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시대의 일상사 -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국가규모의 범죄집단은 폭력과 공포만으로 지배하는가?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스펙터"와 같이 국가적 규모를 갖춘 범죄집단은 과연 가능할까? 어떤 만화나 영화들을 보면서 가끔 설명이 불충분하더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도 나는 심각하게 궁리할 때가 있다. 앞서 말한 스펙터같이 국가와 경쟁할 수 있는 범죄집단의 가능성이 그렇고, 영화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유인원 인류가 사용하는 자동소총(혹은 반자동소총)이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문명 수준에서 개발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들이 그렇다(세계 최초의 반자동소총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M1소총이었다).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원숭이들의 문명 수준이 당시 미국의 문명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이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총 한 자루 만드는 것에도 그에 합당한 기술 수준이란 것이 있으니까. 007 시리즈뿐만 아니라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 폭력집단(유사국가 혹은 국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이 단순히 폭력과 억압을 이용한 공포만으로 국가라는 조직과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소규모 폭력조직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국가 단위의 폭력구조를 유지하는 일은 구태여 그람시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폭력과 공포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역사란 "과거의 의미있는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간 의미없음으로 치부되어 왔던 일상의 역사적 진실을 들춘다. 저자는 독일 나치 시대를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여 나치의 인종주의와 같은 중세적 야만성이 선진사회에서 돌출할 수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론삼아 저자의 주장을 미리 말하자면, 이것은 결코 돌출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성, 선진 사회가 내세우는 '진보' 안에 내재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Detlev Peukert)는 독일의 역사가로 '나치 시대 공산당의 저항운동' 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그가 81년에 저작한 것으로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선구적으로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포이케르트의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며, 부제로 되어 있는 세 가지 "순응, 저항, 인종주의"란 맥락 가운데 좌파의 역할은 "저항"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제3공화국의 기억과 제3제국의 기억

평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유럽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들이 존재했던 독일에서 어떻게 나치즘과 같은 극우파 정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책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그런 의문이 모두 해갈된 것은 아니나 상당 부분 도움을 얻게 되었다. 포이케르트는 우선 "순응"이란 측면에서 나치즘이 폭력적인 권력 탈취 방식을 일부(?)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내 중산층과 부르주아지들이 이에 순응했기 때문으로 규정한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저자의 지적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뼈아픈 일침이 된다.


제3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당시 유행하던 사형 혹은 가스실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특수한 형태의 테러, 즉 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데 테러 방식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도둑맞지 않았다는 판에 박힌 좋은 기억이 "절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집시들이 수용소에 수감된 것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303-304쪽 중에서>


질서를 위한 폭력을 권장하는 세력들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제3공화국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독일 제3제국 히틀러에 대한 독일 노인들의 향수는 어딘지 모르게 일탈 행위를 그나마 용납해주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이런 판에 박힌 기억은 과거 독재 시대를 미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전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극우파들과 일부 교회의 목사들이 성조기를 나부끼며 벌였던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개신교 총감독 디벨리우스가 "포츠담의 날"에 행한 설교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가사의 새로운 장은 언제나 폭력과 더불어 열립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결정, 새로운 지향, 변화, 전복은 언제나 한 편에 대한 다른 한 편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경우, 국가 권력은 안을 향해서든 밖을 향해서든 강력하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 국가가 국가질서를 파괴하는 자들, 특히 더럽고 비열한 언어로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신앙을 경멸하는 자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목숨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 질서가 수립되면 다시 정의와 사랑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날 광화문에서 있었다는 쿠데타 선동 발언에 버금가는 말이다. 독일 개신교 세력이 모두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배경에는 독일 개신교 세력의 은근한, 때로는 적극적인 지지가 작동한다. 그들은 좌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리어 나치즘을 선동하고 나섰다. 1933년 초 몇달 동안 독일 내 좌파들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억압 상황에서 독일의 일반 국민들은 이것을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좌파에 대한 공포로 반공에 대한 공포를 잠시 잊은 결과 독일 국민은 최악의 전쟁을, 최악의 패배를, 최악의 생존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제3제국의 신화

오늘날까지 독일 제3제국의 신화는 여전하다. 인터넷상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나치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들이 보여준 절도와 형식에 깊이 매료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전쟁 발발 이전의 나치 시대는 부흥과 복지의 시대로 미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대공황과 전쟁동안, 전후(제1차 세계대전)의 질식할 듯한 궁핍과의 비교를 통한 것일 뿐이다. 실제 나치가 집권한 뒤인 1930년대의 경제 분위기도 낙관적이진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경제의 호전 기미만으로 이를 반가워했고, 이를 곧바로 경제호황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연계시켰지만, 여전히 생필품은 치명적으로 부족했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처해있다. 국가차원에서 보았을 때 경제는 여전히 나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수경제가 살아나지 않아 실질경제는 불황 속에 처해 있는 현실은 전적으로 언론의 탓이라 할 수는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언론의 부풀리기가 경제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히틀러가 실업문제를 조속히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 제3제국의 현실이 아니라 나치의 선전이란 측면에서만 그러했다. 현실에서 수치와 통계로 드러난 실업자 감소 추세는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5.16직후 군사정부가, 1978년 오일쇼크 이후 급증한 실업자 문제를 제5공화국이 해결한 방식은 이미 1930년대 독일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임금만을 받고 노동봉사대와 긴급노동대로 결성되어 체제 위신용 건물 건설에 동원되었다. 실업자 수치 자체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실질적인 실업자 감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 독일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36년 무렵 전시 경제에 접어들어 군수산업이 폭발적인 호황을 누린 뒤부터이다.


다른 하나의 신화는 독일 (나치)관료 집단이 청렴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실이다. 공직과 권위를 충분히 획득한 그들은 관료로서 권력과 직위, 특권을 마음대로 전용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과거 비판해 마지 않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공무원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니 더욱 부패해 있었다. 그럼에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인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그가 최초의 권력기반으로 삼았던 돌격대를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해체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초기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에른스트 룀과 그의 사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돌격대는 나치의 중요한 권력기반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해 더이상 사병집단이 필요없어진 히틀러에게 그들은 골칫거리이자 장차 그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비춰졌다.


히틀러는 재빨리 룀을 제거함으로써 권력기반을 공고히하는 결과를 나았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묘하게도 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일로 비춰지기 보다는 독일의 골칫거리가 된 자신의 신뢰하는 수하들인 돌격대를 국민들을 위해 제거한 것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알기만 한다면 이를 악물고 부패한 자신의 수족을 잘라낼 만큼 결단력있고, 공정한 총통으로 비춰졌고, 실제로 그렇게 선전되었다. 독일 국민들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그 순간까지도 독일 국민들의 총통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승만이 모든 실정의 근간이자, 부패의 근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이 이기붕과 자유당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는 나치당의 모든 부패와 실정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었다. 과연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상관없이 집권당만 실책을 거듭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도 물어보아야 한다.


새로운 고전의 기미를 엿볼 수 있었던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단 생각이 들고, 이미 어느 정도는 고전의 지위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이 책의 단점이랄까, 아쉬움이 남아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독일 내 좌파들의 맥없는 몰락에 대해 저자의 "일상사"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독일 내부의 문제만으로 독일 좌파의 몰락이 빚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이 저자의 주된 연구 분야이므로 저자의 다른 책을 보노라면 더 세세한 지적들이 있을 것이고, 이 책의 주제가 일상사이므로 국제사적인 맥락을 짚기는 어려웠겠으나 당시 독일내 좌파가 나치에 대한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실책(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 소련 고립정책을 타개할 방편으로, 나치 독일이 프랑스와 우선적으로 경쟁할 것이란 판단에서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을 금지시켰고, 독일 좌파는 사분오열되고 만다.), 영국과 프랑스의 오판 등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쉽다.


그러나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저자의 단명이다.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살아 있었다면 좋은 연구 업적들을 보다 많이 남겨주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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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가진 자들만의 민주주의를 끝내야 한다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에코리브르, 2008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광화문 시청 앞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여 벌이는 촛불 시위가 30여 일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시위는 서울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2의 6월 항쟁이 되는 것이 아니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시민 사회의 목소리에 맞서는 정부의 자세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아니 정부의 자세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고, 시위대에게는 가차 없이 물대포 세례가 가해진다. 대테러진압용이라던 경찰특공대까지 동원되는 모습은 살인적인 진압으로 악명 높았던 5공 치하의 백골단을 연상시킨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경험한 시민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과연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은 시민 대다수가 남아있는 수도 서울에서 비밀리에 철수하며 한강철교를 폭파해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에게 특수부대까지 동원해 총기를 난사했다. 1987년 정부기관원들이 대학생을 물 고문하다가 살해했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정권은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평택 주민들을 군대를 동원해 철조망을 둘러친 제2의 게토에 가두고 강제진압했다.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시위대에 뿜어져 나오는 물대포의 극적인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서서히 데워져가는 솥단지 안의 개구리처럼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회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변모해간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고, 시장에 가기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석유에 기초한 문명의 문제,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것이 현실이니 어쩌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현실주의’엔 눈앞에 빤히 보이는 ‘현실’은 없고, ‘주의’만 남아있다. 그동안 우리가 석유와 제3세계를 불태우는 대가로 누려왔던 값싼 농산물의 시대, 녹색혁명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현실엔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삼성 이건희 회장은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천 명,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경쟁력’과 ‘시장경쟁력’ 강화라는 주문 앞에서 한껏 움츠러든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한 명의 천재가 만 명 분의 월급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 사람이 소비하는 부스러기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 과연 우리들이 추구해야 하는 선진사회의 진정한 모습일까? 로버트 프랭크 ․ 필립 쿡이 말하는 승자독식사회란 어떤 것일까?

『승자독식사회』는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통해 최대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얻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요구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국 사회 내부의 사회적 양극화(승자독식)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승자독식현상은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한 정보혁명, 글로벌 네트워크의 확대와 관세축소 등 규제 없는 시장의 세계화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통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1992년 슈테피 그라프는 상금으로 16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 그녀가 선수보증광고와 시범경기로 벌어들인 돈을 합하면 이 액수의 몇 배였다. 그러나 그녀의 수입은 당시 최고의 라이벌인 모니카 셀레스의 수입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4월 셀레스가 관중에게 칼로 찔려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라프는 절대적 수준에서 볼 때 경기력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많은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43쪽>

정말 우리들은 능력 있는 일등 인재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까?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앞서 두 테니스 선수의 경우처럼 이런 주장은 허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독식사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우리가 동네놀이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놀이기구 중에 시소가 있다. 시소게임이란 놀이상대끼리 서로 균형을 이루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즐기는 게임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다소 몸무게가 나가더라도 그만큼 앞으로 당겨 앉거나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쪽에 다른 사람이 더 앉도록 한다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승자독식사회는 삶의 즐거움 혹은 지속을 위한 균형을 맞추는 시스템이 붕괴된 사회다.

예전에 아이들이 즐겨 찾던 군것질거리 중에 “젤리뽀”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상품명을 이용해 노래가사를 바꿔 부르곤 했다. 무척이나 살벌했던 그 노래 가사는 이랬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자본주의 시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바꿔 불렀던 노래가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대박과 쪽박 사이의 갈림길에서 개인이나 기업, 심지어 국가조차도 과거 냉전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저마다 핵군비 경쟁에 나섰던 것처럼 승자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을 치른다.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무한대로 펼쳐질 것 같았던 핵무기 경쟁도 군비축소조약을 통해 결국 제약이 가해진 것처럼 시장이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무한경쟁에도 일정한 규제가 가해져야만 현재의 승자독식 제로섬게임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파국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파국은 석유자원의 고갈과 함께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친기업적(Business Friendly)인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을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갈 것인가?

끝장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새로운 군비경쟁의 시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의 에르베 캄프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며, 현재의 민주주의의 시스템으로는 그것을 통제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생태적이라고 여겨왔던 ‘지속 가능한 발전’도 이미 너무 늦은 일이 되었으며, 도리어 이 용어가 현재의 심각한 위기를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는 ‘생태학’이라는 비속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의미론적인 무기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제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미덕을 믿는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한 번쯤 자문해보기 바란다. 그들은 정녕 산림벌채, 온실효과를 만들어내는 가스 배출, 시골길의 아스팔트화, 전 지구를 자동차로 뒤덮는 것, 수질 오염 등 이 모든 것이 점점 도를 더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몇 가지 반가운 소식 - 교토 의정서 체결, 몇몇 야생 생물종의 건채, 친환경 농업의 도약 등 - 은 작은 투쟁의 성과와 상황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된 물줄기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1938년에 살고 있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41쪽>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구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고, 작지만 소중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왜? 매일 더욱 많은 숲들이 사라지고,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가스 배출은 나날이 늘어나며, 어째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도 누리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나?

세계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과잉투자지만, 개별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고화질 텔레비전(HDTV)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는 식량과 보건에 투자를 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보다 고화질 텔레비전 제작기술이 뛰어난 국가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화질 텔레비전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면, 거기에 들인 연구개발비를 뽑고도 남기 때문이다. …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191쪽>

20세기 후반부터 자신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에 투자하며 환상적인 발전을 거듭한 중국과 인도는 2004년 한 해 동안에만 각각 47억 700만 톤과 11억 1,3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분야에서 단연 으뜸은 미국으로 같은 해 59억 1,2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세계는 파국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2005년 교토의정서를 발효시켰지만,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2001년 3월 탈퇴해 버렸다. 세계화에 의한 국가 간 승자독식경쟁은 과거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대신하여 새로운 형태의 무한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작게는 일국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과 크게는 세계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국가들의 투쟁이 지구의 파멸적 상황들을 극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놓은 결과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에르베 캄프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가진 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왜곡된 민주주의의 과두정치체제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사실상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 - 경쟁력을 상실한 고비용 저이윤의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해소 - 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기술 차이는 미미해졌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뒤처진 선진국들은 제조업을 포기하는 대신 지식서비스산업(금융 등)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 역시 미래의 성장 동력은 지식 경제 산업에 달렸다는 명분 아래 IT, BT, CT의 순서로 산업구조를 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본과 자본의 투쟁이라는 투기화된 금융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한 차례 경제위기를 경험한 기존의 사회권력은 재벌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승자독식시장의 과잉경쟁을 개인이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화된 시장 앞에서 개별 국가의 정부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다.

가진 자들의, 가진 자들에 의한, 가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끝장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광화문 네거리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거나 투표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어째서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를 놓고 ‘황금분할’이니 ‘절묘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인 ․ 관료들은 평범한 유권자들과는 거리가 먼 계급일 뿐이다. 미국의 ‘투표와 민주주의 센터'가 미국의 의회 선거를 분석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선거에서 정책 경쟁이 치열할수록, 다시 말해 후보자나 정당 간에 정책이나 이념, 철학적 차이가 큰 선거일수록 투표 참여율이 증가한다고 한다. 만약 정치인들 사이에 시장경제에 대한 운영방식, 민영화, 소비와 조세 감면, 탈규제, 부유한 투자자들에 대한 정책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현대의 수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들이 투표 참여를 귀찮은 의무로 생각하는 것이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는 말이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더라도 이것이 상대 정당의 지지율과 연결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민주주의(democracy)가 ‘demo(인민)’+‘kratos(지배)’,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민주주의는 무지한 대중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회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의 선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인민에 의한 지배를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무지한 인민대중이 아니라 바로 직업적인 정치인 계급에 의한 과두정치, 즉 정치인들이 입을 모아 사수하자고 외쳐대는 ‘자․유․민․주․주․의’다. 이라크 파병부터 시작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한미FTA까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조차 강행하는 것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다. 이럴 바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도 재판의 배심원처럼 인민대중 가운데 추첨으로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정치체제일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어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이라지만 청와대엔 특급 한우가 공급된다. 가진 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도 유기농 한우만을 먹을 충분한 재력과 의지가 있다. 이처럼 소수의 승자들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 체제는 실제 대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유권자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늘 반대의 행동을 취한다. 가진 자들의 소유인 언론과 미디어는 이것을 정치인들 개개인의 전형적인 위선이라 공격한다. 그러나 거대기업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곧 정치라는 것을 뼛속 깊숙이 체득한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이다. 정치인과 정당, 정부의 기만행위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적대감을 이용해 보수언론들은 ‘부패’ 혹은 ‘무능한’ 정부 대신 ‘정직’하고 ‘효율’적인 시장을 칭송한다.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세워 보상해주는 정부라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선 반정부적 수사까지 동원하는데 능숙한 그들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회적 회전문 시스템을 이용해 권력과 다시 한 몸이 된다.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승자독식경쟁을 멈출 의사가 전혀 없다.

홀로세의 공룡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20세기의 문명을 후세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도 점점 자명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20세기를 ‘화석연료의 시대’, 우리들을 ‘홀로세(Holocene)의 공룡’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2008)의 연간 에너지 전망에서 2030년 전 세계 원유의 하루 평균 생산량을 종전 1억1600만 배럴에서 1억 배럴로 하향 조정할 전망이다. 그동안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문명의 위기,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생태 위기를 지적했던 수많은 이들의 염려처럼 산유국의 석유 생산은 이제 정점에 도달했다. 석유 생산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일피크론은 더 이상 우려나 기우가 아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의 역사발전은 없다고 할 만큼 자신만만했었는데 어째서 오늘의 우리는 이토록 커다란 불안과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승자독식사회』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흡사한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승자독식의 원리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되어갈 것이다. 정부의 결단력 있는 정책들이 소득불평등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의 승자들은 언제라도 어느 한 나라의 세율이 높아지면 조세피난처를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한경쟁에 재갈을 물리자는 새로운 군비축소운동에 세계적인 시민 연대가 요구되는 이유다. 이처럼 두 권의 책 속에 그려지는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는 너무나 암담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결정적인 파국의 도래가 오기 전에 우리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이 그 시작을 알리는 일이길 바란다.

출처 : 환경과생명.2008.여름호(통권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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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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