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불멸의 아티스트 17명의 초상) - 박명욱 | 그린비(2004)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란 말은 이 책에 수록된 17명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릭 사티가 한 말이다. 제목이 책 내용을 모두 설명해주는 책은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음이 또한 좋은 책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의 저자 박명욱이란 사람을 잘 알지 못하지만 출판사 "박가서장"의 책들은 몇 권 가지고 있다. 조병준의 책들이 그것이다. 물론 내 취향이라기 보다는 이 역시 아내의 취향 덕분에 나는 더부살이 독서를 한 셈인데, "나눔나눔나눔"이란 책과 "제 친구들하고 인사 하실래요?"란 책이 그것들이다. 조병준, 그는 시인 기형도와 친구다.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고 말했던 시인 기형도와 조형준. 그리고 원재길... 선량한 사람들은 선량한 사람들과 친구 네트워크로 맺어진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는 이들은 제 주변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박가서장의 이 책 "너무너무"는 1998년 초판이다. 그 이후에 재판을 찍는 일이 생겼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처음 이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동안 이 책이 절판되었으며, 매우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류의 책 가운데 내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시 제목을 따서 만든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란 책이다. 이 책 역시 매우 좋은 책임에도 절판되어 더이상 구할 수 없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출판관계자라면 한 번 잘 찾아서 다시 부활시켜 보는 것도 좋을 거다. 지금 읽어보더라도 결코 뒤처진 느낌을 주지 않을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너무"가 부활하게 된 것엔 아마도 이 책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닌 독자들의 힘과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 편집자의 눈썰미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암송해보는 건 싱거운 일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물론 모르는 이들은 모르고,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나도 지금껏 잘 모른다.) 우선 파울로 파졸리니, 그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다. 정치적으로 좌파이고, 삶의 양식으로 보자면 급진적인 인물이었고, 또 동성애자였으므로 만인의 혐오를 받는 자였다. 정치적으로 좌파, 급진, 동성애자... 그렇다면 살해당할 역사적 근거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는 살해당했다. 안토니오 가우디.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신의 건축가였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늘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웠던 그는 성장하면서 스페인의 불같은 대기와 붉은 대지에 깃든 성(聖)적 충만함으로 심폐를 가득 채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건축적으로는 매우 급진적이었던 그는 성가족 성당을 미완성으로 남겨둔채 달려오는 전차를 피하지 못하고 사고로 죽는다. 실비아 플라스. 미국 태생의 시인이자 3번의 자살 시도 끝에 성공리에 생을 마감한 아이들의 엄마, 영국의 계관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쇠같은 고집으로 타협을 모르는 생을 관철해낸 작곡가 에릭 사티. 그의 짐노페디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말 변태스럽다. 그래서 날 행복하게 한다.

 

이 책의 저자 박명욱이 선정한 17인의 예술가들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더이상 마이너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이다. 누가 오늘날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구스타프 클림트를, 로버트 카파를 마이너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이 지닌 사상과 생의 궤적들이 그러했을지라도 오늘날 이들은 충분히 메이저의 지위를 누린다. 물론 사후에 누리는 쓸쓸함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1998년으로부터 2005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문화적으로 우리는 매우 풍성한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누구나 코 끝의 안경처럼, 입 속에, 혀끝에 문화를 담고 살아간다. 그런 과정들이 마이너 아티스트들을 상업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로, 전문적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이들을 대중적인 아티스트로 변모시켰다. 그 과정이 우울한가? 천만에... 문화와 예술은 좀더 천해져도 괜찮다.

 

구판의 뒷표지에서 내 뒤통수를 잡아끄는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원칙주의자는 나중에 쓸쓸하다." 이 문장 하나로 나는 올가을을 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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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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