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들만의 민주주의를 끝내야 한다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에코리브르, 2008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광화문 시청 앞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여 벌이는 촛불 시위가 30여 일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시위는 서울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2의 6월 항쟁이 되는 것이 아니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시민 사회의 목소리에 맞서는 정부의 자세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아니 정부의 자세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고, 시위대에게는 가차 없이 물대포 세례가 가해진다. 대테러진압용이라던 경찰특공대까지 동원되는 모습은 살인적인 진압으로 악명 높았던 5공 치하의 백골단을 연상시킨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경험한 시민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과연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은 시민 대다수가 남아있는 수도 서울에서 비밀리에 철수하며 한강철교를 폭파해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에게 특수부대까지 동원해 총기를 난사했다. 1987년 정부기관원들이 대학생을 물 고문하다가 살해했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정권은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평택 주민들을 군대를 동원해 철조망을 둘러친 제2의 게토에 가두고 강제진압했다.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시위대에 뿜어져 나오는 물대포의 극적인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서서히 데워져가는 솥단지 안의 개구리처럼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회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변모해간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고, 시장에 가기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석유에 기초한 문명의 문제,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것이 현실이니 어쩌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현실주의’엔 눈앞에 빤히 보이는 ‘현실’은 없고, ‘주의’만 남아있다. 그동안 우리가 석유와 제3세계를 불태우는 대가로 누려왔던 값싼 농산물의 시대, 녹색혁명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현실엔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삼성 이건희 회장은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천 명,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경쟁력’과 ‘시장경쟁력’ 강화라는 주문 앞에서 한껏 움츠러든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한 명의 천재가 만 명 분의 월급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 사람이 소비하는 부스러기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 과연 우리들이 추구해야 하는 선진사회의 진정한 모습일까? 로버트 프랭크 ․ 필립 쿡이 말하는 승자독식사회란 어떤 것일까?

『승자독식사회』는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통해 최대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얻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요구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국 사회 내부의 사회적 양극화(승자독식)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승자독식현상은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한 정보혁명, 글로벌 네트워크의 확대와 관세축소 등 규제 없는 시장의 세계화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통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1992년 슈테피 그라프는 상금으로 16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 그녀가 선수보증광고와 시범경기로 벌어들인 돈을 합하면 이 액수의 몇 배였다. 그러나 그녀의 수입은 당시 최고의 라이벌인 모니카 셀레스의 수입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4월 셀레스가 관중에게 칼로 찔려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라프는 절대적 수준에서 볼 때 경기력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많은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43쪽>

정말 우리들은 능력 있는 일등 인재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까?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앞서 두 테니스 선수의 경우처럼 이런 주장은 허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독식사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우리가 동네놀이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놀이기구 중에 시소가 있다. 시소게임이란 놀이상대끼리 서로 균형을 이루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즐기는 게임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다소 몸무게가 나가더라도 그만큼 앞으로 당겨 앉거나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쪽에 다른 사람이 더 앉도록 한다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승자독식사회는 삶의 즐거움 혹은 지속을 위한 균형을 맞추는 시스템이 붕괴된 사회다.

예전에 아이들이 즐겨 찾던 군것질거리 중에 “젤리뽀”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상품명을 이용해 노래가사를 바꿔 부르곤 했다. 무척이나 살벌했던 그 노래 가사는 이랬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자본주의 시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바꿔 불렀던 노래가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대박과 쪽박 사이의 갈림길에서 개인이나 기업, 심지어 국가조차도 과거 냉전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저마다 핵군비 경쟁에 나섰던 것처럼 승자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을 치른다.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무한대로 펼쳐질 것 같았던 핵무기 경쟁도 군비축소조약을 통해 결국 제약이 가해진 것처럼 시장이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무한경쟁에도 일정한 규제가 가해져야만 현재의 승자독식 제로섬게임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파국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파국은 석유자원의 고갈과 함께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친기업적(Business Friendly)인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을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갈 것인가?

끝장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새로운 군비경쟁의 시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의 에르베 캄프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며, 현재의 민주주의의 시스템으로는 그것을 통제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생태적이라고 여겨왔던 ‘지속 가능한 발전’도 이미 너무 늦은 일이 되었으며, 도리어 이 용어가 현재의 심각한 위기를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는 ‘생태학’이라는 비속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의미론적인 무기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제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미덕을 믿는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한 번쯤 자문해보기 바란다. 그들은 정녕 산림벌채, 온실효과를 만들어내는 가스 배출, 시골길의 아스팔트화, 전 지구를 자동차로 뒤덮는 것, 수질 오염 등 이 모든 것이 점점 도를 더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몇 가지 반가운 소식 - 교토 의정서 체결, 몇몇 야생 생물종의 건채, 친환경 농업의 도약 등 - 은 작은 투쟁의 성과와 상황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된 물줄기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1938년에 살고 있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41쪽>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구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고, 작지만 소중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왜? 매일 더욱 많은 숲들이 사라지고,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가스 배출은 나날이 늘어나며, 어째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도 누리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나?

세계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과잉투자지만, 개별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고화질 텔레비전(HDTV)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는 식량과 보건에 투자를 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보다 고화질 텔레비전 제작기술이 뛰어난 국가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화질 텔레비전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면, 거기에 들인 연구개발비를 뽑고도 남기 때문이다. …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191쪽>

20세기 후반부터 자신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에 투자하며 환상적인 발전을 거듭한 중국과 인도는 2004년 한 해 동안에만 각각 47억 700만 톤과 11억 1,3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분야에서 단연 으뜸은 미국으로 같은 해 59억 1,2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세계는 파국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2005년 교토의정서를 발효시켰지만,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2001년 3월 탈퇴해 버렸다. 세계화에 의한 국가 간 승자독식경쟁은 과거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대신하여 새로운 형태의 무한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작게는 일국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과 크게는 세계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국가들의 투쟁이 지구의 파멸적 상황들을 극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놓은 결과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에르베 캄프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가진 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왜곡된 민주주의의 과두정치체제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사실상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 - 경쟁력을 상실한 고비용 저이윤의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해소 - 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기술 차이는 미미해졌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뒤처진 선진국들은 제조업을 포기하는 대신 지식서비스산업(금융 등)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 역시 미래의 성장 동력은 지식 경제 산업에 달렸다는 명분 아래 IT, BT, CT의 순서로 산업구조를 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본과 자본의 투쟁이라는 투기화된 금융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한 차례 경제위기를 경험한 기존의 사회권력은 재벌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승자독식시장의 과잉경쟁을 개인이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화된 시장 앞에서 개별 국가의 정부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다.

가진 자들의, 가진 자들에 의한, 가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끝장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광화문 네거리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거나 투표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어째서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를 놓고 ‘황금분할’이니 ‘절묘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인 ․ 관료들은 평범한 유권자들과는 거리가 먼 계급일 뿐이다. 미국의 ‘투표와 민주주의 센터'가 미국의 의회 선거를 분석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선거에서 정책 경쟁이 치열할수록, 다시 말해 후보자나 정당 간에 정책이나 이념, 철학적 차이가 큰 선거일수록 투표 참여율이 증가한다고 한다. 만약 정치인들 사이에 시장경제에 대한 운영방식, 민영화, 소비와 조세 감면, 탈규제, 부유한 투자자들에 대한 정책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현대의 수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들이 투표 참여를 귀찮은 의무로 생각하는 것이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는 말이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더라도 이것이 상대 정당의 지지율과 연결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민주주의(democracy)가 ‘demo(인민)’+‘kratos(지배)’,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민주주의는 무지한 대중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회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의 선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인민에 의한 지배를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무지한 인민대중이 아니라 바로 직업적인 정치인 계급에 의한 과두정치, 즉 정치인들이 입을 모아 사수하자고 외쳐대는 ‘자․유․민․주․주․의’다. 이라크 파병부터 시작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한미FTA까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조차 강행하는 것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다. 이럴 바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도 재판의 배심원처럼 인민대중 가운데 추첨으로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정치체제일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어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이라지만 청와대엔 특급 한우가 공급된다. 가진 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도 유기농 한우만을 먹을 충분한 재력과 의지가 있다. 이처럼 소수의 승자들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 체제는 실제 대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유권자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늘 반대의 행동을 취한다. 가진 자들의 소유인 언론과 미디어는 이것을 정치인들 개개인의 전형적인 위선이라 공격한다. 그러나 거대기업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곧 정치라는 것을 뼛속 깊숙이 체득한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이다. 정치인과 정당, 정부의 기만행위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적대감을 이용해 보수언론들은 ‘부패’ 혹은 ‘무능한’ 정부 대신 ‘정직’하고 ‘효율’적인 시장을 칭송한다.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세워 보상해주는 정부라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선 반정부적 수사까지 동원하는데 능숙한 그들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회적 회전문 시스템을 이용해 권력과 다시 한 몸이 된다.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승자독식경쟁을 멈출 의사가 전혀 없다.

홀로세의 공룡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20세기의 문명을 후세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도 점점 자명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20세기를 ‘화석연료의 시대’, 우리들을 ‘홀로세(Holocene)의 공룡’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2008)의 연간 에너지 전망에서 2030년 전 세계 원유의 하루 평균 생산량을 종전 1억1600만 배럴에서 1억 배럴로 하향 조정할 전망이다. 그동안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문명의 위기,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생태 위기를 지적했던 수많은 이들의 염려처럼 산유국의 석유 생산은 이제 정점에 도달했다. 석유 생산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일피크론은 더 이상 우려나 기우가 아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의 역사발전은 없다고 할 만큼 자신만만했었는데 어째서 오늘의 우리는 이토록 커다란 불안과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승자독식사회』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흡사한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승자독식의 원리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되어갈 것이다. 정부의 결단력 있는 정책들이 소득불평등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의 승자들은 언제라도 어느 한 나라의 세율이 높아지면 조세피난처를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한경쟁에 재갈을 물리자는 새로운 군비축소운동에 세계적인 시민 연대가 요구되는 이유다. 이처럼 두 권의 책 속에 그려지는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는 너무나 암담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결정적인 파국의 도래가 오기 전에 우리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이 그 시작을 알리는 일이길 바란다.

출처 : 환경과생명.2008.여름호(통권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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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 제임스 러브록 | 홍욱희 옮김 | 갈라파고스(2004)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시한다. - T.W. 아도르노


세상 모든 믿음의 시작은 자연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한정된 수명을 지닌 인간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나타나고, 죽었는가 하면 되살아나는 힘을 지닌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에 경외심을 품었다. 인간의 신화적 상상력은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신이란 생각에 이르렀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 속에서 ‘대지의 여신'을 일컬어 대지모신(大地母神), 즉
“가이아(Gaia)”라고 불렀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인간의 엄지손가락이 지닌 복잡한 기능만 보더라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만약 그가 불안정한 지구의 대기가 이루고 있는 절묘한 균형과 유지방법을 알았다면 그는 지구 자체를 하나의 신이라 불렀을지도 모른다.

“가이아 이론”이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1978년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A New Look at Life on Earth)」이란 책(『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을 통해 주장한 하나의 새로운 과학적 가설이다. 러브록의 가설에서 ‘가이아’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대기권, 토양, 대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대지모신의 이름을 빌어 사용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하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임을 강조한다. 가이아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과학자들은 ‘가이아’라는 이름 때문에 지구를 하나의 인격체로 취급한다는 오해를 했다(러브록은 도리어 그 반대의 측면에서 지나친 환경주의를 경계하며, 철저히 과학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한 과학자였고, 과학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론을 과학을 빙자한 유사과학으로 취급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자 했으나 지구 온난화 현상 등 지구의 환경 생태 문제와 관련해 가이아 이론은 더욱 큰 힘을 얻고 있다.


▶ 제임스 러브록 박사


제임스 러브록은 1950년대 후반 전자포획기라는 새로운 물질 분석장치를 발명해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전자포획기를 이용하면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도 대기에 섞여있는 미세한 원소를 분석해낼 수 있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러브록에게 화성탐사우주선 바이킹호에 탑재할 생명체 탐지장치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러브록은 화성의 대기를 분석한 결과
“화성에 생명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면 굳이 탐사선을 보낼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도 알 수 있지요. 화성은 광물처럼 완전히 죽은 존재”라고 단언했다. 러브록이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화성의 대기를 분석한 결과(화성을 비롯한 천체들은 빛의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화학적 조성을 알 수 있다)였다. 분석 결과 화성의 대기는 대부분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있고 산소는 거의 없었다. 무수한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의 대기에 산소는 21%나 되었고, 이산화탄소는 1% 미만이었다.

생명체가 호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산소는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한 기체로 다른 물질들과 반응성이 크고, 잠재적인 폭발성까지 가지고 있다. 산소에 의한 산화작용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세포를 늙게 만들고,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하며, 쇠를 녹슬게 만든다. 호흡도 녹이 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연소현상(산화작용)이다. 즉 인간의 호흡은 자신도 모르게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산소가 생겨난 이래 그토록 오랫동안 갖가지 산화작용, 연소 반응들이 진행되어 왔다면 마땅히 지구상의 대기 속의 산소 역시 닳아 없어졌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산소나 암모니아와 같은 공기 중의 기체들은 언제나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하고 만약 이런 수준에서 약간만 벗어나더라도 생물들에겐 치명적인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지구의 산소 농도를 수억 년이 넘도록 일정하게 유지시켜 왔는가?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들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권(biosphere)이 지구의 다른 부분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절묘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가이아 이론의 핵심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유 에너지를 섭취하여 자기 생존에 맞게 조절하는 능력(자기조절능력)을 지녔고, 살아있는 지구는 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체이며, 가이아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적·화학적 환경을 조성(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cybernetic system)을 구성한 총합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러브록은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하는 생물체로 설정한 가이아 이론, 지구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가설을 펼쳤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단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해 간신히 생존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물리 ․ 화학적 환경에 영향을 주는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가설을 담은 것이 이 책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이다.

가이아 이론의 핵심인 자기조절능력은 인간의 체온(36.5℃)이 주변 환경의 변화나 급격한 열량 소모 등으로 체온이 급격히 오르거나 내려갈 수도 있지만 신체대사를 조절하는 기능을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체온을 조절하는 것처럼 지구 역시,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공존하는 방식으로 지구의 산소량과 대기의 온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러브록이 지구의 모든 것(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 등)을 이르는 복합적인 실체로서의 지구를 은유적으로 가이아라고 표현한 데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다. 지금까지 우리가 발견한 은하계의 어떤 행성도 지구처럼 생물권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하며,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낸 곳은 없다. 어떤 행성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의해 조절되는 절묘한 환경조절 메커니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를 죽은 것으로 간주해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만 취급해 왔다.




그 결과 지구는 점점 자기조절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류는 가이아의 파트너이자, 가이아의 일원 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자기들의 농장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바라보는 일은 칼 G 융이 주장하는 인간 영성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러브록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말한다.

대부분 정치가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과 교역증대이며 환경문제는 기술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낙관론은 내게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런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 당시 나는 독일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어느 한 방공호 속의 공기의 적합성 여부를 평가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 방공호는 템스강을 따라 진흙탕 속에 조성된 과거의 하수관 시설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나는 좀도둑들이 그 폐기된 하수관의 접속 철판 부분에 조여진 볼트를 풀어 훔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그 풀어진 이음새 사이로 강물이 침범하게 된다면 순식간에 온 터널이 물바다가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 터널을 방공호로 이용하는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진흙탕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가능성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들은 공습 경보와 폭탄의 폭발음에 더 놀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게는 그 방공호 속이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어떤 점에서는 현재의 우리도 역시 그 방공호 속의 런던 시민들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하수관의 이음매 볼트를 빼내어 팔아먹고 있으면서도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여 정작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본문 29~30쪽>

러브록은 우리가 부주의하여 고래를 멸종으로 이끌면 그것은 분명 일종의 종족학살(genocide)이며, 또한 게으르고 완고한 국가관료주의에 빠진 결과라고 경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나 자본주의자를 막론하고 인류는 이 같은 범죄의 심각성을 깨우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과 자연, 우주가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도 유지될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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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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