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구두가 선정한 2006년의 책
(2005. 10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우리에게 2006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 질문에 답하기 전, 우리는 잠시 20년 전의 오늘을 떠올려보는 것이 좋겠다. 1986년은 아시안게임이 있던 해이고, 한동안 “86, 88”은 번영을 이룩해줄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 시대의 우리들은 지금보다 암울했을까? 이 무렵 한국의 노동자들은 주당 52.4시간 노동으로 세계1위를 차지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미국의 전폭기들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했고, 소련에서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7월에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다.


과거를 기억하는 서로 다른 방식


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양산, 정치개혁실패가 잇따르면서 권위주의 독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현실인식은 극단을 달린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2』(책세상, 2006)은 지난 시대의 필독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대한민국이 성취한 결과를 부정하는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자학사관을 담은 책이라고 비판한다. 이 책의 편집위원들은 엄밀한 고증에 입각한 학문적 성과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론 노 대통령이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했다는 발언과 그런 분위기에서 과거사 청산 법안들이 만들어지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올해가 다 가기도 전에 대한민국이 성취(?)한 또 하나의 결과를 보여주는 두툼한 책 『야만시대의 기록 - 고문의 한국현대사』(역사비평사, 2006)가 출간되었다. 앞의 책이 노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발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책은 지난 2004년 12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열린우리당의 이철우 의원에 대해 “지금도 조선노동당 간첩이 국회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말한 사건을 보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올바른 청산과 정의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과거사는 언제라도 정치의 중심에 부각될 수 있는 뇌관이다. 그 이유는 과거사가 단 한 번도 깨끗하게 청산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철우의 경우에도 과거 재판기록만 놓고 보자면 자백한 간첩이다. 권인숙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당시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믿거나, 그 재판기록이 “한 번 들어오면 대통령도 무사히 나갈 수 없다”던 고문 기술자들의 고문과 용공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본주의, 성장과 시장 논리가 제압한 도박판에서 살아남는 법

언제인가부터 우리 사회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신조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좌파 신자유주의’, ‘인권을 위한 전쟁’, ‘평화를 위한 핵실험’이 그것이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르포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프로메테우스, 2006)을 통해 핵발전소를 책임진 성실한 한 가장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온가족을 잃는 참사를 피할 수 없었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확히 20년 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발생한 체르노빌 참사는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발표하지 않았고(대략 1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 지금도 체르노빌에는 192톤의 핵연료가 미봉된 채 잠들어 있다. 우리가 북한의 공포와 미국의 증오 사이에서 벌어진 핵실험에 찬성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난 해 우리는 한 과학자가 벌인 언론플레이에 얼이 빠졌던 경험이 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지금도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태연자약하게 벌어지는 것일까? 도로시 넬킨과 로리 앤드루스는 『인체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궁리, 2006)를 통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 우리 몸의 생체(유전자) 정보에 특허권이 부여되고, 이를 상품화하여 이익창출의 도구로 삼는 시장과 생명기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황우석의 숭고한(?) 연구를 위해 몸 바친 이들에게 난자체취의 위험성은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황우석의 생명공학이 가져다 줄 풍요의 도마 위에서 우리의 몸(유전자, 생체정보)은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일들에 둔감한 걸까? 얼마 전 모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TV광고는 미인선발대회를 코믹하게 엮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47%는 주가지수연동정기예금에, 48%는 환매조건부 채권에 투자하며 5%는 부족한 미모에 조금 더 투자”하겠다는 미인의 소감 뒤엔 좀더 긴 뒷이야기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더 이야기해보라는 권유에 참가자는 “얘들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고 외친다. 젊은 세대는 언제나 기성사회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기 마련이지만, 오늘의 젊은 세대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자기경영, 자기혁신에 전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그런 논리를 담고 있는 경영처세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당연하지만 정말로 개처럼 벌어도 좋은 걸까? 지난 해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마시멜로 이야기』(한경BP, 2005)의 이중번역 논란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어디로 향하는지 잘 보여준다.

만화 『타짜』(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는 대중적 호응에 힘입어 영화화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대 배경을 갖고 있는 만화 『타짜』에서 자전거를 갖고 싶었던 곤이의 소박한 욕망은 결국 그의 청춘을 도박판에 저당 잡히도록 한다. 빨치산과 국군이 밤낮으로 번갈아 출몰하던 지리산에서, 살벌한 승부가 펼쳐지는 도박판에서 주인공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깨달은 것, 다른 타짜들처럼 죽거나 손가락이 잘리지 않고, 몸성히 살아남는 방법으로 깨우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멈췄다. 그것만이 돈을 위해 체면도, 염치도 없이 벌거벗은 욕망들이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도박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

1986년엔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라는 <아, 대한민국>의 노래가사처럼 유람선이 정말 한강 위로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아~ 대한민국”을 외친다. 다만 지금의 “아~”는 풍요와 번영을 상징 조작했던 그 시절의 외침과 달리 한숨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의 집권 세력은 이른바 민주화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한숨짓고 있는가? 다가오는 2007년 새해는 개인적으로는 87년 시민‘혁명’이라 규정하는 87년 민주화운동이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바로 그 시민혁명이 만들어냈던 87년 체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고비에 서 있다.


박태균의 『우방과 제국』(창비, 2006)이나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2006)는 모두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체제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살펴야 하지만, 문제의 복잡성을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한미FTA'라는 하나의 사안을 두고 우석훈은 크게 세 가지 층위의 각기 다른 고민거리를 제기한다. 첫째는 생산력 중심, 발전 중심의 패러다임은 결국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폭주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기존의 87년 체제에 의해서는 어떤 대통령이 선출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체제를 개혁하거나 보수하기 어렵고, 호민관으로 선출된 대통령 자신의 폭주를 국민직접행동 이외에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것, 셋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라도 새로운 시스템을 상상해 내고, 그것을 국민적 합의에 의해 도출해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즉, 우석훈은 우리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느닷없는’ 한미FTA 폭주를 통해 우리 사회의 경제시스템, 국가시스템 전반에 걸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폭주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박태균은 그간의 한미관계가 대등할 수 없었던 것은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정권들의 태생적인 한계에도 있지만 ‘국가안보’를 빌미로 ‘정권안보’에 치중한 정권을 경제성장 혹은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승인해온 우리들 자신에게도 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만약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면 한미관계는 좀더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무엇인가? 87년 혁명 이후 어느새 20여 년간 지속된 절차적 민주화에 의해 수립된 민주주의 정부 아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한미관계의 불평등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박태균은 이것이 지속되는 독재의 유산이며,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진화론적인 약육강식 담론을 우리들이 내면화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통해 누렸던 경제적 ‘특수’를, 미국과의 동맹으로 덩달아 우리도 ‘제국’이 될 수 있다는 음험한 욕망이 왜곡된 한미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상상력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가 꿈꾸셨던 대한민국입니다.”라는 CF가 있었다. 이 광고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이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 광고가 호명하는 아버지들이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것은 사실이고, 분명 그들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은 배고픔을 극복하는 대한민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저당 잡히긴 했지만 분명히 성공했다. 그러나 87년 체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었지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 우리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그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 할 때이다. 이제 소개하려는 두 권의 책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 해답의 단초가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순홍 유고전집 1. 2 - 생태학의 담론, 정치생태학과 녹색국가』(아르케, 2006)과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길, 2006)가 그것이다. 책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지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합리적이고, 급진적 실천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책 소개를 가름하고자 한다.

<출처 : 함께사는길, 2006. 12월(통권1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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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건희와 비정규직 노동자

첫번째는 “이건희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상징되는 노동과 자본 그리고 국가의 위기이다. 이와 관련해 강준만의 『이건희 시대─우리는 정말 이건희를 알고 있는가?』(인물과사상사, 8월)와 최장집 외 여러 학자들이 참여한 『위기의 노동─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후마니타스, 3월)을 놓고 고민한 끝에 『위기의 노동』이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노동의 위기,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제에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접근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선정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감정의 기저는 ‘불안’이다. 나, 가족, 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이 과도하게 강조되어온 사회에서 국가부도위기는 ‘나’라는 개인의 존립과 정체성 자체를 위협하는 사건이었기에 철부지 어린이부터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금 모으기 운동에 앞 다퉈 나섰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맸고, 정리해고도 감내했으나 문제는 위기 극복 이후에도 여전히 고용불안정, 비정규직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고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차례 권력포기를 시사했으나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그의 표현대로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좌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니다. 모두가 신자유주의에 따른 시장논리를 구원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외쳐댄다. 시장의 주문에 걸려든 사회는 과도한 경쟁으로 내몰린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60퍼센트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현실에서 과도한 분배가 시장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은 아사 직전의 환자에게 다이어트를 처방하는 것과 같다. 시장논리의 주문에서 깨어나는 것, 시민의 재정치화만이 위기에 처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2. 광복 60주년과 한일관계
광복 60주년과 패전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한국과 일본은 서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으나 양국은 도리어 이전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물론 문제는 우리에게도 있으나 그보다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의 우경화, 일본헌법 제9조의 개정 움직임과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의 연이은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있다. 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국내 출판계에서도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여러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목해보게 될 변화는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반전, 반차별,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등장한 계간 『전야』(前夜)의 공동대표이자 양심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의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역사비평사, 10월)와 이토 나리히코의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행복한책읽기, 5월)이다.

특히 데쓰야 교수는 천황의 신사 야스쿠니의 기능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 겪는 자연스러운 슬픔을 신(神)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180도 전환시키는 감정의 전이를 통해 국가주의에 맹목적인 복종을 초래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범 분류인 A급, B급, C급은 전쟁범죄의 경중에 의한 것이 아닌 국제군사재판소의 헌장 제A항, B항, C항의 위반을 따진 것으로 일부에서 주장하듯 A급 전범의 분사만으론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감정적 분노와 비판은 일본의 전통문화를 가장하고 있는 국가주의에 도리어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멀고도 가까운 한일관계, 감정보다는 이성적이고 평화적인 접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지닌 의미는 소중하다.


3. 국가보안법, 강정구 그리고 맥아더
지난 2004년 연말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 및 4대 개혁입법의 추진이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의 힘세고 오래가는 수구보수와 개혁보수란 배터리 시스템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광복 60주년이자 동시에 미군 주둔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과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6.25 민족해방전쟁론이 맞물리면서 해결해야 할 때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어떻게 뒤통수를 치는지 실감하게 해준다. 이와 관련해 박태균의 『한국전쟁─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책과함께, 6월)은 전쟁과 분단이 우리 사회의 심리구조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를 실증적인 자료들과 함께 잘 분석하고 있다. 누가 죽은 맥아더를 오늘의 한국 땅에 부활, 재림케 하며, 이토록 극렬한 반응을 불러오게 하는가?

그것은 한국전쟁의 경험이 남북한 지배집단의 국민국가형성과 정당성 창출의 근거가 되었음을 먼저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맥아더는 소박하게는 무속신앙의 장군님으로부터 거대하게는 남한 지배집단의 수호신으로 자리한다. 비록 박태균의 주장은 여러 곳에서 강정구 교수의 주장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그와는 다소 다른 길을 가고 있으나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분단 상황이 남북한 지배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적대적 공범자란 사실에 대해 인식을 같이한다. 이외에도 한국전쟁과 관련해 주목해볼 만한 책들은 김경학 외 『전쟁과 기억─마을 공동체의 생애사』(한울, 10월), 류춘도의 『벙어리새─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당대, 9월) 등이 있다.


4. 위험사회-성, 가족, 군대, 국가
올해는 지난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1년여의 시점에 도달했고, 호주제 폐지 법안이 지난 3월 2일 국회를 통과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있던 한 해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가족의 해체를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 남성노동자가 중심인 사회(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정은 출산을 통해 노동력 재생산과 (남성)노동자에게 평온과 안정, 건강관리 등 많은 부분을 가사노동으로 충당하도록 강제해왔다.

비록 가족 해체의 원인을 단순히 자본의 변화된 생산구조에서만 찾을 수는 없겠으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 가족 해체 징후는 노령화, 출산율 감소문제와 더불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은폐되어 왔던 성과 생식의 문제는 이제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의 문제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런 여성주의의 시선을 통해 평화와 군사주의, 남성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청년사, 8월)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11월)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기하고 있다.


5. 생명의 기반을 흔드는 복제기술의 윤리
다섯 번째는 원래 “삶의 기반을 흔드는 먹을거리 산업”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불거져 나온 난자 불법매매와 황우석 교수의 ‘세계줄기세포허브’의 윤리성 문제가 제기되어 “생명의 기반을 흔드는 복제기술의 윤리” 문제가 더 시급한 현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엔에 의해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의 제4조는 “어느 누구도 사람을 노예처럼 다루거나 물건처럼 사고 팔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통한 난자의 불법매매는 과정의 불법성은 물론 “어차피 난자는 매달 나오는 거고, 돈이 필요해서 팔았을 뿐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이가 내 아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는 판매자의 말에서 우리는 생명윤리의식 부재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판매자의 윤리의식만이 아니라 불법매매에 의한 것인 줄 알면서도 시술해준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의료를 책임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정부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도 묵인해준 혐의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황우석 박사와 함께 세계줄기세포허브 프로젝트에 참가해온 미국의 새튼 교수가 난자 취득의 윤리문제를 제기했다. 그 진위 여부는 좀더 시간이 걸려야 해결되겠으나 2004년 줄기세포 연구 발표 후부터 난자 출처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돼왔다는 사실은 생명산업의 선도적 지배라는 이익 앞에 우리 사회의 눈이 얼마나 어두워졌는가를 반증한다. 도미니크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인간 복제 이후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지식의풍경, 11월)를 통해 기술과 인간본성의 위기 사이에 서 있는 인간복제문제를 제기한다.


이외에도 한일관계가 해마다 과거 역사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는 것처럼 한·중이 해마다 먹을거리의 안전성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는 일도 이제는 연중행사가 되었고, 이와 맞물려 쌀협상국회비준반대 투쟁 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산적해 있다. 또한 20여 년을 끌고 온 방폐장 부지 선정 주민투표는 그 과정의 온갖 구설과 후유증 속에서도 여전히 핵발전을 고집하는 우리의 에너지 체계를 되돌아보게 해주었고, 경기도 최전방 GP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 교원평가제 도입 논란 등 2005년 한 해는 해결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내년의 과제로 남겨둔 채 저물어가고 있다.



출처 : <함께 사는 길>, 2005년 12월호(통권 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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