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12 이하석 - 구두
  2. 2010.11.06 이하석 - 버려진 병
구두

- 이하석

풀덤불 속에 입을 벌리고 누워
구두는 뒷굽이나마 갈고 싶어한다, 풀들 속으로
난 작은 길을 가고 싶어하며, 어디로든
가 버릴 것들을 놓아 주면서.

주물 공장 최 반장은 토요일에 그를 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최씨의 바지 밑으로 그는 끈이 풀렸고
뒷굽이 너무 닳아 있었다. 일년 가까이
그는 벌겋게 달아 있었다, 술과 불이 어울어진
최씨의 온몸 밑에서. 내던져진 채
그는 이제 가고 싶은 곳을 잊었다,
최씨의 여자 속을 걸어가는 허약한 다리 대신
차가운 빗물을 맑게 담고서.

문득 흐르던 구름 하나가 구두 속에 깃들어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그래도 최씨의 구두는
뒷굽에 매달린다.

<이하석,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시인선8, 문학과지성사, 1980>


*


처음부터 내 닉이 바람구두로 안착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대학 때 별명이었고, 뒤늦게 인터넷을 시작하다보니 적당한 닉이 없어 이메일 계정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 무심결에 영어로 바람구두를 뭐라해야할까 싶어 생각해낸 것이 windshoes였다.

바람이 wind고 구두가 shoes니까 하는 마음에서 홀로 간단히 해결한 닉네임이었던 셈이다. 네 글자 닉네임이 흔치 않았다. 내가 처음 인터넷을 할 때만하더라도...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구두라고 불렀는데... 구두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아서 그런지... 바람은 웬지 멋부리는 듯 하여 부담스럽기도 하고 해서 구두라고 불리우는 게 좀더 편하다.

구두...

우리 문학사에 제법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구두가 몇 켤레있다.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가 있고, 시인 이문재의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러나 내게 처음 구두의 이미지가 선명해지게 한 시는 이하석의 "구두"란 제목의 시였다.

이 시는 정황만으로 이루어진다.

주물 공장 최 반장의 구두.

바려진 구두.
끈이 풀렸고, 오랫동안 술과 불이 어우러진
가고 싶은 곳을 잊은 구두.

시적 화자는 무생물인 버려진 구두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누구나 사람이다. 한 때는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우리들... 나이를 먹으면 입부터 맛이 간다고 했던가. 어려서는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 예를 들어 아무리 묽게 끓였더라도 언제나 맛있었던 카레라이스나 간장으로 양념한 불고기, 매콤달콤한 떡볶이... 무엇하나 입에 착착 붙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천원으로 충분히 느꼈을 기쁨은 이제 10만원 아니 백만원으로도 그만큼 기뻐지지 않는다. 구름이 내 속에 담겨 어디든 가자하는데... 나는 아무 곳도 가고 싶어지지 않는다. 구두여! 구두여! 구두는 세월따라 걸음에 녹아 밑창이 닳고, 가죽은 헐거워지고, 끈도 끊어져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버림받는다. 버려지는 건 구두만이 아닐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국 -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0) 2011.07.19
정일근 - 묶인 개가 짖을 때  (0) 2011.07.18
김승희 - 죽도록 사랑해서  (2) 2011.07.15
반칠환 - 은행나무 부부  (0) 2011.07.14
이기철 -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0) 2011.07.13
이하석 - 구두  (0) 2011.07.12
이문재 - 푸른 곰팡이  (0) 2011.07.11
김선우 - 목포항  (4) 2011.07.01
임현정 - 가슴을 바꾸다  (0) 2011.06.30
김은경 - 뜨거운 안녕  (0) 2011.06.29
정우영 - 초경  (1) 2011.06.28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버려진 병

- 이하석

바람 불어 와 신문지와 비닐 조각 날리고
깊은 세계 속에 잠든 먼지 일으켜 놓고
사라진다, 도꼬마리 대궁이 및 반짝이는
유리 조각에 긁히며. 풀들이 감춘 어둠 속
여름은 뜨거운 쇠 무더기에서 되살아난다.
녹물 흘러, 붉고 푸른 뜨겁고
고요한 죽음의 그늘 쌓은 채.

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꽂힌 채
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조각들에 스치며
이지러진 알파벳 흙 속에 감추며.
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
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질이며.
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
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와
콜라 병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쓰러진다. 풀들 그 위를 덮고
흙들 그 속을 채워, 병들은 침묵한다,
어느덧 묵묵한 흙무더기로 속을 감추면서.

<이하석,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시인선8, 문학과지성사, 1980>

*



우리 시단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특이한 이미지들을 전개하여 시를 쓰는 시인 중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 이하석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의 서정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연친화적인 이미지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시의 비루한 정경들에 친근한 정서를 덧씌우지도 않는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시를 일컬어 "광물적 상상력"이라고 말했다는데 ...
나는 그 표현도 시의 표현적 분석이란 측면에서는 적확한 일면이 있긴 하지만 "광물적 상상력"이란 그의 상상력을 일정 부분 훼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광물은 단순하고, 협애하기 때문이다. 그의 상상력은 그보다는 훨씬 크다.

나는 이하석을 최승호와 더불어 한국 시단에서 가장 문명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시인으로 생각한다. 그건 다음과 같은 그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의 시집 <투명한 속> 뒷면엔 이런 글이 있다.


"모든 존재는 신성하다. 이 평등한 사실 앞에서 인간의 삶은 좀더 겸손하고 확실해야 하리라. 지금까지 인간은 너무 추상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해 왔으며 위로만 올라왔다. 사물들에 대해선 엄격했고 극히 주관적이었다. 사물에 대해 엄격하다니, 그런 짓거리는 결국 인간 우위의 과시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엄격함을 풀어야 하리라. 우리는 이제 세계를 향해 구체적으로 문을 열고 냉정한 시선과 뜨거운 몸으로 그쪽으로 다가가야 한다. 추상과 관념은 언제나 지저분함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들이 걸어온 만큼 그것들의 뒤는 문란해졌고 그것들 스스로 지우고 버린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추상과 관념, 주관과 모든 모더니즘은 종식되어야 한다. 더불어 <인간을 위하여> 시를 유보시키는 입장도 지양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의 평등을 확실하게 그려야 한다. 인간이 그들의 과시욕을 버릴 때 그들의 들판은 맑은 물 흐르고 꽃들은 그들을 위해 향기롭게 피어나 어우러질 것이다."


우리들이 겸손해질 때 세상은 우리들에게 맑은 물과 꽃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시인은 그렇게 말한다. 이런 시인에게 "광물적 상상력"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를 규정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다. 특히나 시인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해도 이미 폭력적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비평가에겐 숙명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충성 - 무의촌의 노래  (1) 2010.11.08
정끝별 - 안개 속 풍경  (0) 2010.11.08
고정희 - 쓸쓸한 날의 연가  (3) 2010.11.07
강은교 - 사랑법  (1) 2010.11.07
김명인 - 베트남1  (0) 2010.11.07
이하석 - 버려진 병  (0) 2010.11.06
김형영 - 지는 달  (0) 2010.11.06
오탁번 - 꽃 모종을 하면서  (0) 2010.11.05
최두석 - 달래강  (0) 2010.11.05
조은 - 동질(同質)  (2) 2010.11.04
이성복 - 세월에 대하여  (2) 2010.11.04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TAG 이하석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