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앙드레 고르는 내게 있어 마르크스 이후 발견한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중 하나였다. 이반 일리치를 계승한 정치생태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산업문명 전반을 반추해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생태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남성(sex)으로써 태어난 남성(gender)'이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생태주의’를 하나의 실천적 이념(정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모든 문명체계(혹은 문화)를 극복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인간이 되겠다는 결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앙드레 고르가 평생의 반려였던 도린에게 보낸 사랑의 메시지이자 동시에 변명의 편지였던 『D에게 보낸 편지』(학고재, 2007)를 읽고 나는 도저히 그가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한다.

첫째는 정치생태학적인 그의 생각을 한 개인이 옮긴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고민이다. 산업물질문명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없이, 다시 말해 마르크스적 아젠다의 수행 없이 신좌파의 정치생태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는 나의 현실적 판단은 여전하다. 다시 말해 나의 가슴은 프루동과 일리치를 쫓더라도 머리는 여전히 마르크스와 그람시의 제자일 수밖에 없다.

둘째는 앙드레 고르처럼 사랑하며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독일군의 징집을 피해 달아났던 그는 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이론가로서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를 통한 문화사회로의 전이가 자본주의 산업문명이 말하는 진보(?)의 잔인한 흐름을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 여겼다. 당시 이미 그는 80년대 이후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산업시대의 종말을 경고했었다.

앙드레 고르는 1947년 처음 만난 영국 출신의 도린과 사랑에 빠져 49년 결혼했고,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자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20여 년간 간호했다. 그리고 2007년 9월 22일, 자택에서 아내와 동반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내가 도저히 그처럼 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하기 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것이 과연 잘하는 결정인지 알 수 없었다. 앙드레 고르처럼 ‘결혼을 부르주아 계급의 제도’라는 이념적 반대도 컸지만, 동시에 카프카적인 고민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고민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겁니다.”라고 고백하는 앙드레 고르의 모습은 또한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회의하고, 버릇처럼 매일매일 허무에 빠져드는 한 남자, 자신조차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길 더 즐기는 사람이 사랑이라니. 나는 나조차도 책임질 수 없는데….

그때 나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세 명의 여인이었다. 한 사람은 어머니를 대신해 오랫동안 날 길러준 작은 어머니였다. ‘결혼이란 너만의 선택이 아니라 상대의 선택이기도 하므로 네가 모든 걸 책임지려 하는 건 오만이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흡사한 조건에서 자란 내 누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로부터 빠져나가겠다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연애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 붙잡은 사람은 아내였다. 하지만 내 마음의 결정은 이미 그 전에 나와 있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평생토록 맺어진다면, 그건 둘의 일생을 함께 거는 것이며, 그 결합을 갈라놓거나 훼방하는 일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거예요.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의 기획인 만큼, 두 사람은 그 기획을 끝없이 확인하고, 적용하고, 또 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방향을 재수정해야 할 거예요. 우리가 함께할 것들이 우리를 만들어갈 거라고요.”<본문 24-25쪽>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도린의 말이 그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신이 도린 없이 살 수 없는 상태였기에 저 말에 붙잡힌 것이란 뜻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확신과 불안 사이를 오간다.

“떠나면서 당신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난 온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사는 것보다 나 없이 살 때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권위가 있었고, 대인관계와 조직에 대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했고, 또 남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당신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속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지요. 당신은 남들 문제를 직관적으로 놀라울 만큼 빠르게 파악하고, 남들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본문 30-31쪽>

결혼 전 잠시 헤어져 있는 동안 연인은,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은 상대방이 나보다 우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견딜 수 없는데, 당신은 이 상황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즐길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건 아마도 탯줄을 끊고 나온 아기가 어미를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 아니 절대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상황과 흡사하다. 말 그대로 앙드레 고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도린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당신이 나를 알게 된 이후로, 내가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했던 일에서 실패한 것을 어떻게 당신이 감당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나는 얼마동안이 될지 몰라도 당분간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일에 눈 질끈 감고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흔들리지 않았고 조바심을 내지도 않더군요. 당신은 누누이 내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삶은 글을 쓰는 거예요. 그러니 글을 써요.” 내 소명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당신의 소명인 것처럼요. <본문48쪽>

문득 이 장면에서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베티블루 (Betty Blue 37.2 Le Matin)>이 떠올랐다.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계속해서 거절당하던 ‘조르그’에게 ‘베티’는 영감의 원천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도린’과 ‘베티’. 두 사람의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영화 속 인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실존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본문 89-90쪽>

앙드레 고르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오만을 사죄하는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그의 회고 속에서 ‘도린’은 여러 모습으로 생생하게 기억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There is no wealth but life.)” 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또한 의미가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순간만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문득 그 시절의 나를 결심하게 만든 것은 ‘나를 포함한 온 세상을 저주하는 동안에도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이율배반의 모순’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다.

"내 생각에는 어릴 때 좋은 아버지를 두었던 사람이 나중에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 (...)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도린이 아이에게 쏟는 사랑을 질투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앙드레 고르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그가 정직한 사내였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생겨나는 아이는 축복이라고 세상 모든 인간이 그리 생각하지만 오랫동안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한 사내는 간신히 한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기에 그 여인을, 그 사랑을 비록 자신의 아이라 할지라도 나눌 수 없었다.

"도린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과 화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성공적이었는데, 그건 내가 도린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가능했지요."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앙드레 고르는 생의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여인 도린 앞에서 정직해지고자 했다. 나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결혼한지 10년만에, 이제는 더이상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시도를 포기했을 때 자연스럽게 들어선 아이다.

모든 예술가는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이상을 품었을 때만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록 예술가는 아니지만 글쟁이로서 그런 이상을 품었었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스카'처럼 오랫동안 나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더이상 늙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나이 먹기로 결정한 순간 갑자기 밀어두었던 세월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 17살 어린아이였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마흔 살의 중늙은이가 되어버렸다. 급격한 파도처럼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지난 4월 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내가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다고 전화를 한 순간 나는 희열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나 하나도 책임질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진정으로 책임져야만 하는 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외로운데, 외롭다고 누군가의 품에 징징대고 파고 들 사람이 필요한데, 내 문제만이 아니라 세상의 문제가 여전히 내 가슴을 돌덩이처럼 짓누르는데, 어느날 갑자기 미련없이 이 세상을 하직해도 후회가 없는데, 지금도 비바람불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흙강아지 마냥 뛰어놀다 낯선 여자랑 눈맞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어떤 이는 나에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하며 축하를 건넨다. 나 역시 집사람과 함께 병원에서 처음 본 아이의 모습을 보며 감동했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겨우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아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선 가느다란 탄성이 터져나왔다. 도저히 이 세상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이제 나에겐 더이상 나만의 여자가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웃었다. '참, 한심한 사내로구나. 너란 남자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앙드레 고르도 그랬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 앙드레 고르의 대표작인 "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 생각의나무(2008년)"와 함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 생각의나무(2011년)"도 최근에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니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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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특집 / 한국의 진보, 새로운 가치와 양식을 찾아서>

우리 시대 진보의 고민과 현실



들어가기 전에


'우리 시대 진보의 고민과 현실'은 여러 갈래로 다양하게 진화·발전해온 진보의 전망들을 조망해보기 위한 노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도임을 절감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도 그 지향점과 실천 양태에 따라 각개 약진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것을 하나로 묶어줄 만한 거대담론은 사실상 붕괴해버린 현실 상황이 그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아직까지 혹은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가능성은 부재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기획 자체가 "노무현 현상"이라는 바람을 맞은 한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혹은 장악했던 이들의 충격 못지않게 여전히 소외되어 있는 진보의 고민과 진보의 지향을 묻고, 진보가 처한 위기의식, 전망의 부재를 고민하자는 차원의 출발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러 단체에 속한 진보 활동가들과의 만남은 거짓된 희망보다는 참된 절망과 대면하는 일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는 더욱 발전적일 것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세계의 대안을 모색하는 희망이 될 것이다. 『옥중수고』에서 그람시가 밝힌 "만약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여, 즉 더 이상 '지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억압만을 행사함으로써 '지배'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대중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되고 과거에 믿었던 것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이다."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기에 가장 유효하다. 바로 그런 위기의 한국 사회, 격변의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의 고민과 전망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묻고 싶었다.

 

고민의 출발점, 우리 시대의 진보주의자들

  올 3월 1일. 삼일절에는 해방 이후 사실상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사건 하나가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가 각기 별도의 3·1절 행사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다른 의미가 담긴 '새시대'를 선포했다. '새시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무현 정부의 출범'이란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좌측으로 좀더 큰 걸음을 옮겼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야흐로 '이념의 커밍아웃'이 시작된 것이다.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는 <한국일보>의 한 기사를 통해 "금기가 깨지고 사회적 포용력이 늘어나면서 이념집단 간에 공개적인 경쟁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그런 면에서 좌파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진보진영(좌파)를 두렵게 만들고 있는 현실의 변화, 내적 요인들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해법을 묻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스스로를 진보(좌파)로 규정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과 메일이나 게시판, 그리고 실제 만남을 통해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 중 현재 민주노동당 활동가이자 <다함께 의 target=_blank>http://alltogether.jinbo.net>의 운영위원인 김인식 씨, 인터넷을 중심으로 진보적 담론이 형성되고 소통되는 공간을 꿈꾸는 <진보누리 의 target=_blank>http:// www.jinbonuri.com>의 이장규 운영위원, 전화상으로 진행된 짤막한 인터뷰이긴 했지만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을 비롯한 여러 분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다함께>는 지난해 월드컵 이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SOFA개정 시위와 올해 초의 반전 시위 현장 곳곳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던 단체들 중 하나였다. <다함께>는 원래 민주노동당 내 학생 그룹에서 출발하여 지난 2001년 8월 민주노동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김인식 씨는 87학번으로 학생운동에서 출발하여 지난 1991년 소련의 해체를 지켜보면서 그렇다면 과연 사회주의는 무의미한가를 묻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소련의 해체는 단지 '일국사회주의'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 일 뿐 사회주의 전체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다함께>의 성격과 구성원들의 지향점을 묻자 그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데 지난 1999년 11월에 있었던 시애틀 반(反)세계화 시위 이후 벌어지는 반자본주의 운동과 관련된 운동 단체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그런 까닭에 <다함께>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자격요건은 필요 없고, 이윤지상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두 번째는 세계화가 낳고 있는 부시의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 반자본주의 운동도 그 주류가 반전운동으로 옮아가고 있는 추세인데, 그런 맥락에서 반자본주의 단체라고 규정한 <다함께>를 지금은 반전운동단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현재 <다함께>에 가입하고자 하는 회원들에게 제시하는 규정은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합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보누리>는 진보적 성향의 네티즌들이 이른바 '개혁'이 아니라 '진보' 내지 '좌파'적 시각의 담론이 소통되는 공간을 인터넷상에서 확보하기 위해 2002년 11월 중순에 만들어진 사이트다. 처음 <안티조선 우리모두>나 <깨끗한 손>(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이문옥 지지 네티즌 모임) 또는 <당당모>('당의 진로를 고민하는 당원 모임'의 약자로, 민주노동당 사이트 내의 소모임이었으며 민주노동당 내의 당내민주주의 확대와 민주노동당의 정체성확립을 고민했던 당원모임) 등의 사이트에서 활동했던 진보적 성향의 네티즌들이 지난 대선 국면에서 인터넷 공간의 담론들 거의 대부분이 '개혁' 내지 '자유주의'적 담론만으로 채워져 그와 구별되는 '진보' 내지 '좌파'적 담론이 제대로 형성될 공간을 얻지 못했다는 인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장규 씨는 <진보누리>의 운영위원 5명 중 한 명으로, 본인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저는 80년대 초반에 대학에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때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진보적 사상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우리는 자기규정과는 무관하게, 그냥 소박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신봉자였다는 생각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이른바 '386' 세대 중 아직도 진보진영에 남아있는 사람이 드문 것은 이런 이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로만 좌파였던 거지요. 제가 확실하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느낀 것은 오히려 '현장' 생활을 접고 한동안 운동에서 떠나있었을 때입니다. 생계를 위해 학원강사로 일했고 나름대로 꽤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면 할수록 그 이면의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적 경쟁의 실상을 더 느끼게 되더군요. 게다가 '현장' 시절 알고 지냈던 노동자들의 생활은 그때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음을 주변에서나마 계속 접할 수 있었구요. 결국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겠구나 싶어 다시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성공(대단한 성공은 아니지만)에서 느낀 절망감이 오히려 저를 다시 좌파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인터넷 게시판과 메일을 통해 만난 네티즌들 가운데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과거 학생운동을 통했거나 1987년의 터널을 통과하며 진출한 사회의 경험들을 통해 스스로 자본주의 밖의 대안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연세대 재학생인 Nightwalker 라는 ID를 사용하고 있는 한 네티즌은, 이런 전 세대와는 다른 시대 경험 속에서 "인간이라면 좌파나 우파나 둘 다 모두, 보다 나은 세상을 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짧은 공부와 경험이지만 좌파라는 저의 정체성을 얻었을 뿐입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진보적, 좌파적이라고 생각되는 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좌·우, 진보와 보수를 함께 갈 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은 단지 몇몇 사람의 것이 아니라 현재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이 기획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로버트 폴 볼프의 『아나키즘 - 국가권력을 넘어서』를 접하게 되었는데, 미국의 70년대, 유럽의 60년대 말과 우리의 재미있는 유사점을 찾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영화는 흑백영화였고, FBI요원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임을 받았으며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그리는 FBI요원은 대부분 악당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대도시의 경찰 지휘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그는 좀더 높은 차원의 내밀한 수사를 한다는 이유로 명백한 정의를 왜곡시키는 방해꾼으로 간주된다.

경찰 역시 악역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매우 노골적인 영화 람보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람보 영화인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를 보면, 베트남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 존 람보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을 걷다가 지방 보안관 브라이언 데니히에게 체포된다. 영화 속의 모든 것이 람보 편을 들고 있으며 보안관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가학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보안관이 옳았던 것이 아닌가! 보안관은 람보가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영화가 끝나기 전에 보안관 조수들 중 여러 명이 죽게 되고 그 마을은 도살장이 되어버린다.

람보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는 더욱 노골적이다. 람보는 베트남에서 포로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CIA에게 차출되어 출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임무의 실제 목적은 람보가 실패하는 데 있었기에 생존하는 포로들에 대한 소문은 전혀 들을 수가 없다. 온갖 난관을 이기고 람보가 마침내 포로 몇 명을 찾아내어 그들을 탈출시키려고 할 때 CIA요원들은 그들을 내버려두라고 명령한다. 이 영화에서 실질적인 적은 람보를 죽이려는 북쪽 베트남인이 아니라 바로 CIA 요원이다.

(중략)

70년대에 국가의 권위를 불신했던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시민군인 극우파들이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불신은 정치적인 노선과 관계없이 대중문화의 한 가지 특징이었다. 내가 언급한 영화와 그 외에 대중들에게 친숙한 대중문화에서도 권위에 대한 불신이 하나의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로보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1998년판 서문, 14-17쪽>

볼프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우연치 않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진보진영이 처한 고민과 일정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1) 노무현 정부 출범을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시각과 고민

  볼프는 "70년대에 국가의 권위를 불신했던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시민군인 극우파들이다"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이래 지금 국가의 권위에 가장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은 '좌파'라기 보다는 오히려 '5년만 참자'며 스스로를 달래던 '극우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청년장교 봉기론"까지 들먹여지는 것을 보면 조만간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시민군의 등장까지 염려(?)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진보의 고민은 여기에도 있다. 87년 대선 이후 하나의 전통처럼 되어버린 비·지(비판적인 지지)의 연장선에 놓인 고민이겠지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현재 극우파가 공격하는 국가와 정부의 권위를 좌파는 과연 보호해야 하는가?

한국의 진보진영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을 다소 놀라운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만년야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수평적 정권교체'라 했는데 그것이 담고 있는 진정한 정치적 함의는 남한의 정치권력 속에서 최초로 극우 헤게모니가 배제되었다는 정치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과 시민운동단체들은 이만한 변화조차도 매우 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극우를 배제시킨 김대중 정부에 의해 남북대화의 실질적인 진척이 이루어졌고, 전교조와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고, 고문경찰의 대명사격이었던 이근안이 감옥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이른바 혼란과 부정부패라는 말로 김대중 정부를 청산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긍정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은 김대중 정부에 보낸 비판적 지지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경험이 있다. 'IMF 국가 부도 위기' 속에 빈부 격차는 극심하게 벌어졌고, 20대 80사회가 눈앞에서 펼쳐지면서 비정규직 노동과 고용불안정이라는 태풍이 노동자들의 삶을 뒤흔들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결국 진보진영의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소위 '김대중 학습효과' 역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진보의 입장을 제약한다.

우리 사회는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사회발전의 원동력을 얻어 왔고, 많은 분야에서 후진국적인 풍토에서 벗어났다고 자평해 왔다. 정당이란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표출하고 대변하며, 공익과 공공선에 대한 여러 경쟁적인 논의와 이슈들을 정책 대안으로 조직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당은 그런 사회적 갈등의 균열이 격렬하게 대면하는 선거 경쟁의 결과에 따라 정부 여당이 되거나 야당이 됨으로써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는 왜곡된 지역 정서에 기반 한 후진적 정당 구조에 발목이 잡혀 정당이 정당으로서의 제 몫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정치에 대한 희망, 정치 개혁에 대한 희망은 영웅적 해결사를 바라보는 것이 되었다. 우리 사회라는 압력솥은 다양한 갈등과 요구로 끓어오르고 있는데 그런 정치적 욕구들이 방출될 수 있는 출구는 막혀있었다.

결국 비등점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놀라운 기세로 뿜어져 나온 것이 '노풍'과 '정풍'이었다. 이런 영웅적 해결사에 대한 지지는 정책적 대안이나 이념보다 먼저 인물에 대한 믿음과 신뢰, 과거 전력에 기반한 지지였으며 이를 통해 '바보 노무현'의 신화는 가능해졌다. 정치인 노무현이 진보진영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라거나 기성 정치인들에 비해 개혁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진 몰라도 진보진영이 바라는 정치인은 결코 아닐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이란 현실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이 현상에 대한 규정과 대응방안을 놓고 진보진영은 고심할 수밖에 없다. 진보성의 한계는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초래할지도 모를 극우 헤게모니의 등장 내지는 개혁의 발목 잡기라는 비판을 경계하지 않을 수도 없다. 지금 좌파의 고민 중 한 가지는 여기에 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기본적인 시각은 우리 사회가 이른바 '세계적 기준global standard'에 맞는 자본주의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구되는 합리성의 기준을 충족시키고, 그간 유보되었거나 제약되었던 시민적 권리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이제 정치권력의 중심부에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본주의적 합리성 특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동시에 진행되는 합리성이란 노동자 민중에게는 결국 보다 불안정한 노동과 소득의 가변성 확대(실질 소득의 저하),  무한경쟁체제로의 내몰림을 의미한다. 이런 노무현 정부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는 별도로 <진보누리>의 이장규 운영위원은 "결국 노무현이든 누구든 비판하고 투쟁할 사안이 있으면 비판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노무현이 보다 개혁적인 방향으로 나가려는 것을 극우세력들이 막는다면(가령 국정원장 청문회 사건 등) 그 부분에 대해선 노무현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함께>의 김인식 운영위원 역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환상은 갖지 않지만 노무현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이들과도 함께 한다."며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좌파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할 이상을 할 수 있는 기회이며, 자칫 노무현 정부에 대한 환상에 빠지면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며 고민의 일단을 털어놓는다.

1990년대 초반까지 비합법적인 노동조직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이스크라'라는 ID를 사용하는 한 네티즌은 노무현 정부와 진보진영의 관계에 대해 "함께 가지만 따로 가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린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 정책에 대해서는 지지를 보내야 하지만 진보로서의 자기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극우 헤게모니가 해체되지 않으면 지금의 중도보수 세력 중에서 또 다른 극우가 만들어질 것이며, 노무현 정부를 바라보는 관점도 이에 기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우의 재등장이 두려우니 노무현을 일단 지지하자는 사고방식은 결국 노무현을 더욱 우경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결국 노무현이든 누구든 비판하고 투쟁할 사안이 있다면 비판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가 보다  개혁적인 방향으로 나가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극우세력들이 있다면 가령 최근의 국정원장 임명에 대한 정부여당과 야당의 비토veto와 같은 부분에 대해선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지지는 어떤 경우에도 노무현 정부 그 자체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시민사회 속에서 극우적 논리, 헤게모니가 통용될 수 있는 기반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그것은 노무현을 통해서 이루려고 했던 개혁들조차 노무현 개인을 통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진보진영의 우려 섞인 전망이자 고민이기도 하다. 진보진영은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시민사회와 노동자 민중운동 내에서 진보의 헤게모니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문제와 맞물려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 보자.


2) 불신 받는 진보, 변화하는 진보

  앞서와 마찬가지로 볼프를 인용한다면 "정당한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불신은 정치적인 노선과 관계없이 대중문화의 한 가지 특징이었다. 내가 언급한 영화와 그 외에 대중들에게 친숙한 대중문화에서도 권위에 대한 불신이 하나의 특징"이 되어 있는 현실이다. 2002년 대선 이후 좌파가 당면한 고민 중 하나는 지난 시기 진보진영(민주화 투쟁 세력이 전적으로 '좌파'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한 축으로서)이 독재정권과 투쟁하며 쌓아올린 정당한 권위조차 대중들에게 불신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그것이다. 지난 80년대를 인권과 자유의 가치에 대한 '계몽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90년대 이후의 사회적 흐름은 '구호로만 그친 개혁에 대한 피로'와 '계몽에의 강요에 대한 거부' 증세가 도드라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우리 사회가 성취한 민주주의의 발전은 분명 민주화 투쟁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수동혁명' 또는 '위로부터의 혁명,' '보수적 근대화' 혹은 '보수적 민주화'라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규정되었지만 결국 해방 이후 50여 년간 우리 사회를 추동해왔던 틀(그것이 '산업발전'이라는 근대화가 되었든, 민주화가 되었든) 속에 민중은 배제되어 왔다는 정치 현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대중의 참여가 배제된 상태에서 국가가 형성되었고, 산업화가 추진되었으며, 민주화에 이르는 변화가 일어났다. 냉전반공이데올로기, 재벌을 성장엔진으로 한 개발경제, 거대화한 국가관료제, 우익 일변도의 반공교육 속에서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에 친화적인 사회구조 혹은 도저히 민주화될 것 같지 않은 조건 속에서 민주화를 추진했다.

결국 1987년 대중의 거대한 폭발이랄 수 있는 6월 항쟁으로 조성된 일정한 정치적 자유의 공간은 6·29선언이라는 '보수적 민주화'의 타협 속에 그 공간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만다. 결국 정치적 자유의 협소화(실제 정치지형 속의, 그리고 우리들 내면속에서의 협소화)는 지난 50년간 수없이 많은 명칭으로 변화된 정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는 권위주의 국가 구조가 만들어낸 정당으로, 다른 하나는 해방 정국에서 지주의 이익을 대변한 한민당의 후계정당이라는 보수 양당 구조의 틀로 고착된다. 비록 이들 정당은 수없이 많은 정당 명칭의 변천 과정을 거쳤음에도 그 본질적인 요소들은 변화하지 않은 보수정당이었고, 수평적 정권교체의 의미 역시 철 따라 당적을 교체하는 정치인들의 행보와 함께 그 의미를 잃고 말았다.

1987년 민주화투쟁의 결과는 이런 보수적 정치질서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이행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개혁에 대한 바람을 저버린 채 결국 일부 정치 엘리트들 간의 협약에 의해 부분적인 타협과 정쟁 차원에서의 합의로 이룩된 보수적 민주화였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들에게 도전하거나 타협하며 정치적 이력을 쌓아온 이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그들이 오랜 기간 배제시켜 온 아래로부터의 불만과 도전이었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도전에 대해서는 폭력적으로 억압하거나 일부는 수용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통제해 왔다. 이들에게 정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자산(부채와 자본)의 가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보수 정당들은 양 김의 집권 성공이라는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 극우와 '죽음의 키스'를 나누며 그들과 한 몸이 되어 뒹굴었던 것이다.

대중이 보이고 있는 기존 정치질서에 대한 불신과 반감은 그들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보수정당에 대한 이탈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보수정당에 대한 이탈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이장규 운영위원은 "극우 헤게모니는 단순히 극우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보진영조차 일부에서는 극우 헤게모니적 논리(민족에 대한 과도한 강조나 국가중심주의적 사고, 천박한 경제결정론, 대중에 대한 동원체제 등 극우적 사고방식)들이 통용되고 관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극우에게도 있지만 '적과 싸우며 닮아간다'는 명제처럼 진보진영 내부에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극우세력이 배제된다고 해서 극우 헤게모니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지적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진보를 고민하는 이들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이 비단 좌파만의 고민은 아니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도전에 익숙한 보수주의와 달리 좌파의 권위에 대한 불신 혹은 도전이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은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과거에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현상이다. 지난 2002년 대선은 이런 상황의 도래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대중적인 활력을 빼앗긴 혹은 잃은 진보란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낯선 경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보수정당으로부터 이탈된 표가 고스란히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과 같은 진보 정당으로 향하지 않았다는 현실적인 고민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현실 지향이 고스란히 '노사모'나 '개혁국민정당'의 몫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들(진보)이 정당성의 뿌리라 여기고 있던 노동자·농민 계급의 정치적 지향은 물론, 과거 상대적 지지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청년 대중들에게조차 심각한 불신을 받고 있다는 것은 현재 여기저기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은 이런 '이념의 백가쟁명' 시대에 대한 대비가 미흡했거나 설령 대비했다고 하더라도 가파른 파고에 적지 않게 당황한 듯 보인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진보진영이 현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현실 사회주의 세력의 몰락을 출발점이라고 했을 때 그에 따른 일련의 대처들이 '지적인 통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술적인 필요와 정신적 수동성'에 의해, 다시 말해 현실의 힘이 시대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에 복종해 온 결과이다. 르펭의 등장에 대처하는 프랑스 좌파의 당당함이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좌파의 역할이 기껏 우파를 봉쇄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냐는 지적―좌파의 존재 의의가 현존 사회 질서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인데 결국 르펭과 같은 극우파의 등장이 가능했던 것은 좌파가 이런 대안 제시에 미흡했던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은 한국사회에도 가능하다.

우리의 지난 대선은 외견상이라고 하더라도 극우파의 헤게모니를 붕괴시킨 것이 진보의 도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시장자본주의를 '지구 마을의 유일한 게임'으로 체념하며 수용하는 선에서의 개혁이라고 보인다. 유권자들이 진보를 지지하기보다는 단지 희망에 앞선 현실, 삶에 앞선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그나마 개혁적인 노무현 정권 출범을 지지한 것은 진보 역시 현재의 상황에서라면 신자유주의의 하부구조로 포섭되어 가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란 즉,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계산은 아니었을지 고민해야 한다.

현재 좌파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이런 자유주의적 개혁이 아닌 진보의 관점으로 재구성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이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진보의 관점이란 단순히 '반자본주의'나 '반제국주의'라는 최종 목적에 이르는 과정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진보운동 안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관심을 보이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여러 마이너리티 운동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환기를 필요로 한다. 노동소외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로부터 동성애 운동에 이르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관심과 실천이 진보운동의 활력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다함께>의 김인식 운영위원이나 <진보누리>의 이장규 운영위원 모두 견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보수적인 현 진보진영의 상황이 지난 대선에서 진보진영을 지지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보진영에 등을 돌리게 만들어 결국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대중이 보이는 진보에 대한 불신은 시대의 변모 탓이라기보다는 변화하지 않는 진보진영의 권위의식, 보수적인 태도 등에 기인하는바 역시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진보진영이 더욱 고민해야 할 부분은 자유주의적 개혁이 아닌 진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립하고 확산시키는 일일 것이다.


3) 1,300만 노동자, 400만 농민의 지지는 허구인가?

  다시 두 번째 고민에 이어지는 문제는 좌파적 진보주의자(혹은 진보정당)들이 계속 목청 높여 외쳐 온 '1,300만 노동자, 400만 농민의 지지'가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물론 어제오늘 갑자기 생겨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진보정당의 주장대로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계층의 지지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진보의 전망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겠는가?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직선제)에서 이승만 후보는 74.6%, 조봉암 후보는 11.4%를 얻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좌·우가 그들의 이념을 실전으로 맞붙은 냉전과 열전의 와중에서 한국의 진보정당이 얻었던 최초의 득표율은 11.4% 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직선제, 1956년)에서 이승만 후보는 70.0%,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는 30.0%의 득표율을 얻었다.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이때의 선거에서 눈에 보이는 득표율이 아닌 실제 지지율은 조봉암 후보가 위의 수치보다는 좀 더 높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후보를 냈던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후보가 각기 얻어낸 득표율은 합쳐도 민주노동당은 957,148표 (3.9%), 사회당은 22,063표(0.1%)로 두 정당의 득표를 합해 봐야 4%의 득표율에 불과했다.

그간 우리 역사 속에서의 정당체제는 좌우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의한 정당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매우 협소하게 조작해 왔고, 강제해 왔다. 좌우의 이념 대립이 배제된 상태에서 남는 것은 결국 지역감정에 의한 투표 행태에 의한 권력의 창출이었다. 이번 대선 결과 역시 아무리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정권이 되겠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차이를 결정한 한 요소로서 '지역감정'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 이후 다시금 등장한 '호남소외(배제)론'은 그 진위야 어떠하든 간에 아직도 이런 지역정서를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하는 정치세력이 잔존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정당구조와 투표 행태 속에서는 아무리 지역 간 화해, 지역 협력 행사, 공평한 인사정책을 수없이 반복한다 할지라도 결국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수와 보수가 맞붙는 현실 속에서 지역감정해소라는 공약은 결국 마피아의 협상처럼 서로의 배후를 노리는 기만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좌우이념간의 정책적 대립의 폭이 협소할수록 지역에 기반을 둔 보수 정당 간 갈등 구도는 극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 현실, 투표 행태의 반복이 깨지기 전에는 지역감정에 기생하는 수구 보수 정당을 해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며 신당의 출범으로 해소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 구도 아래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오랜 희망은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워 보인다. 이와 관련해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당적 문제로 선거의 다른 국면을 뜨겁게 달구었던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선생과 전화 인터뷰가 있었다. 그는 전화 인터뷰 전에 <한겨레21>을 통해 이미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고, 『인물과 사상』 26호에서 가진 좌담에서 다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의 논지는 사회구성원들이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입각해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우리의 교육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지독한 국가주의 교육에 의해서 사회구성원들 대부분이 자신의 존재에 걸맞은 의식(계급적 정체성)을 갖지 못하도록 왜곡했고, 그로 인해 지지정당의 선택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과 결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일례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사회에 진출하여 곧바로 노동자가 되는 사람들조차 중·고등학교 때 자신의 계급적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어 있다고 했다. 즉 노동법에 대한 학습 등과 같이 사회에 나가 곧 부딪치게 될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대해 특별한 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괴리된 채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의 교육은 그동안 반공이데올로기만을 주입하도록 강요당했다.

그 결과 우파와 좌파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어떤 선택이 자신의 이익과 결부될 수 있는 선택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방법조차 알 수 없도록 했다. 실제로 그 동안의 투표 행태를 분석해보면 저소득층일수록, 교육의 혜택을 적게 받을수록 정치적으로 우파를 선호하는 투표 형태가 반복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은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진보를 주장하는 정당도, 개혁을 주장하는 정당도 결국 대중의 정치 참여 없이는 엔진이 빈약한 정당일 수밖에 없다. 비록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보여준 약진이 TV토론 참가라는 우리 선거 사상 초유의 이벤트에 따른 결과(?)라 할지라도 그 약진은 우리 정치 역사상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자신들이 그어야 하는 갈등과 균열의 전선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좀더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긋는 전선에 따라 앞으로 장착하게 될 엔진의 출력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우리 사회의 중심 갈등에 가로놓인 여러 위태로운 요소들은 잠재적인 진보정당의 지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해관계를 누가 대변하는지 알기 어렵게 만들었고, 설령 알더라도 여러 내면적인 위기의식들(사표 논리, 최악의 후보론, 전쟁불사론, 비판적지지, 전략적 투표행위, 막판 위기론, 정몽준의 지지철회에 따른 동정론, 진보정당의 입지 마련을 위한 우선 지원론 주장 등)이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도록 내면화하고 있다고 하지만 진보정당에 쏠린 5%도 안 되는 득표율 역시 현실이다.

어느 사회에든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있기 마련이며, 정치적 좌·우의 갈등 역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극우와 맞서는 좌파의 수나 세력이 너무 적다는 데에 있지 않다. 좌파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거나, 일정한 수준의 보수적 민주화에 너무 일찌감치 만족한 나머지 예전의 노선 투쟁식 분열 양상을 재현하려 한다는데 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듯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다운 보수, 극우와 싸울 줄 아는 보수가 없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는 보수와 자칭 보수인 수구의 안락한 연대 속에 지역에 따른 편 가르기 식 나눠먹기 정치를 해왔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은 우리 사회에서 극우를 배제한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 우파의 정권 연장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진보진영은 평가한다. 그런 평가 속에는 사회적 우 편향이 강한 우리 현실의 정치적 지축이 제 자리를 찾도록 하는 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 또한 담겨 있다. 물론 이런 희망이 단지 노무현 대통령 일개인에게 거는 희망은 아니며, 진보진영 역시 스스로의 역량으로 이런 현실을 개혁하려는 강한 열망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뿌리 내리지 못하고 흔들렸던 진보정당이 지난 지자체 선거에 이어 이번 대선기간의 약진을 통해 미약하나마 확실한 뿌리내리기에 성공한 것이다.


맺음말, 시대의 유령을 깨울 것인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확실한 대세처럼 보인다. '사스'라는 괴질이 초음속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시대, 국적을 초월한 자본이동의 시대에 우리 사회의 진보주의자들은 과연 이런 세계 체제의 바깥이 존재 가능하다고 꿈꿀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본에 의한 세계화의 진행은 자본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고, 빈부의 격차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진보진영은 닫힌 시스템에 안주하는 반대가 아니라 세계 시민 사회와 세계 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이런 자본의 강요에 의한 세계화에 맞서려 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믿음이 이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민주노동당, 사회당을 비롯해서 현재의 의회 체제 속의 진보를 꿈꾸는 정당을 '제도권 좌파'라 했을 때, 이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아래로부터의 좌파'들도 형성되어 가고 있다. 지금의 진보는 과거에 그러했듯 일정한 틀이나 방향을 향해 무조건 똑바로 나아가는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진보는 오히려 무정형의 카니발처럼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은 일상에서, 현장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런 대중의 활력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아가기 위한 진보의 고민이 어느 한  방향을 향한 '일사불란(一絲不亂)'을 꿈꾸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생각일 것이다.

1848년 유럽에서 출판된 한 소책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박노자 교수는 「좌파의 미래에 대한 단상」(계간 『사회비평』, 2002. 봄호)이란 글에서 약 2백 년 전 유럽의 자본주의·민족주의·군국주의와 동시에 태어나 이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좌파의 역사 속에 드러난 이들의 본질을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찾고 있다. 진보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런 본질은 작게는 한 개인의 삶의 잣대이자 실천의 기준이 되며 크게는 한 시대와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동력이 되어 왔다.

1985년 나는 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중학교 근처에는 민주정의당 연수원이 있었고, 그 해 11월 한 무리의 철없는(?) 대학생들이 민정당 정치연수원 지붕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 잡혀갔다. 당시 학교 옥상에서 보면 그 모든 광경들이 바로 코앞의 일처럼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나의 80년대가 이토록 매운 최루탄과 함께 시작되어 저물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86년 나는 고1이 되었고, 매일 매일의 뉴스는 그렇게 시보를 알리는 땡 소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으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18일, 물리적 시간 속의 광주는 내 나이 불과 11살의 일이었다. 중학 때 광주에서 전학 온 얼굴도 까무잡잡한 전라도 촌놈, 흉내 내기도 어려운 전라도 사투리로 범벅이 된 그 녀석과 친해진 어느 날 그는 그날의 광주를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알려주었다. 그 후 대학을 갓 졸업하고 새로 부임해온 사회 교사에게 수업이 끝난 뒤 광주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수업이 끝난 뒤 혼자서(아무도 데리고 오지 말고) 학교 근처 아파트촌 지하의 중국음식점으로 오라고 내게 말했다. 우리는 마치 스파이들이 접선하는 것처럼 수업이 끝난 뒤 한참동안 학교 주변을 배회하고, 선생님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학교 근처 약속된 중국 집에 갔다. 선생님은 작은 룸을 빌려 배갈 한 병을 이미 비운 뒤였다. 그 무렵 열심히 다니던 성당의 어두침침한 강당에서 신부님이 틀어주던 광주비디오는 그렇게 나에게 역사 속의 광주가 되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이 끝난 직후 친구들과 들뜬 마음으로 놀러간 화양리 건대 앞에서 나는 또다시 눈물범벅으로 얼룩진 얼굴을 감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1987년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6월의 거리를 경험했다. 두루마리 화장지들이 빌딩 창가에서 개선장군을 환호하듯 뿌려졌고, 사람들은 화장지를 받아 저마다 매운 눈과 코를 거머쥐었다. 치약이 칫솔질보다 최루탄의 매운 연기를 막기 위해서 더 많이 쓰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1987년 12월, 6월의 거리를 경험한 고등학생들 중 일부가 '교육민주화와 사회민주화, 공정한 대통령 선거 보장'이라는 구호 아래 "서울지역 고등학생 연합(서고련)"이란 것을 만들어 서울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그 무렵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비판적 지지냐, 민중연대후보 추대냐를 놓고 갈등했다.

1987년 12월 24일 대통령 선거가 끝난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은 무기한 농성을 풀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렸고, 그들은 농성을 풀고 작은 촛불 하나씩을 들고 성탄절 분위기로 들뜬 성당을 나와 침묵시위를 시작했다. 며칠 동안 명동성당의 차가운 바닥에서 밤을 지새운 그들이 촛불을 들고 나선 명동 거리, 사람들은 여전히 쌍쌍으로 팔짱을 끼고 행복한 미소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나는 서러움에 내 청춘의 희망을 매장했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다 죽거나 잡혀가는데,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을 일삼던 자들을 다시 대통령으로 뽑아 놓고 그해 연말의 크리스마스를 하염없이 즐기고 있었던 거다. 그때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저들이 산 자라면 나는 죽은 자였다. 저들의 경계에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부유하는 것들에 불과했다. 피가 강처럼 흐른다 할지라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틈에서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둘 촛불을 끄고 거리의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1990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대선에서 패배한 후, 그 정권에서 11년간 장관직을 수행했던 신부이며 시인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어떤 신문 기자의 "산디니스타 정권은 결국 실패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니카라과 민중이 산디니스타 정권을 통해서 하늘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잠깐 동안 본 하늘은 그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고 이것은 후에 다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

1987년 내가 본 하늘은 아직도 열려 있다. 미래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발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에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다. 사람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찾고 만들려는 의지가 전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 윗글은 계간 『황해문화』 2003, 여름호(통권39호) - 특집 <한국의 진보, 새로운 가치와 양식을 찾아서> 기획 중 하나로 썼던 글입니다. 노무현 정부 출범 6개월 즈음 쓰인 글로 노무현 정부가 마무리되어가고,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인 지금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 먼지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 봅니다.

당시에도 저는 노무현 정부의 출범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그것을 두고 저의 혜안이 돋보였다고 자평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논하기에 앞서 ‘한국의 진보’는 ‘새로운 가치와 양식’을 우리 눈앞에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민주적 방식으로의 권력 획득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 이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이 글은 제게 메일을 보내 현재의 정세를 묻고 고민을 토로한 어느 대학생의 편지에 대한 저 나름의 부족한 응답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이 부분들에 대한 보충 작업을 지속시켜나갈 생각이지만, 올해 안으로 어떤 작업들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도록 할 자신이 없습니다. 일단 현재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지난 시대를 어떻게든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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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티토 - 재스퍼 리들리 지음 |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2003)


뛰어난 전기 작가의 세 가지 덕목


오늘날 전기 작가가 주는 인상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돈나 같은 인물의 뒤꽁무니를 추적해 이들이 구태여 감추고 싶은 것들을 파헤쳐 가십거리를 양산해내는 옐로우 페이퍼를 연상하거나 아니면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에게 고용된 대필 작가들이 쓰는 자서전 형태의 전기들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나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은 일반 대중의 흥미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소위 잘 알려진 이들의 배꼽 아래 이야기와 같이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들에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 전기문학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런 인식에 변화를 주게 된 것은 체 게바라 평전의 성공 이후 일어난 변화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 쓰인 여러 종의 책들을 읽어 보았으나 지난번에 성공을 거둔 ‘장 코르미에’ 판 체 게바라 평전이 거둔 인기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흡함이 많은 책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의아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까닭이 책 자체가 주었던 것이기보다 ‘체 게바라’ 자신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탓이 더 크다고 여긴다.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당시 게바라의 행적만을 무미건조하게 추적했을 뿐, 게바라의 활동이 가진 사회적 의미나, 당시의 시대 상황이 게바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의 대응이 빚어낸 결과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부족한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인식의 한계를 꼬집곤 하는데,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겠으나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 못한 전기 작가의 저술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뛰어난 역사가이자 동시에 뛰어난 문학작가였던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기 작가들, 예를 들어 ‘플루타르코스’나 ‘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일급 전기 작가들은 역시 일급의 역사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다루려고 하는 역사 속 인물들을 단지 개인의 삶을 추적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그네들의 삶과 역사를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듯 서로 긴밀하게 결합시킨다. 뛰어난 전기 작가는 문학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취재기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기 혹은 평전 같은 장르에 대해 우리 문학은 거의 전혀 관심이 없는 편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학은 시와 소설만을 의미한다. 에세이 역시 일부 삶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나 즐기는 시중한담으로 치부된다. 이래서는 철학적 에세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에세이는 힙합이 그러하듯 한국에 와서 그저 미셀러니 수준으로 격하되며, 기자들의 르포 문학 역시 문학비평은 다루지 않는다. 잭 런던이나 조지 오웰의 르포가 서구에서는 정식 문학 장르 안으로 포용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다. 심지어는 작가나 시인이 저술한 산문집도 문학비평에서 제외되는 협소한 장르가 문학이다.


시와 소설만이 문학의 순수성을 담보해주는 장르로 머무는 동안 한국 문학은 계속 외국 이론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 상황에 놓일 것이고, 폐쇄적인 학문사회가 서로 인접한 학문의 교차를 금지하는 것처럼 서로의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노벨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라). 한국에서 소위 일급 문학가들이 집필한 전기문학들은 문학적으로는 평가받을지 모르나 역사학자들에게는 고증의 가치조차 없는 것들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이는 문학가들의 전기문학인 탓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전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급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있으나 유고슬라비아 국민은 없다


우리의 근대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미완의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남과 북은 그들의 태생만큼이나 상이한 체제를 구축했고, 북의 정치 지도자 김일성의 행보는 호치민식 민족주의, 티토의 비동맹외교노선, 카스트로의 반미와 일부분은 겹치고, 일부분은 다른 그들만의 모습을 보여 왔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은 냉혹한 국제질서의 격동기 속에서 각기 다른 민족과 극심한 분열 속에 놓였던 유고가 어떻게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와 그의 리더십을 통해 봉합될 수 있었던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시기적으로 구분하자면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요셉 브로즈가 유고 공산당의 정치지도자로 부각되는 단계, 2단계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숙청을 피해 유고지도자가 된 티토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우스타샤, 체트니크의 협공으로부터 승리하여 유고의 실질적 지도자로 인정받는 단계, 3단계는 스탈린의 공격으로부터 유고 지도자의 지위를 지속시키고 유고의 독립성을 수호하는 단계, 4단계는 외부적으로는 비동맹 외교의 중추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들로 부터 유고식 사회주의를 지켜내는가로 구분된다. 이렇듯 20세기 가장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정치지도자 티토에 대한 평가가 단지 위대했다는 한 마디만으로 규정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가능하다.


제1단계는 티토가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는가를 살피는데는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과거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1892년 5월 7일 크로아티아 쿰로베츠 계곡에서 태어난 요시프 브로즈는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 이르기까지 그가 진짜 요시프 브로즈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북의 김일성이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처럼 말이다. 우리가 흔히 "티토"라고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사실 무수히 많은 가명을 지닌 사내였고, "티토"라는 이름 역시 그의 무수히 많은 가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에 불과하다.


▶ 대독항쟁 기간 중 자신의 오른 팔이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모사(mosa pijade)와 함께 한 요셉 브로즈 티토. 모사는 함께 옥중에 갇혀 있는 동안 티토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쳤던 인연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티토가 통치하던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나라는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진정한 의미의 유고슬라비아 인들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티토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몬테네그로인, 코소보인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지명 속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경계선상에서 종교적으로도 가장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었다. 거기에 비잔티움 제국을 함락시킨 투르크 제국과 기독교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종교간의 대립 양상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


"제스퍼 리들리"가 집필한 "요셉 브로즈 티토"의 평전은 매우 뛰어난 전기 작품이자, 나에겐 그간 궁금했으나 충분한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었던 지난 역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담긴 책이었다. 우리에게 유고슬라비아는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제3세계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자 시금석 역할을 해주는 나라이지만 이에 대한 접근은 통제되고 있었다.


내가 지닌 여러 궁금증 가운데 하나인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파시즘에 저항한 주된 세력은 좌파였으나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까닭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총체적으로도 궁금한 부분이었으나 각국의 사례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총론적 접근방식으로야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책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발칸 반도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각론적 접근이 가능한 책은 현재도 태부족인 상황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그리스"를 우리는 오로지 "신화의 땅"으로만 이해하지만 그리스 올림푸스에는 제우스와 아프로디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에 저항한 수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뛰어난 활동을 보인 다수는 좌파였으며 이들은 전후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복귀한 그리스 왕정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하여 많은 수가 유고슬라비아로 탈출하게 된다.

▶ 반파시스트 전선의 동맹군으로 한때 대독투쟁에 나섰으나 극우 민족주의 성향으로 인해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고 티토의 빨치산을 공격했던 체트니크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za Mihajlovic). 유고슬라비아가 해방된 뒤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된 세계질서 속에서 과거의 강대국들 영국과 프랑스, 미국들은 그들의 정치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은 반면, 신흥독립국들이나 약소국가들은 대개 두 가지 혹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의 발전 양상을 보인다. 이것을 유럽이라는 지역으로 한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와 같이 좌파의 몰락이 기존 정치체제의 부활로 이어지고, 이것이 표면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태로 전이되었다가 군부쿠데타와 연이은 파시즘적 군부독재로 이어졌다가 다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가는 형태이거나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과 같이 이전의 정치체제가 파시즘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소련공산주의 체제로 갔다가 소련의 몰락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이되는 양식이다. 물론, 제3의 방식엔 과거 동서 냉전 시절 비동맹외교를 주도했던 네루의 인도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있다. 이들 두 국가의 발전 양태나 정치 체제, 외교는 이 두 정치 지도자의 과거 행적의 차이만큼이나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이들 두 사람이 오랫동안 구금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만큼이나 흡사하다.


티토는 공산주의자였는가?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이후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코민테른의 악명 높은 실책들만 엮어도 책 10권은 족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티토를 비롯해 당시 혁명에 가담했던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신념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 생각했고, "사회주의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위한다"는 믿음을 위해 기꺼이 동지의 손에 죽어가는 길을 택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나치즘이 소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것이라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침묵했고, 중국에서는 마오쩌뚱 대신에 장개석을 유일한 중국 내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학살당했지만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를 죽인 나라는 다름 아닌 소련이었고, 그들은 레닌의 사후, 트로츠키의 몰락 이후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공산주의 이념을 이용했다.


티토는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뒤 내분에 휩싸여 있던 모스크바로 간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고 장담한다. 그러자 기업가들이 수많은 정치 헌금을 헌납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실제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해 테러에 나서자 독일 공산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하인츠 노이만은 공산주의자들도 앉아서 당하지 말고, 파시스트를 공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1931년 여름 노이만이 스탈린을 만나 나치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활동을 설명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게 되면 서방세계를 휩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 소련이 한숨 돌리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노이만은 하는 수 없이 한 발 물러났다. 이 무렵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큰 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밀어낸다면 그 틈을 노려 프랑스를 압박해 동맹체제를 구축할 요량이었다.


티토는 그 시절 국제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그가 소련에서 머무는 동안 스탈린의 후계자로 추앙받던 키로프가 암살되는(실제로는 스탈린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혐의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숙청당한다. 숙청은 이 두 사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 와 있던 국제공산주의자들에게도 시행되었다. 비밀경찰들이 밤마다 이들이 묶고 있던 숙소로 들이닥쳐 체포해간 뒤 이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아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훗날 이 때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른 스탈린과 소련을 지지한 이유를 묻자 티토는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했을 법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르주아들의 형무소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한 경험이 있던 소수의 골수 공산주의자들은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소련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중략>... 우리는 오랫동안 낮에는 강제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독이 엄습하는 숨막히는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 때 우리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 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과 우정이 충만하며, 성실성이 인정받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 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이런 말을 대신하여 생각해볼 만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보면 티토에게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무렵 만약 소련과 스탈린을 거부한 혁명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최악의 경우 트로츠키처럼 멕시코 산골의 오두막에서 스탈린의 자객이 보낸 피켈에 정수리를 찍혀 죽거나, 아니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정치적 위상과 활동 공간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국내의 현실에서 죽산 조봉암이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뒤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포기한 많은 이들이 훗날 파시스트가 되어 더욱 가혹한 억압자로 나선 것을 생각해볼 때 티토의 이 말은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민테른을 신뢰하지 않은 티토는 스탈린의 시선 밖에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침묵했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켰고, 벨기에, 네덜란드 , 프랑스를 함락시켰고,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유고 공산당에서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다면서 다른 공산당원들의 숙청을 실시했지만, 티토는 "불만 당원이라도 교화시키면 됐지 죽일 필요는 없다"며 이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에 대해 내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단 하나 그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짜르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단 하나의 목적, 러시아의 패권 유지"란 차원에서 국제공산주의를 이용했다. 책을 읽는 내내 티토에게 쏟아내는 스탈린의 증오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나라가 70여 년 동안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도리어 의문스러웠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본래 러시아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인민의 대의를 위한 그들의 이상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혁명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 우울하고 슬픈 역사 아닌가. 티토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도살자인가? 유고 통합의 지도자인가?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을 포용하는 유고 내부의 유일한 정치 세력이기도 했다. 티토 자신은 크로아티아 출신이었고, 그는 파르티잔 세력 못지않게 모두의 미움을 받은 이슬람교도들을 포용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파르티잔 세력 안에는 유고 내부의 잡다한 민족구성과 이념적 다양성을 두루 포괄하고 있었다. 그런 티토조차 전후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 세력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내전을 경험했다. 북의 김일성은 신흥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신흥학살의 역사적 진실은 북한군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신흥의 우파 세력이 들고 일어나 좌파들을 숙청하면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이후 다시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우파를 다시 제거하는 피의 악순환이 벌어졌지만, 김일성은 신흥 학살 사건을 미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일소해버린다. 내부의 적 대신에 외부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적으로는 왜곡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티토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다. 우스타샤와 체트니크의 악행이 워낙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데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파르티잔 집단이 이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티토 역시 이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이후 서구에 의해 티토의 공격에 종종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블라소프와 코자크인들의 경우 그들이 영국의 관할 지역으로 넘어왔으나 그들은 영국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되돌려 보내졌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국제정세의 미묘한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 요셉 브로즈 티토의 세 번째 아내 요반카(Jovanka Broz)


다음의 일화를 보자.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한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랴나를 입양한다. 미랴나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냉혹한 인종청소로 악명 높았던 밀로셰비치가 바로 이 사람이다. 티토가 죽은 지(1980년) 10여년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가혹한 내전을 경험하며 분열된다. 유고가 다른 동구 국가들이 걸었던 공산화의 길과 다른 공산화의 길을 걸었던 것을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빚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소련이 건재할 당시 이들의 위성국가였던 알바니아나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는 소련의 몰락 이후 그나마 국가의 분열이나 인종청소와 같은 갈등을 겪지 않은 반면에 당시로서는 서구와 동구 사이에서 그네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유고가 티토의 사망 이후 동구 해체 과정을 겪으면서 나토(NATO)와 미국의 집중 폭격을 받을 만큼 가혹한 해체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여러 방면에서 가능하다. 우선 평전인 만큼 요셉 브로즈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만 치중해서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티토가 궁극적으로 보냈던 충성의 대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의 전개 과정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고, 영화화되기도 했던(리처드 버튼이 1971년 티토 역을 맡은 영화) 그의 파르티잔 시절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비동맹 외교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이 책이 티토의 개인적 삶은 물론이고, 역사를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전기 출간 붐을 타고 판매되는 수많은 평전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책을 단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책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도 몇 가지 단점이 보인다. 우선 이 책의 저자 제스퍼 리들리는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란 부제를 통해서도 이미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티토에 대한 존경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티토의 모습이 객관성이 결여된 그에 대한 상찬으로 거듭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는 오해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저자가 티토에 대한 존경을 보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장점에 어긋나는 몇몇 부분들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흐루시초프가 집권 이후 티토와 유고 공산당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럴 개연성도 있지만, 그것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전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유고가 유럽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고와 티토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까지 영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두고 싶다. 미국과의 관계 부분이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그 이외에 이 책은 번역이나 기타 편집 부분에서 역자인 유경찬 선생(그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도 번역했는데)의 깔끔한 번역 솜씨에 힘입어 흡족한 수준이지만, 무려 53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 그것도 20세기 초엽인 제1차 세계대전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기나긴 시대를 다루는 책에서 책 말미에 인명, 지명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과 편집자 주, 옮긴이 주와 같은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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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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