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최규석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4



테르미도르와 순정만화

"김혜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왜 저자도 아닌 "김혜린"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만화의 등장을 사람들은 1909년 6월 2일에 창간된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한칸 만화를 꼽는다. 그로부터 한동안 한국엔 만화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여유자적(?)하게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아니, 그것을 출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어째서 만화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기간의 우리 민족의 모든 예술이 굴절되었듯 만화 역시 굴절 혹은 단절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 만화가 다시 일선에 등장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라이파이"의 작가 김용환 선생이 한국 최초의 만화 전문 잡지《만화행진》을 1948년에 발행하면서부터였다. 만약 이것을 기점으로 한다면 한국 만화는 56년 만에 현재의 위치까지 성장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러하듯 비약 혹은 도약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화만큼 남녀간의 취향 분화가 확실한 장르도 드물다. 특히나 일본 만화의 짙은 그늘 속에 있는 한국 만화의 대중적 취향을 고려할 때 이런 남녀간의 취향 분화는 사실 전세계적인 것이라기 보다 한국적 혹은 일본적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한국 사회에서 만화는 그 시대적 한계나 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해본다면 놀라울 만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길찾기"라는 출판사에 대해 처음 머리 속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혜린의 "테르미도르"가 이곳에 복간되었다는 기사를 통한 것이었다. 그런 뒤에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 중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라크전과 관련해 먼저 인터넷상으로 주목받았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다시 "길찾기"를 통해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적 배경으로 차용한 작품으로 우리 만화사에 기록되어야 할 작품 목록에 분명히 올라가야 할 작품이다. 작품 자체의 질도 질이거니와 이 작품이 처음 수록된 "르네상스"라는 잡지의 역사적 의미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19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지로서 처음 등장한 잡지 창간호부터 수록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혜린은 당시 김진(바람의 나라) 등과 더불어 그간 순정 만화의 영역을 대하 서사 장르까지 확장시켰다.


한국 만화가 가야하는 머나먼 길

1958년 무렵 미국의 원조 경제에서 갓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만화는 출판 유통망을 떠나 대본소 체제에 진입하게 된다. 만화는 사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는 전형적인 출판물이 된다. 이것은 대본소용 만화, 무협지를 탄생시켜 만화의 예술성을 극도로 억압하게 된다. 만화의 생명은 대본소의 순환 구조와 맞물리게 되어 점점 짧아지게 되고, 만화 작가들은 작가가 아니라 만화공장의 공장장이 된다. 그들은 대본소에 착취당하면서 동시에 그 밑의 문하생이라 불리는 하도급을 둔 착취자가 되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에 연이어 군사쿠테타로 들어선 1961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만화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작한다. 가뜩이나 열악한 한국 만화계를 더욱 짓눌러 온 것은 군사독재정권이 그들 스스로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사회에 대해 벌이는 치졸한 도덕극이 지닌 과장된 무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었고, 어린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이었다.


만화가 대본소 시스템에서 다시 서점으로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주목해보아야 할 상황이다. 대중가요가 사전 검열 철폐를 위해 투쟁한 것처럼 만화 역시 대본소 독점체제를 깨뜨리기 위해 많은 만화가들이 싸웠다. 거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보태준 이들은 역시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이었고, 그렇게 만화를 사랑하고 고민한 세대가 바로 "공룡둘리에 대한 오마주"를 그린 "최규석" 세대다. 물론 얼마전 이현세 파동 등으로 드러나듯 아직도 우리 만화가 이런 사회적 금기와 편견을 벗어나 가야할 길은 멀고 험난하다. 동시에 만화에 대한 가장 든든한 지지층이자 동시에 어려서는 대본소 만화 보기에 익숙했고, 어느 정도 자라서는 도서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보던, 그리고 자라서는 디지털 스캐닝을 통한 인터넷상의 만화 보기에 익숙한 독자들이 얼마나 만화를 직접 소장하고 보려드는가? 혹은 보게 만드는가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그것은 만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거의 모든 예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마주 - 짧지만 위대한 전통에 대한 경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접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던 최규석의 이 단편 만화를 보고 놀라운 재능을 지닌 신예작가의 등장에 대해 찬사를 보냈고, 아동물의 전형적인 캐릭터성을 지녔던 둘리란 존재의 확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만화를 보고 나도 역시 그런 점에서 대단히 놀랐고, 여러 면에서 기뻤다. 우선 우리 사회에 드디어 오마주를 바칠 만한 전통 혹은 사회 전반에 두루 알려진 문화적 코드가 생겨났다는 점에서 기뻤고, 패러디물인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대해 이 캐릭터의 원저작권자인 작가 김수정 선생의 반응이 또한 기뻤다. 김수정 선생이 "둘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만화의 다양성을 감안할 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반가워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다시금 그의 작가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마주와 패러디는 사실 기법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베낀다"는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끊임없이 알프레드 히치콕을 베낀다. 퀜틴 타란티노는 오우삼을 베낀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예술가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낀다. 오마주가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면 패러디는 풍자를 위해 베낀다. 선배된 입장에서 후배의 오마주란 것은 말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패러디든, 오마주든 본래 자신이 만들어냈던 작품의 아우라에 변형을 가하는 행위이며 후배로서는 오마주라 하더라도 선배 입장에선 욕보이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비근한 예로 "서태지"를 패러디한 음치 가수의 음반과 비디오물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언제라도 오마주의 대상이자 동시에 패러디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이 설령 기분 나쁜 일이라 할지라도 참아줄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본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바로 예술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오마주가 되었든, 패러디가 되었든 표절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그 대상이 된 예술가 혹은 작품이 이미 사회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마주는 논외로 하더라도, 패러디의 기본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김수정은 일종의 아동물로 구분되는 "둘리"를 통해 대중적인 만화작가로 널리 알려졌으면서 동시에 둘리 캐릭터를 통해 독자(한국)적인 애니메이션 창작과 캐릭터 산업 분야를 개척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이자 중요한 장인이다. 그에 대해 후배 작가가 보내는 오마주는 짧지만 위대한 우리 만화계의 전통에 대한 경배이기도 하다. 그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인 김수정 선생의 자세를 보면 역시 경배를 보낼 만하다.






최규석 - 슬픈 먹이사슬의 뫼비우스

많은 이들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구입하게 된 동기가 이 단편 만화의 뒷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고길동의 무덤을 베고 누운 둘리가 공룡화된 모습으로 표현된 이 만화의 엔딩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감동적이었던 만큼 후속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엔 그 뒷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작가 최규석의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할 것은 없다. 나머지 단편들 역시 놓치면 아쉬울 만큼 뛰어난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문화계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문제 중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조로현상이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화계를 대표한 장르가 된 영화 부문은 복합상영관과 대자본의 결합으로 영화 장르의 급격한 산업화와 장르화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창의력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고, 오랫동안 한국 예술계의 정점에 서 있던 문학은 그 활력을 잃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손쉽게 타협하거나 아예 대결할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만화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시점에서 최규석의 단편 만화들은 비록 때로는 너무 안이하게 해피엔딩으로 종결짓거나 거친 안목을 정제하지 못한 체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젊은 작가의 당연한 권리인 "창조"와 "도전", "비판"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80년대적 향수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익히 드러낸 바 있는 솜씨, 교묘한 비틀기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정신은 2002년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의 극화부문 당선작인 <콜라맨>에서 손쉽게 해피엔딩적인 결말로 다가섰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고, 그의 데뷔작인 <솔잎>에서는 아직 그만의 그림체가 완성되기 이전의 박흥용과 오세영의 그림체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솔잎>에는 이미 작가가 앞으로 걸어가고 싶은 작품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맹아들이 숨겨져 있다. 그는 반전을 즐기는 작가이자 동시에 세상에 대해 진지한 말걸기를 시도하고 싶어한다. 이런 류의 작품에는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간 지녀왔던 적지않은 편견들, 가령 순정만화 vs 활극만화의 구도나 예술만화 vs 대중만화의 경계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깨우쳐 준다. 결국, 예술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다. 그것을 창출해 내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얼마나 철저하게 하였는가? 그의 장인적 기술과 예술가적 재능이 이것을 얼마나 뒷받침해주고 있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최규석은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근래 어느 장르의 예술가들도 지니지 못한 최규석만의 뛰어난 장점이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슬픈 먹이사슬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과거에서 미래로 타임워프한 공룡, 아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 원하는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줄 수 있었던 히어로 둘리조차도 나이 40에 이르러 "주민증"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이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원숙해지고 그만의 것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거친 러프 스케치 풍의 연필 데생으로 음영을 주는 그의 그림체도 매력적이지만, 역시 그만의 다양한 실험을 할 것이란 사실을 믿는다. 그의 드라마투르기 역시 지금의 간결하고 힘 있는 구조란 장점을 살리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더욱 많은 사연들을 담아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 매우 중요해질 한 작가의 초반부를 함께 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앞으로 더욱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나의 걱정에 아랑곳없이 아니 사실은 이 리뷰를 쓴 것이 이미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최규석은 나의 염려를 한낱 기우로 만들어버린 채 무럭무럭(?) 훌륭한 작가로 자리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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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초콜릿, 권력의 달콤한 유혹



초콜릿 전쟁 - 청소년 문학선 10 | 원제 The Chocolate War (1974)
로버트 코마이어 (지은이), 안인희 (옮긴이) | 비룡소


전교조 문제로 뜨겁던 여름이 지나간 1989년의 어느 가을 나는 모교의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후배가 수업 시간 중 교사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기 몇 명과 병원을 찾았다. 선배랍시고 찾아간 우리들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들고 간 꽃다발을 병에 꽂아주고, 음료수를 권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들은 만약 네가 원한다면 이 문제를 민주동문회 차원에서 다루도록 애써 보겠다는 말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후배는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어머니를 불렀고, 우리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 안에서 후배의 울부짖는 고함이 들려왔다. “선배, 절 이용하지 마세요.”

성장소설의 전형을 탈피한 성장소설, 『초콜릿전쟁』

사적인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 것은 로버트 코마이어의 『초콜릿전쟁』이 내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어 몇 번이나 책을 덮도록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영감을 아들 필립이 학교에서 전통적으로 실시하는 초콜릿 판매를 거부한데서 얻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이 작품이 오늘날 미국의 청소년 소설을 대표하는 지위에 올랐으나, 처음 출판되기까지 그리고 출판된 이후에도 적지 않은 논란을 겪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출판되기까지 주요 출판사 일곱 군데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했고, 출판된 이후에는 학교와 도서관에서 강독 금지와 대출 금지 같은 검열과 투쟁해야 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그들이 그를 죽였다”로, 마지막 문장은 “아치와 오비는 아무 말도 없이 그곳에 잠시 더 있었다. 그런 다음 어둠 속에서 그 장소를 떠났다”로 마무리된다. 앞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읽고 중간 부분을 유추해보면 마치 1930년대 유행했던 대쉴 해미트나 레이먼드 챈들러 풍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들이 떠오른다. 그 만큼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우며, 청소년 소설은 밝고 명랑한 것이라는, 최소한 희망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기존의 청소년 문학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성세대의 희망이다. 기성세대들은 청소년 문학을 통해 미처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성장소설(Bildungsroman)에서 성장(bildung)이란 한 인간의 자아가 갈등을 겪으며 성장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콜릿전쟁』은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범주에 들기 어려워 보인다. 이 소설은 자아 형성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한 인간의 자아가 망가지는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성장소설에서 주인공은 세상과의 갈등을 통해 성장하고, 사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며 어른이 되어 간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제리 르노'와 그를 괴롭히는 '아치 코스텔로'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각각의 이유로 끝끝내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다. 주인공 제리는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생활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그는 학창시절 동안 풋볼팀에서 뛰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 있으나 학교의 전통 행사인 초콜릿판매를 거부하면서 그의 소망은 철저히 망가진다. 야경대의 우두머리인 아치는 매우 냉소적인 인물이다. 그는 교사의 권위조차 비웃을 만큼 영악한 존재이면서 타인을 제 마음대로 부리고, 골리는 권력을 즐긴다. 아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모든 아이들을 장악한다는 즐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제리는 타의에 의해서, 아치는 자의(?)로 세상과 화해할 수 없었다.

내 감히 우주를 어지럽히랴

국가가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듯, 교육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사회의 통제와 폭력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학교란 공간에는 두 개의 권력, 공식적 권력인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 존재하는 비공식적 권력(폭력)이 존재한다. 트리니티엔 레온 선생과 교사들이 묵인해온 비밀 서클 야경대가 그런 비공식적인 권력이다. 야경대의 우두머리 아치는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비밀 과제를 내주고 강제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통제해왔다. 그의 권위는 야경대 비밀 과제를 수행해 본 아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제리가 처음 초콜릿 판매를 거부했을 때 같은 반 급우들은 누구나 이것이 그에게 내려진 야경대의 과제라는 것을 알아챘다.

차기 교장 자리를 노리는 레온 선생은 평소보다 무리한 초콜릿 판매를 강제하기 위해 야경대를 동원한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치는 평범한 신입생에 불과한 제리가 자신의 의지로 초콜릿 판매를 거부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장난스럽게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제리가 자신의 의지로 야경대가 지시한 기간이 지나서까지 초콜릿판매를 거부하면서 그들이 장악한 작은 우주인 학교의 권력 질서에 균열이 일어난다. 권력은 겉으로는 매우 견고한 듯 보이지만 단 한 명의 어린 학생이 용기 있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 그런 점에서 제리의 사물함에 붙어있는 포스터“내 감히 우주를 어지럽히랴?”라는 구절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렇듯 학교를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 내지 축도로 읽을 수 있기에 교육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작품만으로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이 있고, 특히 황석영의 단편 『아우를 위하여』는 갈등 구조와 사건의 전개 과정이 『초콜릿전쟁』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아우를 위하여』의 주인공 “나”는 주먹대장 영래 패의 전횡에 맞서 반 아이들과 합세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승리를 거둔다. 제리의 저항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은 잠시 자신들에게 떠안겨진 부당한 요구를,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이런 기분은 전교 400여 학생들 사이로 전파되고, 초콜릿 판매는 부진을 면치 못한다. 자신의 야심을 위해 초콜릿판매를 포기할 수 없는 레온 선생은 아치에게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도록 요구하고, 제리의 거부는 아치와 야경대의 지위마저 흔든다.

그러나 제리는 승리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을 다룬 두 작품에서 그가 승리할 수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큰 차이는 『아우를 위하여』에서의 영래패는 단순한 폭력집단인데 비해, 야경대는 대중의 심리를 조작할 정도의 영악함을 지닌 상대였기 때문이다. 야경대는 대중을 공범으로 삼을 만큼 교활했다. 제리의 거부에 마음이 쏠렸던 학생들은 야경대가 조작해낸 영웅놀이에 휩싸여 초콜릿판매를 학교의 이념에 대해 개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용기와 헌신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대목은『초콜릿전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알레고리 구조를 가진 소설이란 것을 반증해준다. 작가는 주인공을 정면에 배치시켜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대상화시켜 소외하지도 않는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다. 마치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시선처럼 파편화된 여러 학생들을 소개하며, 각 개개인들을 인터뷰하듯 다룬다. 각자 인격과 개성을 갖춘 이들은 아치와 야경대의 선동과 조작을 통해 제리를 소외시키는 몰개성의 집단으로 변모한다.

제리는 갑자기 “완전히 투명한 유령”처럼 취급된다. 『아우를 위하여』와 『초콜릿전쟁』에서 두 주인공이 상대해야 하는 대상의 차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교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레온 선생은 그가 가진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마치 나치 선전상 괴벨스처럼 학생들의 심리를 왜곡시킨다. 학생들은 부당한 대우를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인생이 부패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진정으로 이 세상에 영웅은 없으며,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조차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에 비해 황석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교사는 “애써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무서워만 하면 비굴한 사람이 된다”고 일깨워준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리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초콜릿판매는 성공리에 마무리된다. 교활한 아치는 제리를 본보기 삼아 다시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가 생길 수 없도록 하고 싶었다. 진저를 내세워 제리를 호모라 욕하고, 린치를 가했던 아치는 교활한 제안을 한다. 제리에게 명예를 회복하고, 복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권투시합을 주선한 것이다. 평범한 소년으로, 개인적인 원칙을 고수하고 싶었을 뿐인 제리는 함정에 빠진 검투사처럼 보다 많은 피와 폭력을 요구하는 군중(학생)의 아우성에 파묻히고 만다. 『초콜릿전쟁』을 읽으며 제리를 응원하고, 해피 엔딩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맞닥뜨릴 사회는 과연 학교의 현실보다 덜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우리는 과연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양심의 원칙들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는『초콜릿전쟁』을 통해 개인의 사소한 일탈행위를 처벌하는 국가주의와 집단의 광기,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와 작동방식을 떠올릴 수 있다.

청소년 소설로서는 너무 암울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냔 의문에 대해 작가는 “물론 슬픈 일입니다. 현실과 마주한다는 것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버랜드에 살게 될 뿐입니다. 그곳은 성장도 승리의 가능성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최근 내가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후배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선생님은 아직도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뼈아프지만 그것이 우리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초콜릿전쟁』은 분명 해피엔딩이 아니다. 권투시합 끝에 쓰러진 제리는 친구 구버에게 “속임수야. 우주의 질서를 방해하지마라, 구버, 포스터가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라고 충고한다. 제리에게 세상은 속임수였고,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제리의 목소리에서 1989년 후배의 고함을 느꼈다. 세상은 평범한 소년에게 조그만 통로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이 작품은 불행한 결말을 통해 현실이 비록 절망일 뿐이라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절망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면 인생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출처 : 창비어린이 7호(200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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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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