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vis Presley - Elvis 30 #1 Hits - BMG 플래티넘 콜렉션 (수입)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노래 / SonyBMG(수입) / 2002년 12월


영화 "MIB"엔 이런 대사가 있다. "엘비스가 죽었다구? 천만에 그는 고향 별로 돌아갔어."

1935년 1월 8일 소위 미국의 딥 사우스(deep south)인 미시시피주 미시시피 주 투펠로에서 태어나 1977년 8월 16일 숨질 때까지 엘비스 프레슬리는 살아있는 신이었다. 에드가 모랭은 그의 저작 "스타"를 통해 스타됨의 미덕이랄까, 스타의 조건을 다음의 네 가지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미모,젊음, 착한 이미지,초인격적 행위' 이다. 스타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란 것을 "MIB"의 대사는 그들을 외계인으로 묘사함으로써 역설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란 셈이다.


굳이 에드가 모랭의 조건들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엘비스 프레슬리는 스타가 지닐만한 모든 요소를 지녔다. 미모와 젊음, 착한 이미지와 초인격적 행위들은 물론 그 삶을 마감하는 비극, 가난하고 굶주렸던 어린 시절 등 그는 과거 신화 속의 영웅이 운명을 딛고 일어섰다가 다시 몰락하는 비극의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았다. 미국의 가장 진지한 뮤지션 중 하나로 손꼽히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조차 "에드 설리번쇼"에 출연한 엘비스를 본 순간 어머니에게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던가. 엘비스의 존재는 단순히 당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후대에도 꾸준하게 이어져 간다. 존 레논은 엘비스의 "헛브레이크호텔(Heartbreak Hote)"을 들은 뒤의 삶은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밥 딜런 역시  "That`s All Right Mama"에 완전히 매료당했다고 말한다.



이 음반 "Elvis 30 #1 Hits"은 그런 엘비스의 베스트음반이다. 음악평론가 임진모 선생은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에서 엘비스의 "Elvis' Golden Records(1958)"를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가운데 하나로 손 꼽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LP시대의 뮤지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엘비스는 존 레논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뮤지션으로 손 꼽고 있음에도 "비틀즈" 이후 세대의 사람들에겐 머리에 포마드나 바르고, 느끼하게 다리나 흔들흔들하는 엔터테이너 이상의 의미를 얻기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BMG에서 제작한 이 음반은 지금의 세대에게 엘비스의 매력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기획일 것이다. 디지털 세대의 귀를 움직일 수 있도록 리마스터링된 음반은 디지털 음반 제작기술의 장점을 잘 살려주고 있다.


엘비스는 흑인의 음악성을 백인의 목소리로 표현해주길 원하던 시대에 출현한 뛰어난 뮤지션이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그의 58년 골든디스크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거의 전부 재수록하고 있다. 그가 군입대 이전 발표한 곡들부터 군에서 제대한 뒤 발표한 곡들까지.... 어떤 의미에서 엘비스는 그와 선배이자 경쟁자였던 프랭크 시내트라에게 패배했다. 그는 록큰롤의 신기원을 이룩했으나 이것을 좀더 밀고나가지 못하고 군 제대 이후엔 서서히 프랭크 시내트라 풍의 스탠더드 팝으로 전이해 갔기 때문이다. 엘비스는 위대했으나 선배인 플랭크 시내트라와 후배인 비틀즈 사이의 과도기 속에 놓인 다리였는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늘 자신의 인기에 대해 불안해 했다. 그는 한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대체 소녀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아마 그 또한 신이 주신 선물일 겁니다. 전 그렇게 믿어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두려워 하는 게 있다면, 흡사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갑자기 들어왔다가 갑자기 꺼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거죠."라고 답한다. 그에겐 늘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압의 전류가 흘러들었다. 110V 전구에 흘러든 전류는 순간 엄청난 빛을 발하다 어느 순간 꺼져 버린다. 엘비스의 흔적은 그렇게 점차 잊혀져 갔으나 그가 세상에 보낸 빛은 광속의 속도로 여전히 날아다닌다.

* 리믹스된 보너스 트랙도 매우 재미있으니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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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사랑 이야기(살림지식총서 91) - 안재필 | 살림(2004)


앞서 오승욱의 "한국 액션 영화"를 읽고 나서, 화장실에 갈 때 들고 간 책이 안재필의 "세기의 사랑 이야기"다. 화장실 가서 담배 두 대 피워문 동안 다 읽었다고 하면 심한 뻥이겠지만, 변비 있으신 분들은 필경 다 읽고 나올 수도 있겠다. 이유는 두 가지다. 쉽고 재미있으니까. 이 책은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전체 쪽수가 96쪽이다. 그러므로 맘만 먹으면(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한 시간에 두 번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만 안뜻 봐가지고는 내용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세기의 사랑 이야기"하면 누가 먼저 떠오를까? 왕위를 버린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의 사랑, 비극으로 끝난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사랑. (글쎄, 누구의 사랑은 세기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대중 사회의 도래 이후 그깟 핏줄에 의한 왕족 나부랑이보다 더 많은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은 역시 "스타"다. 스타에겐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미지까지 펼쳐진다. 그들은 이미 인간을 초월한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로 승화된다.

 

스타에도 여러 길이 있다. 세기의 사랑이라 불릴만한 스타들의 사랑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차드 버튼의 사랑이 있을 테고, 머릴린 먼로의 남성들(케네디, 디마지오, 시내트라, 이브 몽땅 등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나브라틸로바의 동성애인들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데 저자 안재필은 음악전문칼럼니스트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세기의 사랑 이야기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 그리고 패티 보이드",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핑겐", "오지 오스본과 샤론 오스본", "토미 리와 파멜라 앤더슨", "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저스틴 팀벌레이크"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제목은 "팝스타들의 사랑" 내지는 "팝스타들, 세기의 사랑 이야기" 정도가 내용을 설명하기엔 더욱 적당해 보인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 그리고 패티 보이드"의 이야기야 이미 한 세대도 이전 이야기가 되었으니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얘기일 테고,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핑겐"("시드 비셔스"라 "비셔스, 비셔스" 이름이 너무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 "카우보이 비밥"의 그 "비셔스"와 같은 이름이다. 역으로 이렇게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섹스 피스톨스를 모르는 이들은) 이야기는 이들의 이름을 딴 영화 "시드와 낸시"로도 만들어졌다. 시드 역에는 게리 올드만이 나왔었다. 이 분야의 꽤 좋은 영화로 평가받는다. 오지 오스본은 블랙 사바스와 오지 오스본 밴드를 통해 악명높은 퍼포먼스로 널리 알려진 뮤지션이고, 글래머의 대명사인 파멜라 앤더슨과 헤비 메탈 밴드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 역시 요즘 신세대들에겐 좀 그럴지 몰라도, 고 바로 윗 세대들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룹 "너바나"의 리드 보컬이자, 또 다른 짐 모리슨이 되었던 "커트 코베인"...그들은 각각 그들이 추구한 음악 세계와 자신의 가치관을 삶과 사랑을 통해 증명해보였다. 대중문화산업의 인큐베이터에서 성장한 브리트니와 저스틴의 사랑 역시 그들 나름으로는 진지한 것이었을 게다. 물론 이 책은 스타들의 연애담 내지는 결혼 생활을 중심으로 다룬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사랑이 결코 그들의 삶과 음악과 다르지 않았음을 잘 드러내준다. 언젠가 이들에 대한 좀더 자세한 책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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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권혁범, 삼인(2004)



"무인도를 꿈꾼다"는 말 속에는 단지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은 아닐 게다. 그 말엔 존 레논의 소박한 무정부주의 찬가 "Imagine"의 노랫말처럼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서의 "천국"도, 딛고 올라서야 할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 오는 "지옥"도, 우리를 옭죄는 "국가"도, 탐욕을 부추기는 "소유"도 없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담고 있다. 나 하나쯤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서 세상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일탈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경우에만 아름답고, 즐거운 상상일 수 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공안기관 요원들에게 끌려가 욕조물을 흠씬 들이키다 목이 눌려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박종철). 그 누구도 민주주의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다 날아온 최루탄에 두개골이 함몰되어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끝끝내 숨을 거두고 싶어하지 않는다(이한열). 그 누구도 남편에 의해 홍콩의 작은 아파트에서 목졸려 숨지길 바라지 않는다. 더군다나 죽임 당한 뒤에 북에서 내려보낸 여 간첩으로 몰려 남은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길 바라는 일은 없다(김옥분). 그 누구도 이라크에서 길을 가다 자동소총에 난사당해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간신히 생존해서 귀국한 뒤에도 여전히 걷지 못하는 몸으로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오무전기 노동자들). 그 누구도 피납되어 살려달라는 애절한 호소를 무시당한 채 목이 잘려나가는 고통 속에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김선일).

더군다나 국가라는 추상적인 민족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인 희생이 아닌 타의에 의해 억울하게 맞이하는 죽음 같은 것은 원치 않는다. 죽은 뒤에 아무리 열사가 되고, 애국자가 되고, 순교자가 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의 책임 -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에서도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로마인에게는 종교도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는데 기독교의 침투로 말미암아 로마의 시민의식이 붕괴되어 로마인의 특성인 실용적인 기풍과 전투 의지를 약화시켜 그 결과 로마가 붕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로마라는 국가 자체를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신의 것으로 돌렸으므로 - 이라는 역사가들의 논리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정의를 빼버리고 크게 보면, 왕국이 범죄집단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범죄집단도 조그만 왕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범죄 집단은, 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에서, 협약에 따라 약탈품을 나눠 가지는 결사체에 의해 묶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만약 이 악행집단이 부도덕한 무리들로부터 많은 지원자를 획득하여 영토를 획득한 후 거점을 구축하고, 도시들을 탈취하여 사람들을 복속시킨다면, 그 집단은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왕국이라고 사칭하고, 침략의 비난이 아니고 정당성을 획득하여 그 왕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한 재치있고, 사려깊은 대답을 보자. 왕이 그에게 자신에게 대항할 때의 네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해적이 대답하기를 '세상을 정복할 때의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배로 그것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와 해적 집단 사이에는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고 도덕적인 차이는 없었다. 두 집단 모두 성공을 위해 내적 조화와 조직에 의존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취하고 파괴하는 그들의 능력에 의해 성공여부를 평가받는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체첸을 향한 러시아의, 이라크를 향한 미국의 행위를 보라.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일컬어 국가테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권혁범의 저서
"국민국가로부터의 탈퇴"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국가주의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불행한 국민들,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 혹은 이에 저항할 기력을 잃은 지식인들(혹은 중독되어 있는)에게 향하는 적절한 예방백신, 해독제 구실을 한다. 

립셋의 정의에 따르자면, 지식인이란
"문화, 즉 예술, 과학, 종교를 포함하는 상징세계를 창조하고, 배분하고, 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물질세계와 구분되는 정신세계의 창조자이자, 전파자이며, 실천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혁범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지적인 저술 행위와 실천으로서의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는 한 ‘비판적’ 지식인이, 우리 사회와 인간에 대해 그 나름의 이해와 소망을 담은 통찰이자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국민적/민족적 정체성"에 의한 것이다. 이런 국민적 정체성, 국민됨으로 사유하기는 다른 모든 정체성을 종종 압도해버린다. 현실정치의 테제인 "국가안보"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이를 위해 국민이라 불리는 집단이면서 동시에 해체해보면 개인일 수 밖에 없는 근대적 개념의 개인이 지닌 기본적 인권을 유보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근대성과 더불어 식민적 요소들, 전근대적 질서들이 혼재해 있다. 국민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기준 속에는 이렇듯 전근대적 가부장제, 혈통주의를 품는다. 국가라는 상상공동체는 종종 국경이 아닌 단일민족 신화와 같이 혈연에 의해 규정된다.

국가주의는 민족주의와 만나고, 민족주의는 보수와 진보라는 양 진영 사이에 다리를 놓고, 이 둘을 묶어주는 최소공약수가 되어준다.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반미민족주의는 종종 국가주의의 우산 아래에서 행복한 밀회를 즐긴다. 친미와 반미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하나의 회로판에서 신호
(사안, 사건)에 따라 서로 도체가 되었다가 부도체가 되는 반도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국익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다른 모든 개별적인 보편을 능가한다. 권혁범의 문제의식은 탁월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몇몇 요소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단지 이 책의 저자 권혁범만이 풀고 해결해나가야 할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우파 지식인들
(지식인은 결코 하나의 성향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에 대해 쏟아내는 비판과 동일한 강도의 비판을 마음속으로 동의를 보내는 지식인들에게도 보내야 한다. 지식인은 "권력(특히 근대국가), 시장(좁게 보면 지식시장), 여론(공론공간)" 사이의 긴장을 통해 자리매김되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에 대한 비판은 그가 한동안 속해있던 "당대비평"의 문제 제기들 "우리 안의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다. 권혁범의 비판들에 대해 구구절절이 다 옳다고 외치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허탈하기 쉽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우리가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 권력, 집단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도달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토피아"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권혁범의 비판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그의 근본주의적 비판은 더욱더 공허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국가주의와 파스즘으로 흐를 수 있는 집단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지만 그것을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설령,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이 크롬웰의 신성정치화될 가능성(즉, 또다른 폭력)이 열려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가 빠질 수 있는 공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논리적 프로그램만을 따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UN의 보고에 의하면 1991년 냉전해체 이후 2001년 9.11 이전까지 전세계 약 45개 지역에서 57번의 주요 분쟁이 발생하였다. 분쟁의 결과로 36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시기에 일어난 분쟁의 최대 희생자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고, 이들 민간인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분쟁의 또다른 특징들은 그것이 국가간의 분쟁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해체에 따른 국가권력의 부재상황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 국민주의를 회피할 필요는 여전히 인정된다 할지라도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명과 권리,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공동체의 존재의 필요성이란 고전적인 명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권혁범의 비판적인 주장들을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민족 단위, 국가 단위의 도덕으로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어려운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고전적인 명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장 자끄 루소의 고전
"사회계약론" 의 세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권혁범의 주장이 현실적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근대 국가의 역할 자체를 부인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이 어느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하며 공동체를 재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유럽공동체의 출범과 같이 민족에 기반한 근대적 국가개념의 해체와 새로운 물적 토대에 기반한 지역 공동체의 출현은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근대화의 숙제에 우리는 여전히 발목을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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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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