시이 마모루의 제안을 지지해주었다.

- '시로 마사무네' 특유의 섹스 어필한 포즈들은(그야말로 펑크한 장난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메카닉 탑승 자세에도 드러난다.


오시이 마모루 판 <공각기동대>와 시로 마사무네 판 <공각기동대>의 가장 큰 차이는 캐릭터와 분위기의 변화였다. 시로 마사무네의 <애플시드> 역시 결코 경쾌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만화적인 재미란 측면을 고려한 듯 사고뭉치 전차인 ‘후치코마’ 캐릭터 등이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재미를 위해 시로 마사무네는 시종일관 지속되는 극화체의 흐름 중간에 만화체를 삽입하기도 하는데, 오시이 마모루는 극한의 극사실주의 묘사로 일관한다. 코믹한 요소들을 대거 거둬낸 대신, 시로 마사무네 판의 굵직굵직한 대사들은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전개와 문제의식이란 측면에서 반다이측이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공각기동대>의 애니메이션화를 오시이 마모루에게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 '시로 마사무네'는 "애플시드"에서 버추얼 스페이스를 창조한 것뿐만 아니라 버추얼 역사를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시로 마사무네


미야자키 하야오와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세계는 이 두 사람의 작화 스타일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랄 수 있는 부분과 차이를 비교해보는 건, 시로 마사무네의 스타일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듯싶다. 편의상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를 비교해보자(두 편 모두 애니메이션 작품이 아닌 만화로 한정한다). 우선 두 작가의 공통점은 여성. ‘나우시카’와 ‘쿠사나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인데, 나우시카의 재능은 선천적인 것에 비해, 쿠사나기의 재능은 다분히 후천적인 것이란 차이가 있다(신체의 일부를 안드로이드화한 것을 두고 선천적 재능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다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와 인간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을 철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두 작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기도 한 유토피아의 세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토피아가 자연회귀(自然回歸)적이라면, 시로 마사무네의 유토피아는 사이버펑크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지향 사이에 놓인 현실세계와 미래, 물질문명에 대한 시선은 부정적이며, 비판적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더 나아가 두 작가의 유토피아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이란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지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생명공학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불의 7일간’은 창세기를 역전시킨 개념이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7일간에 빗대어 아마겟돈의 7일간을 의미하는 것이 ‘불의 7일간’인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과정에서 과거의 인간들이 첨단생명공학을 이용해 부해를 만들어 환경공해물질을 제거하도록 한다는 설정을 삽입하고 있다. 즉, 과거의 인간들은 부해를 통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해물질과 독소들을 제거한 뒤 과거의 잘못을 되밟지 않을 신인류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불의 7일간’으로부터 생존해 부해와 공존의 삶을 살고 있는 인류를 전멸할 수도 있다. 이렇듯 생명공학을 이용해 인류를 개조하려 드는 과거의 인간들은 신(神)적 존재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비록 나우시카가 과거로부터 계승되어온 신화적 존재라 할지라도 나우시카 혼자의 힘으론 인류를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으로 이끌고 갈 수 없다. 이 때 나우시카가 기대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은 부해와 거대화된 곤충, 그 중에서도 ‘오무’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으며, 이때 도움을 얻을 대상은 자연이다.

- 시로 마사무네의 오리지널 작화 '애플 시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개인적으로 시로 마사무네의 작화가 더 마음에 든다.


시로 마사무네는 <공각기동대>를 통해 세기말의 권태스러움을 그야말로 펑크적인 반항으로 가볍게 처리한다. 이때의 가볍다는 의미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해 시쳇말로 Cool하다는 것이지, 무게 자체의 가벼움을 의미하진 않는다. 시로 마사무네는 <공각기동대>의 전작이랄 수 있는 『애플 시드』를 통해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불의 7일간’을 만들어냈을 법한 인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구수가 급감하게 되고, 사회 구성원을 확보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바이오로이드들로 채워지고, 기존의 국가와 민족이란 개념이 없는 인공의 도시 ‘올림푸스’이다. <공각기동대>의 시간 개념은 『애플 시드』의 시간보다 앞선 시대이지만, 그가 추구하는 바는 『애플 시드』의 세계관보다 진일보하고,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시로 마사무네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인 "나는 인간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란 질문은 이미 『애플 시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이를 좀더 정교하게 다듬고, 주제를 밀도있게 다루고 있는 것은 <공각기동대>이다. 오시이 마모루는 이런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가 추구한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올림푸스 시티로부터 쿠사나기 소령이 살아가는 근미래의 시대로 역순한다 하더라도 시로 마사무네가 작품을 통해 주장하는 유토피아 속의 세계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시로 마사무네의 유토피아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마찬가지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이지만 자연의 힘을 비는 대신, 생물학적으로 조작된 바이오로이드, 즉, 기계의 힘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현생 인류가 과거의 인류에 의해 전멸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면, 시로 마사무네의 인류는 그 근본 패러다임부터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 "애플 시드"의 매력적인 히로인 '듀난 뉴트'


애플시드, 공각기동대 - 시로 마사무네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시로 마사무네의 그림체는 누군가에게 사사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 자신이 누구누구하면 알 수 있는 대가를 스승으로 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연습을 통해 도달한 경지라고 들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시로 마사무네에게는 그만이 지닌 특징들이 있다. 첫 번째는 그저 평범한 재미를 찾아 만화책을 펼친 보통의 독자들에겐 골머리가 아플 만큼 복잡하고, 거대한 철학적 테마들이다. 사실 인형 혹은 로봇이 인간인가? 하는 질문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피노키오, 인어공주가 그렇고, 프랑켄슈타인 역시 이런 질문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게 만드는 요건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기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블레이드 런너(Blade Runner, 1982)>와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1968)』의 작가인 필립 K. 딕(Philip K. Dick)만큼 인간과 기억의 상관관계에 천착해 들어간 작가도 드물다. 어떤 의미에서 시로 마사무네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세계의 ‘필립 K. 딕’이다. 그러나 시로 마사무네를 필립 K. 딕과 구분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차이는 필립 K. 딕의 작품 세계가 다분히 디스토피아적인 반면에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세계는 사이버 펑크적인 요소들, 좀더 나아가 그것을 일단 긍정하고 수긍하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robot)이란 말이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K.차페크가 희곡 『로섬의 인조인간(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유래되었단 사실 만큼이나 사이버(Cyber)란 말이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필립 K. 딕이 정통 SF의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진 작가라면 이후 등장하는 작가들은 ‘사이버’와 ‘펑크’를 조합해낸 ‘사이버펑크’적인 요소들을 가미하기 시작한다.


펑크 자체는 반체제적이란 점에서 사회에 위협적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저항이란 점에서 사회 내부의 일탈자로 치부되고 있다. 사이버와 결합된 펑크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사이버펑크족은 사이버스페이스를 개인의 자율적인 권리가 보존되는 영역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제도를 조롱하기는 하지만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사회의 획일성, 진부함에 대한 비판정신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들이 지닌 펑크 정신은 ‘나는 인간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질문을 경쾌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SF작가들, 심지어 그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오시이 마모루 스타일과도 다르다. 그의 이런 펑크 정신은 그가 독학으로 익힌 그림체와 캐릭터들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이 그를 다른 작가들과 구분하게 만들어주는 두 번째 특징이다.


그의 메카닉 디자인과 설정은 리얼함이 뚝뚝 떨어지는 대단한 것들로 일단 시각적인 쾌감이 대단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OVA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책을 출판하면서 설정자료집을 별도로 출간한 것은 시로 마사무네가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시로 마사무네의 그림 스타일과 그가 담고 있는 주제 의식 사이엔 괴리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그의 펑크성을 역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구미에서 제작된 정통 SF물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캐릭터와 그림체가 매우 어둡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철학적 테마라는 묵직한 주제의식의 반영이랄 수 있는 이런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극화체에 가깝고, 그리스 정통 비극에 등장함직한 성격을 지닌다. 이에 비해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조차 마치 미소녀물에 등장하는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묘사된다. 시로 마사무네는 작품에 드러내놓고 경쾌한 섹스 코드를 삽입하여 자칫 진지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메카닉이나 사회 구성 시스템 등에 대해서는 극사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극 속에 종종 등장하는 미소녀 안드로이드들은 갈 길 바쁜 독자들의 발길을 사로잡아 버린다.


사이버펑크의 정신 자체가 이미 마이너리티성을 지닌다고 했을 때, 시로 마사무네는 그 자신이 이런 마이너리티성을 대변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국내에 시로 마사무네가 덜 알려진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거니까....


* 『공각기동대』와 『애플 시드』는 몹시 소장하고 싶은 책들이긴 한데, 『공각기동대』"는 이렇듯 절판되었고, 『애플 시드』는 어느 출판사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직까지 구하기 힘든 해적판을 제외하곤 출판 소식을 듣지 못했다. 개인적으론 『애플 시드』를 좀더 보고 싶은데, 음, 음, 그 이유는? 이 만화책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보다 섹시하기 때문?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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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치킨런(Chicken Run, 2000)



존재하지 않는 세계 - 유토피아(Utopia)

   영국의 인문주의자이며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저술하여 유명해진 - 오늘날엔 읽는 사람보다는 인용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은 기이한 고전이 되어가고 있지만 -『유토피아』는 본래 그 유래가 그리스어의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으며 영향을 받아 이 책을 저술했는데, 책의 내용은 당시의 유럽, 특히 16세기 무렵 영국사회의 여러 병리 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꿈꾼 것이지 전혀 실제 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하기사 공화정제, 전 시민이 교대로 농경에 종사, 노동시간은 6시간, 나머지 여가는 교양시간,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로이 꺼내 쓸 수 있으며 남녀는 혼인하기 전에 미리 서로의 나체를 볼 수 있도록하고,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그의 유토피아가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쉬운 것은 아니다)만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가 고민했던 사회적 모순들은 오늘날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모어가 살던 16세기 영국은 자본주의 생성 초기로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양을 사육하기 위해 농민들은 대대적으로 농경지로부터 쫓겨나야 했고, 모어는 이를 가리켜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기이한 세상이라고 했다. 현실은 오늘날에도 대동소이하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대량해고 및 실직 사태에 직면해 있고, 과거와는 형태만 달라진 빈곤이 계속 된다.

  <치킨 런>은 죽음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의 탈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애니메이션들이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하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예술작품치고 지옥에 비해 천국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예를 찾긴 매우 어렵다. 천국이란 그 상상의 세계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그에 대해 반대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지는 일종의 대안적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지옥은 현실의 축쇄판이기 때문이다. 누가 애써 비난받을 짓을 저지르겠는가? <치킨 런>에는 조지 오웰식의 <동물농장>이 그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양계장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유사하다는 분석을 할 수는 있다. 거기에 애써 기호학적인 분석 어쩌구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치킨 파이 자동 제조기'를 '대처리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던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바라보던 간에 양계장이 지배와 억압의 세계, 암탉 진저의 탈출 시도가 그에 대한 일탈을 말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진저가 꿈꾸는 이상세계가 원시적이고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사람들은 좀더 친근감을 느끼고 쉽게 동의하게 된다. 이 말은 천국은 모호할수록 좀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논리적 제약을 무시하고 말한다면 유토피아는 그런 까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에서 진저와 록키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무사히 닭들의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동화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듯이 아들 병아리, 딸 병아리를 낳아 인간들에게 발각되기 전까지 당분간은 행복하게 산다는 타협을 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현실 속의 닭들은 과연 어떻게 사는지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충고이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관적인 현실론의 일단에 자리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 약육강식'이란 말이다. 19세기에 등장한 다아윈(Charles Darwin)과 월리스(Alfred Wallace)의 진화론을 사회학에 접목시킨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론이 그것이다.‘적자생존’,'자연도태',‘강자우월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사상은 결국 생물학적 다양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비서구 사회들을 결국 서구사회와 같은‘문명화(Civilizing)’된 사회로 강제 진화시킬 필요가 있는 미개한 야만사회로  규정하도록 했다. 나는 서구 합리주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막다른 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회진화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 자연은 타자화된(정복할) 대상이었으며 자신들의 문명·문화라는 편협한 잣대로 보았을 때 그들과 다른 문명권은 오로지 정복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냉장고

  어두컴컴한 밤. 갈증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연다. 마치 SF영화의 한 부분처럼 혹은 공포영화의 살인 장면이 벌어지기 직전처럼 갑자기 열린 냉장고 속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원시시대였다면 동굴 역할을 했을 법한 냉장고, 그 환한 전구 불빛 속으로 여러 식료품들이 보인다. 그린 자이언트 옥수수 캔, 동원 참치 캔, 플라스틱 밀폐 용기 속에 담긴 방울 토마토, 비닐랩에 싸인 오이, 햄, 소시지, 그리고 달걀. 우리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이야기로부터 참신한 발상의 전환을 증명해주는 '콜럼부스의 달걀'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에 달걀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닭은 인류가 길들인 가장 오래된 가금(家禽)류 중 하나였다. 물론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어린왕자와 여우'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길들인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만약 여기서의 '길들임'이 전자의 길들임이라면 어린왕자는 여우의 고기와 모피를 얻기 위해 여우의 생명을 난도질해야 한다.



  냉장고 속의 달걀이 닭의 살아있는 난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달걀 프라이를 해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기름에 튀겨낸 생선 대가리의 쾡한 눈동자가 마치 나를 쏘아보는 듯해서 섣불리 생선 살에 손을 대지 못했던 기억처럼 말이다. '존재의 응시'란 나 이외의 타자를 나와 동등하게 대우할 때만 가능하다. 냉장고 속의 달걀은 과연 얼마나 그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중 달걀 썩은 냄새를 맡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냉장고 속의 달걀은 한 달 이상 그 싱싱함을 유지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달걀 자체의 생명력이라거나 냉장고의 탁월한 보관력 덕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걀이 그토록 오랜 기간 보존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먹을 거리로 삼고 있는 달걀이란 생명의 유통기한 아니,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부은 항생제 덕분이다.

한 알의 달걀이 닭이 되기까지

  우리가 길들인 닭은 다시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와 고기를 얻기 위한 육계, 달걀을 얻기 위한 산란계로 구분된다. 재래(자연방임 상태로 살았던)의 종계들은 보통 1년에 120개에서 140개의 알을 낳는데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며 기온이 내려가면 털갈이를 하면서 알을 낳지 않는다. 현대의 산란계들은 완벽한 공기순환구조와 온도를 유지하는 시스템이 보호(?)하는 계사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닭들은 계절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24시간 켜진 불빛 아래 밤낮없이 알을 낳다가 1년쯤 후 산란율이 떨어지면 폐닭이 되어(산란계들은 몸을 너무 혹사한 나머지 육질이 좋지 않아 프라이드 치킨이나 부위별로 판매될 수가 없어서) 노상의 장작불 구이 신세가 된다.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장에서 나온 알들은 인근의 완전자동화된 부화장으로 옮겨져 20여일의 부화 기간을 거쳐 태어난다. 이중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병에 걸린 것들은 사료로 쓰이거나 박스째 헐값에 팔려나간다. 내가 국민학생 때 샀던 병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걸러진 병아리들은 수천마리씩 컨베이어 벨트로 쏟아져 나오고 숙련된 인부들이 병아리들의 목덜미를 잡고 여러 가지 백신 주사를 놓는데 시간당 3천 마리까지도 예방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한 차례 소동을 겪은 병아리들 중 육계로 팔려나가는 닭들은 아직 산란능력도 생기기 전인 생후 30-35일만(이걸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10살이 겨우 넘은 나이인 셈인데, 재래종에 비하면 3배나 빠른 성장속도)에 시장에 나가게 된다. 유난히 '영계'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인 까닭도 있고, 우리 육계 농장의 질병 오염도가 너무 높아서 체중을 1.6kg 이상 기르면 그만큼 폐사율(20%)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병아리를 30일만에 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료도 남달라야 한다. 사료에는 주로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첨가되어 있는데,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 따르면 법적으로 사용가능한 항생제만도 3백 50여 종이 넘는다. 걔 중에는 이 엄청난 성장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는 병아리들도 생겨난다. 날개를 펼쳐볼 수도, 마음껏 훼를 칠 수도 없을 만큼 좁디좁은 양계장에서 운동부족과 약물남용의 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팔려나가는 닭의 90%가 백혈병이나 암 등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거짓은 아닌 셈이다. 



  패스트푸드점의 매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손님회전율이라는 것이 적용된다. 즉, 좀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빨리 먹고, 빨리 나가줘야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손님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Ray Kroc) 같은 이들은 패스트푸드점의 실내 인테리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유심히 통제(맥도날드에 들어서는 고객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치밀한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된다. 우선 규격화된 메뉴, 제한된 소스 종류, 줄서기 시키는 주문 카운터,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 빨리 먹고 나가야 하는 분위기, 지정된 퇴식구와 쓰레기통 등 고도의 통제 구도 하에서 놓이게 된다)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의 의자가 유난히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보고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빨리 먹고, 빨리 나가달란 뜻이다. 이런 법칙은 양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닭들은 마치 패스트푸드점의 손님처럼 빨리 먹고, 빨리 성장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하기 때문에 30일 동안 고도로 농축된 성장호르몬과 항생제가 범벅된 사료를 먹고 도계장으로 실려나간다.


날 수 없는 새와 레드스킨

   닭의 운명은 그들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 되었던 시절 혹은 그렇게 길들여지기 시작하면서 결정된 것이었을까? 신은 과연 닭을 인간의 먹을 거리로 삼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인가.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들 사이의 해묵은 논쟁을 이곳에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바람구두는 분명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순전히 식욕이 당기기로 말하자면 서구인들 못지 않게 육류 소비를 즐기는 축에 속한다. 오늘날 육식이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는 것은 담배의 해로움과 마찬가지로 이제 의학적 상식 축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채식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이 채식과 더불어 육식을 하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지난 몇년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광우병 파동처럼 인류는 좀더 풍요로운 사회, 기아 걱정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미명 아래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자 지구상의 생명 다양성 중 분명 한 축을 담당하는 가축들을 매우 비자연적,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육한다. 인류의 재앙으로까지 불린 광우병 파동이란 결국 좀더 많은 고기와 우유를 얻고,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완전 채식 짐승인 소에게 단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도태시킨 숫컷 병아리와 소와 양의 내장, 잡고기, 뼈 등을 갈아만든 사료를 먹여 육식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계장으로 실려간 닭들은 커다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싣고 간 닭들을 쏟아낸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옮겨지는 닭들은 일일이 사람들 손에 붙들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쇠꼬챙이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다. 죽음의 사슬에 엮인 닭들은 이렇게 도계장에서 대량으로 도륙되는 닭들은 마치 <치킨 런>의 치킨 파이 자동제조기와 흡사한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60볼트의 전기침 세례와 목 뒤의 경동맥을 자르는 칼날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닭들이 우리가 흔히 어렸을 때 시장통에서 보았던 것처럼 닭의 모가지를 단칼에 딴다거나 잘라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기계가 닭의 머리를 있는 대로 쭉 잡아당겨 끊어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닭의 머리를 끊어내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식도와 내장기관까지 끌려나와 세 사람 정도의 인력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출된 내장은 닭똥집만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물로 팔려나간다.



  <치킨 런>의 진저와 록키처럼 이런 과정을 모면한 닭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 집 마당에 작은 철망 닭장을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닭들은 밤이 되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알을 낳는 항문 부위에는 신경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밤새 휏대에 올라가 잠들지 않은 닭 중엔 닭장에 침입한 생쥐가 항문 부위를 죄다 파먹어도 모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 '닭 대가리'라는 오명을 붙여준 것은 이렇게 항문을 파먹혀 피를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도 평화롭게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을 바라보는 주인의 기막힌 심정이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닭 도축 작업을 주로 밤에만 했다고 한다(물론 닭서리를 해본 분들은 더 생생하게 기억하겠지만). 어쩌다 도축 컨베이어 벨트의 전기침과 칼날을 피해 살아난 닭들은 공포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레드스킨(Redskins) 현상이 나타나는데 육질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 온몸이 붉어져 팔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날아라 병아리, 중독된 소비 사회를 넘어

   현대의 물질문명은 더 이상 기아에 대한 맬더스의 예측이 옳다고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과학이 이루어낸 농경기술의 발달은 식량 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제 굶주림은 분배의 문제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기아선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아이스크림 메이커 '베스킨 라빈스'의 유산상속자였던 존 로빈스는 "매해 기아로 죽어가는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물의 양이 1,200만 톤인데 이 1,200만 톤은 미국인들이 소고기 소비를 10%만 줄이면 얻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말한다. 육류 소비를 억제하고 그 사회적 비용으로 채식을 한다면 좀더 많은 이들에게 풍족한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다만 고민되는 문제는 그렇게 얻게 된 1,200만톤의 곡류를 과연 굶주린 이들에게 앞장서 전해줄 정부와 사회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나는 우선 우리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소 종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식량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소박한 대안은 당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소비란 인간의 삶과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건, 일반 소비재이건, 기호품이건 간에 결국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지본주의가 구축해놓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체제는 소비를 강요한다.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경기변동을 초래해 때로는 경기 부흥을 위해 소비를 촉진한다. 마치 비만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빅맥을 먹으며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하는 것과 같이 낭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 중독되어 있다. 이제 소비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도구이고, 인간은 소비를 통한 자본축적의 수단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과 욕구에 따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프로그램(거대기업의 의도와 광고와 유행 등에서 나타나는 패턴)에 따라 소비한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구자원의 무한정한 소비와 그에 따른 공해. 그로인해 우리 인류의 생존기반이자 물질생활의 토대인 지구를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물론 그전에 항생제 남용과 축적으로 인한 새로운 전염병의 유행이나 호르몬계 이상 등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욕망의 무한 질주인 자본주의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민할 일도 더 이상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2/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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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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