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 <연말정산-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 - 포토텔링기획전




전시기간 : 2009년 12월 31일 - 2010년 1월 20일
참여작가 : 김성헌, 김수진, 이치열, 심현철, 이명익, 정택용, 조재무, 박선주, 한상훈
전시장소 : 사진전문갤러리카페 <포토텔링>
홈페이지 : www.phototelling.net



사진전문 갤러리 카페 포토텔링(Phototelling)은 사진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다는 모토로 만들어졌다. 이들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준비한 기획전의 제목은 <연말정산 -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광학 원리에 의해 사물을 포착해내는 카메라 렌즈에 의해 정착된 사진은 있는 그대로 재현된 광학원리의 결과물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바라본 이의 시선에 의해 포박된 기호(記號)이다. 사진 기호는 작가에 의해 촬영되고, 현상과 정착, 인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발화(發話)한다. 사진은 타인(감상자)의 시선에 다시 포박되는 과정을 통해 수화(受話)된다. 수신된 기호는 타인의 논리와 감정의 미로를 지나 또 하나의 심상(心象)이 된다. 세상의 모든 대화(對話)는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사진의 놀라운 재현성은 종종 화자에 의해 언술된 기호가 모두 사실(fact)일 것이라는 강박을 준다. 그러나 언어가 그러하듯 사진 역시 왜곡될 수 있으며 세상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줄 수 없다. 사진의 놀라운 재현성과 현장성은 그 힘이 강력하면 할수록 그와 반대로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강력한 회의에 부딪치게 된다. 한 장의 사진은 물론이요,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사건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구체적 보편'이다. 사회적으로 무수한 연쇄의 고리를 지니고 있는 구체적 보편의 연쇄 앞에서 한 장의 사진이 구체적 해답이나 대답을 주기엔 너무나 약소하다.




한 장의 사진은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만 한다. 이들의 사진은 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구체적 보편의 연쇄 앞에서 구체적 해답(혹은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 과연 지금도 우리 안의 모순들과 대면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또 사진 속에 담겨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연민이 과연 진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증명사진과 존재증명

문학에서 ‘자서전’이 그러하듯 미술에서 ‘자화상’이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그려 그것을 후세에 남긴다는 의미보다 자신(존재)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의 투쟁을 담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 본질을 묻는 작업이다.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외양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의 온전한 모습을 집약하고자 노력한다. 자화상은 세계에 투사된 자아의 이미지이자, 존재의 확인이며 동시에 세상과 대결하는 자신을 노출하는 첨단(尖端)의 일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획전이 담아낸 우리 시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비록 성긴 모양에 그칠지라도 그 윤곽을 살피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시선을 - 기륭전자(비정규직), 뉴타운, 미디어 법, 세종시, 대통령 서거, 쌍용차 등 -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의 자화상, 대한민국의 증명사진은 참담하다.




1997년 IMF외환위기를 전후해 우리는 ‘희망퇴직’이란 말을 즐겨 들었다. ‘희망’과 ‘퇴직’이란 어울리기 어려운 두 단어가 결합된 형용모순은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 당한 사람들보다 좀 나은 행운을 누렸다는 의미가 되었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우리는 ‘희망의 빈곤’ 시대를 살았다. “잘 살아보세. 누구나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상징하듯 국가가 제시한 근대화의 아젠다는 폭압적이고 봉건적인 노동통제의 시대를 거쳐 근대 포디즘적 노동통제 시대로의 전환기 동안 ‘하면 된다’는 희망을 통해 빈곤을 인내하도록 했다. ‘희망’을 품고 있는 동안 ‘빈곤’은 그래도 견딜 만 했다. 그러나 생산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노동통제를 곧 자율, 자기계발이란 허울 좋은 논리로 전환시키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강제하는 빈곤을 자기계발하지 못한 이들의 자기 책임으로 귀결시켰다. 이제 빈곤은 단순한 절망과 박탈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적 무능력자들의 책임이 되었다.

사회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자 약자들은 자신보다 더 약한 처지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박탈하여 엄혹한 시대를 견디려 한다. 광우병 촛불시위 현장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비롯한 온갖 구호가 나왔으나 ‘비정규직 문제’로 넘어가면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이 아니면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앞에 우리는 모두 잔인한 동맹의 구성원이 되었다. 국가권력, 기업권력 앞에서 모두가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왕따’였다.




이등시민의 사회 - 박탈과 배제의 일상화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처럼 황국시민과 후레이센진(不逞鮮人)처럼 일등시민과 이등시민으로 양분되고 있다. 이런 차별은 단순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만이 아니라 언제 누가 될지도 모를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제의 원리를 관철시킨다. 쌍용자동차는 거친 세계화의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한 이들의 투쟁으로, 세종시는 지역이기주의로, 미디어법은 그동안 안전한 고용의 테두리 속에서 고임금을 누려온 이들의 제 밥그릇 지키기로 폄훼된다. 5.18 광주 민주항쟁 이후 권위를 의심받았던 대한민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거치며 ‘오! 대한민국’으로 찬란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집권여당이 2년 내 정규직으로 전환하란 법 규정을 4년으로 바꾸지 않으면 해고대란이 일어난다며 도리어 난리 치는 국가다. 우리는 빈곤하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빈곤하다. 한 사회가 이처럼 조직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짓밟으면서도 OECD 10위 안에 드는 생산력, 경제력, 경쟁력을 누린다 한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담고 있는 우리 시대 초상의 몇몇 구체적인 진면목을 살펴보자. 1990년 6월에 설립된 기륭전자(Kiryung electronics)는 한국의 위성방송 수신기를 제작, 생산하는 업체로 이 업체가 생산하는 제품들 - 디지털 셋톱박스, 디지털위성 라디오, 네비게이션, 지상파 DMB, HD Radio 등 - 은 대부분 외국에 수출된다. 제조업으로 분류되는 기륭전자지만 이 업체는 지난 2002년 이후 생산직 정규노동자를 한 번도 고용하지 않았다. 2005년 6월 30일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노동부에 기륭전자와 파견업체 휴먼닷컴에 대해 불법파견이라며 진정서를 냈고, 다음달 5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기륭전자는 생산 물량을 중국의 외주업체로 빼돌린 뒤 물량감소를 이유로 계약직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노동부는 불법파견을 이유로 기륭전자에게 개선명령을 내렸지만 기륭전자는 비정규직 중 1년 미만 노동자 전원을 해고한 뒤 이들을 도급으로 돌리겠다며 개선이 아닌 개악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이는 법적으로는 불법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점거농성을 시작하자 공권력이 투입되었고, 조합원 전원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1,000일이 넘는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기륭전자는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지만 끝끝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파견된 사람일 뿐, 기륭전자의 정규직 사원이 아니므로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기륭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비정규직이 무조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고, 이제는 한국에 공장도 없기 때문에 정규직화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륭전자는 이름만 바꾼 다른 공장을 통해 제품생산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용산참사’. 정식명칭은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사건이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5시 33분, 대한민국 수도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 경찰과 용역 직원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경찰특공대 1명, 철거민 5명이 목숨을 잃었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 시절부터 추진했던 뉴타운과 도시정비사업의 결과였다. 서울시가 도시환경정비라는 목적으로 추진했던 도시정비사업은 서울 곳곳에서 벌어졌고, 그중에서 용산 4구역은 한강로3가 일대 5만3,442평방미터를 재개발하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재개발로 인해 인근의 땅값이 크게 올랐고, 그 결과 이 일대 지역에서 상가를 임대받아 장사를 하던 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도시정비사업 관련 법률은 도시개발법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토지 보상법 등 여러 법률체계에 얽혀 있어 일반인들은 설명을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며 복잡한 법률체계의 틈바구니에서 법률이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행정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게 되어있다.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철거현장마다 아수라장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법률체계의 문제다. 그리고 이런 법률체계의 틈새를 이용해 공공연한 불법행위들이 자행된다. 문제는 행정 권력이 토지소유주들의 입장과 세입자들의 입장 사이에서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도시정비사업의 한 주체로서만 인식한다는 데 있다. 서울시와 용산구는 도시정비를 통한 땅값 상승과 이를 통한 세비 증대 등을 이유로 도시정비사업을 강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서울시와 용산구는 토지보상법에 규정된 주거이전비를 철거지역 세입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이들을 강제로 내쫓으려 했고, 저항하는 이들을 범법자로 몰았다. 국가권력은 세입자들을 내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용역들에게는 관용을, 이에 대항하는 세입자들은 범법자로 대했다. 범법자가 된 세입자들 가운데 생계를 위협받게 된 이들이 옥상 건물 위에 망루를 설치하고, 경찰과 용역 철거반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과 신너, 돌을 준비했다. 경찰은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사전에 최소한의 안전대책 마련이나 협상 없이 곧바로 경찰특공대를 진입시켰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용역들을 대동하기도 했다. 화재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에 대해 일각에서는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져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판에 나온 경찰특공대원은 “진압 당시 화염병 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 내부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인터넷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용산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철거민과 조합간의 보상비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이에 주목해 이것을 사회문제가 아닌 세입자와 조합 사이의 문제만으로 축소해서 보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용산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며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도록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구속처벌하고, 범대위 위원장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 역시 마찬가지의 시선이다. 용산참사를 국가권력과 시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세입자와 조합, 세입자가 조합에게 좀더 많은 이주보상비를 뜯어내기 위해 벌였던 시위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UN사회권 규약위원회에서는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이 원치 않을 경우 겨울철과 같은 악천후에는 퇴거를 수행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용산4구역은 2008년 11월부터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국제사회는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고 있다. 검찰은 수사기록 등의 열람, 등사를 거부했고, 법원이 요구한 수사기록 3천 쪽 역시 변호인단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변호인단이 수사기록이 전면 공개될 때까지 공판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끝내 거부되었고, 변론을 거부하자 재판부는 국선 변호인들로 하여금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겼다. 이에 반발한 피고인 9명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운찬 신임 총리는 10월 3일 전격적으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해 자연인으로서 무한한 애통함과 공직자로서 막중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총리로서 사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지만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기는 어렵다면서 당사자 간 원만한 대화가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꼬리를 붙였다. 무한한 애통함과 막중한 책임을 뒤로 한 채 용산참사의 피의자들은 모두 1심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구형한 검찰이나 검찰의 구형 그대로 형을 선고한 법원이나 모두 비인정(非人情)이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곧 만 1년을 맞이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등에 새겨진 짧지만 강렬한 문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외침일 것이다.

“함께 살자”

함께 살자는 기륭전자의 외침, 용산의 외침,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외침을 외면하고서는 올해의 연말정산은 불가능하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후, 2004)』에서 매스미디어를 바라보며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행위, 살아남은 혹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로 고통의 근본원인은 그대로 둔 채 단지 연민하는 포즈만 취하는 것이 주는 가증스러움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실천 없는 연민’은 ‘자기 연민’이자 ‘자기애’의 발로이고, ‘연민 없는 논리’는 잔인하다.



‘엄살’이란 ‘아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보태어서 나타내는 태도’를 일컫는다. 엄살이란 전체를 뜻하는 ‘온(온 세상의 온)’과 ‘살갗’이 합쳐진 ‘온살’이란 말이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준비한 작가들은 그들이 이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온살(엄살)쟁이’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타인이 얼어 죽어도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 살 수 있다. 파업을 주도할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언론인이 일요일 오전 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잡혀가도 누군가는 여전히 평온한 아침을 맞이한다.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아니므로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다면 엄살이란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 혼자만 도덕적인 척 한다거나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엄살'이란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이다. 연인과 다툰 뒤 전화를 받지 않아 애태우던 불통의 기억, 가난하여 차별받았던 기억, 급작스러운 실직으로 고통 받았던 기억, 이런 기억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 엄살의 힘이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우리는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을 통해 내 일이 아닌 일에도 내 일처럼 아파할 수 있다. 인간이 꿈의 세계에서 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꿈꾸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론이야말로 상상력 부재의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의 답답함을 의미할 뿐이다. 손톱 끝에 박힌 가시 하나에서 온 몸의 통증과 불편을 체험하듯 이 사회의 작은 일부가 아플 때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처럼 느낀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포박하여 그려낸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자신이 바라보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진짜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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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발언과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절차에 따라 로케트(굳이 ICBM이라고 하진 않겠다)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 핵의 보유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약소국의 가장 효율적이며 거의 유일한 방법임을 인지할 때, 우리 배달족이 4,300년 만에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 태세를 갖추었음을 또한 기뻐하며, 대한민국의 핵 주권에 따른 핵보유와 장거리 미사일의 보유를 염원한다.”

가수 신해철이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던 중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섯줄의 글을 올렸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앨범 홍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 평가 절하하는 이도 있고, 그의 사회비판정신에 대해 나름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이 글이 핵미사일이라는 위험천만한 무기로 민족의 운명을 줄타기하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그간 남북화해협력정책의 성과들을 방치한 채 사태가 악화되도록 손 놓고 있다가 앞장서서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남한의 이명박 정권을 싸잡아 조롱한 것이라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저 도발적인 해프닝에 그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신해철의 발언에 대해 국회의원 송영선은 “북한 로켓 발사 성공을 경축하는 사람이라면 김정일 정권하에서 살아야 한다”거나,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은 칼럼에서 “신해철 같은 독설가는 북한에선 공개처형감”이라 비판하면서 문제가 더욱 커졌다. 신해철 역시 자위대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송 의원을 친일파라 비꼬고, 셋집 빼서 나가라 호통 치는 집주인에 빗대어 독립투사였던 외증조부 이야기로 맞받아치고 나섰다. 아마도 본인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해철 본인의 의도가 애초에 무엇이었든 ‘라이트코리아’라는 우익단체의 대표가 바퀴벌레나 쓰레기는 치워버려야 한다며 국가보안법 7조 고무찬양죄로 고발하였으므로 법정에 설 운명이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끼리 패를 지어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하는 놀이를 하며 놀았던 적이 있는데, 지금 논설위원과 국회의원 그리고 우익단체 대표까지 나서 “우리 집에 왜 왔니?”라며 묻고, 질문을 받은 사람은 “여기가 왜 너희 집이냐?”고 되묻는 상황이다. 비록 아이들 놀이지만 어느 패에도 속하지 못하거나 선택되지 못하는 아이들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지난 2008년 세상을 떠난 故 이청준 선생의 중편소설 중에 『소문의 벽』이란 작품이 있다. 6.25동란 직후 남해의 작은 포구를 배경으로 밤마다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들이닥친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넌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 대답 여하에 따라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판국이지만 눈이 부시도록 밝게 쏟아지는 전짓불 앞에 서 있는 마을 주민들은 정작 불빛 저편의 사람이 누구 편인지 알 수 없어 잇달아 학살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국가가 인권보다 앞서는, 민족이 핵폭탄으로 스스로의 생존을 보장받겠다고 나서는 현실에서 넌 누구 편이냐고 묻는 국가보안법이 무서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동네 아이들 사이에선 그저 재미난 놀이에 불과하지만 어떤 한 가지 질문을 통해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를 구분 지으며 심판하는 일이 실제 국가 내부에서 벌어질 때 그 결과는 전쟁만큼이나 참혹해진다. 나는 신해철의 비아냥거림이 분명 과잉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를 바퀴벌레나 내다버릴 쓰레기에 빗대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가졌는가를 따질 것이 아니라 농(弄)이라 할지라도 ‘핵의 보유와 장거리 미사일의 보유를 염원’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비판했어야 옳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먼저 아이들의 놀이에도 ‘깍두기’라 해서 이편에도 저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배려해 함께 놀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있는데 과연 우리 사회에 그만한 관용과 상식이 있는지 묻고 싶다.

출처 : <경향신문>(2009.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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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죽산의 평화통일론과 ‘평화통일도시 인천’의 지향>


일시 : 2008. 9. 8.
장소 : 인천발전연구원 2층 대회의실
주최․주관 : 인천발전연구원

 

 


토론문


먼저 인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어윤덕 원장님과 인천발전연구원이 인천이 배출한 정치인이자 평화통일론의 선구자였던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오늘의 이 토론회를 마련해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는 지난 2007년 9월 대통령소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당한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을 결정했으나 그 이후의 후속작업들의 진행이 미진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천을 대표하는 시민재단으로서 새얼문화재단은 그동안 죽산 조봉암 선생을 명예를 회복하고, 선구적인 평화통일론을 기리는 일련의 사업들을 벌여왔습니다. 새얼문화재단은 지난 2000년 죽산 조봉암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고, 당신의 고향인 인천 강화에 세운 조봉암 선생 추모비 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습니다. 이외에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건립사업 등 일련의 활동을 통해 인천이 장차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오랫동안 닫힌 바다였던 황해는 냉전이 해체되면서 다시 한 번 아시아의 지중해로서 과거의 명성을 회복해가는 중입니다. 민주화 이후 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한국전쟁과 이념대립 과정에서 빚어진 수많은 역사적 과오들을 청산하고 정리하는 작업들을 통해 많은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새얼문화재단에서 일한 덕분으로 죽산 선생이 계신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아갈 기회도 있었고, 앞서 김창수 박사가 말씀하셨던 학술심포지엄을 비롯해 국회토론회, 강화도에서 있었던 추모비 제막식 자리에도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죽산 선생의 묘소에 세워진 비석에는 앞면에 죽산 선생의 이름만 적혀있을 뿐 묘비 뒷면엔 아무런 행장(行狀)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유족 분들께서 당신의 명예가 회복된 뒤에야 이곳에 당신의 기록을 채우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죽산 선생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도 무척 오랜 세월이 걸렸고,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강화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죽산 선생의 일문인 창녕 조씨 일족 중 어떤 분은 저희 재단에 ‘왜 당신의 추모비를 세우려고 하느냐?’는 항의를 해온 분도 있었습니다. 이념과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세월이 길었던 만큼 피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유족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실제 역사 속에서도 정권의 변화에 따라 유족들은 다시금 피해자가 되곤 했습니다.

저는 이런 차원에서도 죽산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고 당신의 평화통일 유지를 이어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작게는 인천, 나아가서는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발제를 맡아주신 세 분 선생님의 말씀 역시 이 같은 의미를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발제에서 드러난 것처럼 거시적인 입장 이외에도 오늘의 토론회는 죽산 선생의 평화통일론을 우리 인천의 발전과 어떻게 결합시켜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함께 나누는 자리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선 이현주 선생의 발제는 죽산 선생과 인천이 얼마나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해방 이후 인천에서 죽산 선생이 보여준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역으로 생각하여 해방이라는 중요한 국면을 맞이한 상황에서 죽산 같은 거물 정치인이 서울이라는 중앙 정치 무대를 버려두고, 하필이면 인천을 주요근거지로 택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한때 공산당의 주요 인사였고, 여전히 좌파적인 이념과 정서를 지닌 그가 인천을 주요 정치 무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당시 인천 지역 사회의 정치경제적인, 문화적인 기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이것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재의 인천은 인구 270만의 광대역도시이고, 하나의 도시 슬로건으로 규정되기 어려운 매우 다양하고 다원화된 이해관계를 지닌 도시가 되었습니다. 인천을 미래의 평화통일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에서 이 같은 평화통일론을 제시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 있었을 60년 전 인천과 시민들의 문화적 토대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현재의 인천과 비교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축적된다면 앞으로 인천이 평화통일도시로 나아가는 현실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 발표를 해주신 이철기 교수님의 평소 활동에서도 많은 배움을 얻고 있는데 오늘 발표에서도 거시적인 안목에서 죽산의 평화통일론이 새로운 한반도 구상의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해주신 ‘철학, 비전, 장기적인 목표의 부재’에 대해서는 비록 ‘건국’이냐, ‘정부수립’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어수선한 시절이긴 하지만 죽산의 사상이 여전히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새로운 한반도’ 구상에 있어서 정치적․경제적 남북공동체를 구성한다는 평화통일전략의 수립에 있어서 ‘인천’의 역할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통일이란 과제를 추진하는데 있어 중앙정부의 역할 못지않게 지방자치정부와 시민사회의 역할도 매우 중요할 것인데 이 자리가 구체적인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앞으로 그와 관련한 정책이나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죽산의 평화통일론은 하나의 상징으로서도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 주제 발표를 해주신 김창수 선생님의 발제는 비록 다른 토론자분들께서 지적하셨던 것처럼 학문적 엄밀성이란 측면에선 보강해야 할 많은 부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앞서 오늘 토론회를 기획한 이용식 박사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이 토론회가 학술적 성격 보다는 일종의 정책토론회로서 인천의 미래와 관련해서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명박 정부와 안상수 시장의 인천시 정부의 정책에는 여러모로 유사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외적으로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분배와 내실보다는 개발과 성장 중심의 정책을 우선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과정에서 시민사회와의 소통 부족 현상이 드러나는 것도 역시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용주의란 이념을 떠나 현실에 깊이 착근한 인식일 때에만 비로소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민사회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실용주의는 독단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인천은 대외적으로 명품도시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시민들이 좀더 나은 생활을 꿈꾸고 있지만 명품도시가 담고 있는 정치적 함의 자체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현식 사무처장님도 지적하셨지만 인천은 아시안게임과 도시축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명품도시’라는 슬로건은 내부적인 목표에는 합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것으로는 세계인의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창수 박사님의 주장대로 인천은 한반도 평화통일도시로,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통일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평화통일도시라는 슬로건이 단순한 수사에 그칠지는 몰라도 명품도시를 표방하는 인천시 정부가 인천을 ‘평화통일도시’로 탈바꿈시키자는 시민사회의 주장에 귀기울여주고 소통하고자 시도한다면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도시, 인천의 역사와 남북분단의 첨예한 한 현장으로서의 인천을 기억하는 세계인들에게 인천이 어째서 평화와 통일을 그토록 갈망하는지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좀더 부연해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평화박물관으로 전환시켜 나갈 수 있다면 인천이 평화통일도시로 내실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희 새얼문화재단에서는 앞으로 죽산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과 인천의 평화통일도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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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없는 자들의 고독한 촛불을 넘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위와 집회가 다시 출현하리란 예상은 누구나 했지만 100일도 안 된 시점에서 이처럼 거대한 촛불의 물결이 만들어지리라고는 누구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서울 시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수차가 뿜어대는 최루액에 범벅이 되어 도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경 방패에 내리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헌법 제1조”를 노래하고 컨테이너 장벽을 ‘명박산성’이라 조소하지만 만리장성 같은 장벽, 체제권력을 넘지 못하고 돌아서는 무기력을 반복하는 두려움이었을까. 촛불의 의미는, 촛불 그 이후엔 무엇이 있을까.

대중지성, 촛불시위는 웹2.0의 돌연한 사건인가
“위대한 피플 파워”란 국제앰네스티 조사관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촛불시위에 대한 찬사는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촛불시위 이후 대중은 다중, 대중지성 등 수많은 방식으로 호명된다. 촛불시위가 최고조에 달할 무렵 여러 매체들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앞세워 ‘촛불정국’을 분석하며 “이제 한국 사회의 시대 구분은 촛불 시위 이전과 이후로 나눠 봐야 한다”거나 “현재의 큰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대중들조차 엄청난 역사적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쇠고기 사태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말한다. 인터넷 공간의 웹2.0 민주화 세대란 뉴미디어 담론과 중․고등학생들의 시위참여에 주목해 또 하나의 신세대 담론이 등장한다. 이른바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현재의 촛불 시위를 과거와 다른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은 본의 아니게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를 이전의 정부와는 다른 정부, 6․10항쟁 이후 지속되어온 87년 체제와 다른 정부로 본다는 점에서 보수세력이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 이른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준다. 실제로 달라진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손쉬운 단절을 통해 촛불시위 이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환상 속에서 다시 5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것, 인터넷을 통해 시위가 조직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쌓인 컨테이너 장벽 역시 지난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 APEC 정상회의 장소였던 부산 벡스코 회의장 앞에 어청수 당시 부산경찰청장이 설치했던 전례가 있었다. 또한 경찰의 강경진압을 넘어 군대까지 동원되었던 평택 사태가 이미 있었다. 심지어 브레히트의 시를 빌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체하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라”라는 언론의 비판1)까지도, 지난 정권에 대해 이미 나왔던 비판2)의 반복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부터 한미FTA에 이르는 MB노믹스는 새로울 게 없다. 우리가 ‘세계화’라는 말을 듣기 전부터 정권을 바꿔가며 줄기차게 추진되었던 정책들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이었던 셈이다. 87년 6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체제의 근본을 흔들지 못한 불완전한 타협의 소산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사회적 권력이 아무 탈 없이 보존”되고, “다른 계급들을 계속 착취할 수 있고 소유”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빠뜨린 결과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보수화 흐름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87년 이후 계속된 현상이다. 87년 이후 대중이 보수와 개량에 동의했건, 그렇지 않든 시민권력이 회복해 국가권력에 위임했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위축되었다.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모든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대통령이 고백해야할 만큼 “정치적 무권리 상태”3)가 극도로 심화되었다. 이 같은 인식 없이 촛불시위대를 갑작스럽게 출현한 새로운 시민으로 규정하는 것은 ‘기억 속의 민주화’에만 집착하면서 퇴행의 길을 밟아온 지식인, 시민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정권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졌다고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

‘순수한’ 시민을 넘어 ‘정치적’ 시민으로
이번 촛불시위의 긍정적인 특징은 이른바 ‘깃발 없는 자’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라 할 만한 다양한 시위주체들의 자율성과 문화적 이벤트, 자유로운 토론이라는 카니발적 속성에 있었다. 지배 권력과 보수언론들은 촛불시위의 정치적 배후설을 주장하다가 시민들의 분노에 직면한 뒤부터는 도리어 시민들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보수언론들의 이런 규정과 달리 촛불시위는 애초부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치적인 시민들의 시위였다. 그것이 애초부터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권력의 환수 요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탈정치적인 시위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권력과 보수언론은 ‘순수한 시민’을 끝없이 강조함으로써 시위 주체들의 정치적 지향과 언어를 이간했고, 궁극적으로는 자기조직화를 통해 사회공동체와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시민직접행동이란 가장 정치적인 행위의 한 가운데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은 ‘순수한’ 시민이란 거대한 강박에 사지가 묶여버렸다.

사회운동은 유동적인 사회현상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어렵고 동원국면이 지나면 와해된다. 사회운동은 특수한 과제가 있는 조직으로 바뀌거나 기존 정당에 흡수된다. 그럴 경우, 뒤를 잇는 조직이나 정당이 원래 운동의 가치와 목표에서 나온 선택되고 변화된 자극을 넘겨받을 경우에만 ‘효과’가 나타난다. 사회운동은 조직으로 가는 문지방을 넘어서지 않으면, 복잡하게 얽힌 소집단이나 하부문화적인 생활 방식 혹은 특수한 세대의 기억공동체 속으로 용해된다.4)


어떤 이들은 촛불시위를 서구의 68혁명에 비유한다. 일부에서 대통령 탄핵 같은 구호가 등장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검역주권 수호를 통한 국익사수, 경찰에 대한 시민보호, 행정고시 절차 준수 같은 법질서, 기존 패러다임의 준수를 요구한 측면이 더욱 강했다. 세계화라는 국가를 초월한 패러다임 전환의 충격에 장기간 노출되었던 대중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변화된 패러다임은 국가권력이 초국가적 자본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주었다. 초국가적 자본의 공세에 직면한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은 국가권력과 재벌이라는 국내자본의 위기 혹은 호응을 바라보며 혼미를 거듭했다. 거듭되는 혼돈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펼쳐놓은 사적 욕망의 회오리는 민주화운동기를 통해 구축되었던 개인의 사회적 연대망을 파괴했고, 시민들 스스로를 자가 발전하는 펀드매니저로 재사회화(resocialization)해 나갔다. ‘금모으기 운동’ 이후 대중이 자발 혹은 동원의 형태로 등장한 사건들 -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등 - 은 외환위기를 통해 확인된 국가(권력)의 취약함에 대한 반동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 것은 ‘지식정보사회강국’이든, ‘동북아중심국가’이든 초국가적 자본의 상위를 점하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대중의 위기의식이었다. 중산층의 씨가 마르는 상황에서 이른바 ‘대박’, ‘부자되기’를 통해 삶의 수준을 유지하고 싶은 중산층 서민들의 욕망이 그 배후에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정치적 발언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대신 대중을 사적 욕망의 실현이라는 개별화된 그물망에 가둔다. 신자유주의의 변화된 패러다임은 자본이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 대신 사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노동을 수행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강박을 심어준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중으로 하여금 극도의 긴장 속에서 소비적 욕망의 추구를 자아실현 욕구로, 자본이 강요하는 업무능력강화를 자기계발로 착각하면서 자신과 무한경쟁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이처럼 더욱 촘촘하고 정교해진 사회적 그물망은 시청 앞 광장을 카니발 광장으로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가두리 양식장으로 만든다.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서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다던 대통령이 초등학생까지 닭장차에 가둬버릴 만큼 소통두절 상황이란 사실이 확인되면서 인터넷에는 촛불시위에 대한 비관적 예측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발언의 자유를 허용하는 대신, 국가권력은 시민들이 체제의 패러다임을 감히 전환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으로 촛불은 끝난 것일까. 사제단이 승리를 선언한 뒤, 광우병대책회의가 주최하는 촛불문화제 현장에는 이제 문화제는 그만하고, 새로운 투쟁에 나서자며 격앙된 목소리로 항의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비록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대중의 숫자는 크게 줄었지만 이것으로 촛불이 꺼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립이 아닌 소통과 연대의 촛불
촛불시위의 승리와 패배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촛불시위는 다소간의 역기능이 있다 할지라도 인터넷이란 소통의 광장이 대중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정부수립 60주년이 되는 오늘, 대의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이란 시스템 안에서 국가권력과 시민권력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정치적 광장들이 존재하는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커다란 의문을 남겼다. 시민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촛불의 행렬을 만들어냈고, 시위가 계속될수록 민주화 이후 20년의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제도정치의 한계가 노출되었다. 국가권력과 제도정치의 실상이 대중의 투쟁에 의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지고, 대중의 통찰이 놀라운 모습으로 표출되면서 시민의 축제, 새로운 문화로 찬미되었던 촛불시위는 갖가지 방식으로 규탄 받는다. 그사이 정치는 국회의사당 안으로 슬그머니 환수되었다.

지배계급은 대중이 보수적일 때 그들의 우둔함을 두려워하고, 대중이 혁명적일 때는 그들이 보여주는 통찰력을 두려워한다. 시민대중은 거리에서 직접행동을 통해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고, 경계를 넘어 확장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배질서가 교묘히 직조해둔 ‘욕망의 배치’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중 역시 체제의 외부를 상상할 수 있는 통찰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현실정치는 우리가 무엇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따라 달리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순수한’ 시민이란 허구 속에 갇혀있는 한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적 제도에 머무를 뿐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촛불을 들었지만, 그 촛불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 사회적인 개인의 것, 고립이 아닌 소통과 연대의 촛불이다. 깃발 없는 자들의 고독한 촛불을 넘어 지금 우리는 새로운 깃발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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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형철, 「브레히트가 대통령에게」, <한겨레21>, 2008.06.12.(제714호)
http://h21.hani.co.kr/section-021158000/2008/06/021158000200806120714039.html

2) 강양구, 「유시민 의원, 차라리 국민을 '새로' 뽑지 그래! 」, <프레시안>, (2007. 07. 13)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713155430&s_menu=정치

3) 그들 자신의 이해가 자신들에게 자기 통치라는 위험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 국내에 안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부르주아 의회가 조용해져야 한다는 것, 자신들의 사회적 권력이 아무 탈 없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 부르주아 개개인은, 자기 계급이 다른 계급들과 나란히 매한가지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빠져 있어야만 다른 계급들을 계속 착취할 수 있고 소유와 가족과 종교와 질서를 별 탈 없이 계속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자신들의 머리에서 왕관이 벗겨져야만, 또 자신들을 지켜줄 칼이 동시에 다모클레스의 칼이 되어 자신들 자신의 머리 위에 있어야만 자신들의 돈주머니가 구출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 칼 마르크스, 김태호 옮김(2002).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2』, 332쪽.

4) 잉그리트 길혀 홀타이, 정대성 옮김(2006), 『68운동』, 들녘, 175-176쪽


출처 : <실천문학> 2008년 가을호(통권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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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이 아닌 ‘살림’의 정치

정권교체기마다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는 TV드라마 중에서 특히 ‘사극’이 큰 인기를 얻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던 1998년엔 드라마 <용의 눈물>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던 2003년엔 드라마 <태조 왕건>이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엔 드라마 <이산>과 그 뒤를 이어 <대왕 세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권교체기에 사극이 특히 인기를 얻는 까닭은 비록 드라마의 형태이지만 이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선 ‘평화적 정권교체’를, <태조 왕건>에선 ‘외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통일의 대업’과 ‘지역화합’에 대한 바람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사극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를 주로 다뤘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이산>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이 추진했던 개혁정책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제왕학’의 또 다른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어떻게 해야 개혁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치열한 이념대립 끝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얼마 전 정부수립 60주년을 경과했다. 조선의 건국 과정 역시 그 못지않게 치열했다. 고려 유신들을 처리하는 과정이 그러했고, 형제간에 피 흘리는 권력투쟁으로 유혈이 낭자한 건국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정권을 탈환한 이들은 그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하지만 건국 60주년을 논하는 마당에 민주화 이후 지속된 정부들과 현재의 이명박 정부를 단절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아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김영삼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이래로 5년마다 우리는 과거와의 거듭되는 단절과 청산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로는 청와대의 행정직 관료들은 물론 정부가 투자한 공사 사장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새로운 정권 쪽 사람들로 바뀌어 나갔고, 때에 따라서는 지난 정권에서 일한 사람들을 조사해 감옥에 보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스스로를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비하하는 공무원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 이후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태종의 치세만을 따랐던 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의 4대 임금에 오른 세종은 태종의 장자도 아니었고, 대내외적으로 태평성세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외삼촌과 처가 일족이 거의 몰살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자신의 치세 기간 동안 한 명의 대신도 죽이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치세를 더욱 빛냈던 인물로 오늘날까지 청백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황희조차 처음부터 세종의 사람이 아니었다. 황희는 그 자신도 흠결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세워 양녕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다가 태종에 의해 귀양까지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조선은 작은 나라이고 인재는 다시 얻기 어려울 만큼 귀하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능력에 따라 등용한다.

대통령 이명박에게 국민이 기대한 통치이념은 아마도 ‘경제 살리기’로 상징되는 실용주의 노선이었을 것이다. 실용주의하면 떠올리게 되는 등소평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것이 최고”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핵심도 이념이나 노선이 아닌 능력 위주의 인재채용을 의미하는 것이고, 프랑스의 우파 정치인 출신인 사르코지 대통령도 국가개혁의 밑그림을 그리는 프랑스성장촉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좌파 지식인인 자크 아탈리에게 맡겼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용주의의 첫걸음이란 자기 인맥의 사람을 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반대파라 할지라도 포용하고 화합하는 능력 위주의 인재채용으로 출발한다. 이제라도 ‘죽임’이 아닌 ‘살림’의 정치, ‘신뢰’의 정치가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출처 : <인천일보> 2008.09.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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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만의 민주주의를 끝내야 한다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에코리브르, 2008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광화문 시청 앞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여 벌이는 촛불 시위가 30여 일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시위는 서울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2의 6월 항쟁이 되는 것이 아니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시민 사회의 목소리에 맞서는 정부의 자세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아니 정부의 자세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고, 시위대에게는 가차 없이 물대포 세례가 가해진다. 대테러진압용이라던 경찰특공대까지 동원되는 모습은 살인적인 진압으로 악명 높았던 5공 치하의 백골단을 연상시킨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경험한 시민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과연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은 시민 대다수가 남아있는 수도 서울에서 비밀리에 철수하며 한강철교를 폭파해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에게 특수부대까지 동원해 총기를 난사했다. 1987년 정부기관원들이 대학생을 물 고문하다가 살해했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정권은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평택 주민들을 군대를 동원해 철조망을 둘러친 제2의 게토에 가두고 강제진압했다.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시위대에 뿜어져 나오는 물대포의 극적인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서서히 데워져가는 솥단지 안의 개구리처럼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회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변모해간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고, 시장에 가기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석유에 기초한 문명의 문제,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것이 현실이니 어쩌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현실주의’엔 눈앞에 빤히 보이는 ‘현실’은 없고, ‘주의’만 남아있다. 그동안 우리가 석유와 제3세계를 불태우는 대가로 누려왔던 값싼 농산물의 시대, 녹색혁명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현실엔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삼성 이건희 회장은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천 명,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경쟁력’과 ‘시장경쟁력’ 강화라는 주문 앞에서 한껏 움츠러든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한 명의 천재가 만 명 분의 월급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 사람이 소비하는 부스러기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 과연 우리들이 추구해야 하는 선진사회의 진정한 모습일까? 로버트 프랭크 ․ 필립 쿡이 말하는 승자독식사회란 어떤 것일까?

『승자독식사회』는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통해 최대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얻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요구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국 사회 내부의 사회적 양극화(승자독식)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승자독식현상은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한 정보혁명, 글로벌 네트워크의 확대와 관세축소 등 규제 없는 시장의 세계화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통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1992년 슈테피 그라프는 상금으로 16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 그녀가 선수보증광고와 시범경기로 벌어들인 돈을 합하면 이 액수의 몇 배였다. 그러나 그녀의 수입은 당시 최고의 라이벌인 모니카 셀레스의 수입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4월 셀레스가 관중에게 칼로 찔려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라프는 절대적 수준에서 볼 때 경기력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많은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43쪽>

정말 우리들은 능력 있는 일등 인재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까?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앞서 두 테니스 선수의 경우처럼 이런 주장은 허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독식사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우리가 동네놀이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놀이기구 중에 시소가 있다. 시소게임이란 놀이상대끼리 서로 균형을 이루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즐기는 게임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다소 몸무게가 나가더라도 그만큼 앞으로 당겨 앉거나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쪽에 다른 사람이 더 앉도록 한다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승자독식사회는 삶의 즐거움 혹은 지속을 위한 균형을 맞추는 시스템이 붕괴된 사회다.

예전에 아이들이 즐겨 찾던 군것질거리 중에 “젤리뽀”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상품명을 이용해 노래가사를 바꿔 부르곤 했다. 무척이나 살벌했던 그 노래 가사는 이랬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자본주의 시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바꿔 불렀던 노래가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대박과 쪽박 사이의 갈림길에서 개인이나 기업, 심지어 국가조차도 과거 냉전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저마다 핵군비 경쟁에 나섰던 것처럼 승자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을 치른다.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무한대로 펼쳐질 것 같았던 핵무기 경쟁도 군비축소조약을 통해 결국 제약이 가해진 것처럼 시장이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무한경쟁에도 일정한 규제가 가해져야만 현재의 승자독식 제로섬게임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파국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파국은 석유자원의 고갈과 함께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친기업적(Business Friendly)인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을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갈 것인가?

끝장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새로운 군비경쟁의 시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의 에르베 캄프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며, 현재의 민주주의의 시스템으로는 그것을 통제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생태적이라고 여겨왔던 ‘지속 가능한 발전’도 이미 너무 늦은 일이 되었으며, 도리어 이 용어가 현재의 심각한 위기를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는 ‘생태학’이라는 비속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의미론적인 무기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제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미덕을 믿는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한 번쯤 자문해보기 바란다. 그들은 정녕 산림벌채, 온실효과를 만들어내는 가스 배출, 시골길의 아스팔트화, 전 지구를 자동차로 뒤덮는 것, 수질 오염 등 이 모든 것이 점점 도를 더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몇 가지 반가운 소식 - 교토 의정서 체결, 몇몇 야생 생물종의 건채, 친환경 농업의 도약 등 - 은 작은 투쟁의 성과와 상황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된 물줄기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1938년에 살고 있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41쪽>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구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고, 작지만 소중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왜? 매일 더욱 많은 숲들이 사라지고,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가스 배출은 나날이 늘어나며, 어째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도 누리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나?

세계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과잉투자지만, 개별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고화질 텔레비전(HDTV)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는 식량과 보건에 투자를 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보다 고화질 텔레비전 제작기술이 뛰어난 국가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화질 텔레비전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면, 거기에 들인 연구개발비를 뽑고도 남기 때문이다. …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191쪽>

20세기 후반부터 자신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에 투자하며 환상적인 발전을 거듭한 중국과 인도는 2004년 한 해 동안에만 각각 47억 700만 톤과 11억 1,3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분야에서 단연 으뜸은 미국으로 같은 해 59억 1,2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세계는 파국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2005년 교토의정서를 발효시켰지만,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2001년 3월 탈퇴해 버렸다. 세계화에 의한 국가 간 승자독식경쟁은 과거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대신하여 새로운 형태의 무한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작게는 일국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과 크게는 세계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국가들의 투쟁이 지구의 파멸적 상황들을 극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놓은 결과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에르베 캄프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가진 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왜곡된 민주주의의 과두정치체제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사실상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 - 경쟁력을 상실한 고비용 저이윤의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해소 - 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기술 차이는 미미해졌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뒤처진 선진국들은 제조업을 포기하는 대신 지식서비스산업(금융 등)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 역시 미래의 성장 동력은 지식 경제 산업에 달렸다는 명분 아래 IT, BT, CT의 순서로 산업구조를 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본과 자본의 투쟁이라는 투기화된 금융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한 차례 경제위기를 경험한 기존의 사회권력은 재벌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승자독식시장의 과잉경쟁을 개인이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화된 시장 앞에서 개별 국가의 정부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다.

가진 자들의, 가진 자들에 의한, 가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끝장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광화문 네거리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거나 투표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어째서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를 놓고 ‘황금분할’이니 ‘절묘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인 ․ 관료들은 평범한 유권자들과는 거리가 먼 계급일 뿐이다. 미국의 ‘투표와 민주주의 센터'가 미국의 의회 선거를 분석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선거에서 정책 경쟁이 치열할수록, 다시 말해 후보자나 정당 간에 정책이나 이념, 철학적 차이가 큰 선거일수록 투표 참여율이 증가한다고 한다. 만약 정치인들 사이에 시장경제에 대한 운영방식, 민영화, 소비와 조세 감면, 탈규제, 부유한 투자자들에 대한 정책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현대의 수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들이 투표 참여를 귀찮은 의무로 생각하는 것이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는 말이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더라도 이것이 상대 정당의 지지율과 연결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민주주의(democracy)가 ‘demo(인민)’+‘kratos(지배)’,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민주주의는 무지한 대중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회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의 선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인민에 의한 지배를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무지한 인민대중이 아니라 바로 직업적인 정치인 계급에 의한 과두정치, 즉 정치인들이 입을 모아 사수하자고 외쳐대는 ‘자․유․민․주․주․의’다. 이라크 파병부터 시작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한미FTA까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조차 강행하는 것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다. 이럴 바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도 재판의 배심원처럼 인민대중 가운데 추첨으로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정치체제일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어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이라지만 청와대엔 특급 한우가 공급된다. 가진 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도 유기농 한우만을 먹을 충분한 재력과 의지가 있다. 이처럼 소수의 승자들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 체제는 실제 대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유권자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늘 반대의 행동을 취한다. 가진 자들의 소유인 언론과 미디어는 이것을 정치인들 개개인의 전형적인 위선이라 공격한다. 그러나 거대기업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곧 정치라는 것을 뼛속 깊숙이 체득한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이다. 정치인과 정당, 정부의 기만행위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적대감을 이용해 보수언론들은 ‘부패’ 혹은 ‘무능한’ 정부 대신 ‘정직’하고 ‘효율’적인 시장을 칭송한다.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세워 보상해주는 정부라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선 반정부적 수사까지 동원하는데 능숙한 그들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회적 회전문 시스템을 이용해 권력과 다시 한 몸이 된다.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승자독식경쟁을 멈출 의사가 전혀 없다.

홀로세의 공룡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20세기의 문명을 후세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도 점점 자명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20세기를 ‘화석연료의 시대’, 우리들을 ‘홀로세(Holocene)의 공룡’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2008)의 연간 에너지 전망에서 2030년 전 세계 원유의 하루 평균 생산량을 종전 1억1600만 배럴에서 1억 배럴로 하향 조정할 전망이다. 그동안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문명의 위기,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생태 위기를 지적했던 수많은 이들의 염려처럼 산유국의 석유 생산은 이제 정점에 도달했다. 석유 생산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일피크론은 더 이상 우려나 기우가 아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의 역사발전은 없다고 할 만큼 자신만만했었는데 어째서 오늘의 우리는 이토록 커다란 불안과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승자독식사회』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흡사한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승자독식의 원리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되어갈 것이다. 정부의 결단력 있는 정책들이 소득불평등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의 승자들은 언제라도 어느 한 나라의 세율이 높아지면 조세피난처를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한경쟁에 재갈을 물리자는 새로운 군비축소운동에 세계적인 시민 연대가 요구되는 이유다. 이처럼 두 권의 책 속에 그려지는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는 너무나 암담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결정적인 파국의 도래가 오기 전에 우리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이 그 시작을 알리는 일이길 바란다.

출처 : 환경과생명.2008.여름호(통권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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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은 가능한가
- 이명박 시대의 문화운동, 어디로 가는가

저는 지역에서 발간되지만 전국적으로 소통되는 계간지 편집장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계간지는 월간지나 주간지처럼 특종을 쫓는 것처럼 시대의 이슈를 쫓아가기 보다는 담론의 생산과 매개, 비평에 주력하는 편입니다. 계간지의 책무는 시대를 읽어내고, 그 안에 은폐되어있는 구조를 밝히고 드러내어 지식사회로부터 파급되는 학문적 . 담론적 이슈를 생산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계간지는 지식과 담론의 최전선일 수 있고, 또 다른 의미에서 오늘 저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 가운데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내용이 다분히 원론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든 이미 많이 나왔던 이야기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기도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만약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여, 즉 더 이상 ‘지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억압만을 행사함으로써 ‘지배’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대중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되고 과거에 믿었던 것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이다. 이러한 공백기에 대단히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 - 그람시, 『옥중수고』 중에서

체제에 대한 고민 없는 문화담론은 정책 판타지

그람시의 말에서 지배계급을 진보 혹은 좌파로 살짝 비꼬아놓으면 현 단계 우리 문화운동 진영이 처한 현실과 흡사합니다. 민주화 이후 문화운동의 현재는 최근 들어 정치적 투쟁에서 패배했을 뿐 아니라 문화투쟁, 즉 ‘정서와 의식’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도 패배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문화운동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아방가르드가 되어본 적도 없고, 과거 1980년대 운동적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했습니다. 그 사이 변화된 현실 속에서 대중의 삶과 일상은 주변적인 것으로만 남았습니다. 경제위기 이후 새로운 문화투쟁이 대중의 경제적인 토대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조차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사실상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 - 경쟁력을 상실한 고비용 저이윤의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해소 - 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는 미래의 성장 동력은 지식 경제 산업에 달렸다는 명분 아래 IT, BT, CT의 순으로 매달렸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자본과 자본의 투쟁이라는 금융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한 차례 경제위기를 경험한 뒤 사회권력은 재벌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 운동으로 출현했던 노동계급운동은 조합투쟁으로, 계급 위주의 단선적인 운동 방식을 비판하며 출현한 생태운동, 여성운동, 소수자, 문화운동 등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체제의 내성을 강화하는 운동으로 변질되거나 대안담론을 창안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효관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고명철 문학평론가,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요즘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담론의 출처는 대부분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팅 이론(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고, 심지어 너무나 반혁명적이라 혁명적이기까지 한)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문화담론 역시 이윤 중심의 마케팅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80년대 기동전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자본과의 대결은 진지전의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문화운동의 담론이 만들어냈던 진지는 더 이상 진지가 아니라 적과 동침하는 곳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한다는 것은 지난하고 괴로운 투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싸워야 하는 피터팬처럼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담론의 위기를 염려하는 것은 당장의 끼니를 잇는 일에 비해 덜 중요한 일로 간주되지만 당장의 끼니를 잇는 일과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동시에 시급한 일이며,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무시되거나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새로운 위기가 아니라 아직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닥친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담론의 위기 - 이명박 정부의 출현이 위기인가? 민주화 이후 20년의 위기인가?

롤랑 바르트는 “거짓말보다 신화가 더 많은 것을 속인다”고 이야기했는데, 정권을 재탈환한 측이나 정권을 빼앗겼다는 측이나 ‘잃어버린 10년’이란 표현은 생각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진보대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잃어버린 10년’은 정권교체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1987년 이후 전반기 10년이 영남 지역주의에 기초한 노태우 ․ 김영삼의 연속 정권이었다면 1987년 이후 후반기 10년은 호남과 비영남 지역주의 연합에 따른 김대중 ․ 노무현의 연속 정권이었습니다. 전반기 10년과 후반기 10년을 ‘민주 대 반민주’, ‘진보와 보수’, ‘통일 대 반통일’의 패러다임만으로 규정한다면 현실의 일부 양태만을 확대해석하는 겁니다.

현재 담론의 위기는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정치 / 사회 / 문화의 전 영역에서 일어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혁신과 변화의 속도에 성찰과 사유의 속도가 뒤따르지 못하면서 체제의 바깥을 상상해내지 못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표면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따른 경제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궁극적으로 현재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담론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부터 1987년 체제의 종말, 진보담론의 위기를 말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현실에 착근한 담론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이 있었지만 그 당시 논쟁과 요즘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평등파와 자주파 논쟁 사이에 질적인 비약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문화운동을 일컬어 문화연구 없는 문화운동의 시대였고, 1990년대 후반은 문화운동 없는 문화연구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1980년대 문화운동의 내부에는 사회주의적 대안 담론과 민족주의적 대안 담론이 나름대로 각축을 벌였고, 이 둘을 봉합해온 것이 민주화 담론이었습니다. 절차적 민주화 이후 새로운 담론은 생산되지 못했거나 과정 중에 있고, 1990년대 이후 문화운동은 국가의 문화정책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국가의 문화권력과 시장자본주의의 문화적 독점에 반대하는 등의 제도적 개입(다시 말해 문화정책의 비판, 기획, 실천)으로 방향을 선회해왔습니다. 1990년대 이후 200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현재의 문화운동은 운동 없는(문화정책운동이 아니라) 정책문화운동이 되었고, 장기적 전망 없는 운동이었다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현재까지 연결되는 문제인데 1980년대와 1990년대 문화운동에 공통적으로 내포된 문제 중 하나는 대중과 일상에 대한 중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운동 자체의 측면에선 여전히 대중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겁니다. 전자가 운동적 관점에서 예술가들의 예술적 형상화 작업을 통해 대중의 계급적 각성을 이끌어 내려는 문예운동이었다면, 후자는 비판적 현실개입을 통해 정책화하려는 과정에서 문화기획자들의 지식인 운동(시민운동, 청원권 운동)으로 변질되면서 대중을 참여로부터 소외시켜왔습니다. 2000년대 내내 지역과 대중을 이야기했지만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대중 속에 깊이 착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화운동의 위기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배태되어 온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문화운동만이라도 다른 세상을 꿈꿔보라!

‘노동사회’로 표상되는 1980년대 문화운동 내부의 반체제적 지향과 변혁적 과제들은 1990년대 이후 문화민주주의, 문화적 권리 확대를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어 가는데, 이 같은 방향 전환의 지향점은 국가의 문화정책에 참여함으로써 문화적 공공영역을 확대하는, 장기적으로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이행이었습니다. 문화사회란 자본의 발전된 생산력을 기초로 노동시간을 감축하고 자유 시간을 증대하여 자유시간의 자기조직화를 통한 문화 활동의 증대가 삶의 중심적인 활동이 되는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합니다.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권리 확대 투쟁이 필요하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화운동은 자체적으로 정치적 변화와 노동운동 및 시민사회운동과의 적극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문화사회’론은 과연 우리 현실에 적합한 것인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담론이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화사회’론은 시민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성숙했다는 유럽식 민주주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상부를 점유하고 있는 유럽의 경제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20대 80 사회’로 표상되는 사회양극화에 노출된 한국사회의 현실에 부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자본주의 혹은 체제가 타협에 나설 것이라는 전제가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현실 자본주의에 대한 지나친 낙관에 의존합니다. 과거의 제3세계 담론에 비추어보았을 때, 문화사회론의 밑바탕에는 대한민국 사회를 기본적으로 제1세계 혹은 그 연장선상으로 규정하고, 다른 여타 지역에 대한 배려가 없는 담론이기도 합니다. 유럽식 민주주의, 유럽식 문화에 대한 동경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선 또 다른 문화적 제국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낙관은 민주화 후반기 10년,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문화운동 전체를 관류하는 흐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화운동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정책에 개입하고, 한정된 재원 속에서 분배와 권리보장의 시민권 운동이 되었다는 것은 체제내부로의 포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란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대중이 느끼는 체감온도와 문화운동과 문화권력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비슷할까요?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우기동 경희대 철학과 교수, 최준영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팀장

문화운동의 시민운동화 흐름은 대중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미 문화적 시민권을 확보한,  이해관계에 따른 주류운동이 되었습니다. 비록 사회의 다른 영역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열악한 조건에 놓인 입장이므로 억울하겠지만 ‘잃어버린 10년’ 동안 문화운동이 좀더 마이너한 입장의 사람들(대중)과 얼마나 연대했었는지 반추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1988년 UIP영화직배 이후 20년, 1998년 IMF외환위기 이후 한미투자협정을 기점으로 10년 간 지속된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과 결합되면서 문화운동의 중요한 아젠다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반대투쟁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비판의 주된 요지는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이 국산 영화를 “21세기 복합영상산업의 핵심 고리”이고 “미래경제의 핵심성장엔진”이라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문화예술을 산업으로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영화산업 내부구조의 민주화,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는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이 농민들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투쟁보다 더 큰 공감대를 얻었는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은 일상의 정치적 상상력에 달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재의 문화운동은 문화정책적 차원에서 문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하부구조로 포섭되었고, 자본주의 국가의 우파정치와 조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문화운동의 공공성은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민사회 내부의 냉소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냉소는 다시 사회적 ‘재봉건화’의 위험으로 나타났습니다. 문화운동의 미래는 문화운동과 담론이 애초에 출현할 당시에 품었던 비판 의식 - 사회의 제 분야에 널리 분포하여 존재하는 권력의 다양한 형태를 폭로하고, 논쟁적인 비판 - 을 회복하는 데 있으며 문화운동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는 문화민주주의를 보다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로 심화시키고 확장해나가는 데 있습니다. 현 단계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중심, 운동의 주체, 운동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와 성찰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문화운동 프레임은 단순히 개혁정당의 구조화와 정책의 부재로 인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실제 생활 근거라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정치적인 영역에서 실패한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 실패의 내용을 좀더 차분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좀더 나은 공동체사회를 만들어가는 방법 중 하나는 올바른 국가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에 있긴 하지만, 시민사회가 국가정책에 지나치게 목을 매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국가권력에 너무 많은 권력을 위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이는 국가권력이 약화되는 세계화 시대의 현실에서 궁극적으로 재벌권력에 목을 매는 상황이 됩니다. 책임질 수 없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과 실질적인 물적 토대(실천력)를 구축하는 일 사이에서 이제 문화운동은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모든 정치적인 것들의 귀환을 위하여 싸워야 할 때이고,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는 일은 장기적 전망, 다시 말해 담론과 철학을 귀환시키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위의 글은 민예총이 지난 1월 24일 주최한 신년토론회 <이명박시대의 문화운동, 문화정책 ⓛ - 오늘의 문화운동, 어디로 가는가>에서 토론자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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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오늘(2008. 1.17.) 망명지를 살펴보니 1,634,035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카운터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처음 홈페이지를 만든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제 이야기를 하며 살았습니다. 인터넷 공간에 작으나마 사람들과 소통할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던 건 지난 2000년 8월 1일의 일이었으니까, 햇수로는 올해가 9년, 다가오는 8월이면 만 8주년이 됩니다. 홈페이지 이름이 왜 하필이면 ‘망명지’일까? 때로는 스스로에게 반문합니다.


뭔가 대단한 고민이 있었다기 보다 점점 새로운 해몽을 저의 꿈에 덧대어갔던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꿈보다 해몽이었던 거죠. 아니면 최인훈 선생이 어디선가 들려주었던 말이 오래도록 제 뇌리에 남았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오래전 일이라 어쩌면 저 혼자만의 기억이 최인훈 선생을 들먹이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는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달리 망명을 할 수가 없어서 불행하다’는 말이 저는 이 땅의 숨막히는 현실, 분단의 현실, 상상의 한계를 미리 규정지어 버리게 만든 답답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그만해둬. 나는 너의 인형은 아니잖아!

말은 삼천리 화려강산이라지만 반 토막 난 땅에 살다보니 어딜 가나 늘 고추장, 된장에 쌀밥, 김치를 먹고, 다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탓에 몇몇 사투리의 단어 뜻을 몰라서 그렇지 서로 못 알아 듣는 말이 없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근대화 이후 일일생활권이 된 덕분으로 전국 어디든 하루면 왕복할 수 있는 땅에 살고 있습니다. 망명은커녕 숨어서 못된 짓 한 번 하기도 어려운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입니다. 그런 탓인지 가끔 민족애(民族愛)의 발로와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휴전선이 답답하고, 갑갑해지곤 합니다.

기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밑도 끝도 없이 먼 이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 살다보면 실제로 하기는 어려워도 계획조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실, 휴전선은 땅만 분단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상 속에도 이미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오곤 합니다. 조국을 떠나기 위해 우리는 섬나라 사람들처럼 배 아니면 비행기를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가도 가도 첩첩산중인 개마고원의 깊은 품에서 쌓인 눈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잔가지 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하얗게 지새워 보고 싶지만 이미 마음으로부터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단일민족의 신화는 구성원들의 실제 혈연적 구성이나 유전적인 측면에선 사실이 아니라도 문화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족은 때때로 남이 보지만 않는다면 가져다 버리고 싶은 족쇄가 되기도 하고, 한 번의 입시로 결정되는 학교라는 이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평생 동안 발목을 잡는 굴레가 됩니다.

혈연, 지연, 학연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사회라는 거대한 매트릭스(네트워크)의 하부 구조 중 하나로 ‘나’라는 존재의 위치를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규정짓는 틀이 되곤 합니다. ‘나’는 문화라는 거대한 매트릭스 속에서 한 번도 나 아닌 다른 존재, 아니 진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고민해볼 틈도 없이 족보에 기록되고, 학적부에 기록되고, 주민등록부에 기록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문화망명지라는 거창한 이름, 문화와 망명의 개념을 결합시키면서 나는 타락하지 않겠노라. 이곳에서 나의 깃발을 올리고 타협하지 않는 마음으로 홀로 비장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결심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람구두'라는 익명의 페르소나 뒤에 숨지 않으면 안될 만큼 나약한 한 인간이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쓸쓸함과 변해버린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씁쓸함을 담아 누군가 나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들에게 보내던 유리병편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 공간에 띄어 보냈던 무수한 유리병편지들은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응답을 받았고, 때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법한 인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제 멋대로 무수한 인연의 가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의 근원을 더듬어가며 우주의 끝으로 갔던 우주비행사가 마지막에 만난 것은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우주를 만들어냈던 컴퓨터와 대면하게 되는 SF만화의 허무한 엔딩 장면처럼 어쩌면 “문화망명지”의 끝은 허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나 스스로가 허무한 걸지도...

20년 전 그날, 20년 후 오늘

당신이 먼 이역으로 떠난다 하니 무심결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망명지를 만들게 된 것은 물론 제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망명지는 네덜란드의 작은 이층집 다락에 아지트를 만들었던 안네 프랑크의 사랑스런 일기장 ‘키티’처럼 제게도 그런 공간 하나가 필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기까지 저는 마치 살아있는 좀비처럼 온몸이 썩어가는 듯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87년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어떤 인연으로 당시 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너무 구구한 사연이 될 듯합니다. 다만, 1987년 12월 명동성당이란 시대의 막간극 무대에 저도 잠시 편승했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를 밝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50여개 학교, 2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 중 일부만이 기억하는 ‘서고련’의 명동성당 시위였습니다.

일제 치하부터 해방 이후 면면히 이어지던 고등학생 운동은 4.19혁명을 기점으로 역사의 물꼬를 트는 주요한 흐름 중 하나였으나 유신과 전두환 독재 시대에 이르러 사실상 그 맥이 완전히 끊겨 있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치열한 입시교육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 진학과 입신양명을 위한 입시기계로 전락해버렸던 시대였지요. 올해는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만 20년이 되는 시점이라 여러 매체들이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사화했습니다. 저도 몇몇 언론을 통해 그 당사자가 되기도 했지요.

조세희 선생은 1987년 12월 대선의 그 날을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고, 선이 악에게 패배한 날’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 시작되었습니다. 만 17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당시의 저는 그 날의 충격과 비참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국민의 다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치인들, 운동세력은 독재의 문민화를 전복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독재의 문민화 전략이 먹혀들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명망 높았던 운동가들은 속속 전향 선언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경력은 제도권에서 자신의 입지를 쌓는 업적으로 변신되었습니다. 지역주의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과거 독재 권력에 뿌리를 둔 정당에 투신해 새로운 지배 권력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동시에 전향의 역사이고, 패배의 역사였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제게 그 같은 일련의 흐름들은 대단한 충격이었고, 저 자신의 삶마저도 굴절시킬 만큼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거의 10여 년 간 냉소와 자기비하를 최선의 방책으로 삼았습니다.

20년 전, 그 날의 나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 혹은 대학생 운동세력으로 하여금 출세와 성공이라는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5.18광주’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테러를 가했던 ‘5.18광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본질과 우리 앞에 민주주의의 얼굴로 미소 짓고 있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고, ‘5.18광주’의 진실을 접했던 우리들은 시대와 양심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 청년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명동성당 시위를 마무리 짓는 비참한 현장에서 저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진실을 깨우치게 된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과 안위를 떨치고 일어나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거나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닐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제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 싸움은 내가 평생을 전력투구한다 할지라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란 깨우침이었습니다. 저는 진보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란 당대의 현실을 고민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보는 언제나 현실을 토대로 미래를 상상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지녔던 가장 강한 매력은 계급착취가 없고,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대접받고, 존재하는 인간해방의 평등세상이란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했습니다. 그것도 마치 역사의 법칙처럼 부르주아자본주의 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한 뒤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엄밀한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었지요.

진실이 지닌 거의 유일한 딜레마는 진실이 진실로 존재할 때, 나머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진실 앞에서 종종 저는 그 같은 딜레마를 경험합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그 원인은 진실이지만 그 진실이 진실로 존재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20세기는 러시아혁명이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체제를 실험하고, 결과적으로 그 실험이 실패함으로써 끝났습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우리 인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면서 이를 극복할 만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떠밀려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가능하지만, 그 대안이 사회주의 혹은 좌파적 사유 밖에 없느냔 질문에 우리들은 아직까지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담론의 위기’입니다.

그 대안을 마련하기까지 우리는 매우 오랜 세월, 어쩌면 20세기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이었던 석유가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건국 당시부터 미국이 심어놓은 DNA에 따라 미국이 만들어낸 세계체제에 편승해 지금까지 먹고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국을 애지중지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단순히 과거의 혈맹이기 때문이라는 ‘의리론’에 입각해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에 협조하면서 이득을 얻는 작은 제후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민은 때때로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작게는 대한민국의 보수우경화를 걱정해야 하지만 크게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가 오늘날 진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품어야 할 고민은 근본적입니다. 너무 거창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좌절이라면 좌절이었을 법한 그 경험 이후 97년까지 10년여를 방황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갔었고, 다시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3년여를 보내다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 무렵의 제가 스스로 대단히 불행하다거나 불운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연애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에 대해 받았던 느낌은 오래도록 민감한 상처로 남았습니다. 버림받은 느낌, 상실감, 배신감에 저는 세상을 향해 실천 없는 냉소만을 보냈습니다.

작업장 마당에서 바라 본 작은 하늘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저는 그날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습니다. 20년 전의 고등학생 무렵 여드름이 송송 맺혔던 시절 만났던 친구들을 20년 만에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20년 전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이란 결사체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고, 거리를 뛰어다니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함께 했던 마지막 날, 농성해산을 결정하면서 들었던 비참함이 워낙 컸던 탓인지 우리들은 2007년의 대통령 선거를 자못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의 제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날의 기억'들은 현재까지도 제 삶의 중요한 자양분이자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고 있는 탓이었겠지요.

80년대 초반 어느 운동권 학생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이 말이 지극히 오만한 표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강제 해직당한 뒤 삼성 본관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삼성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썼다는 편지글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교 운동장에 대기하고 있던 삼성 버스를 타고 공장기숙사로 직행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내딛은 첫 걸음은 그대로 학교의 연장이었습니다.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 통과되고 법률이 실제로 적용되면서  강제 해직당한 이 분은 고교를 졸업한 18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면서 회사와 집, 집과 회사를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고 말합니다. 김진숙 선생의 『소금꽃나무』란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당신이 일했던 시절엔 숙련공이 아니어도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완장 하나 채워주고 관리자 보조로 다른 노동자를 감독하는 일을 시키면서 노동자 사이에도 벽이 만들어지도록 했다고 합니다.

막 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선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진학한 셈입니다. 관리자들은 종종 부모인 양, 교사인 양 마치 학생들 다루듯 이들을 훈육했다고 합니다. 볼 일이 있어도 잔업 때문에, 할당량 때문에 쉴 수가 없었고, 자기 맘대로 하루 쉬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닦도록 하거나 일을 시키지 않고 남들 일하는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세워두는 것처럼 부당한 처우와 인격모독을 당할 때도 이들은 스스로 항의해볼 생각을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학교에서부터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체념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실제 직장 속에서 경험하듯 말입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요.

이 분을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분의 편지를 읽고 난 뒤 저는 돌아가신 제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나중에 간신히 한글을 떼셨지만 평생 동안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던 외증조부, 당신의 부모님을 원망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끔 저는 할머니의 하늘이 꼭 저만 하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우물 속 하늘을 보고 있을 테지요. 아마도 18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내 공장에서 살아야 했던 그 분에겐 공장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 당신이 알 수 있는 하늘의 전부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 할머니에게 조국이란 과연 슬퍼할 만한 대상이었을까, 조국을 위해 노여워해야 할 무엇이었을까?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됩니다.

되돌릴 수 없는 민주주의, 그러나 소외된 민주주의

저는 노동자의 노동자 정체성 문제는 나중으로 하고, 민주화 20년 동안 진행된 민주주의로부터도 그들이 얼마나 멀리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언제나 과로 체제에 시달리며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고 쫓기는 이들이라서 이들이 바보 멍청이라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누린 민주화, 민주주의의 진실한 결과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슬프게도 지난 80년대로부터 시작된 민주화는 아직까지 일상의 차원, 문화의 차원까지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좀더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의 과실을 얻어냈고, 우리들 역시 그 수혜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해외펀드에 투자하고, 융자를 끼고 아파트를 구입했고, CMA통장에 월급을 넣어놓고 어떻게 하면 주식 재테크에 성공하여 보다 나은 중산층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 고민합니다. 모든 투쟁은 그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아니지만, 청년 세대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잔을 받고 있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패러다임은 결국 우리 앞에도 쓴 잔을 내려놓을 겁니다.

선거가 있던 날, 친구들을 만나러 가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이 투표를 했느냐고 묻더군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의 개별적인 사안은 구구절절이 진보적인 대안을 찾고, 진보적인 성향의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결론은 이명박에게 투표했단 것이었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우리 국민의 절반 이상이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지요. 지금 대한민국이 맞닥뜨리고 있는 이 결과,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은 듯 미소 짓고 있는 이 결과는 결국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예전에 했던 소리를 내가 이 나이 먹고도 또 해야 하나?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아니고, 앵벌이도 아닌데 사람들에게 이 체제가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말하기도 귀찮고, 현재의 내 삶이 그럭저럭 살만하고,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가 아닌데 뭐? 다시 말해 이 일이 내 일이 아닌 걸 하며 안주해온 결과란 말입니다. 더 많은 걸 누릴 기회를 얻었던, 이 말은 위만 올려다보지 말고, 밑도 한 번 내려다보란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일상의 차원,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만들어서 모두가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되는 단계까지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말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아마 그 해 여름도 올해만큼 더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처음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띄울 때, 아마도 제가 만든 홈페이지는 익명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모래톱 정도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나름의 시간이 흘러 태풍과 홍수, 범람과 가뭄의 7년 세월을 보내며 “문화망명지”는 익명의 바다에서 모여든 작은 산호와 모래알과 물고기와 이름 모를 2,500여 씨앗들이 날아와 섬이 되었습니다.

처음 홈페이지를 시작할 무렵의 저는 이제 막 결혼을 했고, 갓 서른이 된 이십대의 젊음과 십대 시절을 통과하며 온몸에 맺혔던 고통의 기억들이 생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곳에서조차 저는 종종 사막 한 복판에서 홀로 모래바람에 맞서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했다는 걸 고백하렵니다. 사람으로 나서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믿음을 배신하도록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니까,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의 부류에서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거 너무 잘 아니까. 힘이 드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런 저의 쓸쓸함은 인간은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신념이 소년의 신기루처럼 허망한 유토피아였다는 깨달음, 80년대의 해방적 기획들 속에서 잠시 형성되었던 공동체의 따뜻함조차 알고 보면 거품처럼 얄팍한 것이었다는 서글픈 기억들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의 나는 너무나 자유로웠고, 행복했으며 무엇보다 따뜻했었다는 일종의 향수병 같은 것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하지만 그 시절이 아무리 좋았다한들 삶은 좋았던 한 시절의 기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시절의 기억이 과연 깊어가는 겨울밤 어린 아이들에게 군밤을 구워주며 그때는 모두의 인심이 넉넉하고 자유로웠던 태평성대였다고 회고할 수도 없었겠지요.

새로운 절망 없이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없다고 짐짓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누군가와 술 한 잔을 나눌 때, 나는 내 말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쁜 현재 없이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정말 나은 미래일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든 홈페이지의 이름이 “문화망명지”인 까닭은 근대 이후, 신(神)이 없어진 시대 이후,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성의 신, 과학의 신, 역사의 신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오늘날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현실의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현재의 체제를 극복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거기에 도달할 방도가 저라고 해서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다른 세상을 상상해보는 일 이외에 무엇을 또 할 수 있을까?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사랑하는 일이 분명 허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와 같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었던 시대가 지금이 처음은 아니란 겁니다. 같은 의미에서 서구의 중세 기독교 사회야말로 내부와 외부, 인간의 삶과 죽음까지 모두를 기독교라는 거대한 문명체계가 장악했던 시대입니다. 중세의 인간들은 탄생부터 삶과 죽음 그리고 이후의 세계까지 모두를 기독교라는 거대한 문화체계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 속에서도 인간은 다른 세상을 상상했고, 중세시대의 이단자들은 그와 같은 문화망명을 단행했던 이들이겠죠.

만약 제게 어떤 창조성이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서로 소통을 희망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을 7년 동안 한결같이 지속해온 성실성일 겁니다. 하지만 제게 숨겨진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누군가와 더불어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기뻐하고 싶다는 결핍의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절망하면서도 다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결국 희망을 건다는 의미이겠지요. 그것이 아마도 모든 창조자의 힘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저에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짓을 왜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사랑하는 일마저 멈춘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고 시시한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것, 어차피 사람은 그 정도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랑하라!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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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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