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위기와 녹색희망 


『지구화, 되돌아보기와 넘어서기』, 조명래 지음, 환경과생명, 2009





위기의 진화((鎭火)? 더 큰 위기로의 진화(進化) 

1929년 미국의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경제대공황은 인류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 균형이 유지할 것이라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정부(공동체)가 경계를 정해 확실히 통제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탐욕으로 인해 무력화되고 자기 파괴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경제대공황 같은 세계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초국가적인 대책이 아닌 개별 국가단위의 생존자구책은 도리어 위기를 고조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계는 전승국을 중심으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한다는 수정자본주의(케인스주의)를 정책을 선택했고, 전 지구적 경제를 위한 새로운 규범으로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맺는다.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대처 총리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무한한 부의 축적을 열망하는 자본의 동학은 케인스주의 국가들의 성장이 둔화되고, 개발도상국들의 국가주도 계획주의가 성장의 한계에 봉착하면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효과적 증식과 성장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성장의 한계, 경제위기는 모두 정부의 잘못된 정책, 불필요한 간섭과 규제, 과도한 사회복지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자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 이외에 더 이상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itive)”며 신자유주의의 전면적인 승리를 선언했다. 그 사이 대공황이 남겨주었던 교훈은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또 다시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초고속 인터넷망에 번진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세계의 경제위기로 번졌다. 냉전체제 해체 이후 꾸준히 추진되어왔던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결과였다. 금융경제를 넘어 세계 각국의 실물경제를 파탄 상황에 몰아넣은 위기의 원인을 두고,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실패로, 보수 진영은 정치제도의 실패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현재의 위기는 진화(鎭火)될 것인가? 아니면 더욱더 큰 위기로 진화(進化)해나갈 것인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들인 근본적인 위기는 무엇인가?


발전국가, 사회국가, 경쟁국가

조명래 교수는 지구화의 한국적 방식이거나 호명이라 할 만한 ‘세계화’가 이제 막 시작될 무렵이었던 1994년부터 지구화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지구화, 되돌아보기와 넘어서기』는 지구화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다양한 현상들, 특히 사회과학도로서 계몽주의 이래 지속되어온 근대적 현상인 ‘국민국가’ 중심 체제가 전복되면서 삶의 원초적 불안정성이 극대화되는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주목한 결과물이다.


제1부 「지구화 시대의 공간과 환경」에서는 전 지구적 공간과 환경을 매개로 전개되는 지구화의 다양한 양상들을 살피고, 제2부 「지구화와 한국 사회의 현주소」에서는 지구화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의 구체적인 양상과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마지막 제3부 「지구화 시대를 넘어서기」에서는 또 다시 우리 앞에 닥친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인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과 삶의 가능성을 짚어보고 있다. 그는 공동체와 생태계의 생존을 위협하고,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병증의 현상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드리워진 근대적 삶의 양식까지 파헤치는 근원적인 해부를 마치 내과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우선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과 환경의 구체적인 장으로서 국민국가의 변화양상에 주목한다. 근대적 패러다임의 산물인 국민국가모델, 발전국가와 사회국가라는 기존의 모델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따른 국가 재조직화의 결과물로 출현한 경쟁국가 체제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타인(Immanual Wallerstein)은 “자본주의는 시작부터 세계경제적인 사건이었으며 민족국가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자본은 자신의 열망이 민족의 경계로 한정되도록 방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출현은 처음부터 세계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으며 국가들과 사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전 지구적인 상호연결을 시도한 세계체제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경제 체계는 무한한 부의 축적 과정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경제는 주어진 어떠한 정치구조의 경계도 초월하는 경제 단위였다.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합의를 바탕으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을 통해 국민들의 사회적 삶(복지)을 책임지는 사회국가(social state)의 형태였다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주도하는 저임금 노동집약형 산업을 통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였다. 오일달러를 통한 북반부의 차관이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같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권력자 개인의 착복 수단으로 망실된 반면 비교적 건전한 국가엘리트들이 주도한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은 ‘수출주의 축적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조정 역할을 확대하고 시민사회의 조건을 결정하는데 깊숙이 개입할수록 국가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더욱 격렬한 투쟁의 장이 되었다.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서서히 시민사회의 이해관계와 반목하기 시작했다. 국가지배자와 국가요원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책을 추구하고 집행하기 위해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신흥독립국이자 개발도상국들의 국가형성기 동안엔 유력한 정치집단과 경제집단 사이에 이해관계의 동맹이 성립했지만, 그 동맹은 내부적 갈등을 미봉한 체제였다. 새로운 자본가계급은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경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봉건적 특권의 잔재에 대해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경제를 점진적으로 분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신흥 계급은 국가가 조정 역할을 확대하고 경제에 대해 간섭함으로써 생기는 위험부담, 무역이나 사업에 대한 규제에 대한 저항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신흥 계급은 국가의 방향설정에 개입하여 국가의 재구조화를 시도했다. 지구화로 인해 생산 활동이 초국가적으로 전개되고, 금융거래의 지구적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국민국가는 국민경제의 통합적 조절자로서 거시 경제 조절 기능이 무력화되었다.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아시아 각국들은 외환위기라는 자본의 지구화 앞에 무력했고, 외환위기는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로의 편입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제시된 IMF의 정책들은 국가역할의 재조직화를 의미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발전국가 모델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기업과 시장을 통제할 수단을 잃은 사회는 조절력을 상실한 채 지구적 자본의 운동에 따라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구화 시대 국가들은 생산 및 유통의 모든 부문에서 자국 경제의 지구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자신의 역할을 집중시킴에 따라 대부분 ‘경쟁국가(competition state)’로 전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구적 경쟁력의 동학을 중심으로 국가의 역할이 설정되고 특화되는 ‘경쟁국가’는 지구화 시대 국가 역할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전통적인 국민국가가 국민적 합의나 명분을 바탕으로 국민경제의 안정적 성장과 발전을 도모함과 더불어 국민적 헤게모니 하에서 국민 대중을 통합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설정했다면, 경쟁 국가는 국민경제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제화․세계화되는 자본 운동 논리에 국가 경영의 방향을 맞춘다. 따라서 경쟁 국가 하에서 조절은 고용증대, 수요 관리, 분배 등과 같은 국민경제의 재생산 부문보다 신기술․신상품․신생산 체제 개발, 해외 직접 투자, 금융 거래 자유화 등과 같은 부분을 우선한다. <본문 40쪽>



지구화 시대를 넘어선 초록정치의 가능성

조명래 교수는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표면은 지구화이지만 내부는 신자유주의가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의 위기를 불러온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누적효과는 “전략적인 결정의 장에서 사회의 공익성이나 시민성을 보장하는 국가의 역량을 잠식”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국민국가의 약화, 기능을 마비시키는 형태로 나타났기에 국민국가의 기력을 다시 회복시키고 강화해야 한다는 반동적인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조명래 교수는 ‘국민국가의 덫’에 빠져서는 “초국민화 ․ 탈국가화를 수반하는 지구화의 힘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근본 원인에 대한 적절한 진단, 다시 말해 발전국가 ․ 사회국가 모델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었던 포드주의 성장체제, 산업자본주의가 처한 위기를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축적 과정을 추구하는 자본의 근본적인 추동력과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소비중심의 근대적 삶의 패러다임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없이는 어떠한 대안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 체제를 해체하고 재구조화하면서 진행되었던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촉발시킨 위기는 결국 특정한 성장체제의 종말이다. 문제는 이것이 다시 임금과 연동되는 포드주의 성장체제로의 회귀, 국민국가의 기능회복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지구 생태계와 인류공동체가 더 이상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국토 환경의 파괴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포괄하는 ‘진보의 근본 위기’이다. … 생태 위기는 사회의 존립과 지속 가능성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성장․평등․참여 등 인간 중심의 전통적인 진보로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돌파할 수 없다. <본문 333쪽>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경제 위기의 실체, “공동체적 ․ 민주적 삶의 양식”이 해체되는 현실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산물인 동시에 근대 인간중심주의 진보의 산물이기도 하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투며 약자를 차별화하고 배제하는 ‘경쟁적이고 불평등한 삶’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데서 연유한다. 결국 현재의 위기는 바로 우리 안의 경쟁적이고 불평등한 삶의 추구가 외적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진정한 진보는 사람과 사람의 평등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호혜로운 관계설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람 중심의 사회적 진보와 사람과 자연의 공존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형평성을 재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명래 교수의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병증에 대한 원인 진단이 정확하고 그에 대한 대안 역시 적절하다 할지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가 초록정치의 희망을 보았던 지난 2007년 촛불시위에 대한 해석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민주화 20년 뒤에 맞닥뜨린 대한민국은 사회국가로 발전하기는커녕 여전히 발전국가의 망령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존에 의한 진보를 근원적으로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적 다중으로 포섭된 시민들이 초록정치의 주체로 세계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암흑 속에서 헤매야 할까.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했던 루쉰 선생의 말씀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 <환경과생명>2009년 봄호(통권 59호)에 청탁 받아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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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가진 자들만의 민주주의를 끝내야 한다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에코리브르, 2008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광화문 시청 앞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여 벌이는 촛불 시위가 30여 일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시위는 서울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2의 6월 항쟁이 되는 것이 아니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시민 사회의 목소리에 맞서는 정부의 자세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아니 정부의 자세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고, 시위대에게는 가차 없이 물대포 세례가 가해진다. 대테러진압용이라던 경찰특공대까지 동원되는 모습은 살인적인 진압으로 악명 높았던 5공 치하의 백골단을 연상시킨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경험한 시민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과연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은 시민 대다수가 남아있는 수도 서울에서 비밀리에 철수하며 한강철교를 폭파해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에게 특수부대까지 동원해 총기를 난사했다. 1987년 정부기관원들이 대학생을 물 고문하다가 살해했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정권은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평택 주민들을 군대를 동원해 철조망을 둘러친 제2의 게토에 가두고 강제진압했다. 어떻게 시민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시위대에 뿜어져 나오는 물대포의 극적인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서서히 데워져가는 솥단지 안의 개구리처럼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회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변모해간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고, 시장에 가기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석유에 기초한 문명의 문제,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것이 현실이니 어쩌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현실주의’엔 눈앞에 빤히 보이는 ‘현실’은 없고, ‘주의’만 남아있다. 그동안 우리가 석유와 제3세계를 불태우는 대가로 누려왔던 값싼 농산물의 시대, 녹색혁명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현실엔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삼성 이건희 회장은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천 명,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경쟁력’과 ‘시장경쟁력’ 강화라는 주문 앞에서 한껏 움츠러든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한 명의 천재가 만 명 분의 월급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 사람이 소비하는 부스러기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 과연 우리들이 추구해야 하는 선진사회의 진정한 모습일까? 로버트 프랭크 ․ 필립 쿡이 말하는 승자독식사회란 어떤 것일까?

『승자독식사회』는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통해 최대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얻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요구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국 사회 내부의 사회적 양극화(승자독식)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승자독식현상은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한 정보혁명, 글로벌 네트워크의 확대와 관세축소 등 규제 없는 시장의 세계화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통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1992년 슈테피 그라프는 상금으로 16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 그녀가 선수보증광고와 시범경기로 벌어들인 돈을 합하면 이 액수의 몇 배였다. 그러나 그녀의 수입은 당시 최고의 라이벌인 모니카 셀레스의 수입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4월 셀레스가 관중에게 칼로 찔려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라프는 절대적 수준에서 볼 때 경기력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많은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43쪽>

정말 우리들은 능력 있는 일등 인재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까?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앞서 두 테니스 선수의 경우처럼 이런 주장은 허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독식사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우리가 동네놀이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놀이기구 중에 시소가 있다. 시소게임이란 놀이상대끼리 서로 균형을 이루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즐기는 게임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다소 몸무게가 나가더라도 그만큼 앞으로 당겨 앉거나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쪽에 다른 사람이 더 앉도록 한다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승자독식사회는 삶의 즐거움 혹은 지속을 위한 균형을 맞추는 시스템이 붕괴된 사회다.

예전에 아이들이 즐겨 찾던 군것질거리 중에 “젤리뽀”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상품명을 이용해 노래가사를 바꿔 부르곤 했다. 무척이나 살벌했던 그 노래 가사는 이랬다. “예쁜 사람 다 죽으면 젤 이뽀~.” 자본주의 시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바꿔 불렀던 노래가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대박과 쪽박 사이의 갈림길에서 개인이나 기업, 심지어 국가조차도 과거 냉전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저마다 핵군비 경쟁에 나섰던 것처럼 승자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을 치른다. 두 사람의 경제학자는 무한대로 펼쳐질 것 같았던 핵무기 경쟁도 군비축소조약을 통해 결국 제약이 가해진 것처럼 시장이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무한경쟁에도 일정한 규제가 가해져야만 현재의 승자독식 제로섬게임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파국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파국은 석유자원의 고갈과 함께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친기업적(Business Friendly)인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을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갈 것인가?

끝장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새로운 군비경쟁의 시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의 에르베 캄프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며, 현재의 민주주의의 시스템으로는 그것을 통제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생태적이라고 여겨왔던 ‘지속 가능한 발전’도 이미 너무 늦은 일이 되었으며, 도리어 이 용어가 현재의 심각한 위기를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는 ‘생태학’이라는 비속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의미론적인 무기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제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미덕을 믿는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한 번쯤 자문해보기 바란다. 그들은 정녕 산림벌채, 온실효과를 만들어내는 가스 배출, 시골길의 아스팔트화, 전 지구를 자동차로 뒤덮는 것, 수질 오염 등 이 모든 것이 점점 도를 더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몇 가지 반가운 소식 - 교토 의정서 체결, 몇몇 야생 생물종의 건채, 친환경 농업의 도약 등 - 은 작은 투쟁의 성과와 상황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된 물줄기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1938년에 살고 있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41쪽>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구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고, 작지만 소중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왜? 매일 더욱 많은 숲들이 사라지고,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가스 배출은 나날이 늘어나며, 어째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도 누리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나?

세계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과잉투자지만, 개별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고화질 텔레비전(HDTV)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는 식량과 보건에 투자를 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보다 고화질 텔레비전 제작기술이 뛰어난 국가라면 사정이 다르다. 고화질 텔레비전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면, 거기에 들인 연구개발비를 뽑고도 남기 때문이다. …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승자독식사회』, 본문 191쪽>

20세기 후반부터 자신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에 투자하며 환상적인 발전을 거듭한 중국과 인도는 2004년 한 해 동안에만 각각 47억 700만 톤과 11억 1,3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분야에서 단연 으뜸은 미국으로 같은 해 59억 1,200만 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했다. 세계는 파국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2005년 교토의정서를 발효시켰지만,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2001년 3월 탈퇴해 버렸다. 세계화에 의한 국가 간 승자독식경쟁은 과거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대신하여 새로운 형태의 무한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작게는 일국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과 크게는 세계적 차원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국가들의 투쟁이 지구의 파멸적 상황들을 극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놓은 결과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에르베 캄프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가진 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왜곡된 민주주의의 과두정치체제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사실상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 - 경쟁력을 상실한 고비용 저이윤의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해소 - 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기술 차이는 미미해졌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뒤처진 선진국들은 제조업을 포기하는 대신 지식서비스산업(금융 등)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 역시 미래의 성장 동력은 지식 경제 산업에 달렸다는 명분 아래 IT, BT, CT의 순서로 산업구조를 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본과 자본의 투쟁이라는 투기화된 금융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한 차례 경제위기를 경험한 기존의 사회권력은 재벌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승자독식시장의 과잉경쟁을 개인이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화된 시장 앞에서 개별 국가의 정부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다.

가진 자들의, 가진 자들에 의한, 가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끝장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광화문 네거리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거나 투표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어째서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를 놓고 ‘황금분할’이니 ‘절묘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인 ․ 관료들은 평범한 유권자들과는 거리가 먼 계급일 뿐이다. 미국의 ‘투표와 민주주의 센터'가 미국의 의회 선거를 분석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선거에서 정책 경쟁이 치열할수록, 다시 말해 후보자나 정당 간에 정책이나 이념, 철학적 차이가 큰 선거일수록 투표 참여율이 증가한다고 한다. 만약 정치인들 사이에 시장경제에 대한 운영방식, 민영화, 소비와 조세 감면, 탈규제, 부유한 투자자들에 대한 정책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현대의 수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들이 투표 참여를 귀찮은 의무로 생각하는 것이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는 말이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더라도 이것이 상대 정당의 지지율과 연결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민주주의(democracy)가 ‘demo(인민)’+‘kratos(지배)’,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민주주의는 무지한 대중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회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의 선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인민에 의한 지배를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무지한 인민대중이 아니라 바로 직업적인 정치인 계급에 의한 과두정치, 즉 정치인들이 입을 모아 사수하자고 외쳐대는 ‘자․유․민․주․주․의’다. 이라크 파병부터 시작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한미FTA까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조차 강행하는 것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다. 이럴 바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도 재판의 배심원처럼 인민대중 가운데 추첨으로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정치체제일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어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이라지만 청와대엔 특급 한우가 공급된다. 가진 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도 유기농 한우만을 먹을 충분한 재력과 의지가 있다. 이처럼 소수의 승자들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 체제는 실제 대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유권자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늘 반대의 행동을 취한다. 가진 자들의 소유인 언론과 미디어는 이것을 정치인들 개개인의 전형적인 위선이라 공격한다. 그러나 거대기업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곧 정치라는 것을 뼛속 깊숙이 체득한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이다. 정치인과 정당, 정부의 기만행위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적대감을 이용해 보수언론들은 ‘부패’ 혹은 ‘무능한’ 정부 대신 ‘정직’하고 ‘효율’적인 시장을 칭송한다.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세워 보상해주는 정부라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선 반정부적 수사까지 동원하는데 능숙한 그들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회적 회전문 시스템을 이용해 권력과 다시 한 몸이 된다.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승자독식경쟁을 멈출 의사가 전혀 없다.

홀로세의 공룡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20세기의 문명을 후세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도 점점 자명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20세기를 ‘화석연료의 시대’, 우리들을 ‘홀로세(Holocene)의 공룡’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2008)의 연간 에너지 전망에서 2030년 전 세계 원유의 하루 평균 생산량을 종전 1억1600만 배럴에서 1억 배럴로 하향 조정할 전망이다. 그동안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문명의 위기, 욕망의 질주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생태 위기를 지적했던 수많은 이들의 염려처럼 산유국의 석유 생산은 이제 정점에 도달했다. 석유 생산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일피크론은 더 이상 우려나 기우가 아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의 역사발전은 없다고 할 만큼 자신만만했었는데 어째서 오늘의 우리는 이토록 커다란 불안과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승자독식사회』와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흡사한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승자독식의 원리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되어갈 것이다. 정부의 결단력 있는 정책들이 소득불평등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의 승자들은 언제라도 어느 한 나라의 세율이 높아지면 조세피난처를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한경쟁에 재갈을 물리자는 새로운 군비축소운동에 세계적인 시민 연대가 요구되는 이유다. 이처럼 두 권의 책 속에 그려지는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는 너무나 암담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결정적인 파국의 도래가 오기 전에 우리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이 그 시작을 알리는 일이길 바란다.

출처 : 환경과생명.2008.여름호(통권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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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진보와 야만 사이의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

『진보와 야만』을 읽기 전에 들었던 두 가지 생각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책 『진보와 야만-20세기의 역사』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보와 야만'이란 시선으로 20세기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태적 관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파헤쳤던 『녹색세계사』(2003, 그물코)를 통해 인류의 환경파괴 역사를 진지하게 담아냈던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아마 서유럽과 북미의 잘사는 나라들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일 것”
이라고 예측한다. 뒤이어 그는 “이들과 그 가족들의 경험은 20세기에 세계 대다수 인구가 겪은 전형적인 경험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은 2000년에도 여전히 가장 부유했고(이 집단 안에서 일정한 변동이 있었지만), 최빈국들도 대체로 변함이 없었다. 실제로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부의 격차는 20세기 동안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1900년에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은 주변부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약 3배 더 부유했다. 1990년대 말에 이 격차는 7배로 커졌다. 어떤 경우에 그 격차는 개괄적인 수치가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1990년대에 미국의 1인당 소득은 자이르보다 평균적으로 80배 더 높았다. 많은 나라에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89개국 사람들이 1980년대 보다 훨씬 더 가난해졌고, 43개국 사람들이 1970년대 보다 더 가난해졌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부의 하락이었다. … <중략> … 20세기 말 세계에서 부의 격차는 막대했다. 세계 인구의 가장 가난한 20%(약 12억 명)는 세계 총소득의 채 1%도 차지하지 못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에서 ‘극빈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충분한 식량과 주택, 음용수도 공급받지 못했다. 세계 어린이의 1/3이 영양결핍을 분류되었고, 그 중에서 1,200만 명의 5세 이하 어린이가 빈곤 관련 질병, 대개는 13펜스의 비용밖에 들지 않는 경구용 수액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본문 155-156쪽>

이 책을 읽는 우리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가 상정하고 있는 서구 세계, 중심부의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과는 또 다른 경험들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1900년대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탈출해 중심부에 근접하는 위치까지 올라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20세기 전반에 걸쳐 최소한 평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훨씬 더 부유해지는 진보를 이루었지만, 문제는 세계의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 부의 80%를 향유한다는 이 사실이 20세기의 가장 큰 야만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IMF 이후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난리를 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는 국민소득 상위 20%에 든다.

진보와 야만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1948년)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였던 최빈국에서 2006년 현재 16,000달러에 육박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문제는 이 같은 통계나 외형적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주변부 국가들보다 잘 살고 있다는 객관적 조건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른 중심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경제위기와 실업을 완화하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이란 정책은 펼쳐보지도 못했다. 우리들 모두는 좀더 많은 소비를 위해 충실한 노동중독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더욱더 각박해졌고, 지금껏 피땀 흘려 누려온 모든 풍요가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우리에게 이 같은 공포와 불안이 더욱 극대화된 까닭은 우리의 성공과 풍요가 불과 최근 2~30년 사이의 일이라는 단기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라는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우리들 역시 하나의 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주변부에 속한 인류가 채 1%도 안 되는 소득으로 비탈진 삶을 살아가더라도 오늘의 우리는 풍요로운 소비를 만끽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서구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에게도 여전히 진보로 받아들여진다. 이 공포와 불안의 먹이사슬이야말로 20세기의 진보와 야만을 이루는 핵심 고리이다. 우리는 『진보와 야만 -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21세기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서 언급했던 20세기 초 만연했던 중심부 엘리트들의 낙관주의가 그러하듯, 21세기 초반인 현재 장기적인 예측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내리고 있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 동안 세계가 진화해온 길과 세기말의 경제력과 정치력의 분포를 고려할 때, 세계는 다음 수십 년 동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고 전망한다. 이 전망은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이 20세기에 여전히 부유했던 것처럼 21세기에도 여전히 부유할 것이란 전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1992년 미국 과학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협회의 공동보고서는 “현재의 인구성장 예측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고 지구상에서 인간 활동 패턴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기술은 세계의 상당한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가역적인 환경 악화나 계속되는 빈곤을 방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21세기에도 한줌의 소수는 여전히 세상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그 같은 방식으론 더 이상 지구의 자원과 생태계가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5년 미국의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는 미국의 전 지구적 권력과 세계의 모든 일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지구는 매우 작은 행성이 되었다. 우리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대기권에서든 심지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에서든 지구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본문327쪽>

이제 21세기의 인류, 아니 저자가 이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상정하고 있는 중심부의 교양 있는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억눌린 풍요로운 이 체제의 내부고발자로서, 생존의 가파른 비탈에 서 있는 주변부와 “지구상의 모든 것”, 생명을 가진 것들과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권력과 개입할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출처 : 『환경과생명』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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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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