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1

-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일번지 포카라에 들어서는 초입에서 바라본 마나슬루 


탈출인가, 출장인가?
11월 18일(금) 아침에 네팔 카트만두로 떠나 11월 26일(토)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7박9일 일정의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은 새얼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있는 힌두·불교문화권 탐방 시리즈의 사실상 두 번째 일정이다. 인도는 이미 한 차례 다녀왔고, 아마도 다음 기행의 목적지는 티베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인도 기행은 재단의 다른 분이 수행하고 다녀왔는데 어쩌다보니 이번 네팔 기행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가 수행하게 되었다.


2011년은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2009년 8월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매월 혹은 격월로 「현대일상의 지배자들」이란 연재를 시작했다. 기업문화 혹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변화와 혁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고,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에 대해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내용인데 매월 100매에서 120매가 되는 글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올 연초에는 피로가 겹친 탓에 면역력이 떨어져 그만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며칠씩 회사를 결근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 벌어져서 마약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를 먹으며 연평도 주민 돕기 운동을 위해 연평도 현지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가정적으로는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한 노력에도 쉬이 들어서지 않던 아이가 태어나 첫 돌을 지내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상황이었던 터라 직장과 가정, 거기에 부수적으로 연재하던 원고까지 겹치면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져 있었다. 그런 일들이야 남들도 살면서 겪어내는 수고로움이었을 터이니 나만의 괴로움이라 말할 순 없어도 거기에 더해 내 자신이 자초한 괴로움들마저 있어 올해는 청소년기를 제외하고 내 생애에서 살아내기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피곤함과 삶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에 굳이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11월 18일 출국하기 전 날까지도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계간 『황해문화』의 최종 마감 원고를 붙들고 있었는데 편집장으로서 떠나기 전 최종본까지 살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출발 12시간 전에야 부랴부랴 여행용 가방을 꺼내 옷가지를 넣었다 빼다를 반복하며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그런 부산함 덕분에 어딘가 떠나기 전의 여행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여행의 설렘은 내겐 대단한 사치였고, 당장 네팔의 현지 기후가 어떤지 제대로 알아볼 시간마저  없어 트위터에 11월 현재 네팔 기후가 어떤지 대놓고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네팔에 다녀온 어떤 이가 네팔의 11월은 한국의 초가을 날씨라 다니다보면 도리어 더울 수 있고, 일정 중에 포함된 룸비니 같은 곳은 초여름 날씨에 가까우니 여름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었다. 만약 그 조언이 없었더라면 7박 9일의 일정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을지…. 부랴부랴 여름옷 한 벌을 챙겨 넣을 수 있었다.


새얼문화재단은 1년에 한 차례씩 국내 역사기행과 해외 문화기행을 떠나는데 국내 역사기행은 대략 100여명 안팎의 대규모 인원이 2박 3일의 일정으로 함께 먹고 자며 이동하면서 국내의 여러 역사 유적들을 찾아간다. 이에 비해 해외 문화기행은 경비와 일정 문제 등으로 국내 역사기행에 비해서 비교적 소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이긴 하지만 참가인원은 여행지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도 유동적이다. 그러나 이번 네팔·히말라야 기행은 처음부터 3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을 두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처럼 인원 제한을 두게 된 것은 네팔 현지 사정이 그 이상의 인원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만큼 불편한 탓이 컸다. 결국 나와 한국 가이드, 현지 가이드 포함해 모두 26명의 인원이 이번 문화기행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게 되었다.

 


부대끼는 마음을 뒤로 하고 9시 45분에 출발하는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였다. 일행들을 먼저 나와 영접한다고 내 딴엔 일찍 출발해 도착했는데도 공항 장기주차장에 주차한 뒤 3층 출국장 만남의 장소를 찾지 못해 약간 헤맨 탓에 약속장소에 가보니 이미 많은 분들이 도착해 있었다. 네팔로 출국하기 전 휴대폰 로밍에 대해 문의하고,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며칠 전 구입한 네팔 안내 책자를 펼쳐들었다. 내가 구입한 책은 한국의 랜덤하우스가 일본의 다이아몬드 빅사와 출판계약을 맺어 한국판으로 펴낸 <세계를 간다> 시리즈의 네팔 편이었는데, 원래 여행안내서로 가장 유명한 론리플래닛 시리즈의 네팔 편을 구입하려고 찾아보다가 론리플래닛 시리즈가 편집이나 내용 구성이 매뉴얼스러운데 비해 종합적으로 보아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내게는 좀더 적합할 듯 싶어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편이었는데 <세계를 간다>가 한국이나 일본의 여행자 스타일을 좀더 고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네팔, 히말라야 그리고 마나슬루
나에게 네팔이란 나라는 아버지의 꿈이 서린 곳이다. 처음 네팔이란 나라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꼭 한 달 간격으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1979년 겨울부터 이듬해 1980년 연초까지 그 해 우리 집안은 사실상 풍비박산이 나있었다. 당시엔 아직 철없던 어린 시절이라 앞으로 닥쳐올 내 앞의 삶이 지닌 무게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었다. 그 무렵 내 눈에 띈 것은 책꽂이 한 구석에 꽂혀 있던 김정섭이 지은 『집념의 마나슬루』란 책이었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마나슬루(8,163m)가 히말라야 14좌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고, 8,000m급 이상 봉우리 중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된 산은 안나푸르나였다.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게 제2위의 높이를 자랑하는 K2는 난공불락의 어려움으로 인해 악명을 떨친 탓에 유명하고, 낭가파르바트는 목숨을 건 산악인들의 도전이 빛나는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들을 집어 삼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마나슬루는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슬루는 한국과 일본의 산악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이다. 다만 한국의 산악인들에겐 집념과 도전의 산으로, 일본의 산악인들에겐 영광의 산으로 기억된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마나사(Manasa)에서 나온 말로 ‘영혼의 땅’, ‘영혼의 산’이란 의미를 지닌다. 마나슬루가 처음 산악인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네팔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950년 영국의 W.틸만(H.W.Tilman) 등반대가 마나슬루 일대를 정찰하면서부터였다. 네팔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뒤 서구의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 원정대가 펼쳤던 극지원정 경쟁, 올림픽을 통한 스포츠 경쟁이 그렇듯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히말라야 초등 경쟁은 각국의 산악인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치열한 레이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알피니즘이란 말 자체가 애초에 서구에서 출현한 용어인 것처럼 그들은 알프스, 힌두쿠시, 알래스카 등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세계 알피니즘의 역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봉 등반 경쟁에서도 역시 그들이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상실한 영국은 특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독일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줄기차게 도전했다. 독일이 낭가파르바트에 집착한 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로 아이거북벽을 정복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경험과 역사가 배어나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티벳에서 보낸 7년>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산악인 힐러리 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1953년 5월 29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존 헌트 경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초모룽가)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남성으로 태어나 현장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 있음을 깨닫고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된 특이한 이력의 언론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쟌 모리스가 펴낸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여행』에 감격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쟌 모리스는 특파원으로 영국원정대를 동행취재하면서 힐러리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특종 보도하는 영광을 누리며 언론인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된다.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우리 앞의 낡은 박스 위에 앉은 저 두 사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우리 밖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날은 너무나 밝았다. 눈은 그지없이 뽀얗고,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렀다. 대기는 아직도 온통 흥분으로 들끓는 듯 했다. (쟌 모리스, 박유안 옮김,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 여행1-에베레스트부터 성전환까지』, 바람구두, 2011, 22쪽.)



쟌 모리스가 타전한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뉴스가 영국에 도착한 것은 때마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날(1953년 6월 2일)이었다. 영국 전역은 새로운 여왕의 등극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접하며 열렬한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히말라야에 등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처럼 히말라야 등정이란 사건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뉴스라고 생각했기에 국가적인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역시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에 성공하면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으로 마이니치(每日)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일본 산악회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 일본원정대는 초기엔 틸만 원정대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만으로 시작해 마나슬루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했고, 등정 가능한 코스를 여러 차례의 사전 원정으로 파악한 뒤 1956년 유코 마키가 이끄는 12명의 대원과 20명의 셰르파로 구성된 등반대가 본격적인 마나슬루 등정에 나서게 된다. 이들 원정대는 같은 해 5월 9일 토시오 이마니시와 셰르파 갈첸 노르부, 두 명이 정상 공격에 나서 마침내 마나슬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우리와는 민족적 감정이 뒤얽혀 있는 일본원정대에 의한 마나슬루 초등이었지만 이것은 서구 산악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히말라야 8,000m급 초등 경쟁에 동양의 산악인들이 뛰어들어 이룩한 최초의 쾌거였다. 이후 중국원정대가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초등(시샤팡마는 네팔이 아니라 티베트, 중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구 원정대가 도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14좌 봉우리 중 두 곳을 일본과 중국이 초등하는데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 원정대의 마나슬루 초등을 도우며 함께 했던 셰르파 갈첸 노르부는 1955년 프랑스 원정대와 함께 마칼루에 오른 데 이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8,000m급 2개봉을 초등한 사람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이들의 마나슬루 등정을 범국가적으로 축하했다.




16명의 한국원정대를 집어삼킨 마나슬루

 

일본은 이후에도 마나슬루와 끈질긴 인연을 이어가는데 1971년 마나슬루 북서릉을 오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1974년엔 동릉을 통해 일본의 여성원정대 대원 3명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면서 여성 최초의 8,000m 봉우리 등정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는 등 마나슬루는 ‘일본의 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본과 깊은 인연(일본의 등산용 석유버너 중 마나슬루의 이름을 딴 제품까지 있었을 정도)을 맺게 된다. 우리나라가 히말라야 등정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일본보다 뒤처진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대한 정찰등반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는 사실상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이 완료되어 가던 시점이었는데 이후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도전하기까지 1971년 한국산악회가 추렌히말(7,371m)에 등반한 것이 우리가 경험한 히말라야 원정의 전부였다.


한국의 마나슬루 제1차 원정 당시 김정섭은 직접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뒷받침하면서 실질적으로 원정대를 꾸린 당사자였다. 그러나 제1차 마나슬루 원정대는 김정섭의 동생으로 원정대에 참여한 산악인 김기섭을 불의의 사고로 읽은 뒤 철수하고 만다. 김기섭은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희생자였다. 『집념의 마나슬루』는 자신이 빠진 채 진행되었던 제1차 마나슬루 원정에서 동생 을 잃은 슬픔과 비탄 속에서 동생의 시신을 찾아 고국으로 가져오고 제2차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제2차 원정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제2차 원정마저 1972년 4월 10일에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김호섭, 송준형, 오세근, 박창희와 함께 참여했던 일본 산악인 야스히사를 비롯해 셰르파들까지 모두 15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1937년 세계9위봉인 낭가파르바트(NangaParbat, 8,125m)에서 독일 원정대원 1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이래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규모의 대형 참사였다.


그는 1차 원정에서 동생까지 잃은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며 2차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 등반하며 겪어야 했던 일들, 그리고 다시 조난과 실패, 철수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심정이야 피를 토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 힘, 그 힘을 집념이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집념의 마나슬루』에는 그가 준비한 또 한 차례의 원정, 제3차 원정계획서를 책 말미에 게재했는데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생 시절엔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란 말도 흔히 들을 수 없던 시절이었던 터라 그의 3차 원정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단지 등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애와 네팔의 현지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어서 그 내용에 빠져 읽었을 뿐이었다. 이후 김정섭은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실질적인 개척자로 활동했다. 김기섭, 김호섭, 김예섭, 세 동생을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묻은 맏형 김정섭은 1974년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마나슬루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악천후로 인해 6,800m에서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만 했다. 마나슬루는 그를 끝끝내 품어주지 않았다(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김정섭 씨는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가서 현지에서도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정리하는 원고를 집필하며 2002년엔 다시 마나슬루로 가서 동생들의 시신을 찾아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마스떼(당신 안에서 신을 봅니다)’란 네팔의 전통 인사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지만 정작 이 책이 그 시기에 어째서 우리 집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보다 더 세월이 흐른 뒤 돌아가신 아버지의 앨범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 책이 왜 우리 집에 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앨범에는 한 가닥 자일에 의존해 산을 타고 있는 당신의 모습, 빙벽을 기어오르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산을 좋아해 대학 산악부에서 활동했고, 김정섭 씨 형제 가운데 어느 분과 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의 형제들과 함께 산에 다녔고 마나슬루 등반팀에 합류하라는 제안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이 분들과 함께 히말라야에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물론 할아버지의 만류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1차 원정이 있었던 1971년 무렵은 내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어느덧 비행기는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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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미국의 정치 문명 -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문명(civilization)은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키비스(civis)' 와 도시를 뜻하는 '키빌리타스(civilitas)' 에서  유래한 말이다. 문화비평가 김창남은 "문화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뛰어난 정수로 본다면, 여기에는 예술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통한 정신적 완성의 추구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종종 문화(culture)와 문명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으로 파악되거나 문화의 특수한 한 형태로 파악되어 서로 연결되거나 혼용되어 사용되는 등 실제 사용에 있어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문화가 정신적인 발전 상태(가치)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문명은 물질의 발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인류학의 영향으로 문화 가운데 도시적인 요소, 고도의 기술, 작업의 분화, 사회 계층 분화를 갖는 복합문화(문화의 복합체)를 큰 단위로 파악한 총체를 문명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권용립 선생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이 책
"미국의 정치문명"에 저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와 미국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니, 나의 서재에는 미국 관련 서적들이 책꽂이 두어 칸을 빼곡이 채울 정도가 되었다. 하워드 진, 리처드 O. 보이어, 노암 촘스키, 이냐시오 라모네, 리오 휴버만,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외국 학자들과 국내 학자들의 책들이 그것이다. 책 많다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 같은 책들과 권용립의 이 책은 상당히 다른 책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책들이 미국의 역사, 경제, 사회, 외교 정책 등등에 대한 책이라면 권용립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의 정치 문명에 대해 규명하고, 분석하려 한 책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1880년대 후반에 촬영된 서울의 미국 공사관 모습(출처.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권용립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것은 1882년이지만 미국이 한반도의 정치적 운명과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부터다. ...<중략>... 해방 이후의 한국에 엘리트를 공급하고 재생산하는 본거지였으며, 한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아본 사람들이었고 미국과 어떤 종류든 내연의 커넥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미국은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타인의 나라'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피안'이었고 '세계'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본문 29쪽>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에
"이산 가족"이 존재했다면,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인 1970년대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 안에는 "이민 가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민족 공동체인 북한보다 심정적으로 미국이 더 가깝게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닌 내연의 깊은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대표 신헌과 미국 해군의 로버트 윌슨 슈펠트 제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1876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에게 고종이 미국의 위치를 묻자 김기수는
“서양의 서쪽, 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두리뭉술하게 답해야할 정도로 잘 알지 못했던 먼 이역의 나라 미국은 그저 오랑캐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받아 온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단박에 뒤집어진다. “예의로 나라를 세웠기에 남의 땅과 백성을 탐하지 않으며, 굳이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는다.”는 미국에 대한 일방적 찬사가 가득 담긴 이 책은 러시아의 침략성을 과장되게 표현하면서 이를 막고자 한다면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약소국 편에 서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부강한 나라, 미국의 이미지가 우리 위정자들의 뇌리에 새겨진 건 아닐까?


서유럽과 다른 정치 문명 - 미국


권용립은 책 머리에서 서구적 비전으로 바라볼 때, 대개의 학자들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등의 문명론에서 서유럽과 미국을 동일한 문명권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최근 우리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충돌' 역시 미국을 별도의 문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선 토인비 등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권용립은 미국과 서유럽의 정치 문명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 별도의 문명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미국이 서유럽의 정치 문명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농축된 기억의 유무이다.


역사시대의 긴 세월을 수많은 굴절과 변화 속에서 보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국가를 설계한지 불과 150여년 만에 세계 최강의 공화국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해냈다. 서유럽 국가들이 상상의 공동체든, 아니든 간에 실제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계해놓고 그런 뒤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의 이민을 통해 건설된
(기억을 제조해낸)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국가 설계 과정을 담당한 담론이 미국의 건국 신화가 되고, 이것이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즉, 이것이 미국의 이데올로기이고, 미국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현재의 미국 속에서 정치적 응집력을 제공해주는 담론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재의 미국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므로, 이데올로기를 제거할 때 미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


저자는 미국의 역사와 역사학의 계보를 엮어내면서 19세기 미국 애국주의 역사학의 대부 뱅크로프트의 주장을 보여준다. 뱅크로프트는 미국을 전 세계 문명을 융합한 결정판으로 미화하며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합작한 신대륙 탐험과 발견, 프랑스가 지원한 독립전쟁,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그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에서 기원한 문화,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대의 제도,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연방제 원리와 사상적 관용의 정신"을 하나로 녹여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로 묘사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 가 의미하는 상상이 만약 담론에 의해 구축된 고도의 상징 체계를 의미한다면, 정치적 담론과 정치적 자의식의 산물이란 점에서 미국 국민(American Nation)은 이 정의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전세계의 인권과 자유를 노래한 측면에는 이런 미국인들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즉, 미국의 국가 정체는 인류의 정의를 담보한 가장 보편적인 정치 체제이기 때문에 타자(민족, 국가)들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식 문명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현대 외교사를 살펴보면 비합리적일 정도로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모두 '도덕주의적 외피'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다. 실제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power politics)'를 추구하는 현실주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교의
(doctrine, 이 말은 정치학의 주의, 공식 외교 정책을 뜻하지만 그보다 먼저 종교의 교의(敎義), 교리를 의미한다)를 선포하면서 미국의 외교를 정당화하려 한다. 물론 역사 이래 모든 강대국들이 자국의 힘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써왔고, 이런 선민 의식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계도할 소명을 타고났다는 확신 속에 극단적 개입주의의 함정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대륙의 타락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로 태어난 미국이야말로 국제 정체 세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도덕을 솔선수범한다고 믿었다. 즉, 다른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자격과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이런 자의식은 제국주의 혹은 사회진화론적이다. 거기에 캘빈주의적 소명의식이 곁들여지면서 미국의 강자중심주의는 다시 도덕주의적 절대주의가 된다. 즉, 미국의 외교적 행위
(전쟁을 포함한)는 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국제 정치 행위는 반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해방자로서의 힘,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된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독립전쟁 직전의 잠시를 제외하곤 봉건성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롭게 태어났기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봉건 잔재와 투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스스로가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 - 봉건성과 싸워야 하는 나라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바깥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된 지리적 혜택 등으로 인해 마치 배부른 부자가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절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얼마만큼 모방하는지 그것을 척도로 해서 다른 나라들을 평가하는 경향으로도 알 수 있다.



결어 -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을 버려라!


권용립은 정치 문명으로서 미국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 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 즉,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미국 국민 개개인의 개별 정신 영역에 일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다수 미국인들이 믿는 그 무엇, 미국 국민이나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의식에 편승한다고 본다. 그러나 먼저 미국과 같은 방식으로 건국된(설계된 국가)의 정신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설계의 이념을 밝혀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의 얼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의 독자적 정치문명을 이해하고 그 집단 정신의 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래야만 브레진스키나 헌팅턴
(혹은 조지 W. 부시, 라이스와 같은 네오콘)이 보여주는 너무나 미국적인 사고, 즉 한국을 미국의 파트너가 아닌 외교적 액세서리로 보는 브레진스키의 태도나 미국의 어떤 정책도 한국의 자유를 무조건 신장시킬 것이라는 헌팅턴의 아전인수격 메시지에 충격을 받거나 분노하는 새삼스러운 일도 없어질 것이라 말한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하다가는 다시 배신감을 토로하는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이 사라져야만, 우리는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환멸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울, 기대에 따른 미국의 모습이지 실재하는 미국의 모습이 아니란 것이다.


▶ "자, 소망의 거울이 우리 모두에게 무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설명해주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보니까 말이다. 도움이 됐니?"
해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걸 보여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구나." 덤블도어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넌 네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네 주위에 그들이 서 있는 걸 보았고, 론 위즐리는 항상 형들에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형들보다 더 잘되어 혼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본 거지. 그러나 이 거울은 우리에게 지식이나 진실은 보여주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이 거울이 보여주는 게 진짜인지 혹은 심지어 가능한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본 것에 넋을 잃거나 미쳐서, 이 거울 앞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냈지.
이 거울은 내일 다른 장소로 옮겨질 예정이란다, 해리. 그러니 이것을 다시는 찾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그리고 만일 이 거울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게다. 꿈에 집착해서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에는 "소망의 거울"이 등장한다. 주인공 해리 포터는 마법의 학교에서 소망의 거울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선다. 해리가 찾아낸 거울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한 기억들만을 보여주는 거울에 빠져 인생을 허비해버린다. 해리가 거울 앞에서 선지 삼일 째 되는 날 덤블도어 교수가 나타나 말한다. "너도, 앞서 다녀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소망의 거울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한 게로구나. 꿈에 집착해서 현실의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이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 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지금 우리들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 혹은 그 거울에 비춰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혹시 그와 같은 것은 아닐런지....


* 권용립 교수의 "미국의 정치문명"과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은 지금껏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우리나라 학자의 미국학 저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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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3년 10월



어쩌다보니 별로 좋아하는 저자도 아닌 "어니스트 볼크먼Ernest Volkman"이 저술해 국내에서 출판된 3종의 책을 모두 읽고, 그 세 권의 책에 대해 모두 서평을 올리게 되었다. 저자 소개에는 그가 첩보기관 및 스파이 분야의 대단한(하긴 대단하다) 전문가인양 소개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가 전문가인 영역은 이런 자료들을 쫓아가서 공부하고, 종합해내서 글로 써내는 저널리스트란 점에서 전문가라는 것이지, 이 분야에 종사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는 아니다. 어니스트 볼크먼의 저서  세 권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20세기 첩보전의 역사 : 인물편"은 국내에선 모두 "이마고" 출판사에서 나왔다. 내가 읽은 그의 저서 세 권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였고, 그 뒤로 읽은 책 "스파이의 역사"가 제법 재미있었다. 가장 근간인 :20세기 첩보전의 역사"는 생각외로 재미가 적었다.


어니스트 볼크먼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 잘 발휘되는 것으로 대중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이지만 전문가들이 잘 손 대지 않거나, 대체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를 잘 파고 든다는 점, 둘째는 그가 풍부한 사료들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는 것, 셋째는 어려운 이야기를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잘 풀어낸다는 것이다. 이 책 "스파이의 역사"에서는 그의 이런 장점들이 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가장 훌륭하게 성공한 첩보작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전"이라거나 "권력은 총구가 아닌 정보에서 나온다"와 같은 구절들은 스파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전제가 된다. 즉, 저자가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이제 비밀 제한 기간이 완전히 지나서, 비밀이 해제되었거나 너무나 끔찍한 피해를 겪어서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된 사건들로 국한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들이거나 아직도 그 의미가 남아 있는 것들은 여전히 비공개로 남는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이 책의 제2부 "암호와 감청 전쟁: 보이지 않는 스파이들"에서 독일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비밀암호작성기인 "에니그마"의 암호 코드를 영국은 "배틀 오브 브리튼" 이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할 수 있고,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해독해냈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비밀로 남아 있었다. 007을 감독한 가이 해밀튼이 1969년 감독한 영화 "배틀 오브 브리튼"은 독일의 영국 침공과 이에 맞서는 영국 공군의 대혈투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 영화 어디에서도 에니그마 암호를 풀어냈기에 독일 공군이 어딜 목표로 날아오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은 단 하나도 없다. 역시 이 영화의 DVD서플먼트에는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다우딩이 출연해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에니그마 암호를 풀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없다. 왜냐하면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시 전쟁의 최전방에서 이를 지휘했던 다우딩 중장조차 이를 영화든, 회고록이든 어디에도 언급할 수 없었고, 영화에도 그런 극적인 부분을 삽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근대적 개념에서 첩보전을 최초로 실시한 나라는 영국이었고, 특공대를 만들어 운용한 나라 역시 영국이었다. 오늘날 대테러부대의 전세계적 모델이 된 SAS를 만들어낸 나라 역시 영국이었다. 그런 영국도 바보같은 실수를 한 적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의 비교적 낭만적인 첩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더 한층 냉혹해지고, 이후 동서냉전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첩보전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혹시 캐빈 코스트너의 출세작이기도 했던 영화 "노웨이 아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캐빈 코스트너가 미 해군 장교로 등장하는 영화인데, 대통령이 케빈 코스트너의 애인과 밀통하다 우연히 그녀를 살해하고, 그 죄를 덮어 씌우려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엮은 영화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CIA내부에 소련이 침투시킨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설정이 겹치면서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다룬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는 아니지만, 첩보전의 역사에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 있었다.


이 책의 "제3부 반역작전: 내부의 적을 색출하라"는 첩보조직 내부에 침투한 첩보원, 이중첩보원에 대한 이야기와 이들을 추적해 색출하기 위한 첩보작전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거듭되는 반전을 경험하며 골머리를 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이 장을 펼쳐 읽으며 다시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 손자병법에서는 간첩의 종류를 향간, 내간, 반간, 사간, 생간이라 하여 다섯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들 다섯 종류의 간첩을 사용하여도 적이 그 방법을 알지 못하니 이를 신기, 즉 귀신 같은 경륜가 재능이라 일컫는다고 말한다. 우선 향간은 적국의 사람을 포섭하여 이를 활용함이고, 내간은 적국의 관리를 포섭하여 이를 활 용함이며, 반간은 적의 간첩을 포섭하여 이를 활용함이고, 사간은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아군 간첩이 이를 알리고 적에게 전달케 함이며, 생간은 돌아와 보고함을 말한다.


동서냉전 시기에 CIA와 KGB는 서로의 조직에 간첩을 침투시키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더군다나 영국 최고의 첩보기관인 MI6의 최고 책임자 지위에 오를 뻔한 킴 필비가 KGB의 간첩이었단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 첩보 기관의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다. 이런 와중에 KGB로부터 탈출한 전직 KGB요원 하나가 말하길, CIA 내부엔 이미 KGB스파이들이 잠입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CIA의 방첩담당자는 CIA내부의 요원들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이후 KGB에서 망명한 요원을 CIA를 교란시키기 위해 침투한 간첩으로 오인해 수년간 스파이 혐의로 반인권적 처우를 가했다. 결국 이런 방첩 행위는 CIA내부의 반발을 불러왔고, 방첩담당자는 해직당한다. 그 이후 재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의심을 받은 이가 바로 방첩행위를 주도했던 그 담당자였다는 이야기는 웃어 넘기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 역시 분단 이후 아직 풀지 못한 숱한 사건들을 가지고 있다. 위장 간첩 사건부터 시작해서, 권력의 안위를 위해 조작된 간첩 사건, 휴전선을 넘나드며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고투를 거듭했던 이들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 종종 스파이들을 용도가 폐기됨으로 잊혀지거나 좀더 심할 경우 그들을 부렸던 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책 "스파이의 역사"는 물론 그런 부분에 대해 소상한 언급을 하고 있거나 독자들에게 어떤 흥미 이상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노라면 저절로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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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엘리트(오늘의 사상신서 10) - C. 라이트 밀즈 (지은이) | 한길사(1991년)


먼저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자.

18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의 무대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근대사회를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권력의 분화라는 뚜렷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즉, 문관이 권위를 독점, 군사적 강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반면에 군인의 세력은 제한되었으며 정치적인 중립화를 유지해야 했고 따라서 그 세력이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공업화를 이룬 여러 국가에서는 문관 우위라는, 일견 위대하기는 하지만 불확실한 사실이 점차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로부터 1차 대전까지의 오랜 평화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세계 역사는 바야흐로 군부 중심시대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장군들이 다시금 종전처럼 활약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현실적인 성격은 군부의 지도자들이 제출한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정치적인 진공 속으로 장성들이 진군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회사 중역이나 정치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장성들이 -- 미국의 엘리트 세계에서 가장 우대받지 못하였던 이들 장성들이 진출, 지극히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대한 권력을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243쪽>


위의 문장을 살펴보았을 때, 이 내용이 과연 현재의 미국 혹은 세계와 무관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의 13장에 논의된
"대중사회" 부분을 읽어보기 위해 오랜만에 손 때 묻은 이 책을 꺼내서 읽다가 심심한데(물론 절대로 심심할 겨를이 없지만)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이 써 논 글이나 읽어보자는 심산에서 클릭해봤더니 절판이란다. 이런 걸 문화적 아노미라고 해야 하나? 문화지체(cultural lag)라고 해야 하나? 사회과학 분야의 관심이 예전 같지 못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한 시대를 풍미했던 C.W. 밀스의 책이 절판되었을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세상이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 걸 애통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책의 가치 효용이 다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사실 이 책
"파워엘리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상당수는 이제 그 효용이 다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작동하는 지배구조의 엘리트들이 누구라는 걸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이 처음 나온 1950년대 중반 "파워 엘리트"가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C.W.밀스는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을 상류사회, 지방사회, 대도시 상류사회의 400대 가문과 유명인사들, 대부호, 기업의 최고 간부, 기업체 부호, 군부 지도자 등등의 범주로 나누어 이들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균형이론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분점하도록 하여 균형을 맞춘다는 이론)과 파워엘리트, 대중사회의 틀로써 설명한다. 책의 말미에는 미국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1950년대 미국은 이미 보수적 분위기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다)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럿셀 커크를 인용해 미국의 보수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다.


"1) 신의 의도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위대한 힘을 자기의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보수주의자는 전통적 생활의 다양성과 신비성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사회는 지도자를 찾고 있다"고 믿는다. 마치 유대 민족이 선지자를 통해 하느님이 예시해준 왕을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보수주의자(미국의)들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적 우열이 있으며 거기에서 계급과 권력의 자연적 질서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이는 현재 미국이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내재된 보수주의의 도덕률이다). 미국의 전통은 신성한 것이며, 전통을 통해서 신의 섭리의 참된 시화적 방향이 명시된다고 보았다. C.W.밀스의 "파워엘리트"가 왜 대단한 책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이다. 미국 사회는 신의 섭리에 따른 전통에 의해 승인된(기름부음을 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통치되는 균형잡힌 사회인 셈이고, 밀즈는 바로 미국의 그런 보수주의를 비판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 미국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으나 내외부적으로는 두 가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외부적인 위협이란 것은 일찌기 패튼이 주장한 바대로 소련의 위협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미국 사회가 이전과 다르게 크게 변모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유럽에 미국식 문화를 광범위하게 퍼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우선, 전쟁전에 비해 기업의 구조가 대규모화되었다. 이전의 중소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소멸되거나 거대 기업에 합병되었고, 소규모
(물론 우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농장들 역시 거대 기업 속에 포함되어 갔다.


전쟁은 참전한 남성 병사들을 대신해 노동 현장을 메꿔 준 여성과 청소년의 사회진출을 가속화시켰고, 전쟁 수행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미국 동부와 서부의 도시들이 거대화되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미국의 기존 문화 시스템이 대중사회화
(산업화와 도시화)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자신이 대중문화의 총본산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 역시 대중문화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이 되는데, "파워엘리트"의 C.W.밀스 역시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J.S.밀과 A.토크빌의 자유주의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밀스의 견해는 물론, 대중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C.W. 밀스는 공중(public)과 대중(mass)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공중은 ① 의견을 받는 쪽과 거의 같은 정도로 많은 수의 의견을 보내 주는 쪽이 있고 ② 공중에 대해서 표명된 의견에 효과적으로 반응을 나타낼 기회를 보장하는 공적(公的)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며 ③ 그와 같은 토론을 통해서 형성된 의견이 효과적인 행동으로서 실현되는 통로가 용이하게 발견되며 ④ 제도화(制度化)된 권위가 공중에게 침투되어 있지 않고 공중으로서의 행동에 자율성이 유지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중에 있어서는 ① 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의견을 받는 쪽에 불과하다. ②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이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며 또는 불가능하게까지 만드는 조직에 놓여 있다. ③ 의견이나 행동으로의 실현은 여러 가지의 저항으로 인해 통제되고 있다. ④ 대중은 제도화된 권위로부터의 자율성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고 있다. 밀스는 어떠한 양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인가에 따라 공중과 대중을 구별하고, 대중사회에서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제도화된 미디어이며, 대중은 주어진 매스미디어의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라 하였다. 그런데 매스미디어는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밀스에 의하면 당시
(1950년대) 미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는 도덕, 덕성과 상관없는 것이며 그들의 능력은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 수단이나 부의 원천, 명성의 기구에 의해서 선발되고 형성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공중(public - 요새 말로 하자면 '참여 민주주의')의 토론을 정책 결정자의 의사와 결부시켜 주고 있는 자발적 결사체의 다원적 존재에 의해서 견제를 받으면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류사상 일찌기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령관이며 미국의 무책임한 제도의 조직 내부에서 성공을 차지한 인물들이다. (낡은 이야기라고 하기엔 지금 읽어봐도 너무나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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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20th C : 매그넘(MAGNUM) 1947~2006 - 매그넘 (지은이) | 에릭 고두 (글) | 양영란 (옮긴이) | 마티(2007)





20세기 최고의 프리랜서 사진가 집단 “매그넘”


『현장에서 만난 20th C』는 “우리는 그들의 사진으로 세계를 기억한다”는 의미심장한 부제를 달고 있다. 선언적 어투로 쓰인 이 말을 만약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진집단이 했다면 아마 우리는 매우 거만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MAGNUM” 사진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는 보도 사진가들의 집단이 바로 매그넘이다. 매그넘은 좀체로 넘어서기 어려운 중세의 길드 같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스러운 입교식을 치르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 신비로운 매력을 선사하는 이들이 바로 매그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라이프> 등 포토저널리즘의 전성기를 경험한 사진작가들은 편집자들의 의도와 요구에 따른 작업 방식에 많은 불만을 품게 되고, 그들이 촬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촬영하고,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게재해주는 매체에 그들의 사진을 제공해주는 방식의 사진작가 에이전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했던 프랑스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무어 등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립한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집단이 바로 매그넘이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문으로 하여 이후 세계를 대표하는 엘리트 사진 집단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지난 1993년과 2001년, 국내에서도 매그넘의 대규모 사진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에, 또 최근엔 로버트 카파 사진전이 열리기도 해서 국내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나 역시 매그넘에 소속된 사진작가들 가운데 로버트 카파는 물론이고, 베르너 비쇼프, 유진 스미스(한동안 ‘매그넘’에서 활동하다가 탈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엘리어트 어위트, 요제프 쿠델카, 필립 할스만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매그넘과 관련된 몇 권의 원서 사진집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닌 최고 미덕 중 하나는 이전의 다른 책들에서는 보기 힘든 사진들이 제법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건 정말 큰 미덕이다.)

한․불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된 『현장에서 만난 20세기』
- 그러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편집레이아웃

국내에서 지난 2007년 10월에 출간된 『현장에서 만난 20세기』는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로는 프랑스보다도 한 달 정도 먼저 국내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1947년부터 2006년까지 주요 사건들을 매그넘의 사진작품을 통해 바라보고, 에릭 고두(Eric Godeau)의 글이 해설을 다는 형태로 꾸며져 있다. 이미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현장에서 만난 20세기』의 편집과 레이아웃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막상 직접 책을 읽어보니 이들의 지적은 모두 사실이었다. 일단 10년 단위로 내지를 붉은색, 주황, 올리브그린, 노랑, 남보라, 민트그린 등의 테를 둘러 구분하고 있는데, 사진들이 온갖 요란한 색채의 방해를 받는다. 거기에 사진 캡션으로 들어가는 문장들은 그야말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 가뜩이나 요란한 색채들로 인해 저해된 가독성은 더욱 떨어진다.

프랑스판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내심 프랑스판과 거의 동일한 표지와 내지 레이아웃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막상 프랑스판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국내판 책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내지 레이아웃을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를 구하지 못해 내지 편집의 차이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이 싱가포르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실 사진집의 경우 외국에서 인쇄해오는 일이 그렇게 드물진 않다. 작년에 열화당에서 출간된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은 독일에서 인쇄한 것이다. 매그넘에서 제공한 사진의 질이 특별히 카르티에 브레송보다 나빴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현장에서 만난 20세기』의 인쇄 질감이 앞서 언급한 책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용지 선택 문제와 인쇄의 질이 전체적으로 사진의 질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카파가 매그넘을 결성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로버트 카파를 비롯한 “매그넘”의 사진작가들이 독자적인 사진집단, 에이전시를 창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당시 권력집단의 보도통제는 물론, 편집이라는 권력(편집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 나 자신이 한 명의 편집자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편집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대단한 권력자이기도 하다. 지배계급(권력)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계와 일상의 권력을 합리화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 예를 들어 클래식 공연장에서 느끼게 되는 공연한 주눅, 박물관 마다 일정한 방향과 동선을 지시해주는 화살표들과 같이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기존의 세계(지배권력)가 교묘하게 직조한 틀(매트릭스)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의 부제는 “우리는 그들의 사진으로 세계를 기억한다.”이다. 이 말은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꼭 그만큼의 진실은 유보된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들이지만 사진 그 자체는 하나의 스펙타클(spectacle)한 이미지 기호일 뿐이다. 우리에게 그 한 장의 사진이 진정한 의미로 기억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해석(단순하게 말하면 ‘캡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이 존재해야만 한다.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도상성(iconicity)이 지닌 위력을 설명해주는 훌륭한 사례다. 사진은 누가 뭐래도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사진의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고, 우리들에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켜 허구적인 객관성과 신뢰성을 얻어낸다. 그러나 사진은 결코 대상의 객관적인 반영이 아니며,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손쉽게 가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은 도리어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시각기호인 사진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보도사진들의 경우에 우리는 사진 이미지 밑에 가로 놓인 해석(캡션)을 읽고, 이미지를 해독하는 과정을 거친다. 사진 속에서 총을 들고 있는 병사가 광폭한 살인마인지, 전란 속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파견된 병사인지 우리는 사진만으로 해석할 수 없으며, 좀더 복잡하게는 병사가 띄고 있는 정치적 의미, 사회적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롤랑 바르트는 거친 바다 위에 배가 닻을 내려 선체를 고정시키듯, 언어기호는 시각기호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특정한 범위 내로 한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정박(anchorage)’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우리는 이 책에 글을 쓰고 있는 저자(혹은 편집자) 에릭 고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괜찮은 내용의 그런 데로 괜찮은 번역 그러나 몇 가지 결함으로 독자에게 불친절한 책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책을 다 읽고 난 뒤 책의 어디에도, 아니 책의 뒤표지에 적혀있는 몇 줄의 글만으로 저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는지 유추해내야 했다. 우리는 그가 선별해낸 300장의 사진과 보도사진가의 전설이라는 ‘매그넘’을 통해 역사를 이미지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자신은 문서보관소에 기록된 수많은 사진들을 일일이 헤집고, 자신이 나름대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1947년부터 2006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그는 장막 저 편에 서 있다.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문제가 가독성을 해치는 편집레이아웃에도 있지만, 이처럼 독자들에게 상세한 정보(예를 들어 저자에 대한 정보, 옮긴이의 말 등)를 제공하지 않는 불친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인터넷 서점 아마존(프랑스)에서 이 책은 23.75유로(38,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인터넷상으로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의 이미지들이 보고 싶다면 매그넘의 포토아카이브 사이트를 찾아가면 좋을 것이다. (물론 사진의 크기가 좀더 작고, 화질도 좋은 편은 아니지만)
( http://www.magnumphotos.com/archive/C.aspx?VP=Mod_ViewBoxInsertion.ViewBoxInsertion_VPage&R=2TYRYDK5YSOX&RP=Mod_ViewBox.ViewBoxThumb_VPage&CT=Album&SP=Album )

끝으로 한 마디 더 나는 가끔 사진집단 매그넘의 저런 선언적인 어투에서 삼성의 CF카피 같은 선정성을 느낀다. 그건 매그넘 작가들 탓일까? 아니면 기획사들 탓일까? (어쨌거나 비키니 편에서 '달리다'와 '칼 사강'이란 불어식 번역은 좀 웃겼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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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서양 20세기사 -
박무성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2년


세기말이었던 지난 2000년 무렵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내나름으로 지난 20세기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혹은 세계를 움직인 10대 사건을 정리해보기로 결심했었다. 생각외로 이런 궁리는 재미있다. 오늘 하루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재미있었던 혹은 재미와 상관없이 기억할만한 일 3가지를 정리해보는 일, 한달 동안, 아니면 1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10대 사건을 언론사에서 정리하는 것처럼 혼자 해보라. 그렇게 해서 막상 정리된 사건들을 보면 정말 이 한 해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저 일이 올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내가 궁리 끝에 정리해낸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대 사건"은 다음과 같았다.

1.유럽중심의 세계통합과 그 유산들
2.제1차 세계대전과 유럽 제국주의의 몰락(새로운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등장)
3.사회주의 혁명과 전체주의의 등장
4. 대량생산·소비 사회의 도래와 경제 대공황
5. 제2차 세계대전과 핵시대의 도래
6. 팍스 아메리카나와 유럽의 재건
7. 제3세계와 청년운동
8. 환경파괴와 여성해방운동
9.대중사회의 도래와 정보기술혁명
10. 현실사회주의 몰락과 세계화
 
한 세기를 움직인 사건을 정리해보니 소위 '역사의 맥락' 이 잡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를 다시 주제별로 분류하고, 이와 관련해 읽어볼만한 책 10권씩을 선정하고, 이것을 스터디한 뒤에 내나름의 생각을 원고지 100매 내외로 정리해보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었다. 물론 2001년이 시작되기 전에 이 모든 것(내가 나에게 내어준 숙제)을 마무리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란 분루를 삼키며 물러났었다.

박무성 단국대 명예교수의 이 책 "격동의 서양 20세기사"는 그런 점에서 나에게 중요한 참고서적 중 하나였다.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서 역사가의 몫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는 역사학계의 오랜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역사서를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에세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많이 녹인 책을 읽을 것인지, 아니면 랑케식으로 실증에 치중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관계를 추적한 책을 읽을 것인지... 그렇다면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방식일지, 어느 것이 보다 유익할지, 어느 것이 보다 재미있을 것인지는 고민해볼 만하다.

내 체험에 의거해 이야기해보자면 둘 다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예를 들어 부부 혹은 애인 사이에 다툼이 있는데, 나는 이들 양자와 친분이 있다고 하자. 이쪽의 이야기와 저쪽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어보면 다들 나름의 입장이 있기 마련이다. 이유없는 무덤 없다는 격언이 증명하듯 모든 행위에는 그 이면에 도사린 원인이 있다. 이럴 경우 어느 일방의 이야기만 듣노라면 입체적인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만약 영국이 도발한 어느 전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영국 이야기만 듣는 것으로는 부족하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미국인들이 저술한 미국의 범죄 혹은 파렴치한 역사 이야기를 미국인 저널리스트들의 기술로 읽는 것은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기 마련이다. 이런 한계를 보정하기 위해서는 굳이 국적에 의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관점을 알기 위해서라도 여러 종의 책을 읽는 것은 필요한 일이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박무성 교수의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유익하고,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20세기는 분명 1901년에 시작해서 2000년에 종료되었지만, 역사적으로 20세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놓고는 아직도 많은 이견들이 있다. 어떤 이는 대영제국의 마감을 알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 이후를, 어떤 이는 그로부터 훨씬 뒤인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이는 역사를 기술하는 이의 관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박무성 교수는 이 책의 시발점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놓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은연중에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할 20세기의 역사는 서양을 중심으로 한 정치학적인 접근이 될 것이며, 현실 정치가 서로의 세력 균형을 어떻게 잡아가는가? 균형의 파괴가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를 중심으로 기술할 예정이란 뜻이 된다.

그것은 전체 29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소제목들만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인류사를 격변시킨 제1차 세계대전, 유익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과 붕괴, 비운의 바이마르 공화국,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중략)... 동유럽의 자유화운동과 공산체제의 붕괴, 독일의 통일과 그후, 북유럽 및 남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세기말엽 영국의 변혁, 1990년대의 미국, 유럽의 변혁, 20세기의 서양문화, 서양 20세기사의 장을 닫으며"
서양의 20세기를 문화적인 관점에서 다룬 부분은 실질적으로는 맨마지막에 해당하는 28장에 배치해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서양의 문화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로 접근하는 이에겐 그다지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은 그런 부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야를 한정시킨 덕에 이 책은 몇 가지 장점을 지닌다. 우선 지리학적으로 그 대상을 서양(미국과 유럽)으로 국한시켰다는 점, 주로 다룰 분야를 정치적인 부분으로 한정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 책에서는 그간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웠거나 정리하기 어려웠던 가까운 근과거의 유럽과 미국을 발견할 수 있고, 미국과 유럽이 주고 받는 체스게임의 관전자로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 29장을 다시 구분해보면 1장부터 9장에 이르는 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몰락과정을 추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실제로는 동일한 목적과 원인으로 시작된 하나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일한 목적이란 유럽의 통합 - 물론 그 안에는 기존(식민지 시장을 이미 확보한) 공업국가인 영국과 프랑스, 신흥 공업국가인 독일의 대립이라는 경제적 요인들,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미국을 견제하며 세계적 패권국가로서 유럽을 지속시킬 - 필요성을 느낀 유럽 제국들이 힘의 균형이 아닌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이란 것이고, 원인이란 이런 요인들이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서로 그것을 주도 혹은 견제하고자 했던 것을 말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균형과 견제를, 독일은 통합을 주장한 셈인데, 여기에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 세력의 통일 역시 중요한 몫을 한다.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구원의 희망을 찾고자 했던 부분도 여기에 있다.

제10장부터 제19장까지는 크게 보아 서구의 냉전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시작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 아니라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이후 시작되어 1991년 8월 19일 소련의 보수강경파에 의한 군부 쿠데타 실패로 끝난다. 이 시기에 서유럽 일부 지역을 제외한 세계 각처에서는 전쟁, 무력분쟁, 군부 쿠데타, 민간인 학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으나 궁극적으로는 전쟁 상황일 수밖에 없는 충돌이 지속되었고, 나는 이것을 명칭은 어찌되었든 또 하나의 세계대전으로 보고 있다. 제20장부터 제27장까지는 소련의 해체 이후 미.소의 양극체제에서 미국에 의한 일극체제로 변모해가는 과정과 동서냉전 시기의 막바지에 유럽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앞서 말한 이 책의 장점은 20세기사에 대한 기술이 주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치중된 나머지 소홀해지기 쉬운 유럽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제11장 '영국의 변혁' 편에서 우리는 노동당과 보수당의 양당 체제가 확립된 영국과 대영제국의 붕괴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제12장 '프랑스의 변혁' 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자에서 나치 제3제국의 협력국, 그리고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 극적인 변환을 거친 프랑스가 어떻게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 드골이즘의 '위대한 프랑스'가 되어가는가를 볼 수 있으며, 제13장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대변혁'에서는 세계대전의 패자였던 이들 나라들이 마셜 플랜과 미국의 후원으로 소위 자유진영의 일원이 되는가를 살필 수 있다. 이외에도 제21장 '동유럽의 자유화운동과 공산체제의 붕괴', 제22장 '독일의 통일과 그후', 제23장 '북유럽 및 남유럽국가들의 민주화' 등은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나라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해둘 필요성을 느끼는 부분은 우리가 서양이라 하면 쉽게 느끼게 되는 지리적 인상과 상관없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에서 '라틴아메리카'는 완전히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20세기 서양정치사를 통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20세기 서양정치사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하게 다루는 중요한 텍스트 구실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가까운 근과거를 다루기엔 여러가지 문제를 지닌다. 과거의 여러 사건들 가운데 당시로서는 하찮은 사건에 불과한 것이 결과적으로 중대한 사건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생기기도 하고, 당대에는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후세의 평가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역사는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란 역사학의 중요한 화두를 다시 끄집어낸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다소간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관점이란 측면에서 서구와 비교해 동구 진영에 대해서는 보다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는 점은 그에 대해 다소 동정적인 입장을 지닌 독자의 입장에서는 보다 객관적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하나의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을 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트루먼 독트린 이후 소련의 붕괴 사이에 있었던 냉전을 다른 의미에서 세계대전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제3차 세계대전은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할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제3차 세계대전은 지난 2001년 9월 11일 이미 시작되었다. 물리적 시간으로의 21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세계 인류는 이제야말로 인류가 번영과 평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20세기 인류가 남긴 죄악의 유산들은 여전히 인류가 짊어질 형벌로 남았다.

* 참고로 한 말씀 드리자면 2000년 현재 프랑스의 국방비 총예산은 343억불이다. 미국은 프랑스의 국방비 총예산보다 많은 금액을 단지 무기개발연구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국방비 총예산을 합친 금액은 미국의 국방비 총예산인 2,947억불 보다 적다. 여기에 더 추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자주국방의 상징처럼 숭앙해 마지 않는 이스라엘이 한해 사용하는 국방비는 94억불이고, 우리가 사용하는 국방비는 128억불이다. 물론 국민 1인당으로는 우리가 더 적다. 전세계 국방비의 1%를 감축할 수 있고, 그 비용을 기아구제로 돌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굶주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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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난제 -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재구성하는 일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어렵다.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어느 신문 기자던가, 평론가가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썼다가 인터넷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스포일러를 유포했다고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인지, 평론가인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 덕분에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大聖) 공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데, 뉘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서이든, 원작을 통해서이든 누구나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는 보배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널리 전파된 이야기란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로 장르 전이(轉移)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바꾸긴 매우 어렵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익숙한 이야기 스타일이 대중에게 이미 숱하게 검증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릴러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던 신예감독 브라이언 싱어였지만, 이후 <엑스맨> 1편과 2편, 그리고 <수퍼맨 리턴즈>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제2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꿔왔던 브라이언 싱어로서는 선배가 <쉰들러 리스트>로 보여 주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진해서 영화 <발키리>의 감독을 맡았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매력적인 인물과 유난히 끌리는 사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깊이 매료되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에 저항했던 숄 남매의 <백장미단>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과 거의 동시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했다.


결과를 빤히 아는 역사영화(EPIC)를 보는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생전에 모두 42차례의 암살 기도(『독재자들』, 교양인, 2009)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아마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으리라 싶은데,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현대문학, 2008)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6차례의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늑대 무리는 조직적으로 사냥감을 공격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냥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국가조직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암살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수단 중 하나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를 비롯해서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이라는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은 성공유무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런 사건들이 수많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누군가 한 개인의 죽음이 시대의 향배를 어긋나게 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까닭 역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당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위인(偉人)인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大衆)인지는 역사학의 오래된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어찌되었든 역사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인류의 생애사 속에 포함되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란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과연 나폴레옹이 불면증과 위장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역사 속 작은 국면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되짚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 한국의 역사에 대입시켜봄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의 문제와 한계 등을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영화 <발키리>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했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극적인 요소가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슈타우펜베르크 vs. 김재규

정치적 수장을 제거하는 암살의 상당 부분은 브루투스와 케사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측근에 의해 실행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삼엄한 경호를 받기 때문에 암살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암살의 성공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암살이 암살만으로 정치적 의도까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면 한 개인에 불과한 정치인의 암살을 통해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던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의도는 로마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겨냥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김재규의 의도와 달리 그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는 없었다. 현대적인 국가조직은 ‘관료제’라는 단단한 배후조직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영화 <발키리>에서 암살 음모의 주동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논의에 답답해했던 이유는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비록 규모나 역사적 의의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와 김재규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이 두 사람을 닮은꼴이라 비교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하게 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출발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 분단, 부정부패, 경제난 등으로 최악의 위기 속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이후 형식상으로는 민주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최대 업적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3선 개헌에 성공한 뒤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뒤이어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저항 속에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에 살해당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제정을 대신해 출범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무능과 볼셰비즘의 발흥에 위기를 느낀 독일의 일부 민족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과 결합해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을 독일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킨다.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과 독일제국의회 방화사건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비견할 만한 ‘비상대권’을 차지하고 독일 내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유신체제가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만으로 처벌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차지한 독일 역시 나치 체제와 총통에 대한 어떤 비방, 비판도 처벌의 대상이었다.


서민적 독재자와 귀족적 민주주의자

내가 아는 한 독일 역사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한 빌헬름 제정을 물러나게 한 키일 군항의 반란은 있었지만 그것은 쿠데타라기보다는 혁명이었다. 어떤 이는 독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을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독일에선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일컬어 ‘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독일은 국가구조 속에 군대의 전통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군부가 민간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고려 무신정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 군대를 통해 습득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통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이다. 민주공화정의 주인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동안에도 대통령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풍경을 즐겨 연출한다.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최고통치자들의 실생활이 서민적이지는 않지만 서민적이라는 인상을 줄수록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윤보선이나 장면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두 사람과 달리 서민적인 풍모와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최고통치자였던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지배엘리트들과 달리 매우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 헤밍 폰 트레스코프(Henning von Tresckow) 대령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물론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계급 출신이었다. 하사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귀족계급이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무리로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가 에르빈 롬멜을 총애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전 라이프치히 시장)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까닭에 대해 영화 <발키리>는 유대인학살 등 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내 자본가들과 중산층,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식 교육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청교도적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계급적 뿌리와 이반된 사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접한 귀족적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의 통치로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했던 대다수 독일 서민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쿠데타로 나치지배가 종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이자 가장 꺼리는 질문은 “만약에~”란 것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건을 찾아내 인과관계와 그 의미를 찾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거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발키리>로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 <발키리>는 역사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역사 영화들이 지닌 문제점의 상당수는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키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다(물론 다큐멘터리도 허구이며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나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저항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이런 의도는 톰 크루즈라는 대중적인 스타에 의해 충분히 담보되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발키리>의 장점은 이처럼 진지하다는 데 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왜 진지해져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역사 속의 사건이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관객 모두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히틀러 암살이란 대의에 목숨을 거는 요 인물들의 당위적 결의는 영화 내부에 있지 않고, 관객들의 영화 외부에서 배운 역사에서 나온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영화 서두에 이미 히틀러의 제거를 결심한 사람이었고, 베를린의 히틀러 암살 음모 세력 역시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보고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한 등장인물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발키리>자체가 지닌 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해버리면 역사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 관객들이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던지게 될 핵심적인 질문이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그 질문은 ‘만약 히틀러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그의 동지들이 계획했던 대로 암살당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였을 것이다. 역사는 정말 달라졌을까?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1944년 6월 6일로부터 44일이 경과한 1944년 7월 20일의 일이었고,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것은 발키리작전으로부터 10개월쯤 뒤인 1945년 5월 8일의 일이었다. 과연 한 명의 정치지도자가 암살당하고, 쿠데타로 나치 정권은 전복될 수 있었을까? 그 결과 독일은 연합국, 소련 등과 휴전을 맺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영화 <발키리>를 통해 역사 앞에 무수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에 종지부를 찍기는 했으나 뒤이어 12.12쿠데타와 5.18광주학살을 불러들인 것처럼 히틀러의 암살이 역사의 냉정한 잔혹성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와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와 같은 질문은 그저 영화를 재미있게 보면 그뿐인 관객의 입장에서 호사스러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제가 있는 법이다. 설령, 그것이 역사의 잔인한 수레바퀴 앞에서 실패라 불리게 될지라도 목숨을 걸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도 있는 법이다.



영화 <발키리>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던 아브라함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비록 실패로 끝났고,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이 있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휩싸인 독일이 역사 앞에서 그래도 우리 속에 이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1980년 5월 광주의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도청으로 진격해오던 날 밤을 어떤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살았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날 죽고자 마음 먹은 시민들의 피를 통해 산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사이기도 했다. 나는 역사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거나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천하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는 법(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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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ㅣ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
인고 발터 지음, 최성욱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독일의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 Taschen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 중 한 권인 『마르크 샤갈』의 책날개에는 샤갈의 진면목을 살펴볼 만한 샤갈의 말이 있다. “선한 사람이 나쁜 예술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선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선한 사람이란 말은 나쁜 예술가란 말의 개념만큼이나 모호하지만, 선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은 더욱 모호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샤갈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가란 위대함보다는 선함이란 덕목을 갖춰야 하는 존재란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마르크 샤갈이란 이름에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지닌 몽환적인 이미지 못지않게 그 자신에게서도 몽상가의 이미지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샤갈의 작품에서 특정한 유파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으며, 샤갈 이후에도 샤갈처럼 그리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내게 그는 전무후무한 예술가다. 저자 인고 발터는 그를 “긴 생애 동안 주변인으로, 예술적인 기인으로 살았다. 샤갈은 다양한 세계를 연결하는 중개자였다, 유대인이었지만 우상을 금하는 관습을 당당히 무시했고, 러시아인이었지만 자기만족에 익숙한 나라를 뛰쳐나왔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지만 프랑스 미술계의 세련된 세계로 도약했다.”고 평한다.


러시아 지역을 포함한 중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지라 부르는데, 이들은 스페인계 유대인인 셰파르디와 더불어 유대인을 구성하는 최대 집단이다. 한때 이슬람이 지배했던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완료된 1492년 이후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포함한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있었던 것처럼 18세기 이후 20세기 초엽까지 동유럽(특히, 러시아)에서도 포그롬(pogrom)이라는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있었다. 마르크 샤갈은 이런 시대(1887년 7월 7일 출생)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성장한 유대계 러시아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아슈케나지의 공동체 언어였던 이디쉬어 보다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박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양친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는지 몰라도, 러시아와 유대계 혈통이란 이종교배의 덕분으로 그는 유대공동체 문화와 러시아 문화를 결합시킨 독특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리라.


인고 발터와 라이너 메츠거의 공저인 『마르크 샤갈』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균형 잡힌 미술 서적의 면모를 보인다. 작가의 생애를 중심으로 작품세계의 변모를 살피는데, 문자 텍스트와 도판을 적절하게 안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구성은 러시아에서 보낸 소년시절을 통해 샤갈이란 독특하고 모호한 세계관의 형성과정을 독자로 하여금 짐작해볼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러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통해 정교에 바탕을 둔 러시아의 민속/민중(folk)문화와 유대교적 전통이라는 모순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평화롭게 해결한다. 파리 생활을 통해 그는 유럽의 변방인에서 중심으로 진출하게 되고, 고향을 떠난 샤갈의 향수는 파리의 세련된 문화와 만나 한층 더 고양된다. 하지만 전쟁과 러시아 혁명은 파리의 이방인이자, 세계의 이방인이었던 샤갈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샤갈은 러시아 혁명의 초창기 동안 혁명을 지지하는 예술가의 일원으로 짧지만 혁명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성향은 정치와 예술을 병행할 수도, 예술을 종속시킬 수도 없었다.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에 위협받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파리를 떠나긴 했지만 전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파리 시민이란 위치에 안주했던 것은 아닌 듯싶다. 그가 즐겨 그렸던 “서커스단”은 샤갈의 영혼 속에 깃들어있을 모티프(motif)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샤갈 자신은 “내게 서커스는 마술적인 쇼다. 태어나고 다시 사라지는 세상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세상은 생기 넘치는 카니발의 소란스러움, 흥겨운 음악과 놀라운 마술, 기이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낯설음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서커스 무대에서는 세상의 법칙이나 규율은 간단히 무시되고, 그 어떤 신기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길 바랐다. 그는 그런 변화의 근원이 마음과 영혼에서 비롯된다고 믿었고, 마음과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만이 사회구조나 예술의 변화를 촉진하는 삶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의 박해와 유대민족을 구성하게 되는 거대한 에피소드인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그린 샤갈의 작품, 정중앙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커다랗게 묘사되고 있다. 십계를 들고 있는 모세와 수탉, 거꾸로 유영하는 사람들, 불타는 마을,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여인(마리아)과 염소. 샤갈의 「출애굽기」를 보면서 마치 불교미술의 만다라를 보는 듯한 마음이 든 것은 아마도 샤갈의 작품 세계가 이렇듯 절묘하게 모순이 균형을 이룬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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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 기광서 | 김성보 | 이신철 | 역사문제연구소 | 웅진지식하우스(2004)

출발하여 밤길을 걸어가는데, 구성시를 들어가지 않고 산고지에 집결하여 식사 등을 하는데 찬 돌 위에서 달게 먹으면서도 항상 집 생각에 눈물이 날듯하여 참을 수 없다. 저녁을 먹지도 못하고 출발하는 바, 떠날 당시 찬바람이 죽죽 부는데 눈물이 자연히 나도다. 내 아무리 고향을 찾아갈 날이 있겠지 라고 굳게 각오하고 목적지를 향하였다. 태천시, 자성시는 여전하더니 전부 불태워지고 말았다. 

<1950년 12월 13일 인민군 병사의 일기 - 본문 83쪽>


이 책은 194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립부터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현재에 이르는 북한, 북한 사회, 북한의 정치 경제사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있는 일종의 역사책이다.  역사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북한학을 공부하고 있는 소장파 학자 3인이 중심이 되어 북한 정부의 탄생부터 성공과 실패, 일반 주민들의 생활상들을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기획되어 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1945년 해방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이르는 시간들을 다룬다.

 


제2장에서는 한국전쟁의 준비부터 휴전에 이르는 기간의 역사를 다룬다. 제3장에서는 전후 재건과 하나의 정치 체제로 수립되는 북한의 사회주의에 대해, 제4장에서는 재건 이후 북한의 최고권력자로서 그 지위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김일성과 주체사상의 형성을, 제5장에서는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북한의 독특한 정치체제 형성을 다룬다. 이 시기의 우리식 사회주의란 것은 동서 데탕트 분위기와 중소분쟁 등 사회주의권 내부의 균열을 북한이 어떻게 견뎌냈는가를 다루면서 동시에 북한의 자력갱생 경제 체제가 부딪치는 한계를 함께 다룬다. 제6장에서 다루고 있는 북한은 우리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시기의 북한이다.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북한과 그들의 선택에 대해 묻고 있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북한 현대사를 관류하는 시대의 흐름을 사진과 그림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의 정치적 행보와는 상관없이 암암리에 너무나 '잘 생겼다고 소문난' 김일성 주석의 여러 얼굴들을 볼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는 로마 내부의 권력 투쟁이랄 수 있는 마리우스와 술라, 이들의 사상과 지도에 따라 벌어졌던 로마의 내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장에서 매우 중요한 언급 한 가지를 한다. "내전은 짧으면 짧을 수록 좋다"는.....


내전이 그 어떤 전쟁보다도 잔인한 까닭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 마을에서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그간 사이좋게 지내던, 혹은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하더라도 서로를 죽일 정도로 증오하지는 않았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서로 무기를 들고 서로를 죽인다. 그것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집단 체벌과 흡사하다. 서로 마주 보게 만든 뒤 같은 급우의 따귀를 올려부치게 한다. 마주 하고 있는 급우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고, 정나미 떨어져 하던 인간일 수도 있고,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때려주고 싶을 만큼 미운 친구는 아니었다. 처음엔 장난스레 한 대 때린다.


그러자 옆에서 구경하던 선생님이 몽둥이로 한 대씩 쥐어박는다. 그러자 맞은 편 녀석이 보다 힘차게 때린다. 맞은 녀석은 다시 보다 힘차게, 보다 힘차게 서로의 귀뺨을 올려부친다. 그 격렬한 귀뺨 치기가 지난 뒤 한동안 이 반 아이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내전이 잔인해지는 까닭, 그것은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한 이에게 당한 배신은 더욱 아프다. 이 책의 91쪽에는 낯익은 피카소의 그림 한 장이 소개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피카소가 한국전쟁 중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접하고 그렸다는 이 한 장의 그림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전쟁의 잔인함일 것이다. 혹자는 이 그림을 북한에서 일어난 신천학살을 다룬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신천학살이란 무엇이었던가? 북한 정부는 현재까지도 신천학살을 미군이 진주하며 일으킨 민간인 학살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군과 국군의 입성 소식을 미리 전해듣고 봉기한 우익청년단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북한 정부는 어째서 이 신천학살에 대한 진상을 알았을 텐데도 이를 미국의 소행으로 단정해버리고,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내전이었기 때문이다. 내전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든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반복. 북한 정부는 이것을 그들 자신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이 사건을 외부의 적, 미국의 소행으로 규정함으로써 전쟁의 상처 속에서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 그네들의 상처를 덮어버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왜곡을 통해 치유한다. 북한으로서도 분단의 무게는 묵직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북한은 앞으로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호언할만큼 잔인하고 처절했다. 한국전쟁 3년 기간 동안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모든 폭탄양을 능가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전쟁은 패전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초강대국이 된 거인 미국을 상대로 싸워 북한 정권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김일성 정권은 이를 통해 1950년대 일어난 두 차례의 중요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물론 거기엔 우리가 미처 잘 알지 못했던 몇 가지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다. 종종 북한의 정치사를 읽노라면 이것이 공화국의 역사인지, 아니면 고대 로마의 원로원에서 일어나는 정치인지 혹은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왕실 귀족들 사이의 정치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 정권에 대한 도전자 처리 등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은 교과서이면서 동시에 참고서의 형태를 띈다. 개관하는가하면 부분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포인트들을 짚어준다. 그렇다고 우리는 북한을 잘 알게 될 수 있을까?


한반도...

단일 민족의 신화.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적대하는 마음의 강도만큼은 세계 그 어떤 국가간의 대립보다도 극심한 증오를 담아 우리는 서로 대치하고 있다. 냉전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반세기에 이르는 동안 밖으로는 남북한 간의 적대적 분단체제로, 안으로는 '국내 냉전(이 용어는 최장집 교수의 것이다)'이라 할 수 있는 보수적인 반공 질서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왔다. 냉전과 분단체제는 우리 한국 사회의 악이면서 동시에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해 왔다. 마치 "오토모 가츠히로""메모리즈(1995)"에 등장하는 '대포의 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매일 포탄을 만들고 대포를 닦고, 네 거리 신호등처럼 일정한 시간이 되면 탄알을 장전하고, 거리를 측정한 뒤 한 방의 포화를 날린다.


이 대포를 처음 이 땅에 들여온 이들이 누구인지도 잊혀지고, 그 대포를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도 잊혀지고, 그 대포가 누굴 겨냥하고 있는지도 잊혀지고, 그저 시간이 되면 울리는 자명종 태엽처럼 재깍이며 사람들은 국민이란 이름으로 태엽 인형처럼 움직인다. 재깍재깍.... 대포를 닦는 사람, 대포를 조이는 사람, 대포알을 만드는 사람, 매일 같이 학교에서는 탄도학을 가르치고, 이 국가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한 방의 포탄을 더 멀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날리기 위해 이루어진다. 모든 생산은, 모든 학문은, 모든 여가는 어떻게 하면 한 방의 포탄을 좀더 잘 날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쓰여야 했다. 대포 도시에서는 누구나 대포를 저주해선 안되었다. 대포의 존재 이유를 묻거나, 저주하는 것은 이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일이 되었다. 국가는 한 방의 대포를 위해 존재했고, 국민은 대포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바쳐야만 했다. 이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절대적으로 염려하고 있는 것은 바로 대포의 안위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안보'라 불렀다.


이 대포는 남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쌍동이인 북한에도 존재한다. 거울 속의 쌍동이가 오른 주먹을 들면 거울 속의 상대방은 왼 주먹을 든다. 거울 속의 쌍동이가 왼 주먹을 날리면 상대방도 마주 닿을 듯 주먹을 날려온다. 그러나 이 주먹은 서로 맞닿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랬다간 거울이 깨져버릴 테니까. 이 둘은 50년 전에 거울 너머로 서로에게 달려들어 피흘리며 싸운 경험이 있다. 누가 이들 사이에 이렇듯 보이는 보이지 않는 거울을 두었는가? 누가 냉전이란 겁나게 반짝이는 살기등등한 거울을 두었는가? 누가 이들로부터 서로를 겁주고 으르렁대도록 만드는 거울을 한 방에 날려줄 것인가?


아쉽게도 이 책은 그런 사실에 대해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다만 거울 너머 저 편의 땅에도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가르쳐 줄 뿐이다. 이 책은 매우 조심스러운 서술들로 일관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포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은 대포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으나 대포의 존재 자체에서 안위를 느끼기 때문에 그 대포가 결국 아무도 죽이지 못하거나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냉전이 이 국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과 실천을 가져다 주었는가? 사람들은 모두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먼 북방에서 일어나는 한 오라기의 연기에도 기겁하며 새로운 대포를, 보다 구경이 크고, 보다 멀리 나아가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대포를 만들고, 수입하느라 온 힘을 다 한다. 그에 대해 이의를 달았다간 대포가 만들어낸 거대한 파놉티콘에서 다시 보다 음침하고, 보다 깊숙한 감옥으로 옮겨진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가장 미약한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가장 강력한 파트너인 남한에 대한 것이다. 가령 북한에서 지난 1950년대 일어났던 두 번의 권력 투쟁에 대해 이 책은 중국의 팽덕회와 소련의 미코얀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헝가리에서 일어난 의거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북한의 반쪽 거울인 남한이 어떻게 북한을 궁지로 몰고, 서로의 독재권력이 공고히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꼭 이 책의 한계라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런 일은 남북한 사이를 가로지르는 휴전선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북한에 대해 알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 행위로 규정당해 왔다. 권력의 최상층부에 있거나, 정치적으로 탈색된 학문 분야에 있어서만 그것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어 왔다.


우리는 우리의 반쪽을 너무나 모른다. 너무나 모르지만 정치적 좌파도, 우파도 통일을 주문외우듯 암송한다. 오로지 국민들만이 통일이 우리에게 줄 충격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남한의 일반적인 상식을 갖춘 시민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이 남침해올까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네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준비없이 통일되었을 때 북한 사람들이 난민처럼 휴전선을 넘어 남한으로 쏟아져 들어올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오늘날 북한은 더이상 적대적 존재이기 보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마치 생판 한 번 본 적 없는 멀고 먼 친척이 어느날 갑자기 일가족을 대동하고 나타나 우리는 혈연이니 먹을 걸 다오. 입을 걸 다오. 나도 같이 좀 살게 해다오. 떼쓰는 것처럼 인식된다. 우리가 과연 진정으로 통일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책의 저자들도 이 책을 통해 그런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나는 그 첫발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유없이 동상처럼 서 있는 거대한 대포의 그늘에서 이제막 벗어나려는 우리들에게 북한은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원튼 원치 않든 우리들의 그림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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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독일은 전유럽을 석권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만 독일에 굴복한다면 유럽의 통합은 오늘날 EU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이룩될 뻔 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한 유럽의 역사에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곧 유럽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 나치즘에 경사되었던 까닭, 그것은 유럽이 하나의 강력한 문명권으로 재통합하여 다시 세상의 주도 문명(패권)을 이루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렇듯 유럽을 힘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여러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시도되지 않았던 역사 평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대결로서 더 의미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규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1940년 6월까지의 독일은 분명 문제가 많은 폭력적 국가이긴 했으나 특별히 인류의 적이라 규정당할 만큼 사악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나치즘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나 서구문명에서 한 인종에 대한 잔학한 멸종 정책의 원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치즘이나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문명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성취된 이후에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그들은 다른 인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부분은 게르만인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종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인디언 멸종에 이르는 과정,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애보리진 멸종에 이르는 과정과 비교하자면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말살정책은 오히려 덜 잔인한 측면이 있다. 최소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 대화는 했으니 말이다.

 

 

파시즘이 유럽에서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보다 더 정교하게 규명해볼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유럽 혹은 서구(미국을 포함한)에서 파시즘(나치즘)을 바라본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유럽문명을 수호할 하나의 중요한 정신 혁명으로 보거나, 전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공산주의보다는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까닭에 슈펭글러나 하이데거와 같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나치즘을 지지했고, 독일 이외의 국가들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유대인 혐오와 함께 히틀러를 격찬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헨리 포드뿐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대단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치즘과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 파트너로서 격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이 지배하는 독일을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능한 방패로 인식했고, 독일이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만한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과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지한 소련의 스탈린이 수 차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춰를 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 것을 요청했음에도 이들 국가들은 도리어 소련을 고립시켰다. 소련이 강력한 반공을 주장하는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파수견 입장보다는 좀더 쓸만하고 구미에 맞는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제2의 정복왕 윌리엄을 꿈꾼 히틀러

거기에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찌되었든 독일은 서부 유럽의 패자이자, 유럽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프랑스를 단번에 패퇴시키는 위용을 거두었고, 독일 공군(Luftwaffe)는 일찌기 찰스 린드버그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의 공군력은 전유럽 제국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우군 하나 없이(미국은 이 당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국이자, 공군국인 독일을 상대로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방공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나는 전투를 지휘하겠다. 그리고 만일 침공이 시작된다면 이 의자가 내가 앉을 자리이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격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내 시체를 끌어낼 때까지 나는 저 자리를 고수하겠다." 이 말은 당시 영국이 처해 있던 고립무원의 상황을 너무나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무렵 독일은 영국진공계획인 "강치(시라이온)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도버 일대의 벼랑 동쪽에 있는 램즈 게이트에서 와이트도 서쪽의 라임만까지 거리로 약 320km에 달하는 장대한 영국의 해안선에 25만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 정복에 나설 때 상륙한 바로 그곳이었다. 독일은 영국 점령 이후 체포할 유명인사들 - 영국수상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등 - 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논 상태이고, 독일공정부대원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버킹검궁 강하 직후 체포할 영국왕에게 건넬 인사말까지 준비시켰다. 모든 것은 치밀한 독일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폭이 40km에 불과한 도버해협이긴 했지만 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이 보장되어야 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는데는 필수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시작 - 제공권을 잡아라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공군들을 섬멸해야 했다. 히틀러에 이어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에게 이건 닭을 비트는 일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스페인 시민전쟁 때부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점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적의 전투 경험을 쌓은 강력한 공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1선에 배치된 항공기만 4,500대에 이르렀지만, 영국은 제2선급 항공기(여기에는 수송기, 중폭격기)까지 모두 긁어모아야 고작 2,900대 공군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 2:1의 약세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시민전쟁을 비롯한 수않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인데 비해 영국 공군 파일럿들은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들이었고, 그나마 파일럿의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모자라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을 공중에 모두 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도저히 영국은 독일의 거센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영국인들이 이런 비교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0년 6월에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협상을 권유한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고, 그로부터 독일의 가혹한 대공습을 견뎌내는 "불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Battle of Britain"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 말로 번역한 "영국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1940년 6월부터 시작해서 1941년 5월 10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공군대 공군 사이의 대혈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때를 다룬 영화이다.

 

 

자유를 수호한 영국의 찬가

미국에게 "지상최대의 작전"이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사수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찬가라면, 영국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공군대전략)"은 그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럽과 자유 진영을 사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그들만을 위한 찬가이다. 그런 까닭에 "지상최대의 작전"에서 미국과 할리우드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라면, "배틀 오브 브리튼"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제작한 영화이다. 감독은 "007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톤(Guy Hamilton)"이 맡았고(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자가 007시리즈의 제작자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영국 출신의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이 앞장서고 있다(이 영화의 서플먼트에 따르면 이 배우들은 모두 제각각 가장 적은 출연료라도 감수하면서라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고 한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트레버 하워드 (Trevor Howard), 커드 저진스 (Curd Jurgens), 해리 앤드류스(Harry Andrews), 이안 맥쉐인, 케네스 모어, 나이젤 패트릭,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 로버트 쇼, 패트릭 위마크, 수잔나 요크 등 모두 주연급으로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주인공은 영국 공군 대장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경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숨기고 출연해 "배틀 오브 브리튼"의 명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에 대해 여러 찬사들이 있으나, 이 영화 역시 "지상최대의 작전"처럼 수많은 유명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승리 요인들

이 영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어떻게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가를 살피고 있다. 그 요인들은 우선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한 휴 다우딩 장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략에 있었다. 다우딩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견하고, 처칠에게 더이상의 영국 공군을 도버 너머로 파병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 때 처칠은 프랑스 수상에게 더 많은 영국 공군의 파병을 약속해 논 상태였지만, 다우딩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영국은 더이상의 공군력 손실없이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우딩은 영국의 모든 공업력을 항공기, 그 중에서도 전투기 제작에 최우선을 두도록 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에 도시를 내어주면서까지 자국의 공군력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운영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다는 우위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 공군의 주력기인 Me-109는 먼거리를 비행해 영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최소 10분에서 최대 20분의 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는 짧은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 공군은 레이더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공군이 프랑스의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대기하였다가 그네들이 도착한 시점에 비로소 요격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늘 시간과 연료에 쫓기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이 보유하지 못한 신형 무기인 레이더 기술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으므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레이더 기술에 걸려 기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지상최대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실제 전쟁에서 쓰였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실제로 공중전을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기동전술, 편대 비행, 전투 기술을 보이면서 촬영된 영화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전투기(일부 모델)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실사 영화이다. 그렇게 고증에 철저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승리의 요인은 당시 영국군은 독일군의 군사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승리의 요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공군 파일럿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불굴의 정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칠은 "배틀 오브 브리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데이"는 그들이 세계를 구원한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1년 5월까지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만 127회였고, 이 때 영국 민간인 총 6만명이 사망했으며, 8만 7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공습과 폭탄을 독일에 떨어뜨려렸고, 무차별폭격을 가해 더욱 많은 독일의 도시들을 불태웠고,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그 이후 바뀌지 않는 민간인 학살 - 무차별폭격의 역사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승무원으로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폭격했던 지역을 여행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는 다만 한 개의 점으로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그가 떨어뜨린 폭탄이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떨어져 일반 시민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워드 진은 폭격 임무 참여할 당시 폭격기 날개 밑에서 터지는 고사포탄의 검은 색 구름을 제외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물론 적진을 비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자유에 대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항공전의 승리는 그 뒤에 치뤄질 무지바한 대량공습과 무차별폭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수행방식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제 전쟁은 더욱 가혹해졌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욱 가혹해졌는가? 그것은 전방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런 전쟁 수행 방식은 이후부터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수와 양을 능가했고, 베트남전은 다시 이를 경신한다.

 

 

* 이 DVD는 두 장의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본 영화를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두 번째 타이틀 역시 매우 재미있다. 하나는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생생한 증언, 영화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휴 다우딩 장군과 독일의 에이스이자 나폴레옹 이후 유럽 최연소 장군이었던 아돌프 갈란드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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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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