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 김형국 |열화당(1999)


▶ 진진묘(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의 저자를 굳이 따지자면 세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책이 장욱진의 화집이란 점에서 당연히 대표 저자는 장욱진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화가 장욱진의 면모를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김형국 선생이 나서 돕고 있다는 점에서 김형국 선생 역시 이 책의 중요 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화가 장욱진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살펴보고 그의 영혼의 반려로 이 책의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저자는 장욱진의 아내 이순경이 또한 중요 저자다. 

 

장욱진 작품 가운데 "진진묘(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란 것이 있는데, 이 작품은 1970년 1월 3일 불경을 외우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덕소로 돌아가 7일 낮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그렸다는 아내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장욱진이 아내의 모습에서 불성을 발견한 것이겠지만 얼핏 그냥 보아서는 불화라고 해도 될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또 보면 볼수록 묘한 그림이다. 표정하며 자세하며 아내같기도 하고, 보살같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그리고 나서 화가는 몇 개월동안 앓아 누웠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화가의 부인 이순경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그러나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긴 화가는 이를 두고두고 아까워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또한 화가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이에 대한 자료를 엮었다고 해도, 이 책이 장욱진의 화집인 이상 김형국과 이순경을 공동 저자의 반열에까지 올린다는 건 좀 어색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과 장욱진의 관계는 한 사람은 부인으로, 평생의 반려이자 동지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작품 세계를 널리 알린 카프카에게 있어 막스 브로트의 성격이란 점을 떠올려보면 공동 저자라 하더라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장욱진은 일본 유학 중 역사학자 이병도 선생의 맏딸 이순경과 결혼했다. 잘 알려진대로 이병도 선생은 우리 역사학의 태두이자, 우리 역사를 실증사학(어찌보면 싫증사학이지만)이라는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고정시킨(더욱 큰 문제는 사관이 없다는) 책임이 있다고 비판을 당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사관을 강제로 주입하려 할 때, 우리 학자들이 모여 이에 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것이 '진단학회'였다는 사실까지 깍아내릴 필요는 없다. 한국어 사용조차 금지당하는 시대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학회를 이끌고 '진단학회보'를 만든 업적은 후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해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긍정적이었다. 어쨌든 장욱진은 이순경과 결혼한 뒤 평생토록 변치 않는 사랑을 함께 했다. 늘 혼자였던 장욱진의 작품 속 까치에게 가족이 생긴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징용경험과 한국 전쟁이란 힘든 경험들 속에서도 장욱진이 이중섭과 달랐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이란 울타리 덕분이었다. 화가와 가족들은 어려운 살림이기는 했지만 잠깐 이산 체험 끝에 한데 모여 살게 되었고, 장욱진은 매우 행복해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의 모습을 작은 화폭에 옮겨놓기를 즐겨했다. 이 무렵 그린 작품 중 유명한 것이 <가족도>이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옹기종기 둘러 앉은 모습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교수라는 신분과 직업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미술이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고 몹시 따랐지만 장욱진은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그 자신의 감정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안주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이 무렵 장욱진의 동료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화가 이중섭이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병들어 먼저 세상을 떠난다. 장욱진은 그로부터 몇 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 때마침 4.19혁명을 앞둔 무렵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자주 시위를 했는데, 제자들이 매일같이 장욱진 곁에 모여들자 학교 당국은 그가 시위를 부추긴 것으로 추측했는데, 학교에서 불편해 한 탓보다는 그 자신이 떠나고 싶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청해서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그 유명한 덕소생활을 시작한다. 그와중에 친분을 더욱 도탑게 나누었던 인물이 바로 김형국 교수이다.

 

훗날 장욱진의 묘비명을 김형국은 이렇게 적는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십일년 사월.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은 작가의 화집으로 올컬러 인쇄라고는 하지만 부피만 놓고 생각해볼 때 그 부피에 비해 가격이 다소 높은 편이다. 다만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점은 다른 책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욱진의 매직 그림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장욱진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의 회고가 담긴 뒷 부분이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장욱진에게 시집와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동안 - 예술가의 아내로서 살아온 - 의 삶과 애환이 잘 녹아 있다. 애써 고상함이나 교양을 꾸미지 않아도 가장 고상하고 우아한 예술가의 아내는 고상하다. 


▶ 장욱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http://windshoes.new21.org/art-changucchin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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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욕심’이라는 말을 뜻하는 한자어는 두 가지 모두 표준어로 쓰인다. 하나는 ‘하고자 할 욕(欲)’을 써서 ‘欲心’이고 다른 하나는 ‘욕심, 욕정을 뜻하는 욕(慾)’을 써서 ‘慾’이다. 세속도시에서 신선처럼 살다간 화가 장욱진(張旭鎭)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뒤이어 나오는 격식과 겸손이 하나의 구(句)를 이루고, 교만과 소탈이 역시 또 하나의 구를 이룬다. 이 말을 다시 풀어보면 ‘나는 심플하다 그러므로 격식을 갖추느라 꾸미는 겸손보다 소탈한 교만이 좋다’는 뜻이 된다. 장욱진의 발언이 지닌 핵심은 단순성(simplicity)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여러 장의 황소 그림을 그려놓고, 자신이 대상을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자세히 묘사된 황소에서 점점 살갗이 벗겨지고 결국 몇 개의 선으로만 묘사되는 황소는 여전히 황소였다. 그런 심정으로 나 역시 약간의 교만을 벗 삼아 말해보려고 한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문화망명지 - 깃발 없는 자들의 모임”으로 커뮤니티가 ‘분리’되었다. 분리란 표현이 마음에 좀 걸리긴 하지만 액면 그대로 ‘분리’라는 속성도 분명히 지니고 있다. 이걸 좀더 좋게 표현하면 발전이랄 수도 있는데, 나는 발전이란 표현보다는 진화 혹은 진보란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지난 2007년 연초에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는 정보트러스트어워드란 상을 받았다. 나는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는 현재 이미 완성된, 다시 말해 ‘welll-made’된 사이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해가는 사이트”라고 말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물학적 입장에서 진화(evolution)란 ‘돌연변이’에 의한다. 문화망명지의 진화 역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돌연변이의 원인은 크게 내부적인 요인(자연발생적) 즉 유전물질의 복제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하거나 방사선이나 화학물질 등과 같은 외부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하는데 문망의 입장에서 보자면 바람구두라는 한 개인이 지향하고 주장해온 방향성에 공감하는 이들의 마음으로 전이(轉移)되고 수용(收容)되는 과정에서 변이(變異)를 일으키는 것을 내부적 요인에 빗댈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의 변화 혹은 각자가 살아온 과정, 경험, 문화적 체험의 차이로 우리 모두 제각각의 다른 인격체일 수밖에 없는 모든 망명자들의 합(合) 역시 내 입장에서만 보자면 나와는 다른 존재, 변이일 수 있다.

문화망명지의 진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마음 썼던 것을 잘 안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어느 측면에선 침울해지기도 했고, 아쉬움도 진하게 남았다. 본래 내 것이었고,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내 것이라고 말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화를 선택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중 하나는 인간은 하나의 점(點)에 불과하다는 내 평소 소신도 작용했다. 점과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을 우리가 직선이라 부르듯 직선이든 곡선이든 모든 선(線)은 점과 점으로 이루어진다. 점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위치(point)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소실(消失)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이곳에서 꿈꾸는 것은 물론 문화망명이다. 그러나 ‘문화망명’이란 행위 역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문화망명 조차도 나에겐 하나의 방법론이지 그 자체로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어쩌면 그 목적지를 상징하는 것이 ‘깃발’일지도 모르겠다. “~ism”이 하나의 이념이 되기 위해 지향점이 있어야 하겠지만 나에겐 목적보다는 그 과정에 이르는 행로(行路)만이 존재한다. 점과 점으로 연결된, 연대하는 인간의 선(‘관계’라 부를 수도 있는), 어쩌면 나에게 목적은 그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이 '깃발 없는 자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길 위에 서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길 위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완성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점으로 시작되었고, 결국에 가서 다시 하나의 점으로 소멸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람구두의 소실을 이야기하고, 안타깝게 여긴다고 말하지만 나를 움직이는 마음(慾心)은 그런 바람구두라는 하나의 점이 소실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이 있어야 비로소 직선이든 곡선이든 만들어가며 움직일 수 있다. 내가 당신보다 좀더 큰 점이라고 치자. 그래도 점은 점일 뿐 선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의 선이 되기 위해 나는 나라는 점을 버리고 당신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반칠환 시인은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노랑제비꽃 화분이다”라고 노래하지 않던가.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나는 지금 누구보다 교만하게 말하고 있다. 한 송이 제비꽃이 피어나기 위해 지구가 통째로 필요한 것처럼 나라는 하나의 점이 온전히 유지되기 위해서도 당신들이 통째로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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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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