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ㅣ 박명진 외 / 한나래 / 1996년 12월




1996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새로운 키워드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이상 혁명도, 민중도 아닌 문화와 일상, 대중이었다. 현실사회주의라 명명된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단순히 맑스 원전의 번역만 뒤늦은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트렌드에도 매우 뒤늦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마치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 비행체에 지구의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 일거에 무력화시킨다는 발상처럼 일순간에 대한민국 사회는 포스트모던이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글쎄,
이 책은 내가 앞서 말하고 있는 서론 격의 이야기처럼 그리 거창한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학에서 새로운 문화이론을 고민하고, 가르쳐야 하는 8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진행했고, 그들이 공부했던 서구의 문화이론가들, 학자들의 텍스트를 우리 말로 번역해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처음부터 교과서라는 텍스트의 본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책이고, 나 역시도 그런 텍스트로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피에르 부르디외,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해 아는 이들에게는 그들 못지 않게 유명한 니콜라스 간햄, 존 피스크 그리고 미셀 드 세르토 등의 논문 8편이 번역,수록되었다.


미셀
드 세르토의 이름 앞에 '그리고'를 붙인 까닭은 내가 알기로 세르토의 논문 가운데 우리 말로 번역된 유일한 글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이 책은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크게 보아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 격에 해당하는 박명진 선생의 글 "문화 연구 - 새로운 시각의 모색을 위하여"부터 "문화에서 탈문화로 - 스티븐 크루크, 장 파컬스키, 맬컴 워터스""부르디외: 문화 자본과 아비투스"는 문화 편에 해당하는 것이고, 부르디외의 "예술적 취향과 문화 자본", 니콜라스 간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문화 사회학: 입문", 드 세르토의 "일상 생활의 실천", "도시 속에서 걷기" 등은 일상 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피스크의 "팬덤의 문화 경제학", 존 클라크, 스튜어트 홀, 토니 제퍼슨, 브라이언 로버츠의 "하위 문화, 문화, 그리고 계급", 토니 베넷의 "대중성과 대중 문화의 정치학"은 대중 편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고, 내 개인적인 정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믿음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문화연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 구조, 혹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서유럽 좌파의 고민과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바대로 문화인류학적인 방법론과 본인들은 때때로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거기에 덧붙여 문화연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독특한 문학문화(Literacy Culture)와 좌파 역사학의 영향이 합쳐져서 그들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 혹은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사실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연구대상의 폭넓음으로 인해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치명적인 악몽이며 기존의 아카데미 시스템 속에서 이미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는 학자들에겐 사기꾼 집단처럼 보일 수 있다.


신문방송학,
비판커뮤니케이션학의 한 분파일 수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는 문화인류학, 문화사학의, 또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의 한 지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연구는 어쩌면 실제로도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한동안 국내 소장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직종 가운데 하나가 다소 뜬금없이 출현한 '문화비평가'란 것이었다. 역사적 뿌리가 없는 비평 행위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하기라고 하는 양 1997년 IMF 외환 대란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나서 문화비평가라는 직종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직전에 나와서 현재까지 여러 대학에서 문화연구 혹은 문화이론의 제반 분야들을 공부하는 교재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읽노라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엄청난 문화환경의 변화라는 것이 다각도로 실감난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예시로 들고 있는 급변하는 문화환경들이 이미 오래전의 급변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저자들이 고민하는 문화연구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사실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였다(우습게도 나는 윌리엄스가 부르디외 보다 훨씬 전 세대 사람으로, 느낌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은 영국의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가(문학비평가)로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의 좌파이자 구조주의 문화연구가로 활동한 사람인데,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니콜라스 간햄과 함께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가 어떻게 정치경제학과 문화론적인 연구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통합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맑스는 고전 경제학과 결별하는 방법으로 경제학에 정치학(혹은 사회학)을 도입한다. 당대 최고의 뛰어난 문화적 교양인이기도 했던 맑스는 그러나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진술(다들 아시다시피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를 제외하고는)을 거의 공백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런 점에서 맑스 이후 맑스를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영국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여러 차례 맑스와의 결별을 시도했으나 끝끝내 결별하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그건 지금 우리가 그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흡사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존재하고 있으며, 변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체성을 밝히는 도구로서도 여전히(낡기는 했으나)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문화연구가 영원히 정치경제학과 결별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문화연구의 본질은 결국 "문화+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진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지구적 피라미드의 하부구조가 어떻게 상부구조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의해 통제되는지, 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얼마나 우리의 숨통을 옭죄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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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농담 섞인 충고를 많이 받게 됩니다. 저도 간혹 신참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동네 무당에겐 영험이 없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도 있을 겁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한 수많은 기적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에 그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하지만 명성을 얻은 뒤 찾아간 고향 마을 나사렛에서 그는 뜻밖에 냉담한 반응을 겪습니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 사람들은 "저게 누구야? 목수 요셉의 장남 예수가 아닌가?"라며 예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고, 도리어 갖은 모욕과 조롱을 쏟아댑니다. 이런 일을 겪은 뒤, 예수는 “예언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영험이 있다고 소문난 무당이나 나사렛 마을에서 자란 예수 그리고 교회에선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들도 집에 가서는 사모님들에게 타박을 받는다고 하지요. 아마도 같은 맥락이겠죠. 친숙하다는 건 그만큼 흔한 것이어서 귀한 대접을 받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

요즘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부추긴 작가, 러시아 차르 체제에 저항하다가 나중에 친 차르적인 인물로 표변한 작가란 이유로 비판받곤 합니다. 저도 비슷한 입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비판하지만, 반대로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여전히 그를 위대한 작가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 정치적 입장이나 사상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 영혼의 심연을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파헤쳤던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러시아의 통치자인 차르는 전근대적인 차르의 봉건체제에 저항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시베리아로 유배하거나 사형에 처했습니다. 간혹 자비로운 사면을 베풀기도 했는데, 총살 직전에 차르의 특명으로 사면시켜주는 기만술을 펼쳤다고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그런 방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순간 지식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명은 끝났지만,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때로 이토록 잔인한 것이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만약 사형대 위에서 죽었다면 그 자신은 양심대로 살았겠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록 그는 살아남은 뒤 친(親)차르적인 작가로 거듭나지만 동시에 한 명의 작가로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이기주의와 폭력성, 기회주의와 자기기만(합리화)에 대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깊이 있게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시인 황인숙은 <나를 믿지 마세요>란 시에서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아니 사소하게라도 친구나 애인을 배신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사실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그 사람이 배신한,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일 겁니다. 배신자가 배신하는 것은 타인과의 믿음이나 신뢰, 다시 말해 타인과의 ‘관계’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보내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 역시 파괴하게 됩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통해 생(生)의 의지를 다집니다. 예수가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 황야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깃들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 있겠지요. 인간만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망에 기대어 삶을 조직해 나갑니다. 저는 그 과정을 ‘자기합리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든,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든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만행위에 참여해 본 사람은 그 행위로 인해 파괴된 의미망(존재의 의미)을 재구축하기 위해 - 다시 말해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했던 자는 - 다시 한 번 자신을 기만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악명 높은 사상전향공작이 감옥에서 자행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단 한 번만 반성문을 쓰면, 사상전향서를 작성하면 풀려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갖은 고문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품었던 사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개똥같은 일상이 당신을 지배한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거나 작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유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상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인 거죠. 과거 80년대 나름대로 양심적인 지식인, 운동가들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거듭되는 절망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위대한 작가로 기억하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신을 냉정하게 살폈습니다. 마치 실험대 위에 놓인 개구리처럼 자신을 관찰하고, 관계를 살피고, 그것을 소설로 남겼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그는 ‘세상을 위해 순교할 수는 있어도 냄새나는 한 인간과 같은 방 안에서 공존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형대 위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명하지 않고 순교하는 일은 가능해도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매순간 '현실 적응'이라는 미명 아래, 사소한 일이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이유로 양심과 신념의 배반을 강요받습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할 때의 ‘개똥’이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사소하고, 흔해빠졌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지만 막상 그 평온한 일상이 깨졌을 때 우리는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행복'이란 그 상태가 지속되길 바라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행복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요? 일상의 행복은 와인 잔보다도 약한 것이라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상황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손님이 왔을 때 여직원에게 부탁하는 커피 한 잔, 아무도 보지 않는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슬쩍 건드렸을 때, 상사가 업무 외에 부탁하는 지시를 들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같은 일들 말입니다. 그처럼 소소한 부딪침으로 일상은 불편해지곤 합니다. 어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의 누군가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까닭도 그것이겠지요.

하지만 때로 그 평범한 일상이 역사의 한 순간이 되고, 개인의 사소한 선택에 대해 역사가 책임을 묻는 순간이 있습니다. 군대를 경험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경계 활동, 보초 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입니다. 예를 들어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동독 병사에게도 그 하루하루는 지겨운 일상이었을 테죠. 어느 날 동베를린에 살던 한 사람이 갑자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려 들었던 순간이 하필이면 그 병사가 보초를 서던 날만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시민에게 사격을 가해서라도 저지하라는 것이 병사에겐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고, 일상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 탈주자로 인해 병사는 일상의 평온을 방해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야에 독일에서 자행되었던 유대인 박해, 수정의 밤 이후 독일 내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받는 것 역시 일상이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영혼이 없는 공무원 역할을 수행했던 합리적인 제도의 뒷받침을 받아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빼곡하게 들어선 동포들과 함께 다카우와 아우슈비츠로 실려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선별하는 일도 그곳의 병사들에겐 수많은 진부한 일상 가운데 하루였을 겁니다.

악은 진부하지만 일상을 통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난 뒤 한나 아렌트는 “악의 진부함, 악의 평범함에 놀랐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말은 사실 악이 우리 주변에 개똥처럼 흔하게 널려있다는 말입니다. 세계평화와 인권을 노래했던 밥 말리는 거리 콘서트를 앞둔 어느날 밤 괴한의 침입으로 목숨을 위협받았습니다. 다들 그가 공연을 취소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밥 말리는 공연을 강행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공연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밥 말리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번성하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에 대해, 그 진정성이 무엇일까 의심하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도 우리들에겐 필요악일 수 있고, 심심 파적삼아 화제로 올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앞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먼저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문에서, 혹은 방송을 통해 특검에 호출 받아 나가는 중역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 밑에도 역시 부장이 있을 테고, 그보다 많은 과장들이 있을 테고, 또 그들 밑에는 더 많은 대리가, 주임이 평직원이 있겠지. 과연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500만 원 짜리 다섯 뭉치를 묶고 포장하는 일은 누가 했을까? 설마 그날 포토라인 앞에 카메라 세례를 받은 높은 분들이 로비하려고 필요하니 100만원 뭉치 다섯을 종이박스에 넣고 포장하라고 아랫사람에게 시켰을까? 그 같은 허드렛일을 본인이 직접 했을 리는 없고, 누군가 아래 직원을 시켰을 텐데 그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이 들까 하는 그런 상상이 들었습니다. 그 직원은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 고발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종찬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지난 2000년에서 2002년 삼성그룹의 관리대상자 명단에 포함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2000년 여름에는 이 수석이 삼성본관빌딩의 이학수 당시 구조조정본부장 사무실을 방문해 휴가비를 직접 받아갔다는 의혹까지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가 자기만 본 것이 아니라 함께 보았다고 말한 다른 직원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목격한 일이 일절 없다”고 특검에서 진술했다고 합니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모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이 진술과 관련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입증할 수 있는 방법도, 수단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이번 특검 결과를 지켜보면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특검의 입장이 진실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서글펐습니다.

특검 발표를 보니 이번 수사를 시작하게 만든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거나 증언에 일관성이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했던데 그렇게 강변해야했던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BBK시와 마찬가지로 '김경준' 씨처럼? 자신을 비호하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김용철 변호사는 왜 구속될 것도 각오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받아가며 나섰던 것일까? 그야말로 튀고 싶은 '또라이'였나? 그것이 아니라면 사실 조준웅 특검 자신이 삼성을 수사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검이 발동하게 된 계기는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이 정관계에 전방위적으로 로비를 해왔다는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측에서 삼성의 로비 대상자로 지목했던 사람 중 단 한 명도 특검은 소환해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장의 진술서를 받은 것으로 특검의 발단이 되었던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모두 무혐의 처리를 내리고, 검찰의 추가수사 가능성 마저 막아선 꼴이 되었습니다. 대신에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시효가 지나 법적으론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도록 합리화시켜주고, 정당화시켜준 결과만 내준 꼴이 되었지요.

정신적 불구를 강요하는 사회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같이 마주치게 되는 부당한 지시,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대면하고 항의할 수도 없는, 마치 카프카의 소설 "성(城)"에 나오는 "K"처럼 저항해야 할 상대를 알지도 못한 채 종이박스 100만 원 짜리 다섯 뭉치를 챙겨넣은 것은 아닐까요. 이번 사건은 좀더 윗선의 명령과 의도라는 모호한 배경을 깔고 다가오는 비리의 연쇄사슬 속에서 가장 하부 구조의 피라미처럼 연루되어가는 우리들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내려온 명령과 지시에 불복종하는 일은 과연 사소한 일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의 막대한 임금을 받았으면서 이제 와서 삼성을 배신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묻고 싶더군요. 과연 배신이란 무엇인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 배신인지 아니면 잘못된 관행이나 비리조차도 마치 야쿠자나 조폭의 의리처럼 한 번 보스(boss)로 모셨으니 끝까지 그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을 의리라고 부르자는 말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얼마전 진행된 ㄷ그룹 공채에서 ㅎ(27)씨는 6명이 함께 들어간 면접에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소견을 말하라’는 면접관의 질문을 받고 “회사가 더 발전하려면 김 변호사처럼 발설하고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뒤 더 이상 면접관들로부터 질문을 받지 못했다. ㅎ씨는 “면접이 끝날 무렵 ‘원래 지원부서 말고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네’라고 대답했는데도 결국 떨어졌다”고 말했다.

82만여명이 가입한 인터넷 취업카페 ‘취업뽀개기’(cafe.daum.net/breakjob)에도 “면접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김용철 변호사 옹호했어요. 당연히 떨어지겠죠?”(아이디 제우스호), “삼성 자회사 면접을 봤는데 최근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얘기하래서 김용철 변호사가 생각나 얘기했는데 정적만 흘렀어요. 어쩌죠?”(아이디 힘내자앙)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청년실업이 중대한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시대입니다. 취업재수니, 취업고시니 하는 말이 실감나는 이 시대에 대기업은 신입사원 최종면접 시험에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 질문한 뒤 김 변호사를 두둔한 지원자는 모두 탈락시켰다는 증언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라고 부른 사람들만을 합격시켰다는 것은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의리를 대신하여 조직의 의리를 우선하는 사람들을 선발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그간 기업들이 주장해왔던 글로벌 스탠더드니, 세계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창의적 인재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기만을 일상적으로 범할 수 있는 ‘정신적 불구’를 원하는 것이 아니냔 의심이 듭니다. 어쩌면 과거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오늘의 젊은이들도 취업전선이란 사형대 위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을 기만하라고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삼성 특검 결과 발표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나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당부해 봅니다.

'정신적 불구'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듣게 되는 모양입니다. 일상은 혁명이 움트는 곳이자 혁명이 소멸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일상을 무엇으로 재구축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삶도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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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매우 많다. 사람, 인간, 민중, 군중, 대중, 인민, 서민 등등... 때로는 정치적으로, 학문의 엄밀성을 위해 용어는 구분되고, 구분될 때마다 각각의 용어들은 별도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람 혹은 여러 사람들을 일컫는 말 가운데 가장 나중에 온 말은 무엇일까? 민중? 하기사 우리가 민중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나중에 발견되었으며, 가장 나중까지 논란의 여지로 남을 인간은 '개인'일 듯 싶다. 최근 역사학계의 새로운 조류로 주목받기 시작한 '일상사'에서(이와 관련한 책으로 몇 해 전 청년사에서 출간된 『일상사란 무엇인가』와 개마고원에서 출간된 『나치시대의 일상사』 등이 있다. 더 좋은 책들도 있지만...) 다루는 인간 또한 개인이라 할 수 있다. 일찌기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만행이 히틀러와 같은 소수 권력자들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에 내재된 '악'에 의해 가능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때의 일상 역시 개인에 해당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 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 유택 교수를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손녀딸 하나코와 유택 교수.
야나기사와 요시노리(Yanagisawa Yoshinori 柳澤良則) 교수가 원저상 유택 교수의 이름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택 교수만 한국식으로 한자어 발음을 따서 작명되어 있고, 그의 가족이나 나머지 사람들 이름은 개명되지 않고 일본 이름 그대로 사용된다. 야나기사와 교수라고 하는 것보다야 유택 교수가 편하긴 하다. ^^

'야마시타 카즈미'의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읽다보면 문득 이런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읽는 내내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 감동받기도 하지만 기억에 남는 극적인 대목은 쉽게 찾을 수 없는 만화다. 이 작품에도 물론 사건이 일어나고, 갈등이 빚어지긴 하지만  사건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철저하게 캐릭터에 의해 진행되는 만화란 점이 다른 작품들과 가장 큰 변별점이 된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의 주요 캐릭터들 우선 주인공 유택 교수가 있다. 그는 Y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매우 고지식한 인물이지만 마음이 따스하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며 무엇보다 매사 원칙을 세워 공부하는 일을 즐긴다. 그리고 그의 부인 마사코, 평범하지만 과연 평범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넷째(막내) 딸 세츠코, 크게 튄다고 할 수 없지만 유택 교수의 딸 아니랄까봐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대찬 면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남자친구 히로미츠, 그리고 외할아버지를 무척 존경하여 유 교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흉내내는 하나코가 있다. 아, 고양이 타마도 빼놓을 수 없다.
 

Y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유택을 다른 이들과 확실하게 구분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의 신념이다. 유택은 고지식하다 못해 확실한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이런 개인적 신념은 그의 가족은 물론 그가 속해있는 다른 사회의 융통성이 과다한 인물들과 늘 갈등을 빚고, 충돌을 일으킨다. 만약 이 충돌이 독자들로 하여금 답답하다고 느끼게 만든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얻지는 못했을 게다.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는 유택을 이 위태로운 경계 선상에서 오락가락하게 만들면서 이 작품의 소소한 재미와 교훈을 유발시킨다. 유 교수의 준법 정신, 바르게 살기 자세는 타인을 겨냥함과 동시에 그 자신을 겨냥한다. 바르게 살기를 타인(혹은 독자)에게 권유한다는 일은 종종 위험한 경험임을 잘 아는 독자를 위해 작가는 유택의 면모들을 먼저 살피고 이해하도록 권유한다. 
 

예를 들어 바른 생활 사나이인 유 교수는 취침 시간 9시를 칼 같이 지키는 인물로(그런 의미에서 유 교수의 모델은 '칸트'일지도...), 그 시간을 넘기면 마치 신데렐라의 황금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듯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든지 하는, 결함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원칙이 남을 겨냥할 때나 자기 자신을 겨냥할 때나 변함없다는 점에서 그는 타인에겐 바르게 살기를 강요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위선자들과 격을 달리 한다. 무엇보다 유 교수의 바르게 살기가 그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피해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기에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유 교수의 좌충우돌을 지켜볼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이 융통성 없음의 신념이 타인에 대해서는 배려와 관심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유 교수의 그 인간적인 매력에 흠씬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는 만화적 관점에서 유 교수를 비롯한 캐릭터 묘사에 특히 각진 부분보다는 전체적으로 원만한 선을 통해 독자들이 시각적으로도 편안하고 깔끔함을 느낄 수 있도록 장치해두고 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 주는 매력의 또 한 가지 요소는 이 작품이 지닌 풍부한 드라마성이다. 작가는 TV드라마처럼 일정한 분량 동안 기승전결을 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대신 어떤 이야기는 상당히 긴 분량의 이야기로 늘이고, 어떤 이야기들은 짤막한 에피소드로 완결짓는 신축성 있는 방식을 이용해 만화책에 담아내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만화들이 대개는 잡지에 연재되는 것을 다시 단행본으로 엮어낸다고 했을 때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의 독특한 고집이 관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마시타 카즈미는 유택을 통해 현재로부터 일본의 과거를 오가며 - 동시에 유택은 일본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청년들을 길러내는 대학 교수다 -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유 교수 자신이 희극적인 캐릭터도, 비극적인 캐릭터도 아닌 탓이지만, 유 교수의 캐릭터 자체도 희비극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그런 유 교수의 캐릭터 덕에 가끔씩 과거로 피드백하는 순간, 진지하게 몰입을 요구받는 순간에도 우리는 편안하게 유 교수를 따라 건너갈 수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캐릭터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독자들이 지루하다거나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의 제목 자체가 이미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 교수는 천재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처음 쳐 본 게이트볼 게임에서 그는 마치 '맥 가이버'가 처음 당구 게임을 경험하면서 그가 지닌 물리학적인 지식들을 이용해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유 교수도 그런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서 두드러지는 건 유 교수의 천재적인 면모보다는 그와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삶 그 자체다. 유 교수가 이런 평범함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비범함을 보이는 대목은 그의 천재성보다는 그가 늘 배움을 갈구하는 인물이란 거다.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때나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갈 때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은 "나는 지금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배운 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와 같은 말이다. 그에겐 세상 모든 것이 배울 거리들로 가득하기에 심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일상을 늘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노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다람쥐 쳇바퀴란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물보다도 더 촘촘하게 짜인 인간 관계와 사회의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권력 관계와 이해 관계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으로 비춰지고, 삶은 조각난 파편처럼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한 무엇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바흐친으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의 일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앙리 르페브르, 미셀 드 세르토 등과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일상이 단지 파편화된 개인이 권력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에 대항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천재 유 교수처럼 늘 무언가 배우는 이, 스스로 주체적인 자아로 해나가는 이에게 일상은 무기력한 삶의 반복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환희의 새로움을 경험하는 순간이 된다. 

일상, 그것은 혁명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처럼 혹은 삶의 진실한 측면이 그러하듯, 불꽃처럼 일순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혁명의 미래라면, 일상은 바로 미래의 어제인 것이다. 천재 유 교수가 주는 가장 아름다운 매력은 일상의 환희, 일상의 재미가 어떤 순간 점화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는데 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이 스스로 깨닫고 실천에 옮길 수만 있다면 일상의 주인은 다시 당신이다. 지금 아주 작은 일 한 가지를 스스로를 위해 먼저 해주라. 잠깐 책상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이제 막 움트는 새싹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는 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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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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