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 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1998년)



내가 어렸을 때 영화는 흑백영화였고, FBI요원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임을 받았으며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그리는 FBI요원은 대부분 악당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대도시의 경찰 지휘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그는 좀더 높은 차원의 내밀한 수사를 한다는 이유로 명백한 정의를 왜곡시키는 방해꾼으로 간주된다.


경찰 역시 악역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매우 노골적인 영화 람보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람보 영화인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를 보면, 베트남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 존 람보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을 걷다가 지방 보안관 브라이언 데니히에게 체포된다. 영화 속의 모든 것이 람보 편을 들고 있으며 보안관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가학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보안관이 옳았던 것이 아닌가! 보안관은 람보가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영화가 끝나기 전에 보안관 조수들 중 여러 명이 죽게 되고 그 마을은 도살장이 되어버린다.


람보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는 더욱 노골적이다. 람보는 베트남에서 포로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CIA에게 차출되어 출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임무의 실제 목적은 람보가 실패하는 데 있었기에 생존하는 포로들에 대한 소문은 전혀 들을 수가 없다. 온갖 난관을 이기고 람보가 마침내 포로 몇 명을 찾아내어 그들을 탈출시키려고 할 때 CIA요원들은 그들을 내버려두라고 명령한다. 이 영화에서 실질적인 적은 람보를 죽이려는 북쪽 베트남인이 아니라 바로 CIA 요원이다.


(중략)


70년대에 국가의 권위를 불신했던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시민군인 극우파들이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불신은 정치적인 노선과 관계없이 대중문화의 한 가지 특징이었다. 내가 언급한 영화와 그 외에 대중들에게 친숙한 대중문화에서도 권위에 대한 불신이 하나의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로보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1998년판 서문, 14-17쪽>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이 글을 모 잡지에 발표하는 글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원제명이 "In Defense of Anarchism"이란 것을 생각해볼 때 볼프의 서문은 책의 본문에서 나올 이야기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때 볼프가 말하는 '좌익'이란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부인하기 보다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체제로 연착륙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한 말일 것이다. 최소한 미국의 사례에 비춰보았을 때 국가는 정치적 좌파들에 의해 공격받기 보다는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알프레드 머라 빌딩에서 일어났던 폭탄 테러 사건처럼 극우파에 의한 것이다. 당시 범인으로 잡힌 티모시 맥베이는 연방정부에 반대하는 극우파 단체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1990년대 초반의 동구에서 발생한 현실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흔히들 좌파의 패배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본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단견이다. 실제로 좌파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국가에서 승리했다. 확실히 초창기의 야만적 체제였던 자본주의 체제를 국가의 경제체제로 채택한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강한 선진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점에만 주목하여 보자면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를 압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영국만 하더라도 모든 의료체계를 사회가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그외에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하는 거의 대부분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과거 사회주의가 처음 태동할 당시의 주장들을 '사회복지 시스템'이란 이름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국가단위의 사회주의는 패배한 것으로 보이나 정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애초에 소망했던 대부분을 획득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고 있다. 문제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대상으로 투쟁했던 혁명적 사회주의가 그 이후의 사회주의로, 새로운 세상으로 전진해나갈 수 있는 정신적 동력과 대안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비단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모든 정치 이념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문, 본문, 해설, 찾아보기'의 형태로 되어있지만 전체 페이지가 200쪽이 안 되는 얇은 책이다. 한 권의 작은 논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얄팍한 본문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인 임홍순 선생의 해설이 40쪽 정도 할애되어 별도로 따라 붙는다. 200쪽이 안되는 책에 40여쪽의 해설이 붙는다는 것은 이 책이 읽어내기에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볼프의 이 책이 읽기 어렵고, 난해한 개념들로 가득하다는 뜻은 아니다. 임홍순 선생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이해되지 못하고, 극좌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편견으로 규정된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즘"으로 제대로 이해받도록 하고 싶다는 뜻에서 해설을 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볼프의 저술이 다루고 있는 부분을 잘 요약하여 해설해주고 있으므로 볼프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다소 어렵다면 해설을 참고하는 것도 이 책을 이해하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이래 "아나키즘"은 하나의 '이상주의'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물론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역시도 실제 정치적 현실로서의 아나키즘을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1880년대 이래 "8시간 노동제"가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치부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8시간 노동제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아나키즘"에 대해 일종의 도덕적, 정치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평생 '전분'만을 섭취하며 살다가 세상을 등진 것처럼(헬렌 니어링은 소로우가 전분만 섭취하지 않고, 다른 과일이나 곡물도 섭취했더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때로 아나키즘은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들에 이미 상당수 녹아들어 있다.


소로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크 트웨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였던 전쟁에 반대하는 행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들 모두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나키즘"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적인 분야에서 이런 아나키즘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우리는 "아나키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된 사회체제에 반대하는 극렬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세례를 자동연상하지만, 그런 식으로 치자면 "자본주의"는 "아나키즘"이 사제폭발물을 만들 때 공장에서 수없이 많은 아동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살해했다는 오명을 오늘날까지 뒤집어 써야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18세기, 19세기의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달라진 것 이상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환경분야, 정치분야, 철학적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


볼프는 이 책에서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국가의 본질을 가장 강력한 통치권력으로 규정하고, 국가 권력에 의한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곧 권력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문제는 국가의 형태가 민주공화정제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이런 지배와 복종의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측면에서는 전제왕정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국가를 문제삼는 것은 이렇듯 최고의 권력을 갖는 국가 권위가 정당성을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형태의 국가도 존재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볼프 역시 어떤 국가의 권위도 정당화될 수 없고,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적 신념은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문제는 논리 이전에 현실적으로 이미 최고의 권력으로 존재하는 국가의 권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볼프는 그 문제의 핵심으로 국가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 의무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한 개인이 갖는 최고의 의무는 '자율'에 대한 의무이며, '자율'이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스스로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시시각각으로 자율과 복종은 충돌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짧은 독후감으로 그 모든 걸 정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인 볼프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프의 이런 견해는 때때로 국가의 권위를 도덕적 권위와 동일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작은 일상에도 국가의 권위는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는 영원히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잠시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들 모두는 크든 작든 자율적인 개인이란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아나키스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 책이 쉽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은 분명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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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독일은 전유럽을 석권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만 독일에 굴복한다면 유럽의 통합은 오늘날 EU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이룩될 뻔 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한 유럽의 역사에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곧 유럽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 나치즘에 경사되었던 까닭, 그것은 유럽이 하나의 강력한 문명권으로 재통합하여 다시 세상의 주도 문명(패권)을 이루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렇듯 유럽을 힘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여러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시도되지 않았던 역사 평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대결로서 더 의미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규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1940년 6월까지의 독일은 분명 문제가 많은 폭력적 국가이긴 했으나 특별히 인류의 적이라 규정당할 만큼 사악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나치즘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나 서구문명에서 한 인종에 대한 잔학한 멸종 정책의 원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치즘이나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문명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성취된 이후에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그들은 다른 인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부분은 게르만인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종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인디언 멸종에 이르는 과정,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애보리진 멸종에 이르는 과정과 비교하자면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말살정책은 오히려 덜 잔인한 측면이 있다. 최소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 대화는 했으니 말이다.

 

 

파시즘이 유럽에서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보다 더 정교하게 규명해볼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유럽 혹은 서구(미국을 포함한)에서 파시즘(나치즘)을 바라본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유럽문명을 수호할 하나의 중요한 정신 혁명으로 보거나, 전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공산주의보다는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까닭에 슈펭글러나 하이데거와 같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나치즘을 지지했고, 독일 이외의 국가들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유대인 혐오와 함께 히틀러를 격찬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헨리 포드뿐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대단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치즘과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 파트너로서 격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이 지배하는 독일을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능한 방패로 인식했고, 독일이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만한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과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지한 소련의 스탈린이 수 차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춰를 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 것을 요청했음에도 이들 국가들은 도리어 소련을 고립시켰다. 소련이 강력한 반공을 주장하는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파수견 입장보다는 좀더 쓸만하고 구미에 맞는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제2의 정복왕 윌리엄을 꿈꾼 히틀러

거기에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찌되었든 독일은 서부 유럽의 패자이자, 유럽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프랑스를 단번에 패퇴시키는 위용을 거두었고, 독일 공군(Luftwaffe)는 일찌기 찰스 린드버그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의 공군력은 전유럽 제국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우군 하나 없이(미국은 이 당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국이자, 공군국인 독일을 상대로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방공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나는 전투를 지휘하겠다. 그리고 만일 침공이 시작된다면 이 의자가 내가 앉을 자리이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격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내 시체를 끌어낼 때까지 나는 저 자리를 고수하겠다." 이 말은 당시 영국이 처해 있던 고립무원의 상황을 너무나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무렵 독일은 영국진공계획인 "강치(시라이온)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도버 일대의 벼랑 동쪽에 있는 램즈 게이트에서 와이트도 서쪽의 라임만까지 거리로 약 320km에 달하는 장대한 영국의 해안선에 25만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 정복에 나설 때 상륙한 바로 그곳이었다. 독일은 영국 점령 이후 체포할 유명인사들 - 영국수상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등 - 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논 상태이고, 독일공정부대원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버킹검궁 강하 직후 체포할 영국왕에게 건넬 인사말까지 준비시켰다. 모든 것은 치밀한 독일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폭이 40km에 불과한 도버해협이긴 했지만 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이 보장되어야 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는데는 필수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시작 - 제공권을 잡아라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공군들을 섬멸해야 했다. 히틀러에 이어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에게 이건 닭을 비트는 일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스페인 시민전쟁 때부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점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적의 전투 경험을 쌓은 강력한 공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1선에 배치된 항공기만 4,500대에 이르렀지만, 영국은 제2선급 항공기(여기에는 수송기, 중폭격기)까지 모두 긁어모아야 고작 2,900대 공군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 2:1의 약세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시민전쟁을 비롯한 수않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인데 비해 영국 공군 파일럿들은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들이었고, 그나마 파일럿의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모자라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을 공중에 모두 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도저히 영국은 독일의 거센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영국인들이 이런 비교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0년 6월에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협상을 권유한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고, 그로부터 독일의 가혹한 대공습을 견뎌내는 "불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Battle of Britain"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 말로 번역한 "영국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1940년 6월부터 시작해서 1941년 5월 10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공군대 공군 사이의 대혈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때를 다룬 영화이다.

 

 

자유를 수호한 영국의 찬가

미국에게 "지상최대의 작전"이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사수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찬가라면, 영국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공군대전략)"은 그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럽과 자유 진영을 사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그들만을 위한 찬가이다. 그런 까닭에 "지상최대의 작전"에서 미국과 할리우드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라면, "배틀 오브 브리튼"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제작한 영화이다. 감독은 "007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톤(Guy Hamilton)"이 맡았고(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자가 007시리즈의 제작자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영국 출신의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이 앞장서고 있다(이 영화의 서플먼트에 따르면 이 배우들은 모두 제각각 가장 적은 출연료라도 감수하면서라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고 한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트레버 하워드 (Trevor Howard), 커드 저진스 (Curd Jurgens), 해리 앤드류스(Harry Andrews), 이안 맥쉐인, 케네스 모어, 나이젤 패트릭,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 로버트 쇼, 패트릭 위마크, 수잔나 요크 등 모두 주연급으로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주인공은 영국 공군 대장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경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숨기고 출연해 "배틀 오브 브리튼"의 명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에 대해 여러 찬사들이 있으나, 이 영화 역시 "지상최대의 작전"처럼 수많은 유명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승리 요인들

이 영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어떻게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가를 살피고 있다. 그 요인들은 우선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한 휴 다우딩 장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략에 있었다. 다우딩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견하고, 처칠에게 더이상의 영국 공군을 도버 너머로 파병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 때 처칠은 프랑스 수상에게 더 많은 영국 공군의 파병을 약속해 논 상태였지만, 다우딩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영국은 더이상의 공군력 손실없이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우딩은 영국의 모든 공업력을 항공기, 그 중에서도 전투기 제작에 최우선을 두도록 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에 도시를 내어주면서까지 자국의 공군력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운영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다는 우위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 공군의 주력기인 Me-109는 먼거리를 비행해 영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최소 10분에서 최대 20분의 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는 짧은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 공군은 레이더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공군이 프랑스의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대기하였다가 그네들이 도착한 시점에 비로소 요격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늘 시간과 연료에 쫓기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이 보유하지 못한 신형 무기인 레이더 기술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으므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레이더 기술에 걸려 기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지상최대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실제 전쟁에서 쓰였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실제로 공중전을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기동전술, 편대 비행, 전투 기술을 보이면서 촬영된 영화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전투기(일부 모델)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실사 영화이다. 그렇게 고증에 철저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승리의 요인은 당시 영국군은 독일군의 군사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승리의 요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공군 파일럿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불굴의 정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칠은 "배틀 오브 브리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데이"는 그들이 세계를 구원한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1년 5월까지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만 127회였고, 이 때 영국 민간인 총 6만명이 사망했으며, 8만 7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공습과 폭탄을 독일에 떨어뜨려렸고, 무차별폭격을 가해 더욱 많은 독일의 도시들을 불태웠고,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그 이후 바뀌지 않는 민간인 학살 - 무차별폭격의 역사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승무원으로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폭격했던 지역을 여행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는 다만 한 개의 점으로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그가 떨어뜨린 폭탄이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떨어져 일반 시민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워드 진은 폭격 임무 참여할 당시 폭격기 날개 밑에서 터지는 고사포탄의 검은 색 구름을 제외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물론 적진을 비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자유에 대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항공전의 승리는 그 뒤에 치뤄질 무지바한 대량공습과 무차별폭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수행방식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제 전쟁은 더욱 가혹해졌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욱 가혹해졌는가? 그것은 전방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런 전쟁 수행 방식은 이후부터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수와 양을 능가했고, 베트남전은 다시 이를 경신한다.

 

 

* 이 DVD는 두 장의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본 영화를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두 번째 타이틀 역시 매우 재미있다. 하나는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생생한 증언, 영화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휴 다우딩 장군과 독일의 에이스이자 나폴레옹 이후 유럽 최연소 장군이었던 아돌프 갈란드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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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만의 민주주의를 끝내야 한다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에코리브르, 2008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광화문 시청 앞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여 벌이는 촛불 시위가 30여 일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시위는 서울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2의 6월 항쟁이 되는 것이 아니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시민 사회의 목소리에 맞서는 정부의 자세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아니 정부의 자세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고, 시위대에게는 가차 없이 물대포 세례가 가해진다. 대테러진압용이라던 경찰특공대까지 동원되는 모습은 살인적인 진압으로 악명 높았던 5공 치하의 백골단을 연상시킨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경험한 시민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과연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은 시민 대다수가 남아있는 수도 서울에서 비밀리에 철수하며 한강철교를 폭파해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에게 특수부대까지 동원해 총기를 난사했다. 1987년 정부기관원들이 대학생을 물 고문하다가 살해했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정권은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평택 주민들을 군대를 동원해 철조망을 둘러친 제2의 게토에 가두고 강제진압했다.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시위대에 뿜어져 나오는 물대포의 극적인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서서히 데워져가는 솥단지 안의 개구리처럼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회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변모해간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고, 시장에 가기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석유에 기초한 문명의 문제,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것이 현실이니 어쩌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현실주의’엔 눈앞에 빤히 보이는 ‘현실’은 없고, ‘주의’만 남아있다. 그동안 우리가 석유와 제3세계를 불태우는 대가로 누려왔던 값싼 농산물의 시대, 녹색혁명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현실엔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삼성 이건희 회장은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천 명,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경쟁력’과 ‘시장경쟁력’ 강화라는 주문 앞에서 한껏 움츠러든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한 명의 천재가 만 명 분의 월급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 사람이 소비하는 부스러기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 과연 우리들이 추구해야 하는 선진사회의 진정한 모습일까? 로버트 프랭크 ․ 필립 쿡이 말하는 승자독식사회란 어떤 것일까?

『승자독식사회』는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통해 최대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얻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요구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국 사회 내부의 사회적 양극화(승자독식)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승자독식현상은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한 정보혁명, 글로벌 네트워크의 확대와 관세축소 등 규제 없는 시장의 세계화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통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1992년 슈테피 그라프는 상금으로 16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 그녀가 선수보증광고와 시범경기로 벌어들인 돈을 합하면 이 액수의 몇 배였다. 그러나 그녀의 수입은 당시 최고의 라이벌인 모니카 셀레스의 수입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4월 셀레스가 관중에게 칼로 찔려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라프는 절대적 수준에서 볼 때 경기력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많은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43쪽>

정말 우리들은 능력 있는 일등 인재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까?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앞서 두 테니스 선수의 경우처럼 이런 주장은 허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독식사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우리가 동네놀이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놀이기구 중에 시소가 있다. 시소게임이란 놀이상대끼리 서로 균형을 이루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즐기는 게임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다소 몸무게가 나가더라도 그만큼 앞으로 당겨 앉거나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쪽에 다른 사람이 더 앉도록 한다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승자독식사회는 삶의 즐거움 혹은 지속을 위한 균형을 맞추는 시스템이 붕괴된 사회다.

예전에 아이들이 즐겨 찾던 군것질거리 중에 “젤리뽀”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상품명을 이용해 노래가사를 바꿔 부르곤 했다. 무척이나 살벌했던 그 노래 가사는 이랬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자본주의 시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바꿔 불렀던 노래가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대박과 쪽박 사이의 갈림길에서 개인이나 기업, 심지어 국가조차도 과거 냉전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저마다 핵군비 경쟁에 나섰던 것처럼 승자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을 치른다.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무한대로 펼쳐질 것 같았던 핵무기 경쟁도 군비축소조약을 통해 결국 제약이 가해진 것처럼 시장이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무한경쟁에도 일정한 규제가 가해져야만 현재의 승자독식 제로섬게임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파국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파국은 석유자원의 고갈과 함께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친기업적(Business Friendly)인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을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갈 것인가?

끝장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새로운 군비경쟁의 시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의 에르베 캄프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며, 현재의 민주주의의 시스템으로는 그것을 통제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생태적이라고 여겨왔던 ‘지속 가능한 발전’도 이미 너무 늦은 일이 되었으며, 도리어 이 용어가 현재의 심각한 위기를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는 ‘생태학’이라는 비속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의미론적인 무기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제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미덕을 믿는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한 번쯤 자문해보기 바란다. 그들은 정녕 산림벌채, 온실효과를 만들어내는 가스 배출, 시골길의 아스팔트화, 전 지구를 자동차로 뒤덮는 것, 수질 오염 등 이 모든 것이 점점 도를 더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몇 가지 반가운 소식 - 교토 의정서 체결, 몇몇 야생 생물종의 건채, 친환경 농업의 도약 등 - 은 작은 투쟁의 성과와 상황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된 물줄기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1938년에 살고 있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41쪽>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구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고, 작지만 소중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왜? 매일 더욱 많은 숲들이 사라지고,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가스 배출은 나날이 늘어나며, 어째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도 누리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나?

세계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과잉투자지만, 개별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고화질 텔레비전(HDTV)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는 식량과 보건에 투자를 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보다 고화질 텔레비전 제작기술이 뛰어난 국가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화질 텔레비전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면, 거기에 들인 연구개발비를 뽑고도 남기 때문이다. …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191쪽>

20세기 후반부터 자신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에 투자하며 환상적인 발전을 거듭한 중국과 인도는 2004년 한 해 동안에만 각각 47억 700만 톤과 11억 1,3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분야에서 단연 으뜸은 미국으로 같은 해 59억 1,2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세계는 파국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2005년 교토의정서를 발효시켰지만,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2001년 3월 탈퇴해 버렸다. 세계화에 의한 국가 간 승자독식경쟁은 과거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대신하여 새로운 형태의 무한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작게는 일국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과 크게는 세계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국가들의 투쟁이 지구의 파멸적 상황들을 극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놓은 결과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에르베 캄프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가진 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왜곡된 민주주의의 과두정치체제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사실상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 - 경쟁력을 상실한 고비용 저이윤의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해소 - 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기술 차이는 미미해졌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뒤처진 선진국들은 제조업을 포기하는 대신 지식서비스산업(금융 등)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 역시 미래의 성장 동력은 지식 경제 산업에 달렸다는 명분 아래 IT, BT, CT의 순서로 산업구조를 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본과 자본의 투쟁이라는 투기화된 금융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한 차례 경제위기를 경험한 기존의 사회권력은 재벌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승자독식시장의 과잉경쟁을 개인이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화된 시장 앞에서 개별 국가의 정부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다.

가진 자들의, 가진 자들에 의한, 가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끝장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광화문 네거리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거나 투표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어째서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를 놓고 ‘황금분할’이니 ‘절묘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인 ․ 관료들은 평범한 유권자들과는 거리가 먼 계급일 뿐이다. 미국의 ‘투표와 민주주의 센터'가 미국의 의회 선거를 분석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선거에서 정책 경쟁이 치열할수록, 다시 말해 후보자나 정당 간에 정책이나 이념, 철학적 차이가 큰 선거일수록 투표 참여율이 증가한다고 한다. 만약 정치인들 사이에 시장경제에 대한 운영방식, 민영화, 소비와 조세 감면, 탈규제, 부유한 투자자들에 대한 정책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현대의 수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들이 투표 참여를 귀찮은 의무로 생각하는 것이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는 말이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더라도 이것이 상대 정당의 지지율과 연결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민주주의(democracy)가 ‘demo(인민)’+‘kratos(지배)’,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민주주의는 무지한 대중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회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의 선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인민에 의한 지배를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무지한 인민대중이 아니라 바로 직업적인 정치인 계급에 의한 과두정치, 즉 정치인들이 입을 모아 사수하자고 외쳐대는 ‘자․유․민․주․주․의’다. 이라크 파병부터 시작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한미FTA까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조차 강행하는 것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다. 이럴 바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도 재판의 배심원처럼 인민대중 가운데 추첨으로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정치체제일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어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이라지만 청와대엔 특급 한우가 공급된다. 가진 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도 유기농 한우만을 먹을 충분한 재력과 의지가 있다. 이처럼 소수의 승자들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 체제는 실제 대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유권자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늘 반대의 행동을 취한다. 가진 자들의 소유인 언론과 미디어는 이것을 정치인들 개개인의 전형적인 위선이라 공격한다. 그러나 거대기업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곧 정치라는 것을 뼛속 깊숙이 체득한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이다. 정치인과 정당, 정부의 기만행위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적대감을 이용해 보수언론들은 ‘부패’ 혹은 ‘무능한’ 정부 대신 ‘정직’하고 ‘효율’적인 시장을 칭송한다.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세워 보상해주는 정부라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선 반정부적 수사까지 동원하는데 능숙한 그들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회적 회전문 시스템을 이용해 권력과 다시 한 몸이 된다.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승자독식경쟁을 멈출 의사가 전혀 없다.

홀로세의 공룡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20세기의 문명을 후세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도 점점 자명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20세기를 ‘화석연료의 시대’, 우리들을 ‘홀로세(Holocene)의 공룡’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2008)의 연간 에너지 전망에서 2030년 전 세계 원유의 하루 평균 생산량을 종전 1억1600만 배럴에서 1억 배럴로 하향 조정할 전망이다. 그동안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문명의 위기,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생태 위기를 지적했던 수많은 이들의 염려처럼 산유국의 석유 생산은 이제 정점에 도달했다. 석유 생산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일피크론은 더 이상 우려나 기우가 아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의 역사발전은 없다고 할 만큼 자신만만했었는데 어째서 오늘의 우리는 이토록 커다란 불안과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승자독식사회』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흡사한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승자독식의 원리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되어갈 것이다. 정부의 결단력 있는 정책들이 소득불평등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의 승자들은 언제라도 어느 한 나라의 세율이 높아지면 조세피난처를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한경쟁에 재갈을 물리자는 새로운 군비축소운동에 세계적인 시민 연대가 요구되는 이유다. 이처럼 두 권의 책 속에 그려지는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는 너무나 암담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결정적인 파국의 도래가 오기 전에 우리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이 그 시작을 알리는 일이길 바란다.

출처 : 환경과생명.2008.여름호(통권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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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담배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가끔 철지난 느와르풍의 옛날 한국 영화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참 이국적(異國的)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프랑스와 미국의 느와르 영화풍의 미장센들이 난무하는 장면들, 중절모를 멋있게 쓴 남자 배우들의 건들거리는 연기를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마초적이지요. 사랑에 울고, 의리에 울고, 배신에 우는 ...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하던데, 그것이 비록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예를 들어 "아리조나 카우보이"란 노래 가삿말의  "인디안의 북소리"에 연이어 나오는 "주막집"이란 가사처럼, 그럼에도 옛시인의 얼굴을, 김수영이 중절모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입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사진 한 장이 주는 선연한 인상은 오래 남습니다. 비록 김수영 자신은 박인환의 댄디즘을 겉멋으로 평가절하했지만 지금의 우리 시각으로 보면 김수영도 은근짜하게 댄디 스타일을 자기 것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개폼도 몸에 착 붙는 사람이 있는데, 김수영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인환과 김수영이 부리던 개폼(댄디즘)의 차이는 그것이 얼마나 몸에 맞춘 듯 잘 들어맞는가에도 있지만 박인환과 달리 김수영은 자신의 개폼을 자기 검열하는 정도의 자의식을 늘 품고 있었다는데 있었을 겁니다.

요사이 포트레이트 사진에서 소위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는데, 신동엽 시인의 사진 가운데 널리 알려진 사진 중에서도 이른바 얼짱 각도의 사진이 있습니다. 상방 45도 각도에서 내려찍은 구도의 사진이죠. 신동엽 시인을 요새 청소년들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으로 아는데, 널리 알려진 그의 시들에 비해서 "담배연기처럼"은 상당히 센티멘탈합니다. 사실 신동엽 시인을 소개할 때 자주 붙는 말인 '민족시인'이란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엔 '민족시인'이란 말이 신동엽 시인이 지닌 여러가지 풍모들을 가리는 역효과를 발한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위의 시를 보면 마치 5-60년대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정서를 담아 남기는 유언 같은 느낌이 들어요. 죽음을 예감한 사내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라며 노래하고 있지요. 이런 서정적인 정조가 소시민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때도 있지만, 바로 그런 모습이 신동엽 시인을 오래도록 우리 가슴에 남게 만드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의 일생을 두고 가장 격렬했던 시기는 대략 분단 직후와 한국전쟁, 그리고 연애 시절, 4.19혁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려서 형제를 여럿 잃은 그는 친구들과 뛰어놀기 보다는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을 적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요. 어려서 공부를 잘해서 내리 1등만 차지했던 그였지만, 당시 지방의 공부 잘하는, 가난한 수재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전주 사범에 지원합니다. 지금도 교육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은 교육이 해방이 될 것인지, 통제의 수단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지만, 식민 치하에서의 교원이란 고민이 많은 자리였을 겁니다. 신동엽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매우 컸지만 해방 직후인 1948년 신동엽은 전주 사범을  중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해방 직후의 극렬한 이념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참여했던 까닭이 크리라고 추측하곤 합니다. 전주 사범을 중도에 그만두긴 했지만 워낙 어수선한 시기였던 터라 그에게 초등학교 교원 자격은 인정되어서 인근의 어느 국민학교에 부임했지만, 부임한 학교에서도 대립하는 사람이 있어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고향인 부여에 머물던 그는 국민방위군이란 것에 징집당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여러 곡절 깊은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건 중 하나가 국민방위군 사건이었을 텐데, 원래 국민방위군이란 것 자체가 중국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면서 이승만 정권이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자 혹시라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될지 모를 젊은 장정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서 급조해낸 일종의 예비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엄동설한에 소집된 장정들에게 피복이나 식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그나마 지급되어야 할 물품들은 중간 관리자들이 모조리 착복해서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장정들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두 사람 앞에 하나씩 지급되는 가마니 한 장씩을 덮고 자야했습니다. 그 결과 소집된 50만 명의 젊은 장정들 중 무려 5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고 말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때 신동엽 시인의 몸도 만신창이 폐인의 몸이 되었고, 간을 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상한  건강 때문에 훗날 그의 나이 40세도 되기 전에 요절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대전 전시 연합대학'을 졸업한 신동엽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일을 도우며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 해 초겨울 어느 따뜻한 날 신동엽은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던 단발머리 소녀 인병선(印炳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신동엽과 사별한 이듬해인 1970년 <여성동아>에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인과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서 한낮이 되자 나는 집 근처 책방으로 신간 서적을 사러 나갔다. 가끔 들러 주간지와 월간지를 사오던 서점이었다. 몇 가지 뒤적이다 찾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방 주인에게 "○○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책은 아직 못 갖다 놓았읍니다만 그 대신 이건 어떨까요?"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나는 책을 따라 자연히 그와 마주섰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 깊이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 크고 빛나는 눈! 비록 작달막한 키에 빛 바랜 허름한 군복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빛나는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눈빛은 너무 깊고 넓어 나의 온 가슴을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의 해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맵찬 눈매를 한 소녀가 가끔 들러 대중잡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예지 아니면 사상지 그리 어려운 학술 서적만 사가더란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해서 부여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매우 가난했고, 아내 인병선이 양장점을 개업하면서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비로소 신동엽은 시인으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예술가와 능력있는 아내의 결합이란 등식이 이 경우에도 성립된 셈인 거죠. 아내 인병선의 회고에 따르면 다정다감하고,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이긴 했으나 생활인으로서의 신동엽은 못질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 일을 했는데, 제자들에게도 매우 인기있는 스승이어서 교지를 만드는 학생들이 실시하는 앙케이트 조사에서 제자들이 선정하는 인기교사 순위에 늘 올라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늘 새로운 말들로 표현되는 법입니다. 만약 4.19가 없었다면, 신동엽도 없었다는 가정도 가능하겠지만 그와 반대로 신동엽이 없었다면 4.19혁명을 표현하는 새로운 말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 가운데 하나인 "껍데기는 가라"가 바로 4.19가 만들어낸,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진 4.19를 만들어준 시(詩)인 거죠. 신동엽 시인은 4.19혁명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실패를, 그가 사용했던 시어들, 비약의 언어로 혁명으로 승화시켜 줍니다. 우리가 4.19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개혁 실패로 인한 반동으로 기억하지 않고, 민중에 의한 혁명으로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힘, 시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69년 3월 중순, 40세의 신동엽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고, 그동안에도 그는 죽음을 예감한 듯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 입원치료 일주일만에 병원측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퇴원을 지시했고, 며칠 후인 4월 7일, 신동엽은 문병 온 작가 남정현의 품에 안긴 채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마침 신동엽 시인의 기일인 4월 7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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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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