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1958년 무렵 뉴욕 레고 파크.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열 살인가 열 한 살이었을 때…. 난 하우이, 스티브와 어울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스케이트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야! 얘들아! 기다려.”
“꼴찌다! 꼴찌! 하하하”
“같이 가! 얘들아.”
아버진 마당에서 뭔가를 고치는 중이셨다.
“마침 들어오는구나. 이리 와서 이것 좀 잠깐 잡아주렴.”
“훌쩍, 네?”
“아티, 그런데 너 왜 우는 거니? 나무를 잘 붙들려무나.”
“제가 넘어졌는데요. 친구들이 절두고 가버리잖아요.”
아버진 톱질을 멈추셨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1권 본문 5-6쪽>


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청년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4년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에 머물던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작가는 ‘마우슈비츠’란 익살을 부리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극적인 생존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과거사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단순한 회상투로만 구성되진 않는다. 우리는 『쥐』를 통해서 작가인 아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 놓인 경험의 차이, 감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쥐』를 통해 일정하게 의도하는 바가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 작품이 과거와 현대를 번갈아 가며 대비시키고 있는 구조를 취하는데서 발생한다. 즉,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작가)와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의 현재적 갈등 구조는 끝내 해결되지 않지만, 작가는 『쥐』의 작업을 위해 사이가 결코 좋을 수 없는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앞서 인용하고 있는 『쥐』의 첫 도입부에서 이미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나에게 최초로 각인시켜준 인물은 우리에게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 박사였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음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실제로는 가스처형실을 갖춘 유대인 최종해결시설)에 갇힌 수인들에 대해 외부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수들 사이에 불붙는,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관해 거의 모르고 있으며, 매일 끼니와 자기 자신을 위한, 친구를 위한 무자비한 투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친구를 희생자 명단에서 지우려고 아우성을 쳤다는 사실 말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결국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 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수인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아버지 블라덱이 바로 그런 경험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전후 세대인 아들 아트와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는 이렇게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고, 이 두 사람의 간격을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아트 슈피겔만이 스무 살 때 겪은 어머니 안나(아냐)의 자살이었다. 물론 어머니의 자살이 블라덱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묶어주던 하나의 울타리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 『쥐』가 단순히 히틀러의 만행을 그림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으나 그만큼 그저 그런 교훈적인 유형의 만화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의도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로 그려진 것이기 보다는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세대와의 일정한 단절과 소통, 이해를 위해, 다시 말해 스스로의 정리를 위해 그린 작품이란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는 부모 세대와 대화함으로써 끝끝내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 블라덱을 이해하게 되고, 단절을 경험한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성장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버지 블라덱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살아온 과정이 너무나 각박했던 이들 가운데 블라덱이 거쳐 온 극단적인 체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와 흡사한 태도를 지닌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당장 우리의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 혹은 앞으로 우리들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


나 역시 생활보다는 생존을 우선해야 했던 체험이 있었고, 이 무렵 내가 즐겨 입에 담던 경구
“강한 자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란 경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말이었다. 일단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은 어떤 비굴이나 치욕, 폭력도 감내할 만한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태도만이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자세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냉혹함만이 삶의 진정한 자세라고 여기는 동안, 나는 주변에서 순수나 소박한 낭만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얕잡아 보았고 경멸했다. 그들은 삶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존재들이라 여겼고, 결국엔 삶의 과정에서 도태될 것이라 믿었다. 아버지 블라덱이 어린 아들 아트에게 했던 말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공개할 필요 없을, 어찌 보면 아우슈비츠를 드러내는데 도리어 군더더기 같은 대목들에서 도리어 진실을 보여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의 갈등, 아버지가 청년기에 했던 연애 이야기, 어머니의 자살, 그리고 아버지 블라덱 자신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질 뻔 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흑인종에 대해 지닌 편견들, 마트에 가서 이미 개봉한 음식물을 바꿔오는 인색함 등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우리는 블라덱과 아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 그들의 이야기가 지난 한 시대의 과거사가 아닌 오늘에도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잔혹한 시대를 살더라도
“인간의 구원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빅토르 프랑클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존립하는 것이다.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관조함에 여전히 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을 것이며, 그녀와 나의 정신적 대화는 전과 다름없이 생생했을 것이며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그대의 가슴에 새겨주소서. 그러면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해지리다.” 그는 F. 니체의 말을 인용해 (비록 강제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의 과정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긴 했으나)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 말은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의 도상(途上)에서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대개 “어떻게”가 아닌 “왜”이다.


아버지 블라덱의 냉정하고, 각박한 심성과 삶의 자세를 우리는 『쥐』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 조건들 속에서 그의 기대를 배신했거나 믿음을 버림받았던 무수한 경험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숱한 배신과 희망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을 어찌 과거의 일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임금 노예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채 살아가길 강요당하는 현실에서도 역시 배신과 희생은 반복된다. 그러나 블라덱이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까닭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아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블라덱의 이런 태도를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발현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타인
(가족을 포함해서)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만이 타인의 종이 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은 비록 아우슈비츠가 인류에게 별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최악의 범죄자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증빙자료, 회계장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1987년에 감독한 영화 <언터쳐블(The Untouchables)>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했던 시대였던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경찰도, 검찰도 감히 손대지 못하던 갱단 두목 알 카포네(Al Capone)가 엘리오트 네스(Eliot Ness)라는 한 풋내기 열혈수사관에 의해 세금 포탈 혐의로 수감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알 카포네는 1920년대 당시 시카고의 라이벌 갱단 두목이었던 조지 벅스 모렌을 암살하기 위해 경찰관 복장을 한 부하들을 시켜 상대편 조직원 7명을 기관단총으로 살해할 만큼 잔인무도하기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경찰과 언론은 물론 시카고의 삼척동자도 이 범죄가 알 카포네의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능한 경찰은 범죄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해 도리어 알 카포네의 명성만 높여주게 된다.


시카고 시민들은 알 카포네의 갱단의 횡포는 물론 암흑가 조직과 결탁해 있는 시카고 경찰과 시 당국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지만 감히 분노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럴 때 나타난 인물이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미국 법무성(U.S. Department of Justice)의 금주국(Prohibition bureau) 특별수사관으로 임용된 엘리오트 네스였다. 그는 범죄 집단과 깊이 결탁된 경찰을 배제하기 위해 20대의 열혈 청년들로 수사진을 편성했는데 언론은 이들을 ‘언터처블(Untouchables)’이라 불렀다. 그의 업적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에 의해 영화로 재조명되었는데 무자비한 갱단의 두목이었던 알 카포네를 감옥에 보낸 죄명은 다름 아닌 탈세였다. 영화에서 네스와 사법기관이 알 카포네를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비밀장부를 정리한 회계사와 장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10월 26일에 있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와 박원순 범야권단일후보는 지난 10일 밤 SBS방송의 ‘나경원 VS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토론’에 출연해 서울시 부채 규모를 놓고 때 아닌 ‘부기논쟁’을 벌였는데 나 후보와 박 후보가 서울시 부채 규모를 놓고 각각 단식부기와 복식부기에 의한 회계처리기준을 제시하며 상이한 수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 부채가 25조 5000억 원에 이른다”며 “오세훈 前 시장의 전시성·낭비성 예산”에 대해 비판하자 나경원 후보는 “25조는 복식부기에 의한 것이고 단식부기에 따르면 19조 가량 된다”고 이에 맞섰다. 서울시의 부채 문제는 워낙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간의 설전은 토론 종반까지 이어졌는데 박원순 후보는 “나 후보가 부채계산 방식을 단식부기로 하는데 복식부기로 할 경우와 6조 차이”라며 “정부와 공기업·공공기관에는 다 복식부기로 쓰고 있는데 (서울시만)단식부기를 쓰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나 후보는 “정부회계 기준은 단식부기”라며 “잘 모르시나 본데 서울시는 단식부기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맞서며 말끝마다 국민의 혈세 운운하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과연 아직까지도 일반 가정에서나 쓰는 가계부 같은 단식부기를 쓰고 있다는 것인지, 복식부기를 쓴다면 는 어떤 이점이 있으며 이것이 부채를 줄이는데 과연 도움이 될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인류의 경제활동과 함께 시작된 부기의 역사
부기(簿記)란 장부기입(帳簿記入)의 약자로 정부·가계·기업과 같은 경제주체에서 경영활동을 통해 발생되는 재산의 증감과 자본의 증감(손익의 발생)을 계정이라는 계산형식을 이용해 화폐가치에 의해 계속적으로 기록, 계산, 정리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명백히 하는 방법을 말한다. 나일강 삼각주를 통해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했던 이집트, 수메르 문명은 물론 아시리아, 중국, 그리스,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부기의 역사는 인류가 고대국가를 형성한 이래 세입을 통해 국가재정을 충당했던 모든 문명권에서 조세징수나 간단한 거래에 관한 기록들이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 경제활동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특히 부기는 경제활동 가운데에서 상업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데 해양민족으로 지중해 상권을 장악했던 고대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도 상업 활동과 거래에 대한 보고를 위해 기록을 남겼고, 노예가 재산을 관리·운영하던 로마에서는 노예들이 주인에게 보고하기 위해 부기가 발달했다. 아직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이었던 고대와 중세시대의 부기는 단순히 거래 당사자 간의 분쟁의 소지가 있는 채권·채무 관계의 기록, 재산을 관리하고 보전하기 위한 단순한 형태의 단식부기가 일반적이었고, 손익을 계산해 이를 분배하는 데까지는 발달하지 못했었다.


르네상스 회계의 거장 루카 파치올리와 대항해시대
인류의 문명은 특정분야만 갑자기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전반이 고르게 발달하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해 그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거장들이 탄생하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서구문명의 문예부흥이라고 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예술계의 거장들만을 기억하지만 이들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 가운데 오늘날 전 세계가 사용하는 복식부기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재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만 놓고 보자면 일반 대중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루카 파치올리가 끼친 영향이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이자 저명한 수학자였던 파치올리는 1494년 『산술집성(Sa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cioni e Preporrcionalita)』이란 저서를 통해 베니스에서 사용하고 있는 회계시스템이 장점이 많기 때문에 소개한다며 당시 베니스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오던 복식부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파치올리를 통해 정리되고 체계화된 복식부기의 구조는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거의 변함없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특히 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나라 인도에서 탄생한 복식부기는 바그다드의 상인들을 거쳐 이탈리아의 제노바로 들어왔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이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교분이 있었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


그는 공놀이에서 승리할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게임이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나중에 확률과 연결되어 존 내쉬 같은 경제학자에 의해 더욱 발전된다. 루카 파치올리는 그의 저서 『산술집성』에서 당대의 수학적 지식을 집대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상인들과 학자들이 지켜야 할 복식부기 규정을 정리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복식부기 보편화’는 ‘자본주의 탄생의 순간’으로 꼽힌다. 역사 서술에 있어 ‘만약에’라는 말은 없다지만 파치올리의 복식부기가 없었다면 서구의 신대륙 발견과 그로부터 시작된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은의 유입과 이를 토대로 한 서양의 발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파치올리의 복식부기가 없었더라면 ‘대항해시대’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렇다.


잘 알려진 대로 대항해시대의 개막은 애초부터 서구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이슬람세력에 의해 가로막힌 인도와의 향료 무역을 위해 신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탐험을 빙자로 한 사기가 워낙 극성이었기 때문에 돈을 떼일까 염려하던 투자자들에게 콜럼버스는 자신은 탐험에 사용될 비용을 복식부기를 통해 정리할 것이기 때문에 자금의 사용내역을 속일 수 없다고 설득해 경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림>야코포 데 바르바리의 ‘루카 파치올리의 초상’(1495년),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 미술관 소장.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부기로 알려진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복식부기를 통한 회계의 투명성이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1997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G7회담에서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고어가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 민족은 서양에서 복식부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13~14세기 보다 약 200여년 정도 앞선 고려시대 때부터 우리만의 방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부기법로 알려진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을 사용해 왔다.


KBS <역사스페셜>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다뤄지기도 했는데, 사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고증 가능한 기록이 많지 않아 명확히 어느 것이 옳다고 답하긴 어렵다고 한다. 회계학계의 원로학자인 조익순 교수는 사개송도치부법이 외국에선 전래된 것이기 보다는 우리 고유의 복식부기법으로 조선시대에 생성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는데, 조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사개송도치부법의 ‘사개’는 우리 고유의 말인 ‘사개를 물리다’에서 온 표현으로, 그 뜻은 ‘박거나 잇는 나무가 서로 꼭 물리도록 하기 위하여 나무의 끝을 들쭉날쭉 어긋나게 파낸 짜임새’를 말한다. 따라서 ‘사개’는 말이나 사리의 앞뒤 관계가 빈틈없이 딱 들어맞는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사개송도치부법의 셈법 역시 이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고유의 복식부기법인 사개송도치부법이 어느 시대에 출현했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처럼 명확치는 않지만 사개송도치부법은 갑오개혁 이후 우리나라에서 은행이 설립되고 회사가 만들어진 뒤에 꾸준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897년에 설립된 조선은행과 한성은행, 1899년에 설립된 대한천일은행 등은 모두가 우리의 전통 부기인 사개송도치부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1903년 한성은행이, 1905년 대한천일은행 등이 서양식 부기를 도입하면서, 우리 전통부기는 점차 실무 현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어쨌든 개성상인들이 사용했던 ‘사개송도치부법’은 복식주기의 이중성에 자본주의 관계까지 명확하게 나타냄으로써 서양부기보다 훨씬 우수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단식부기냐? 복식부기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단식부기와 복식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단식부기는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기본적인 사항만으로 장부를 기입하는 단순한 장부 기입법으로 계정 없이 재산구성부분의 변동만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손익계산의 상세한 내용을 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규모 기업이나 손익산출의 필요성이 없는 관공서 등에서 주로 사용해왔는데 2009년 1월 1일부터 정부부문에서는 새롭게 발생주의·복식부기 회계제도를 도입해 사용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난 10일에 있었던 토론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가 “잘 모르시나 본데 서울시는 단식부기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던 것은 분명히 틀렸고, 사실이 아니다.


국가회계법 - 제11조(국가회계기준) ① 국가의 재정활동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거래 등을 발생 사실에 따라 복식부기 방식으로 회계처리하는 데에 필요한 기준(이하 "국가회계기준"이라 한다)은 기획재정부령으로 정한다.<개정 2008.12.31>


지방재정법 - 제53조(재무회계의 결산) ①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그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상태 및 운용결과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발생주의와 복식부기 회계원리를 기초로 하여 행정안전부장관이 정하는 회계기준에 따라 거래 사실과 경제적 실질을 반영하여 회계처리하고 재무보고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포탈사이트 네이버 지식IN에는 위 사항에 대해 2011년 2월 25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다음과 같이 답변한 내용이 있다.


o 도입배경
- 예산집행의 자율성 확대, 재정수요의 급증 등 재정여건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선진 재정운용체계 구축 필요
- 국가재정의 종합적·체계적 관리 및 효율적인 재정성과 관리를 위하여 발생주의· 복식부기 회계제도 도입을 추진


o 발생주의·복식부기 특징
- 발생주의는 경제적·재무적 자원의 변동이 발생하는 시점에서 거래로 인식하고 회계처리
- 복식부기는 경제적 거래나 사건이 발생할 때 자산·부채, 수익˙비용의 변동을 서로 연계시켜 동시에 기록·관리


o 도입효과
- 국가 재정의 상태와 운영성과 및 향후 재정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재정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생산· 제공할 수 있음
- 사업별 투입원가정보를 산출하여 성과 중심의 재정운영 체계를 통해 불필요한 사업을 통제할 수 있음
- 일정 시점에서 실질적인 채권·채무 산출이 가능하여 재정위험 및 재정 건전성 관리·유지가 실질적으로 가능


정부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의 답변을 풀어보면 단식부기와 복식부기의 장단점, 그리고 정부가 어째서 복식부기를 도입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관공서와 지방정부 등에서 사용해온 단식부기는 일정한 원리, 원칙 없이 현금의 유입과 유출이 있을 때마다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고, 복식부기는 재산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거래를 파악함으로써 재산이 변화한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를 동시에 기록한다는 차이가 있다.


단식부기의 대표적 사례인 가계부엔 일반적으로 일자, 적요, 지출이나 수입금액, 계, 잔액 같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돈이 나가면 무조건 지출, 돈이 들어오면 수입으로 처리해서 가계부의 잔액과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맞추도록 되어 있는데 이 방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단순해서 현금의 수입, 지출과 현금잔액 정도뿐이다. 단식부기는 채권, 채무, 재산, 물품관리가 복식부기방법에 의한 것처럼 하나의 표로 연계 집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재정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사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제도로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지방정부나 관공서가 단식부기 같이 주먹구구 방식으로는 채무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복식부기에서는 현금의 지출과 함께 지출원인이 즉, 재산변동의 원인과 결과가 모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복식부기는 거래형태를 표현하는 계정과목을 설정하도록 되어 있는데 모든 거래는 자산, 부채, 자본, 수익, 비용이라는 5개의 계정과목을 이용하여 차변과 대변에 기입하고, 이렇게 해서 기록된 계정과목별 차·대변거래를 집계함으로써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가 작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말도 어렵다면 한 마디로 말해 복식부기제도는 오랜 세월을 거쳐 인정된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회계관리수단으로 지난 15세기에 출현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식부기가 불변토록 사용되어 온 까닭은 복식부기가 지닌 ‘자기검증기능’ 때문이다.


복식이냐, 단식이냐는 핵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국가회계에 복식부기가 도입된 까닭은 IMF 외한위기라는 초유의 경제난을 맞이하며 출범한 국민의 정부가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경제문제의 해결차원에서 민간기업 부문에서는 경영의 투명성과 경쟁력 강화를, 국가재정관리 부문에서는 부정부패와 비능률의 추방을 위해 복식부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다. 사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복식부기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부기가 쉽게 정착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복식부기에 대한 담당 공무원들의 인식 부족 때문이었다. 복식부기 도입을 꺼려한 정부 내 공무원들의 논리는 ‘정부부문은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과 달라서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가 필요 없으며, 정부와 자치단체의 회계실무진에 복식부기 전문가가 없기에 이들을 재교육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서 도입의 실익이 적다’는 이유로 그동안 거부해오던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당시 정부의 판단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복식부기 도입 당시의 효과에 대해서는 앞서의 답변에도 나와 있지만 “국가재정에 관한 업무를 능률적으로 수행하고,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었다던 독일 바이마르헌법이 히틀러의 출현을 제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복식부기를 도입한다고 해서 저절로 국가재정에 관한 업무들이 능률적으로 수행되고, 재정의 투명성이 확보되는 것 또한 아니란 것이다. 복식부기는 회계정보를 산출하는 하나의 방법, 즉 수단에 불과할 뿐이지 이것이 곧 회계나 회계정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복식부기를 도입한 까닭은 정부회계에서 사용하는 단식부기로는 제대로 된 회계정보가 나올 수 없고, 회계투명성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개선하자는 것이지 단순히 복식부기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이런 목적들이 저절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사실 서울시 부채 문제가 논란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2010년 서울시의회 김정태 의원은 시정 질의에 앞서 보도자료를 내고 “작년 말 현재 서울시와 투자기관 부채 규모는 서울시가 발표한 19조5천333억 원이 아닌 25조754억 원”이라며 서울시가 5조5천421억 원을 의도적으로 축소·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서울시는 해명자료를 배포하면서 “우리는 단식부기 방식으로 산정한 부채 규모를 발표했고, 김 의원이 인용한 것은 복식부기 방식으로 작성한 재무보고서여서 다른 숫자가 나온 것”이라며 반박했다. 서울시는 “단식부기는 채무 불이행이 재정 위험으로 이어지는 외부 차입금만을 부채로 계상하는데 비해 복식부기는 임대보증금과 퇴직급여 충당금 등 재정위험이 없는 비차입금이 포함된 더 넓은 개념”이라고 설명했고 “단식부기에 의한 부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재무위험 관리에서 실효성이 크다”며 “지방재정법 시행령 제108조에서도 채무관리 범위를 지방채 등 외부차입금만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행정안전부 관계자 역시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위험을 따질 때는 직접적 지급과 관련된 개념인 단식부기상 채무를 기준으로 하는 게 적합하다”며 서울시의 편을 들어줬다.


그렇다면 지방재정법 시행령 제108조를 보자.


제108조(채무관리사무의 범위) 법 제87조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관리하여야 할 지방자치단체의 채무의 범위는 다음 각 호와 같다.
1. 지방채증권
2. 차입금
3. 채무부담행위
4. 보증채무부담행위


시행령 제108조는 지방재정법 제87조에서 정한 방법으로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해야 할 채무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복식부기로 만들어진 회계상 서울시 부채는 25조원이 맞지만 서울시가 시행령에 따라 관리해야 할 채무는 19조원이 맞는 셈이다(법률 용어에 따르면 서울시 부채는 24조 9,943억 원이고, 서울시의 채무는 19조 5,318억 원). 문제는 서울시가 시행령에 따라 관리하는 채무의 범위가 이것일 뿐이지 이것이 단식부기에 의한 건 아니란 말이다.


서울시는 처음부터 복식부기냐 단식부기냐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데, 서울시의 이 같은 답변은 마치 서울시가 단식부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하도록 나경원 후보를 부추긴 셈이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식부기는 다만 현금의 수입과 지출, 그리고 현재 잔고가 얼마인지 정도의 정보만을 제공해주는 것일 뿐 부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인데 서울시는 어째서 이런 이상한 변명을 들고 나왔을까? 그리고 이를 받아서 보도한 언론사들은 단순히 행정안전부 관계자의 법률 해석만을 놓고 누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식으로만 보도해 버린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다.


처음 저 사단이 일어났을 때 언론사들은 자신들이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냐와 상관없이 이런 맥을 정확히 짚어 보도했더라면 나경원·박원순의 복식부기 논쟁 같이 우스꽝스럽고 본질에서 벗어난 논쟁은 애초에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경원 후보는 법률가(판사) 출신이긴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서울시장직을 수행하겠다고 나선 후보로서 지금 시민이 원하는 서울 시장은 법률적 해석을 내리는 법률가가 아니라 시장으로서 서울시의 건전한 재정 운영을 통해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그 사이 언론이 정신을 차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이 문제의 정확한 맥을 정확히 짚어준 것은 언론이 아니라 도리어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 네티즌들이었다.


진짜 문제는 단식부기냐, 복식부기냐가 아닌 우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의 재정상황을 아직도 낙관적으로 인식하는 공무원들과 정부, 집권여당의 태도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격동의 서양 20세기사 -
박무성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2년


세기말이었던 지난 2000년 무렵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내나름으로 지난 20세기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혹은 세계를 움직인 10대 사건을 정리해보기로 결심했었다. 생각외로 이런 궁리는 재미있다. 오늘 하루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재미있었던 혹은 재미와 상관없이 기억할만한 일 3가지를 정리해보는 일, 한달 동안, 아니면 1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10대 사건을 언론사에서 정리하는 것처럼 혼자 해보라. 그렇게 해서 막상 정리된 사건들을 보면 정말 이 한 해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저 일이 올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내가 궁리 끝에 정리해낸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대 사건"은 다음과 같았다.

1.유럽중심의 세계통합과 그 유산들
2.제1차 세계대전과 유럽 제국주의의 몰락(새로운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등장)
3.사회주의 혁명과 전체주의의 등장
4. 대량생산·소비 사회의 도래와 경제 대공황
5. 제2차 세계대전과 핵시대의 도래
6. 팍스 아메리카나와 유럽의 재건
7. 제3세계와 청년운동
8. 환경파괴와 여성해방운동
9.대중사회의 도래와 정보기술혁명
10. 현실사회주의 몰락과 세계화
 
한 세기를 움직인 사건을 정리해보니 소위 '역사의 맥락' 이 잡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를 다시 주제별로 분류하고, 이와 관련해 읽어볼만한 책 10권씩을 선정하고, 이것을 스터디한 뒤에 내나름의 생각을 원고지 100매 내외로 정리해보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었다. 물론 2001년이 시작되기 전에 이 모든 것(내가 나에게 내어준 숙제)을 마무리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란 분루를 삼키며 물러났었다.

박무성 단국대 명예교수의 이 책 "격동의 서양 20세기사"는 그런 점에서 나에게 중요한 참고서적 중 하나였다.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서 역사가의 몫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는 역사학계의 오랜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역사서를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에세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많이 녹인 책을 읽을 것인지, 아니면 랑케식으로 실증에 치중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관계를 추적한 책을 읽을 것인지... 그렇다면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방식일지, 어느 것이 보다 유익할지, 어느 것이 보다 재미있을 것인지는 고민해볼 만하다.

내 체험에 의거해 이야기해보자면 둘 다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예를 들어 부부 혹은 애인 사이에 다툼이 있는데, 나는 이들 양자와 친분이 있다고 하자. 이쪽의 이야기와 저쪽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어보면 다들 나름의 입장이 있기 마련이다. 이유없는 무덤 없다는 격언이 증명하듯 모든 행위에는 그 이면에 도사린 원인이 있다. 이럴 경우 어느 일방의 이야기만 듣노라면 입체적인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만약 영국이 도발한 어느 전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영국 이야기만 듣는 것으로는 부족하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미국인들이 저술한 미국의 범죄 혹은 파렴치한 역사 이야기를 미국인 저널리스트들의 기술로 읽는 것은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기 마련이다. 이런 한계를 보정하기 위해서는 굳이 국적에 의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관점을 알기 위해서라도 여러 종의 책을 읽는 것은 필요한 일이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박무성 교수의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유익하고,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20세기는 분명 1901년에 시작해서 2000년에 종료되었지만, 역사적으로 20세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놓고는 아직도 많은 이견들이 있다. 어떤 이는 대영제국의 마감을 알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 이후를, 어떤 이는 그로부터 훨씬 뒤인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이는 역사를 기술하는 이의 관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박무성 교수는 이 책의 시발점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놓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은연중에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할 20세기의 역사는 서양을 중심으로 한 정치학적인 접근이 될 것이며, 현실 정치가 서로의 세력 균형을 어떻게 잡아가는가? 균형의 파괴가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를 중심으로 기술할 예정이란 뜻이 된다.

그것은 전체 29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소제목들만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인류사를 격변시킨 제1차 세계대전, 유익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과 붕괴, 비운의 바이마르 공화국,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중략)... 동유럽의 자유화운동과 공산체제의 붕괴, 독일의 통일과 그후, 북유럽 및 남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세기말엽 영국의 변혁, 1990년대의 미국, 유럽의 변혁, 20세기의 서양문화, 서양 20세기사의 장을 닫으며"
서양의 20세기를 문화적인 관점에서 다룬 부분은 실질적으로는 맨마지막에 해당하는 28장에 배치해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서양의 문화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로 접근하는 이에겐 그다지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은 그런 부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야를 한정시킨 덕에 이 책은 몇 가지 장점을 지닌다. 우선 지리학적으로 그 대상을 서양(미국과 유럽)으로 국한시켰다는 점, 주로 다룰 분야를 정치적인 부분으로 한정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 책에서는 그간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웠거나 정리하기 어려웠던 가까운 근과거의 유럽과 미국을 발견할 수 있고, 미국과 유럽이 주고 받는 체스게임의 관전자로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 29장을 다시 구분해보면 1장부터 9장에 이르는 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몰락과정을 추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실제로는 동일한 목적과 원인으로 시작된 하나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일한 목적이란 유럽의 통합 - 물론 그 안에는 기존(식민지 시장을 이미 확보한) 공업국가인 영국과 프랑스, 신흥 공업국가인 독일의 대립이라는 경제적 요인들,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미국을 견제하며 세계적 패권국가로서 유럽을 지속시킬 - 필요성을 느낀 유럽 제국들이 힘의 균형이 아닌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이란 것이고, 원인이란 이런 요인들이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서로 그것을 주도 혹은 견제하고자 했던 것을 말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균형과 견제를, 독일은 통합을 주장한 셈인데, 여기에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 세력의 통일 역시 중요한 몫을 한다.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구원의 희망을 찾고자 했던 부분도 여기에 있다.

제10장부터 제19장까지는 크게 보아 서구의 냉전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시작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 아니라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이후 시작되어 1991년 8월 19일 소련의 보수강경파에 의한 군부 쿠데타 실패로 끝난다. 이 시기에 서유럽 일부 지역을 제외한 세계 각처에서는 전쟁, 무력분쟁, 군부 쿠데타, 민간인 학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으나 궁극적으로는 전쟁 상황일 수밖에 없는 충돌이 지속되었고, 나는 이것을 명칭은 어찌되었든 또 하나의 세계대전으로 보고 있다. 제20장부터 제27장까지는 소련의 해체 이후 미.소의 양극체제에서 미국에 의한 일극체제로 변모해가는 과정과 동서냉전 시기의 막바지에 유럽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앞서 말한 이 책의 장점은 20세기사에 대한 기술이 주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치중된 나머지 소홀해지기 쉬운 유럽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제11장 '영국의 변혁' 편에서 우리는 노동당과 보수당의 양당 체제가 확립된 영국과 대영제국의 붕괴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제12장 '프랑스의 변혁' 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자에서 나치 제3제국의 협력국, 그리고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 극적인 변환을 거친 프랑스가 어떻게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 드골이즘의 '위대한 프랑스'가 되어가는가를 볼 수 있으며, 제13장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대변혁'에서는 세계대전의 패자였던 이들 나라들이 마셜 플랜과 미국의 후원으로 소위 자유진영의 일원이 되는가를 살필 수 있다. 이외에도 제21장 '동유럽의 자유화운동과 공산체제의 붕괴', 제22장 '독일의 통일과 그후', 제23장 '북유럽 및 남유럽국가들의 민주화' 등은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나라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해둘 필요성을 느끼는 부분은 우리가 서양이라 하면 쉽게 느끼게 되는 지리적 인상과 상관없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에서 '라틴아메리카'는 완전히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20세기 서양정치사를 통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20세기 서양정치사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하게 다루는 중요한 텍스트 구실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가까운 근과거를 다루기엔 여러가지 문제를 지닌다. 과거의 여러 사건들 가운데 당시로서는 하찮은 사건에 불과한 것이 결과적으로 중대한 사건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생기기도 하고, 당대에는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후세의 평가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역사는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란 역사학의 중요한 화두를 다시 끄집어낸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다소간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관점이란 측면에서 서구와 비교해 동구 진영에 대해서는 보다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는 점은 그에 대해 다소 동정적인 입장을 지닌 독자의 입장에서는 보다 객관적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하나의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을 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트루먼 독트린 이후 소련의 붕괴 사이에 있었던 냉전을 다른 의미에서 세계대전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제3차 세계대전은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할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제3차 세계대전은 지난 2001년 9월 11일 이미 시작되었다. 물리적 시간으로의 21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세계 인류는 이제야말로 인류가 번영과 평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20세기 인류가 남긴 죄악의 유산들은 여전히 인류가 짊어질 형벌로 남았다.

* 참고로 한 말씀 드리자면 2000년 현재 프랑스의 국방비 총예산은 343억불이다. 미국은 프랑스의 국방비 총예산보다 많은 금액을 단지 무기개발연구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국방비 총예산을 합친 금액은 미국의 국방비 총예산인 2,947억불 보다 적다. 여기에 더 추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자주국방의 상징처럼 숭앙해 마지 않는 이스라엘이 한해 사용하는 국방비는 94억불이고, 우리가 사용하는 국방비는 128억불이다. 물론 국민 1인당으로는 우리가 더 적다. 전세계 국방비의 1%를 감축할 수 있고, 그 비용을 기아구제로 돌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굶주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난제 -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재구성하는 일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어렵다.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어느 신문 기자던가, 평론가가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썼다가 인터넷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스포일러를 유포했다고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인지, 평론가인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 덕분에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大聖) 공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데, 뉘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서이든, 원작을 통해서이든 누구나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는 보배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널리 전파된 이야기란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로 장르 전이(轉移)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바꾸긴 매우 어렵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익숙한 이야기 스타일이 대중에게 이미 숱하게 검증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릴러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던 신예감독 브라이언 싱어였지만, 이후 <엑스맨> 1편과 2편, 그리고 <수퍼맨 리턴즈>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제2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꿔왔던 브라이언 싱어로서는 선배가 <쉰들러 리스트>로 보여 주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진해서 영화 <발키리>의 감독을 맡았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매력적인 인물과 유난히 끌리는 사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깊이 매료되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에 저항했던 숄 남매의 <백장미단>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과 거의 동시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했다.


결과를 빤히 아는 역사영화(EPIC)를 보는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생전에 모두 42차례의 암살 기도(『독재자들』, 교양인, 2009)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아마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으리라 싶은데,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현대문학, 2008)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6차례의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늑대 무리는 조직적으로 사냥감을 공격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냥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국가조직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암살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수단 중 하나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를 비롯해서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이라는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은 성공유무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런 사건들이 수많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누군가 한 개인의 죽음이 시대의 향배를 어긋나게 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까닭 역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당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위인(偉人)인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大衆)인지는 역사학의 오래된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어찌되었든 역사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인류의 생애사 속에 포함되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란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과연 나폴레옹이 불면증과 위장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역사 속 작은 국면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되짚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 한국의 역사에 대입시켜봄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의 문제와 한계 등을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영화 <발키리>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했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극적인 요소가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슈타우펜베르크 vs. 김재규

정치적 수장을 제거하는 암살의 상당 부분은 브루투스와 케사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측근에 의해 실행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삼엄한 경호를 받기 때문에 암살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암살의 성공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암살이 암살만으로 정치적 의도까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면 한 개인에 불과한 정치인의 암살을 통해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던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의도는 로마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겨냥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김재규의 의도와 달리 그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는 없었다. 현대적인 국가조직은 ‘관료제’라는 단단한 배후조직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영화 <발키리>에서 암살 음모의 주동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논의에 답답해했던 이유는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비록 규모나 역사적 의의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와 김재규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이 두 사람을 닮은꼴이라 비교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하게 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출발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 분단, 부정부패, 경제난 등으로 최악의 위기 속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이후 형식상으로는 민주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최대 업적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3선 개헌에 성공한 뒤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뒤이어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저항 속에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에 살해당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제정을 대신해 출범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무능과 볼셰비즘의 발흥에 위기를 느낀 독일의 일부 민족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과 결합해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을 독일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킨다.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과 독일제국의회 방화사건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비견할 만한 ‘비상대권’을 차지하고 독일 내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유신체제가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만으로 처벌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차지한 독일 역시 나치 체제와 총통에 대한 어떤 비방, 비판도 처벌의 대상이었다.


서민적 독재자와 귀족적 민주주의자

내가 아는 한 독일 역사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한 빌헬름 제정을 물러나게 한 키일 군항의 반란은 있었지만 그것은 쿠데타라기보다는 혁명이었다. 어떤 이는 독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을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독일에선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일컬어 ‘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독일은 국가구조 속에 군대의 전통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군부가 민간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고려 무신정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 군대를 통해 습득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통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이다. 민주공화정의 주인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동안에도 대통령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풍경을 즐겨 연출한다.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최고통치자들의 실생활이 서민적이지는 않지만 서민적이라는 인상을 줄수록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윤보선이나 장면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두 사람과 달리 서민적인 풍모와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최고통치자였던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지배엘리트들과 달리 매우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 헤밍 폰 트레스코프(Henning von Tresckow) 대령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물론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계급 출신이었다. 하사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귀족계급이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무리로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가 에르빈 롬멜을 총애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전 라이프치히 시장)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까닭에 대해 영화 <발키리>는 유대인학살 등 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내 자본가들과 중산층,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식 교육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청교도적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계급적 뿌리와 이반된 사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접한 귀족적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의 통치로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했던 대다수 독일 서민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쿠데타로 나치지배가 종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이자 가장 꺼리는 질문은 “만약에~”란 것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건을 찾아내 인과관계와 그 의미를 찾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거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발키리>로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 <발키리>는 역사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역사 영화들이 지닌 문제점의 상당수는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키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다(물론 다큐멘터리도 허구이며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나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저항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이런 의도는 톰 크루즈라는 대중적인 스타에 의해 충분히 담보되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발키리>의 장점은 이처럼 진지하다는 데 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왜 진지해져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역사 속의 사건이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관객 모두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히틀러 암살이란 대의에 목숨을 거는 요 인물들의 당위적 결의는 영화 내부에 있지 않고, 관객들의 영화 외부에서 배운 역사에서 나온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영화 서두에 이미 히틀러의 제거를 결심한 사람이었고, 베를린의 히틀러 암살 음모 세력 역시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보고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한 등장인물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발키리>자체가 지닌 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해버리면 역사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 관객들이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던지게 될 핵심적인 질문이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그 질문은 ‘만약 히틀러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그의 동지들이 계획했던 대로 암살당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였을 것이다. 역사는 정말 달라졌을까?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1944년 6월 6일로부터 44일이 경과한 1944년 7월 20일의 일이었고,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것은 발키리작전으로부터 10개월쯤 뒤인 1945년 5월 8일의 일이었다. 과연 한 명의 정치지도자가 암살당하고, 쿠데타로 나치 정권은 전복될 수 있었을까? 그 결과 독일은 연합국, 소련 등과 휴전을 맺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영화 <발키리>를 통해 역사 앞에 무수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에 종지부를 찍기는 했으나 뒤이어 12.12쿠데타와 5.18광주학살을 불러들인 것처럼 히틀러의 암살이 역사의 냉정한 잔혹성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와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와 같은 질문은 그저 영화를 재미있게 보면 그뿐인 관객의 입장에서 호사스러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제가 있는 법이다. 설령, 그것이 역사의 잔인한 수레바퀴 앞에서 실패라 불리게 될지라도 목숨을 걸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도 있는 법이다.



영화 <발키리>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던 아브라함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비록 실패로 끝났고,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이 있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휩싸인 독일이 역사 앞에서 그래도 우리 속에 이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1980년 5월 광주의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도청으로 진격해오던 날 밤을 어떤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살았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날 죽고자 마음 먹은 시민들의 피를 통해 산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사이기도 했다. 나는 역사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거나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천하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는 법(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고 생각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나치 시대의 일상사 -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국가규모의 범죄집단은 폭력과 공포만으로 지배하는가?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스펙터"와 같이 국가적 규모를 갖춘 범죄집단은 과연 가능할까? 어떤 만화나 영화들을 보면서 가끔 설명이 불충분하더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도 나는 심각하게 궁리할 때가 있다. 앞서 말한 스펙터같이 국가와 경쟁할 수 있는 범죄집단의 가능성이 그렇고, 영화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유인원 인류가 사용하는 자동소총(혹은 반자동소총)이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문명 수준에서 개발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들이 그렇다(세계 최초의 반자동소총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M1소총이었다).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원숭이들의 문명 수준이 당시 미국의 문명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이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총 한 자루 만드는 것에도 그에 합당한 기술 수준이란 것이 있으니까. 007 시리즈뿐만 아니라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 폭력집단(유사국가 혹은 국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이 단순히 폭력과 억압을 이용한 공포만으로 국가라는 조직과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소규모 폭력조직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국가 단위의 폭력구조를 유지하는 일은 구태여 그람시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폭력과 공포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역사란 "과거의 의미있는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간 의미없음으로 치부되어 왔던 일상의 역사적 진실을 들춘다. 저자는 독일 나치 시대를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여 나치의 인종주의와 같은 중세적 야만성이 선진사회에서 돌출할 수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론삼아 저자의 주장을 미리 말하자면, 이것은 결코 돌출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성, 선진 사회가 내세우는 '진보' 안에 내재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Detlev Peukert)는 독일의 역사가로 '나치 시대 공산당의 저항운동' 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그가 81년에 저작한 것으로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선구적으로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포이케르트의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며, 부제로 되어 있는 세 가지 "순응, 저항, 인종주의"란 맥락 가운데 좌파의 역할은 "저항"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제3공화국의 기억과 제3제국의 기억

평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유럽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들이 존재했던 독일에서 어떻게 나치즘과 같은 극우파 정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책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그런 의문이 모두 해갈된 것은 아니나 상당 부분 도움을 얻게 되었다. 포이케르트는 우선 "순응"이란 측면에서 나치즘이 폭력적인 권력 탈취 방식을 일부(?)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내 중산층과 부르주아지들이 이에 순응했기 때문으로 규정한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저자의 지적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뼈아픈 일침이 된다.


제3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당시 유행하던 사형 혹은 가스실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특수한 형태의 테러, 즉 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데 테러 방식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도둑맞지 않았다는 판에 박힌 좋은 기억이 "절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집시들이 수용소에 수감된 것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303-304쪽 중에서>


질서를 위한 폭력을 권장하는 세력들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제3공화국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독일 제3제국 히틀러에 대한 독일 노인들의 향수는 어딘지 모르게 일탈 행위를 그나마 용납해주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이런 판에 박힌 기억은 과거 독재 시대를 미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전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극우파들과 일부 교회의 목사들이 성조기를 나부끼며 벌였던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개신교 총감독 디벨리우스가 "포츠담의 날"에 행한 설교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가사의 새로운 장은 언제나 폭력과 더불어 열립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결정, 새로운 지향, 변화, 전복은 언제나 한 편에 대한 다른 한 편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경우, 국가 권력은 안을 향해서든 밖을 향해서든 강력하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 국가가 국가질서를 파괴하는 자들, 특히 더럽고 비열한 언어로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신앙을 경멸하는 자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목숨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 질서가 수립되면 다시 정의와 사랑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날 광화문에서 있었다는 쿠데타 선동 발언에 버금가는 말이다. 독일 개신교 세력이 모두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배경에는 독일 개신교 세력의 은근한, 때로는 적극적인 지지가 작동한다. 그들은 좌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리어 나치즘을 선동하고 나섰다. 1933년 초 몇달 동안 독일 내 좌파들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억압 상황에서 독일의 일반 국민들은 이것을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좌파에 대한 공포로 반공에 대한 공포를 잠시 잊은 결과 독일 국민은 최악의 전쟁을, 최악의 패배를, 최악의 생존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제3제국의 신화

오늘날까지 독일 제3제국의 신화는 여전하다. 인터넷상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나치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들이 보여준 절도와 형식에 깊이 매료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전쟁 발발 이전의 나치 시대는 부흥과 복지의 시대로 미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대공황과 전쟁동안, 전후(제1차 세계대전)의 질식할 듯한 궁핍과의 비교를 통한 것일 뿐이다. 실제 나치가 집권한 뒤인 1930년대의 경제 분위기도 낙관적이진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경제의 호전 기미만으로 이를 반가워했고, 이를 곧바로 경제호황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연계시켰지만, 여전히 생필품은 치명적으로 부족했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처해있다. 국가차원에서 보았을 때 경제는 여전히 나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수경제가 살아나지 않아 실질경제는 불황 속에 처해 있는 현실은 전적으로 언론의 탓이라 할 수는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언론의 부풀리기가 경제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히틀러가 실업문제를 조속히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 제3제국의 현실이 아니라 나치의 선전이란 측면에서만 그러했다. 현실에서 수치와 통계로 드러난 실업자 감소 추세는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5.16직후 군사정부가, 1978년 오일쇼크 이후 급증한 실업자 문제를 제5공화국이 해결한 방식은 이미 1930년대 독일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임금만을 받고 노동봉사대와 긴급노동대로 결성되어 체제 위신용 건물 건설에 동원되었다. 실업자 수치 자체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실질적인 실업자 감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 독일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36년 무렵 전시 경제에 접어들어 군수산업이 폭발적인 호황을 누린 뒤부터이다.


다른 하나의 신화는 독일 (나치)관료 집단이 청렴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실이다. 공직과 권위를 충분히 획득한 그들은 관료로서 권력과 직위, 특권을 마음대로 전용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과거 비판해 마지 않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공무원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니 더욱 부패해 있었다. 그럼에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인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그가 최초의 권력기반으로 삼았던 돌격대를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해체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초기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에른스트 룀과 그의 사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돌격대는 나치의 중요한 권력기반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해 더이상 사병집단이 필요없어진 히틀러에게 그들은 골칫거리이자 장차 그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비춰졌다.


히틀러는 재빨리 룀을 제거함으로써 권력기반을 공고히하는 결과를 나았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묘하게도 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일로 비춰지기 보다는 독일의 골칫거리가 된 자신의 신뢰하는 수하들인 돌격대를 국민들을 위해 제거한 것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알기만 한다면 이를 악물고 부패한 자신의 수족을 잘라낼 만큼 결단력있고, 공정한 총통으로 비춰졌고, 실제로 그렇게 선전되었다. 독일 국민들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그 순간까지도 독일 국민들의 총통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승만이 모든 실정의 근간이자, 부패의 근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이 이기붕과 자유당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는 나치당의 모든 부패와 실정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었다. 과연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상관없이 집권당만 실책을 거듭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도 물어보아야 한다.


새로운 고전의 기미를 엿볼 수 있었던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단 생각이 들고, 이미 어느 정도는 고전의 지위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이 책의 단점이랄까, 아쉬움이 남아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독일 내 좌파들의 맥없는 몰락에 대해 저자의 "일상사"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독일 내부의 문제만으로 독일 좌파의 몰락이 빚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이 저자의 주된 연구 분야이므로 저자의 다른 책을 보노라면 더 세세한 지적들이 있을 것이고, 이 책의 주제가 일상사이므로 국제사적인 맥락을 짚기는 어려웠겠으나 당시 독일내 좌파가 나치에 대한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실책(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 소련 고립정책을 타개할 방편으로, 나치 독일이 프랑스와 우선적으로 경쟁할 것이란 판단에서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을 금지시켰고, 독일 좌파는 사분오열되고 만다.), 영국과 프랑스의 오판 등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쉽다.


그러나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저자의 단명이다.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살아 있었다면 좋은 연구 업적들을 보다 많이 남겨주었을 것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독일은 전유럽을 석권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만 독일에 굴복한다면 유럽의 통합은 오늘날 EU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이룩될 뻔 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한 유럽의 역사에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곧 유럽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 나치즘에 경사되었던 까닭, 그것은 유럽이 하나의 강력한 문명권으로 재통합하여 다시 세상의 주도 문명(패권)을 이루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렇듯 유럽을 힘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여러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시도되지 않았던 역사 평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대결로서 더 의미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규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1940년 6월까지의 독일은 분명 문제가 많은 폭력적 국가이긴 했으나 특별히 인류의 적이라 규정당할 만큼 사악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나치즘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나 서구문명에서 한 인종에 대한 잔학한 멸종 정책의 원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치즘이나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문명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성취된 이후에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그들은 다른 인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부분은 게르만인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종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인디언 멸종에 이르는 과정,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애보리진 멸종에 이르는 과정과 비교하자면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말살정책은 오히려 덜 잔인한 측면이 있다. 최소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 대화는 했으니 말이다.

 

 

파시즘이 유럽에서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보다 더 정교하게 규명해볼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유럽 혹은 서구(미국을 포함한)에서 파시즘(나치즘)을 바라본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유럽문명을 수호할 하나의 중요한 정신 혁명으로 보거나, 전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공산주의보다는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까닭에 슈펭글러나 하이데거와 같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나치즘을 지지했고, 독일 이외의 국가들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유대인 혐오와 함께 히틀러를 격찬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헨리 포드뿐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대단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치즘과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 파트너로서 격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이 지배하는 독일을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능한 방패로 인식했고, 독일이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만한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과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지한 소련의 스탈린이 수 차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춰를 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 것을 요청했음에도 이들 국가들은 도리어 소련을 고립시켰다. 소련이 강력한 반공을 주장하는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파수견 입장보다는 좀더 쓸만하고 구미에 맞는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제2의 정복왕 윌리엄을 꿈꾼 히틀러

거기에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찌되었든 독일은 서부 유럽의 패자이자, 유럽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프랑스를 단번에 패퇴시키는 위용을 거두었고, 독일 공군(Luftwaffe)는 일찌기 찰스 린드버그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의 공군력은 전유럽 제국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우군 하나 없이(미국은 이 당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국이자, 공군국인 독일을 상대로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방공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나는 전투를 지휘하겠다. 그리고 만일 침공이 시작된다면 이 의자가 내가 앉을 자리이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격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내 시체를 끌어낼 때까지 나는 저 자리를 고수하겠다." 이 말은 당시 영국이 처해 있던 고립무원의 상황을 너무나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무렵 독일은 영국진공계획인 "강치(시라이온)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도버 일대의 벼랑 동쪽에 있는 램즈 게이트에서 와이트도 서쪽의 라임만까지 거리로 약 320km에 달하는 장대한 영국의 해안선에 25만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 정복에 나설 때 상륙한 바로 그곳이었다. 독일은 영국 점령 이후 체포할 유명인사들 - 영국수상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등 - 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논 상태이고, 독일공정부대원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버킹검궁 강하 직후 체포할 영국왕에게 건넬 인사말까지 준비시켰다. 모든 것은 치밀한 독일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폭이 40km에 불과한 도버해협이긴 했지만 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이 보장되어야 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는데는 필수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시작 - 제공권을 잡아라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공군들을 섬멸해야 했다. 히틀러에 이어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에게 이건 닭을 비트는 일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스페인 시민전쟁 때부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점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적의 전투 경험을 쌓은 강력한 공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1선에 배치된 항공기만 4,500대에 이르렀지만, 영국은 제2선급 항공기(여기에는 수송기, 중폭격기)까지 모두 긁어모아야 고작 2,900대 공군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 2:1의 약세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시민전쟁을 비롯한 수않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인데 비해 영국 공군 파일럿들은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들이었고, 그나마 파일럿의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모자라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을 공중에 모두 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도저히 영국은 독일의 거센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영국인들이 이런 비교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0년 6월에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협상을 권유한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고, 그로부터 독일의 가혹한 대공습을 견뎌내는 "불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Battle of Britain"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 말로 번역한 "영국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1940년 6월부터 시작해서 1941년 5월 10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공군대 공군 사이의 대혈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때를 다룬 영화이다.

 

 

자유를 수호한 영국의 찬가

미국에게 "지상최대의 작전"이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사수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찬가라면, 영국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공군대전략)"은 그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럽과 자유 진영을 사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그들만을 위한 찬가이다. 그런 까닭에 "지상최대의 작전"에서 미국과 할리우드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라면, "배틀 오브 브리튼"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제작한 영화이다. 감독은 "007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톤(Guy Hamilton)"이 맡았고(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자가 007시리즈의 제작자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영국 출신의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이 앞장서고 있다(이 영화의 서플먼트에 따르면 이 배우들은 모두 제각각 가장 적은 출연료라도 감수하면서라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고 한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트레버 하워드 (Trevor Howard), 커드 저진스 (Curd Jurgens), 해리 앤드류스(Harry Andrews), 이안 맥쉐인, 케네스 모어, 나이젤 패트릭,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 로버트 쇼, 패트릭 위마크, 수잔나 요크 등 모두 주연급으로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주인공은 영국 공군 대장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경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숨기고 출연해 "배틀 오브 브리튼"의 명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에 대해 여러 찬사들이 있으나, 이 영화 역시 "지상최대의 작전"처럼 수많은 유명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승리 요인들

이 영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어떻게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가를 살피고 있다. 그 요인들은 우선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한 휴 다우딩 장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략에 있었다. 다우딩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견하고, 처칠에게 더이상의 영국 공군을 도버 너머로 파병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 때 처칠은 프랑스 수상에게 더 많은 영국 공군의 파병을 약속해 논 상태였지만, 다우딩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영국은 더이상의 공군력 손실없이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우딩은 영국의 모든 공업력을 항공기, 그 중에서도 전투기 제작에 최우선을 두도록 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에 도시를 내어주면서까지 자국의 공군력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운영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다는 우위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 공군의 주력기인 Me-109는 먼거리를 비행해 영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최소 10분에서 최대 20분의 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는 짧은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 공군은 레이더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공군이 프랑스의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대기하였다가 그네들이 도착한 시점에 비로소 요격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늘 시간과 연료에 쫓기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이 보유하지 못한 신형 무기인 레이더 기술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으므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레이더 기술에 걸려 기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지상최대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실제 전쟁에서 쓰였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실제로 공중전을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기동전술, 편대 비행, 전투 기술을 보이면서 촬영된 영화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전투기(일부 모델)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실사 영화이다. 그렇게 고증에 철저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승리의 요인은 당시 영국군은 독일군의 군사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승리의 요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공군 파일럿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불굴의 정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칠은 "배틀 오브 브리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데이"는 그들이 세계를 구원한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1년 5월까지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만 127회였고, 이 때 영국 민간인 총 6만명이 사망했으며, 8만 7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공습과 폭탄을 독일에 떨어뜨려렸고, 무차별폭격을 가해 더욱 많은 독일의 도시들을 불태웠고,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그 이후 바뀌지 않는 민간인 학살 - 무차별폭격의 역사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승무원으로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폭격했던 지역을 여행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는 다만 한 개의 점으로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그가 떨어뜨린 폭탄이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떨어져 일반 시민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워드 진은 폭격 임무 참여할 당시 폭격기 날개 밑에서 터지는 고사포탄의 검은 색 구름을 제외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물론 적진을 비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자유에 대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항공전의 승리는 그 뒤에 치뤄질 무지바한 대량공습과 무차별폭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수행방식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제 전쟁은 더욱 가혹해졌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욱 가혹해졌는가? 그것은 전방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런 전쟁 수행 방식은 이후부터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수와 양을 능가했고, 베트남전은 다시 이를 경신한다.

 

 

* 이 DVD는 두 장의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본 영화를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두 번째 타이틀 역시 매우 재미있다. 하나는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생생한 증언, 영화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휴 다우딩 장군과 독일의 에이스이자 나폴레옹 이후 유럽 최연소 장군이었던 아돌프 갈란드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 김태희 옮김 | 교양인(2006)

 

예전에 나는 내 개인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person-goebbels.htm)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 파울 요제프 괴벨스, 닥터 괴벨스에 대한 제법 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책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 다루고 있듯 1,000여 쪽에 육박하는 분량은 아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나는 하나의 뿌리를 가진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전쟁이 1648년, 30년간 지속된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거하여 생겨난 유럽의 근대민족국가체제의 종말이자 혹은 지속적인 파국의 시원(始源)이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중사회의 도래 이후 대중과 정치, 대중과 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괴벨스를 다루게 되고, 그에 대해 글까지 썼던 이유 역시 그와 같다.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이제 정치가들은 좌우를 막론한 누구든 대중선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기존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대중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시대의 대세라고 파악하고 있는 동안, 파시스트들은 대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깨우치고, 이들을 동원하는 프로파간다 능력을 이용해, 그들이 선전선동에 있어 모범으로 삼았던 좌파를 능가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한 나치 세력 가운데 이 방면에 있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이가 바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디. 우리가 지난 독재정권 아래에서 했던 여러 정치적 경험들 역시 독일의 민중들이 겪었던 선동의 경험과 유사한 측면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과 제5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5공화국이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였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히틀러의 뮌헨 폭동이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합법적 정권 장악의 초석이 되었고, 12.12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박정희 식으로 곧바로 집권 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추는 절차는 거쳤다. 이후 나치가 독일 제국의회 건물 방화사건을 빌미로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5공 역시 5.17 확대계엄조치를 통해 5.18 광주 민중항쟁을 유도하고, 이 과정을 통해 공세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악명을 떨친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조처 등도 매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라디오 대량 보급과 컬러 TV보급, 프로 축구, 야구, 나치의 분서와 5공의 금서, 국민차 "폴크스바겐""티코", 베를린 올림픽과 서울올림픽, 유대인 탄압과 지역감정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독일 나치 정권의 정책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 혹은 대중 선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유럽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는 네오 나치즘과 파시즘적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 오랫동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내면화하도록 강요받아온 우리 사회의 근저를 흐르는 기류가 그만큼 심상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 사회가 국가주의화 되어가고 있다거나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시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내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 역시 앞서의 염려만큼이나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서양의 역사적 경험들을 단선적으로 우리에게 대입시켜 해법을 강구해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하고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고(어제까지는 산아제한을 관장하던 단체가 오늘은 출산을 독려하는 것처럼) 있으므로 모순 자체를 살피는 시각 자체도 복잡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자녀들인 헬가, 힐데가르르, 헬무트의 모습(1937)이다. 마그다는 괴벨스 못지 않은 히틀러 추종자로 자녀들 이름을 모두 히틀러의 'H'를 따서 지었고, 히틀러와 제3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치자 히틀러 없는 세상에서 살 필요가 없다며 자녀들 모두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뒤 괴벨스와 함께 자살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제목 역시 원제인 "괴벨스"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으로 이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읽어내는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분량에 미리부터 진력을 내지만 않는다면 퇴근 후 두어 시간씩 넉넉잡고, 사오일이면 한 차례 정도는 무리없이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는데 무려 2주 가량이 걸렸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에 대한 나의 넘치는 흥미와 지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의 글이 매끄러운 문장과 번역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나오고 한 달쯤 뒤였던가? 우연히 퇴근하는 길에 이 책의 옮긴이인 김태희 선생이 CBS(?)던가 모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말씀도 논리정연하게 잘 하고, 번역 솜씨 역시(독일어는 모르지만 우리말은) 빼어난 편이라 생각이 들었다. 대개 책이 재미있으려면 소박하게는 우선 주제가 관심있는 분야여야 하고, 문장이 좋아야 한다. 물론 장정이나 기타 등등이 좋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어 높은 점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다만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것은 오로지 저자의 문제이지 옮긴이나 출판사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어렵지 않게 다른 평전 작가들, 예를 들면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이를 연상할 수도 있고, 파시즘과 관련해서는 로버트 O. 팩스턴, 빌헬름 라이히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쉽게 입에 올리긴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아이작 도이처, 이사야 벌린, 요아힘 C. 페스트가 저술한 평전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를 이들에게 비유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과 로이트의 가장 큰 차이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사실 한 인물이 시대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 그에 대한 평전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앞서 말한 이들이 이뤄냈던 작업들 역시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평전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한 명의 뛰어난 작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안목과 통찰을 통해 인물을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는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이기 때문에 평전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선 성실성일 것이다. 그 점에서 로이트는 일단 합격점이다. 괴벨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달리 생전에 일기를 남겼고, 이 일기는 나치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괴벨스에 대해서는 제법 풍성한 자료들이 있으나, 문제는 로이트가 새롭게 입수한 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그 부분에서 로이트가 지나치게 자료적인 충실함, 작가이기보다는 역사가적인 입장을 관철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료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 임팩트한 순간이 모자라고, 그의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괴벨스에 대한, 그가 살아온 행적, 그가 역사 속에 남겼던 여러 궤적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쉽지 않다. 앞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괴벨스는 이전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정치인들과 달리 대중을 상대로 정치 선동을 행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행적을 고려했을 때 괴벨스 평전에서 대중과 괴벨스의 상관 관계, 실제 대중의 반응 등 의미있고 생생한 일화들도 충분히 삽입되었을 법한데(전체 페이지 분량를 보자면 더욱더) 그런 내용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앞서의 문제에 대해 로이트는 괴벨스 평전을 아래의 관점(소위 '野史'라고도 하는)보다는 정사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부족하다는 나의 느낌은 남는다. 분량은 넘치지만 괴벨스의 그런 행적들이 당시 독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다시 인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로이트는 잘 드러내질 못하고 있다. 다소 역부족이란 인상이 든다는 것이고,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날 괴롭혔다. 다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책 속의 사진에 달린 설명(캡션)이 작가의 본 문장보다 도리어 의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끝으로 정리하자면,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에서 나는 "괴벨스"는 필요충분으로 읽을 수 있었지만, "대중선동의 심리학" 영역에 대해서는 다소간 아쉬움을 느꼈고, 그 원인을 작가가 자료들을 적절하게 요리해내는 능력, 통찰력 부족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악하였으므로 그 유능함이 더욱 돋보이는 괴벨스에 대한 책이 우리 말로 이렇듯 훌륭하게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흐뭇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 김동춘 | 창비(2004)



현재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동춘 교수는 그간 우리 사회의 굵직한 이슈마다 중요한 이론적 잣대를 제공해온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시민단체로 자리 잡은 "참여연대"의 창립(1994)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창립 등 그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이 아닌 행동하는 진보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 왔다. 이 책은 그가 숨 가쁘게 지내온 뒤 찾아온 2003년 연구안식년을 맞이해 미국 UCLA대학의 박사후 연수를 마친 산물로 저술된 것이다.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이란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물론 미국을 패권국가라고 부르는 인식에는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공통된 인식이다. 다만, 미국을 과거 대영제국과 서구 선진국의 식민지 경영을 일컫는 말 “제국”으로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일부 사람들에겐 다른 문제인 듯싶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열흘 정도가 지날 무렵 알자지라 방송은 럼스펠드를 인터뷰하며 미국이 “제국 건설(empire building)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럼스펠드는 “우리는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서 미국에 대한 기본적 오해의 출발은 ‘고립주의’라고 배운 “먼로 독트린”부터라고 생각해왔다. 엄밀히 말해 먼로독트린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유럽에 대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주장한 선언이다. 즉,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국제정치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독점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유럽에 알린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으로 오해해 왔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의 네 가지 주제

김동춘 교수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될 무렵 그는 미국에 있었다. 그는 TV토론 프로그램의 "한 백인 시청자가 전화를 해서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자국내 흑인들은 '반역자'라고 공격"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미국의 분위기를 전한다. '자유와 관용의 땅' 이라 생각해온 미국에서 듣는 '반역'이란 언사가 주는 문제의식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김동춘 교수는 국제관계학이나 정치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이다. 미국 유학파가 아닌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그가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어 보이는 미국에 대한 연구와 책을 낸 것은 그간 우리 사회에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우리 사회에서 바라보는 미국은 친미와 반미라는 두 가지 잣대만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가장 냉정한 현실론자임을 자부하는 이들로부터 미국에 반대하는 이상론자들이 주장하는 양극단의 스펙트럼 사이에 놓인 일반인들을 헤매고 만든다. 이런 극단의 논리 속에서 미국은 점점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 되어 왔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은 그런 양극단의 논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기술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간 김동춘 교수가 보여 온 면모를 살핀다면 이 책에도 그의 관점은 분명히 녹아있고,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세계가 현실론자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저자는 양극단의 논리 속에서 미국의 현실,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세계의 현실, 무엇보다 미국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고 있다. 이 책은 주와 참고문헌을 포함해 모두 368쪽,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제 혹은 목적은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주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간 "한국 사회가 생각해 온 미국이란 국가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책머리에서 "이 책은 주로 미국의 좋은 점만 알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지만, 미국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과 반감을 갖고 있다가 미국에 직접 가서 보고 겪고 나서는 그 엄청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기가 질려버리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실체와 문제점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뜻"도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는 제목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 암시하듯, 미국의 시스템 혹은 국가 동력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주제가 미국의 탄생으로부터 팽창, 제국에 이르는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라면 두 번째 주제에 해당하는 부분은 미국을 기존의 국제정치, 국제역학관계로 바라보는 방식을 배제하고, 사회학적 틀을 이용해 미국 사회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와 그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경험하고, 미국 현지의 자료들을 직접 접하면서 분석한 결과에 해당한다. 이때 그가 발견한 미국의 주요 동력원은 "전쟁" 혹은 전쟁을 통해 보장받고, 확대될 수 있는 시장이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배경을 찾는다.

 

앞서 말한 “전쟁과 시장”이란 미국의 주요 동력원의 문화적 구성 방식과 역사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세 번째 주제에 해당한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듯, 미국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아니 우리 사회보다도 더 선진화된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미국 사회가 어째서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보수 우익의 메커니즘에 종속되어 있는가? 혹시 "전쟁과 시장"의 맥락 이면에 실재하는 미국의 보수 우익의 메커니즘은 미국 시민들로 하여금 세계 시민이 아닌 제국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강요하거나 이에 자발적으로 동조하도록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미국 사회의 내부를 보다 면밀하게 파고든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국제정치질서 속에서 미국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내부를 사회학적 시각으로 고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패권국가로서의 면모를 숨기지 않는 현재 미국과 앞으로의 미래를 예견해 보고, 우리의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다. 과거 또는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측하고, 그 모델을 제공하는 학문의 역할은 사회학의 몫이 아니라 미래학(futurology)의 몫이다. 더구나 현재 유일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역할을 감안할 때 미국의 붕괴 혹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해체되는 상황을 예견해보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넘겨다보는 것처럼 불온 혹은 불경해보이기까지 한다.

 

친미, 반미적 관점을 떠난 냉정한 관찰

오늘날 가장 많은 교포, 이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물론 가장 많은 유학생들, 가장 많은 박사 학위가 미국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미국을 잘 알고 있을까. 김동춘 교수가 고백하고 있듯 미국에 대한 특집, 기획 등을 준비하노라면 뜻밖에 미국에 대한 전문가가 태부족이란 사실을 절감해야 할 때가 있다. 미국 전문가를 자임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과의 현실, 혈맹 관계를 강조하다 보니 우리의 입장 보다는 미국의 시각이 앞서는 이 혹은 논리적 근거보다는 감정적인 부분이 앞서 냉정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에 주장이 앞서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친미적 관점, 반미적 관점과도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지난 20세기 미국이 세계 문명을 주도하게 된 것, 그 문명의 혜택을 우리 한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누려왔던 현실을 모두 부인하거나 부정해 버리고 출발하는 것도, 미국이 실제 자국의 이익에 충실하여 전쟁을 벌이고, 시장을 개척하는 차원에서 원조했던 사실을 망각하고 이를 마치 구원자의 손길로 인식하는 것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맞서 유럽을 구원한 것은 사실이고, 한국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함께 알고 있어야 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까닭 가운데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미국이 철저한 반파시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은 아니다. 미국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를 용인했고, 독일에서 히틀러, 나치의 등장과 집권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 당시 월스트리트의 자본가들은 히틀러의 나치당을 지원했고, 헨리 포드는 그들이 반유대적이란 점을 들어 히틀러와 협력했다. 전후 미국은 뉘른베르크와 동경의 전범 재판에서 구파시즘 세력을 선별하여 미국 이주를 허용하고, 트루먼의 냉전 전략은 전세계 특히 한국과 그리스에서 구파시즘 세력을 파트너 삼아 이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김동춘 교수는 "미국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들조차 이라크 선제공격이 마치 미국 역사상 최초의 일인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가까운 과거인 1961년 쿠바 피그만 침공 작전, 1983년 레이건 정부 당시 그라나다 침공,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파나마 무력 침공 등 미국은 수많은 전쟁을 선전포고 없이 단지 ‘경찰 행동’ 차원에서 해 왔다. 그라나다 침략의 명분은 그곳에 거주하는 미군이 위협에 처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라나다의 미군은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었고, 파나마 침공 역시 독재자 “노리에가”의 제거가 명분이었으나 누가 보더라도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미국이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제공격전략(예방공격)은 냉전이 미국의 공세적 소련 봉쇄 전략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처럼,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쟁전략이었다.

 

"미국이 전쟁을 먼저 벌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에는 오직 의회만이 전쟁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1950년 북한의 남침에 맞서 미국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전화 한 통으로' 개입했고 이는 이런 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된다. 이것은 전쟁이 국민의 동의에 기초하기보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서, 그리고 은밀하게 추진되었다는 뜻일 게다.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한 것만 전쟁이라 한다면 한국전쟁도 미국의 주장했듯이 전쟁이 아니라 '경찰행동'이고, 베트남 전쟁도 전쟁이 아니다." <본문 82쪽>

 

1950년 당시 한국전 파병을 앞두고 미 국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19세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85차례나 전세계 각 지역에 파병했고, 전쟁을 벌여왔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를 위한 전쟁

미국의 건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대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물론 미국 시민들은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느끼는 것 못지않은 자부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미국은 이런 선조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전세계를 향해 자유와 인권의 수호국을 자부한다. 우리가 미국을 연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자유의 여신상과 세계 최고의 인권국가임을 상기해볼 때 어쩌면 미국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입장이다.

 

미국이 처음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의 이유는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걸프전 이래 12년간 미국의 경제봉쇄로 사실상 전쟁 상태에 있던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도, 대량살상무기를 만들 재정도, 대량살상무기를 만들 의지도 없었다. UN조사단 역시 이라크에서 아무런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전쟁의 이유를 다시 이라크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 민주화로 돌렸다. 후세인이 쿠르드 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독가스는 미국제품이었다. 죄 없는 민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할 무렵 이라크를 방문해 후세인을 격려한 인물이 바로 현재의 국방장관 럼스펠드였다. 이라크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한 핼리 버튼의 총수가 현재 미국 부통령인 딕 체니였다. 핼리 버튼이 총수로 재직할 당시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가장 많은 무기를 이라크에 수출했다. 미국은 한 때 무자헤딘이라 부르며 무기를 지원한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뒤 자신들이 이슬람의 율법에 갇힌 아프간 여성들을 해방시켰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은 여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강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있는 이란에서 여성들은 차도르를 쓰기는 하지만 사무실에서 남성들과 함께 근무한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전까지는 직접적인 무력개입을 자제해왔다. 국제 정세가 미국의 직접 개입을 용인하지 않은 탓에 미국은 현지에 수립한 정권과 CIA의 공작을 통한 '작은 전쟁(저강도 전쟁)'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50여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1970년대 후반의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민간인 학살, 멀리 갈 것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를 상기했을 때 미국이 주장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는 선별된 대상에 의한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세상 더할 것 없는 독재라 하더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그것이 민주주의였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 역시 미국의 팽창 전략에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중동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예를 보자. 최근 MBC에서 방송한 5부작 다큐멘터리 “중동”에서 네탄야후 전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중동에 평화가 오지 않는 이유를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불법 점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지역은 “6일 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 팔레스타인인, 기독교도, 이슬람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철수할 것은 요구한 UN결의를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며 유대인 지역을 넓혀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전략은 바로 미국의 전략을 고스란히 추종한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란 미국의 원하는 것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가 따르는 것이다. 미국의 평화 전략에 따르면 상대에게 보다 빠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핵을 사용하거나 무차별 융단 폭격을 실시하는 것도 평화를 위한 길이 되고, 이런 전쟁조차 평화를 위한 전쟁이 된다. 그것이 지금까지 미국이 벌이고 치른 전쟁 가운데 ‘평화를 위한 전쟁’ 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미국 최고의 대박사업은? 전쟁!

미국의 많은 이들이 매달 이라크에서 사용하고 있는 40억 달러면 전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에릭 홉스 봄은 "극단의 시대"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 육군은 5억 1,900만 켤레 이상의 양말과 2억 1,900만 벌 이상의 바지를 주문했고, 독일군은 1943년 한 해만 440만 개의 가위와 620만 개의 군대용 스탬프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고, 애초에 미국은 이라크 전비와 재건 비용을 세계 매장량의 11%를 차지하고 있는 이라크의 석유를 팔아 충당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이 이토록 많은 돈을 이라크에 퍼붓고 있는 이유는 과연 이라크인들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을까. 미국은 어째서 이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서는 것일까. 그것은 미국을 움직이는 엔진이 “전쟁과 시장”이기 때문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서 미군 18명이 전사(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하자 미국에는 외국에 미군을 파견하지 말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국익에 결정적이지 않은 전쟁에는 한 명의 미국인도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명분이 인권, 세계 평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도적인 이유만으로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언제라도 무력 개입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전쟁을 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인식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박을 터뜨린 전쟁사업은 2차 대전 참전과 전후 복구를 위한 마샬플랜 그리고 냉전전략일 것이다. 2차 대전으로 미국은 세계 총생산의 반을 차지하는 경제적 초강대국이 되었다. 흔히 뉴딜이 미국자본주의를 공황에서 구해냈다고 말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2차대전이 미국 경제를 살렸다. 전쟁은 자본 이득을 증가시켰으며 투자 기회를 확대했다. 고용문제나 경제난이 전쟁으로 한방에 해결됐다. 더구나 자기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니 인명손실을 제외하고는 별로 손해본 것이 없었다. 2차대전 개입 후 미국은 전쟁 호황에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이 전쟁으로 미국 사람들은 전쟁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아챘다. 더구나 파시즘을 멸망시켰다는 명분도 얻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본문 124쪽>
 
이후 미국의 전쟁은 명분은 무엇이 되었든 실제로는 시장개척을 위한 전쟁(프론티어)가 되었고, 고조되는 무력분쟁 위기는 미국의 무기 수출을 위한 좋은 호재였다. 지난 2002년 미국의 무기 판매고는 133억 달러로 전년도 121억 달러에 비해 크게 늘어났고, 2위 국가인 러시아(50억 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이는 세계 전체 무기 판매고의 45.5%에 해당한다. 그중 86억 달러는 중동 국가들에게, 36억 달러는 미국의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평가받는 중국이 수입했다. 단일 국가 규모로는 중국이 1위, 한국이 2위(19억 달러)이다. 미국이 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 조성에 적대적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 지배 엘리트 육성

지난 대선 후보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이 인정한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은 건국 과정부터 미국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부 수립과정, 제헌 과정,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국방 등 우리 사회의 어느 한 분야도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대한민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004년 12월 1일자 프레시안 기사에서 노희찬 의원은 한 달 전 관저로 초청 받아 만난 모 주한유럽대사로부터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도 미국으로부터 썩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다. 걸프전이 끝난 이후 현재까지 13년 동안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소련 붕괴 이후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현재까지 전세계 35개 국가에 700여 개 이상의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만약 이것을 로마제국식으로 한정해 말하자면 로마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로마화가 진행된 것처럼, 미국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미국이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우리들의 짝사랑 이야기는 고종 황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야 하지만, 그 핵심은 광복 직후 단정 수립을 지지했던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 "일본과 달리 미국은 땅이 크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므로 우리의 영토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따라서 우리를 도와줄지언정 침략은 하지 않을 것"과 같다. 그러나 조병옥은 틀렸다. 그가 미국에 유학해 있던 1930년대 이미 미국은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바,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아이티, 니카라과, 필리핀, 파나마 등이 그들의 식민지였다. 미국은 로마 제국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질서를 구축했던 중화 제국과도 흡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단 이들과의 차이는 보다 타산적이고, 냉혹한 실리 계산에 따르되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시스템을 통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통치전략은 군사력을 동원해 이들 나라를 직접통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란 관념을 통한 것이었다. 미국은 직접통치 방식을 대신해 "나라만들기(state-builing)", 즉 법, 제도, 엘리트 이식작업을 통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통치한다. 그래도 못 미더운 나라들은 미군을 반식민지화한 중국의 상해처럼 치외법권화된 지역에 주둔시키는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나라만들기의 시작은 보통선거를 통한 대표자 선출인데, 미국의 사전정지작업을 통해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세력은 과감히 제거한다. 해방 직후의 남한과 현재 이라크 상황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성립된 신생 정부는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합법성을 인정받게 되고, 그런 뒤 현지의 지배엘리트들 가운데 선발해 미국 유학의 형태로 미국의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육시킨다.

 

이들이 귀국한 뒤엔 미국식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과거 로마 제국이 그러했듯 점령지역의 세력가들을 포섭하여 그들의 파트너로 육성하는 것이다. 과거 영국이 식민지 경영을 위해 자국의 관리들, 군인, 기업인들을 훈련시켜 보냈다면 미국은 현지 관리, 군인, 기업인을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미국식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무장시켜 그들로 하여금 지배엘리트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의 대학이 다른 선진국의 대학들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미국에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가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제3세계의 군부엘리트들을 그들의 군사학교에서 육성해 왔는데, 앞서 말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물론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 등도 모두 미국의 군부엘리트 학교 졸업생들이었다.

 

미국을 제국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방식이 아닌 그 본질로 파악했을 때의 제국주의(imperialism)를 한 국가의 정치, 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 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충동이나 정책이라 했을 때 미국의 본질은 제국에 가깝다.

 

우파국제주의자들의 발전전략 "영구전쟁론"

미국에도 내부 비판자들, 시민사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속적으로 제국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는가. 김동춘 교수는 미국이 실질적으로는 이념적으로는 일당독재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레이건 집권 8년 동안 미국 정치사회에서 중도좌파는 완전히 제거되고, 중도파가 좌파로 간주되고, 민주당의 정책 역시 지속적으로 우경화되는 정치 지형의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 같은 이는 민주당을 향해 "위선의 가면을 벗고 차라리 공화당과 합당하라"고 비판한다. 현재 미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거 좌파 국제주의의 정확히 반대 측면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미국의 주류는 우파 국제주의(세계화)에 해당한다. 과거 좌파 국제주의가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면 그들은 미국의 패권을 지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영구전쟁론’을 추진한다. 냉전 시대를 거치며 미국 우파는 유럽과 달리 집요하게 애국주의 담론, 반공 담론의 장에 민주당과 좌파들을 끌어낸다. 그 결과 미국의 정치집단은 스스로 국가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애국게임에 휘말리게 되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과도한 충성심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부시가 승리했지만 캐리가 당선되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선포하기 직전인 2003년 2월 미국 언론에는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부시와 파월, 럼스펠트 등 각료 사진이 크게 실렸다. 부시가 개신교도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교파에 속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공적인 자리인 각료회의 자리에서 다 함께 기도드리는 광경은 자유주의 국가 미국을 연상하는 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이다. 미국인들은 유대인들 못지않게 스스로를 신에 의해 선택된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닌 국가라고 생각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나는 신이 우리 미국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처럼 힘을 주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중동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 못지않게 미국의 정치 지형 속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베트남전을 경험하면서 미국의 가톨릭 우익, 유대교 우익과 합세하면서 "도덕적 다수, 기독교 연합" 등 적극적인 정치 세력화에 나섰고, 종교와 정치를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 미국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신이 보기에 합당한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미국 사회를 "기독교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런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워드 진”이나 “노암 촘스키” 같은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미국 사회의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판적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세대들은 우경화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아카데미 가둬두거나 전문가주의로 퇴보하면서 더 이상의 비판을 멈추고 있다. 어쩌다 나오는 이들의 비판적 발언조차 하워드 진에게 어느 어린 여학생이 "그렇다면 왜 미국을 떠나지 않는가"라며 비판한 것처럼 반애국적인 행위로 단정된다.

 

모든 제국은 팽창한다, 고로 제국은 붕괴한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의 제국들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제국은 팽창한다. 한 번 팽창하기 시작한 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팽창을 멈출 수 없다. 최대한 팽창한 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한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건설한 뒤로부터 몰락하기 시작했고, 중화제국의 최대 판도는 청조 시대의 일이었으나 이후 중국은 급격한 몰락을 경험한다(물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청나라보다도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며 전 세계 가솔린 소비량의 40%를 차지하는 나라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세계적으로 두 번의 미국화(Americanised)를 불러왔다. 한 번은 냉전을 통해, 다른 한 번은 세계화를 통한 것이었다. 이제 미국의 패권은 현재 절대적이다 못해 초월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김동춘 교수는 바로 지금이 '제국의 위기' 라고 진단한다.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악독한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핵심적인 부분은 미국은 바로 그들이 주장하고 전파한 "인권과 평화, 자유와 민주주의"로 인해 내부로부터 붕괴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적 불평등(세계화 혹은 자유무역)은 국가 단위를 해체하는 듯 보이지만 미국만큼은 철저하게 국가의 경계를 유지한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구대륙의 차별받던 시민들을 받아들여 국가의 동력으로 삼은 덕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편주의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제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엄격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 미국은 자국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입국조차 할 수 없도록 통제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노쇠한 제국이 빠지는 딜레마에 똑같이 빠져들고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가 공화국 수비대를 한 달도 못되는 기간에 붕괴시킬 수는 있지만 종전 선언 1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라크에서 총성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념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들이 지닌 돈과 힘에만 의존하는 국제질서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미국은 자본축적의 한계 혹은 자본주의 붕괴 시나리오에 의해 붕괴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붕괴”란 말은 너무 엄청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치 로마 제국이 게르만 용병대장의 손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붕괴가 이미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왔던 것처럼 미국의 붕괴 역시, 대영제국의 붕괴가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시절에 시작된 것처럼 그렇게 시작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미국의 붕괴는 당연히 소련의 붕괴가 가져온 충격파보다도 더한 충격을 가져올 것이다.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국방비를 합쳐도 미국보다 적은 현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은 참으로 맥 빠지는 일이며, 보수우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로마 제국의 붕괴가 중세의 어둠을 불러왔다고 믿는 이들에게 미국의 붕괴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예견 또한 가능하겠지만, 대영제국의 붕괴 과정처럼 조용히 올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우리가 미국의 패권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붕괴 또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 절대적 패권국가인 미국의 붕괴는 미국이 영원한 패권국가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부질없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로마가 그렇게 붕괴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 책이 좀더 일찍 나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 중 상당수는 이미 국내에 출간된 상당수의 미국 비판 서적들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에 대한 조선일보의 서평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보수우익이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전자는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 가장 최근의 미국 사회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학적으로 내부를 고찰하고 있다는 장점과 대중적으로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으로 상쇄되고, 후자의 경우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는 아니면 그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이들에겐 어차피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을 것이란 점에서 상쇄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란 무엇인가?



  마이너리티(minority)라는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마이너리티리라는 개념 자체가 메이저리티(majority, main stream)라는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말하는 마이너리티와 메이저리티는 단순히 수적으로 다수인가, 소수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성리학에 기반 한 노론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군주는 외견상 지존(至尊)의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나 신권이 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성했으므로 마이너리티일 수 있고, 히틀러가 지배하던 독일에서의 유태인들은 '한 줌의 쓰레기'로 분류되었으나, 샤론 총리 하의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다수자 그룹에 속한다. 또한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우리 민족은 인적 구성으로는 다수였으나 권력을 장악한 일본인에 비해서는 소수 집단일 수밖에 없었다. 마이너리티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자 집단에 의해 '침묵하는 다수'라는 말처럼 주관적으로 조작되기도 한다. 이렇듯 마이너리티의 개념은 시대 상황과 정의하는 이의 현실 인식, 그 사회적 위치에 따라 제각기 달라지는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대 변천과 상관없이 마이너티리와 메이저리티를 구분지을 수 있는 근거는 '권력의 유무'이다. 권력을 소유하고, 기득권을 누리는 입장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구분의 준거가 된다. 이런 다수자 집단은 소수 집단에 비해서(이것이 단순히 수량의 개념이 아님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수량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세하다는 의식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마이너리티라 할지라도 수동적으로 차별당하고, 배제되는 경우와 능동적으로 스스로 마이너리티를 자임하는  것은 다른 경우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는 과연 무엇이고 누구인가?

  작가 최인훈은 『회색인』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며 식민지 착취를 통한 서구 제국의 자본 축적 과정을 날카롭게 묘파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불공정한 경쟁과 적자생존을 원칙으로 하는 불평등한 경쟁 체제이며 기득권을 소유한 자에게는 축복을, 경쟁에서 탈락한 자, 상대적인 약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배제와 소외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온 과정은 이렇듯 소수 집단에 대한 배제와 소외라는 '내부 식민지'화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를 확산시켰고, 동시에 노동 소외, 여성 차별, 특정 지역 배제를 전략적으로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인적 구성으로는 다수에 속하는 노동자와 여성 그리고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나 호남 지역이 소수자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소수자 집단은 80년대 사회 변혁 운동을 통해 노동자 집단의 세력화, 여성의 지위 상승, 정권 교체를 통해 일정 정도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너리티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같은 한국의 노동자라 할지라도 숙련된 정규 직 내국인 노동자는 다시 미숙련, 비정규,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 대해 다수자 그룹의 포즈를 취한다. 자신이 획득하게 된 작은 기득권이나마 그들과 공유하지 않으려 하고, 이를 통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정상인이 장애인을, 중산층 여성이 빈곤 여성 가장을, 제도권 교육을 받은 이들이 탈학교생들을, 인문계 고교 출신이 실업계 고교 출신을 상대로 역시 다수자 그룹의 역할을 하려든다. 독일이나 중동 등지에 파견되었던 외국인 노동자로서 마이너리티의 경험만 있던 우리 사회에 어느새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우리들도 상대적인 다수자 집단의 기득권을 그들에게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아야 한다. 이와같이 우리 사회의 지배 구조는 현재 격렬한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이제 마이너리티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질 들뢰즈는 이와 관련하여 "주류는 수가 적어도 스스로를 다수라고 제시하며 그래야 안심하는 사람들이다. 주류는 또 현재의 지배세력에 참여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과 동조하려고 하거나 독자적인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피지배자로 남길 원하거나 혹은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을 고스란히 역전시켜 보면 문화판에서 말하는 '마이너리티'의 정의는 가능할 것 같다. '마이너리티는 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권력의 장악이나 지배 세력에 편입되기를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 세력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삶의 양태를 꿈꾸고 실천하며 기득권을 이용하여 남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마이너리티의 개념은 앞서 말한 수동적이고, 차별당하고, 배제 당하는 소수자 집단이 아닌 행동을 포함한 적극적인 개념의 마이너리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판에서 통용되는 긍정적인 의미와 달리 현실 속의 마이너리티는 고단하고 아픈 것이다. 들뢰즈의 말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경고하고 있는 바가 좀더 명확해 보인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혜택과 기득권을 가지고 스스로 주류라고 착각하지 말며, 한시라도 그 작은 권력을 통해 남을 지배하려 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 때를 풍미했던 '중산층 되기의 허구'와 같은 것이다.

  마이너리티와 주류의 관계는 영구불변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당신도 마이너리티일 수 있고, 주류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좀더 탄력있는 사회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인정되고, 일탈의 허용 범위와 개인의 자유가 보다 광범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의 범주가 좁은 사회, 이를 교정하려는 폭력의 강도가 높은 사회는 결국 파시즘에 이르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주류와 비주류 사이를 오가는지 모른다. 마이너리티와 주류의 선택 그것은 당신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선택 속에서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 2001년 11월 <가톨릭대학교 학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KODEF 안보 총서 15 -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 | 임윤갑 (옮긴이) | 플래닛미디어(2009)

전쟁 종전일이 아닌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는 기묘한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동안 전쟁을 먼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왔던 오만의 결과일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했던 2010년 한 해 동안 전쟁의 기운이 검은 안개처럼 한반도에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학자로 연구에 전념해왔고,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의 편집자로 국제연합(UN)에서 정치국 국장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를 읽었다. 2009년엔 『전쟁의 탄생』 말고도,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다케나카 치하루가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도 출간되었는데, 전쟁 발발의 근본원인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은 이전(2007, 아카넷)에 나온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의 『인간 국가 전쟁(Man, the State and War)』과 함께 비교해가며 읽어볼 만하다.


전쟁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전쟁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 역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앞서 언급한 케네스 월츠는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 사회 또는 국가의 특성 그리고 국가체제의 구조적 특성을 연구함으로써 전쟁을 인간적 수준, 국가 ․ 사회적 수준 그리고 국제체제적 수준으로 분석’했다. 존 헤르츠(John Herz)는 국가 내부의 경쟁을 조율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국가 간의 경쟁을 조율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필요이상의 긴장이 고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고, 오르간스키(A. F. K. Organski)는 2위 국가가 1위 국가(헤게몬)로 전환하려는 가운데 전쟁 발발 가능성이 증대된다고 보았지만 전쟁의 원인은 인류 역사상 벌어진 전쟁의 숫자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 지금까지의 전통적 - 전쟁이 인간 ․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상황이나 인간 본성, 체제, 경제적 요인과 같은 근본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 - 인식을 대신하여 그것이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 중에서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리더)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란 국내 제목이 『Why Nations Go To War』라는 영어 원제보다 저자가 추구하려는 진실에 좀더 근접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라고 물을 때 ‘왜?’에 대한 답은 그때그때 경우에 달라지겠지만 ‘누가?’에 대한 답은 언제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집단적 범죄와 지도자의 결정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대학 국제외교학과의 존 G 스토신저 교수는 『전쟁의 탄생』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가지의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미국 중심의 주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판단하기 쉽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외부 요인 못지않게 해당 결정을 내린 지도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비춰지기도 쉽다. 게다가 ‘스토신저’라는 그의 성(姓)을 보면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처럼 그가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것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서장」에서 자신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지도자를 중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무렵 그의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살고 있었다. 스토신저의 계부는 히틀러 통치하의 오스트리아는 너무 위험하단 이유로 체코 프라하로 떠났지만 그마저도 점령당하자 어떻게 해서든 히틀러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중국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받아냈고, 소련을 통과해 일본까지 넘어가는 극적인 여행을 경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고 있던 스토신저 일가가 유럽의 집단적 광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판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로 평가받는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의 도움 덕분이었다.


존 G. 스토신저는 그와 같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범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둠의 시대에도 우리의 인간성을 재확인하면서 심지어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악마와 맞서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심연 속에서도 도덕적인 용기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항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개인적 체험은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 지닌 용기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신뢰하게 되는, 다시 말해 훌륭한 인간이 지도자가 된다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토신저는 정치나 경제적인 요인들이 전쟁의 ‘징후’를 몰고 올 수는 있어도 전쟁 수행의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지도자’들이 전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벌어지는 요인에 주목한다. 이 부분이 존 G. 스토신저를 이전의 다른 학자들과 구분되게 만드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적 엄밀성을 약화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에 이르기 까지

존 G. 스토신저는 전쟁 발발 요인을 지도자에게 주안점을 두어 분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만 묻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주요 전쟁의 배경과 개별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와 같은 상황들 속에서 지도자들이 전쟁을 결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피고 다시 이를 개념화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는 1장 「철의 주사위」 편에서 그는 장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개전 선언 이전까지도 이 전쟁이 수년간에 걸쳐 장기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하나가 당시 독일의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였음을 지목한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섣부르게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러시아 황제가 섣부르게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이런 기대와 달리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이 충분히 강력하고 길게 이어지면, 그 인식은 결국 사실이 된다.

위기상황에서 힘에 대한 인식은 특히 중요하다. 초기 단계에서 지도자들은 자국의 힘은 과장하고 적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빌헬름의 서약은 러시아 군사력에 대한 근본적인 경멸과 러시아 지도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신뢰했다는 방증이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해서 실제보다 허약하고 성가신 존재로 인식하고 멸시했다. <본문 63-64쪽>


이와 같은 인식을 토대로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이나 의지를 낮게 평가하면서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는 “우리는 지금 물러설 수 없다”라고 호언하는 것이 세르비아의 애국자들에게는 적나라한 침략으로 비출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러시아 지도부에겐 그와 같은 공언들이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전쟁 이외에 다른 대안을 강구할 수 없도록 몰아가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계획을 입안한 군부의 고위 인사들 역시 평화를 유지하기 이전에 자아의 보존을 좀더 중시하는 경향, 다시 말해 군부와 군부의 이해관계에 귀속되어 있는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피할 수 없게 될 막대한 희생에 대해 침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눈을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


2장 「바르바로사 - 히틀러의 소련 공격」은 가장 의심이 많고 교활하며 사악한 인간인 스탈린이 가장 비이성적인 히틀러의 이성적 행동에 대해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나쁜 악마가 같은 놈은 어쩌다 더 나쁜 악마에게 속았을까? 쯤 되는 물음을 던진다. 게다가 이 악마는 처음부터 슬라브족을 노예로 만들고 소련을 그들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포함시키겠노라 공언까지 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잇따라 전해지는 독일의 침공 예보(침공 직전 1년 동안 84번의 경고가 소련에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붉은 군대’ 장교의 10분의 1을 숙청했고,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예하부대 지휘관의 5분의 1이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존 G. 스토신저는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앞두고 소련 전투력의 중추를 꺾어버리는 숙청을 단행한 까닭으로 스탈린 자신이 소련 내부에서 차지해야 하는 권력의 안전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국가의 안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39년 맺은 독 ․ 소 조약은 소련에게 독소처럼 작용했지만 침공 직후였던 1940년 7월 스탈린은 소련 인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첫 방송에서조차 독 ․ 소 조약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전쟁의 행운이 그를 배반하고 소련으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에도 몇 번이고 군대를 증원했다. 반면 스탈린은 그의 초기 실책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본문 104쪽>


완전히 새로운 전쟁, 완전한 승리에 대한 유혹 - 한국전쟁

『전쟁의 탄생』은 여러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은 3장 「승리의 유혹 - 한국전쟁」편이다. 2009년에 번역된 『전쟁의 탄생』은 열 번째 판으로 저자인 존 G. 스토신저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롭게 추가된 사실들을 책의 내용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 역시 전쟁 발발 이후 현재의 핵 위기 상황까지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 중 하나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손꼽는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이 38선에 접근했을 때 그것을 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유엔군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무력 침략은 38선을 파괴한 행위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침략자에 대한 ‘맹추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유엔군의 임무가 단순히 ‘무력침략을 격퇴’하는 데 있다면 북한 침략 이전에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던 곳으로 유엔군을 진격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느냐의 문제를 누가 결정할 것이며 만일 그렇다면 그 목적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도 제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북경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K.M.Panikkar)는 “만일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보냈다. <본문 124쪽>


9월 하순에 개최된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의지에 따라 38선을 넘어 한반도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라고 결의한다. 10월 1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고, 미군도 10월 7일 북진을 시작했다. 10월 2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가, 10월 10일엔 중국의 외무장관 주은래 역시 “중국은 이 침략전쟁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미국과 맥아더 장군은 이것을 중국 특유의 허풍으로 받아들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만나 중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데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가능성을 희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 편으론 북진을 승인하면서도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면서 중국 달래기에 나섰다. 맥아더는 중국을 팽창욕구는 가득하지만 실제로 그럴 능력은 없는 국가로 평가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해서도 경멸에 가까울 만큼 낮게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의 중국 인민해방군을 1940년대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판단을 신뢰했고, 그의 판단을 신뢰한 결과는 매우 혹독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개입은 국제문제 인식의 다양함을 실제로 보여준 좋은 예였다. 이러한 인식은 실제상황을 인식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일단 상황이 명확하게 평가되면 특정 대안은 배제된다. 일반적으로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과는 화해가 어렵기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한국에 개입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힘을 무시할 정도라고 생각할 경우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일종의 허풍으로 치부했다. 자신과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상대방과는 좀처럼 타협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국과 중국은 재앙이 될 분쟁의 문턱에서조차 상대방의 국제적 역할을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한반도를 또 다른 18개월 동안 파괴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본문 133쪽>


트루먼이나 맥아더가 처음부터 북한 점령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켰고,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의지를 미국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유엔은 중재자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 이후 남북한 혹은 양대 진영 사이에서 국제적 중재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 결과 전쟁은 1950년 10월 1일로부터 2년 반 동안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미군 전사자 3만 4천 명, 남북한 130만 명, 중국이 대략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채 휴전했다.


남북한은 현재까지 어떤 심판자나 중재자, 완충 없이 완전무장한 채 60년간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김일성은 1994년 사망했고,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해 1994년 제네바에서 북한이 핵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2개의 경수로와 핵 발전 원자로 건설의 대가로 핵무기 개발계획을 폐기할 것을 약속하는 북 ․ 미간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면서 선제전쟁 전략에 대한 독트린을 발표한다. 예방전쟁, 선제공격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시 독트린의 발표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 상황 등을 지켜보며 북한은 이것을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선전포고)으로 인식했고, 2003년 NPT(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2003년 4월 북한은 NPT조약 체결 32년 만에 처음으로 탈퇴한 국가가 되었다.


2003년 6월 북한과의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점진적으로 북한과 한국 사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멀리 병력을 재배치하는 데 합의했다. 1,7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한국의 수도 서울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포병의 사거리 내에 위치했었다. 미국과 한국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군사력의 재배치는 양측 100만 명 이상의 군사력으로 항상 긴장을 유지해온 전쟁의 위험 상황을 다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달랐
다. 이들은 거대한 규모의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핵개발을 선택했다. <본문 137쪽>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가리켜 ‘최악의 독재자’라고 지칭하며 그 같은 최악의 독재자가 다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무기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이 핵무기를 갖도록 부추긴 결과만 빚고 말았다. 미국의 샘 넌(Sam Nunn) 전 상원의원은 “우리는 악의 축의 잘못된 끝에서 출발했다”며 부시의 악의 축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상대 지도자(국가)의 의지에 대한 오판과 자국에 대한 오만

20세기에 가장 길었던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투쟁한 기간은 장장 30년에 이른다. 한 세대가 흐르고 미국의 대통령 5명이 바뀌는 동안 미국은 상대가 지닌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 자신들과 겨루고 있는 베트남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고, 심지어 경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물론 미국 자신은 아시아 전반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베트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특히 존슨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수없이 많은 이념적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전쟁이 지닌 기본적 특성이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이념적 전쟁이기 보다는 식민주의에 대항한 전쟁,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혁명전쟁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거의 언제나 대부분의 전투에서 상대방보다 적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기꺼이 전투에 임했고, 죽음을 불사했다.


존슨과 미국은 호치민과 베트남을 마오쩌둥과 중국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로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옛 볼셰비키 당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에서 호치민은 마오쩌둥보다 앞선 원로 공산주의자였다.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하기도 했고, 우리에겐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로 잘 알려진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같은 이는 호치민을 가리켜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가진 완전한 베트남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언론은 그를 경멸적으로 묘사하여 “모스크바에서 기술을 익힌 염소수염의 선동가”라 불렀다.


오랫동안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승리를 거의 쟁취할 뻔했던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며 전쟁에 끼어들었던 미국은 정작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진구렁에서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이들이 1973년 파리에서 확인한 것은 이미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결정되었던 상태로 고스란히 되돌아갔음을 인정하는 일 뿐이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투하된 폭탄의 80배나 되며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배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폭탄들은 폭 25~50피트에 깊이가 5~20피트나 되는 폭탄 구덩이 2,000만 개를 남긴 것과 같았다. 폭격 후 베트남의 대부분은 달의 표면처럼 보였고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도 전쟁이 끝난 후 후유증이 심했다. 미국의 지도부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었으며 대학은 붕괴되었고 경제는 전시 통화팽창으로 부풀어 있었다. 5만 8,000명의 전사한 미군을 베트남에서 싣고 온 금속관이 전쟁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의미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산당의 초기 승리와 이 전쟁의 고뇌 중 어느 쪽이 희생을 덜 치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베트남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명의 미군도 인도차이나에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 길이 어느 쪽으로 인도되었을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베트남은 훨씬 일찍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의 형태는 모스크바와 베이징과는 다른 아마도 독립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민족주의 성격을 띤 티토주의적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산화의 연기의 대가로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의 생명과 300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1,500억 달러의 가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본문 185-186쪽>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었던 딘 러스크는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끝난 베트남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미국인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역사와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 - 유고내전

발칸반도 지역은 오랫동안 유럽의 화약고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에 값하듯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총성도, 20세기의 끝을 알리는 유고 내전도 모두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키신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세 종교적 집단 중 어느 것도 다른 집단의 지배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때때로 터키나 오스트리아 또는 공산세력과 같은 외부세력에는 굴종했으나 이들 상호간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1941년 나치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기간 동안 이 3개 민족은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 못지않게 서로에 대한 증오 역시 맹렬하게 불태웠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악명 높은 ‘우스타쉬(Ustashes)'를 만들어 비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체트니크(Chetniks)'를 만들어 비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들 모두와 투쟁하며 통일된 유고슬라비아를 세운 것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이었던 열쇠 수리공 출신의 빨치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는 대외적으로 ’형제의 단결‘이라는 슬로건 속에 통합되어 있는 듯 보였다.


티토 사후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내전, 처음엔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후 보스니아에 이르기까지, 인종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서로 혼인하고 바로 이웃에 살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로에게 총질을 하며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전쟁이었다. 물론 최악의 범죄자는 세르비아였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유일한 가해자도, 그렇다고 유일한 악도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그들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는, 그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과거에만 가 있었으며 미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학살의 주범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대해 존 G. 스토신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죽음과 배반의 그늘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자살했다. 그는 아내 미라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위한 피난처를 찾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밀로셰비치의 아내 미라는 유고슬라비아를 지배했던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조카이자 수양딸이었다.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라(미랴나)를 입양한다. 그녀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하는데, 이들에게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세르비아의 역사는 그들이 수호해야할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되찾아야 할 세르비아 역사의 성지는 코소보였다. 1389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진격에 맞서 코소보에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50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유고 국민이 아니라 과거의 원수들이었다.


실제로 그 장소에서 그 같은 전투가 벌어졌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민족과 종교 사이의 증오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터진 총성과 1994년 사라예보의 총성은 전혀 달랐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사건은 유럽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방아쇠가 되었지만 1994년엔 세계 열강 중 누구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죽임에 대해 개입하길 꺼려했다. 어느 강대국도 이 지역에 개입해야 할 이해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강대국들이 수수방관하는 동안 인종적, 종교적 증오에 휩싸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는 서로에 대한 증오를 맘껏 불태웠다. 결국 1999년 미국과 나토가 개입하면서 잔인한 학살극은 막을 내렸다. 영국의 역사학자 노엘 맬컴은 세르비아 측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1389년의 코소보전투에 대한 신화는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한 민족이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화는 그 자체의 진위 여부로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노엘 맬컴의 주장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기든 가틀립(Gidon Gottlieb)은 “민족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오직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의 공유뿐 아니라 역사, 잘못 저지른 실수, 희생을 포함해 정치술의 냉혹한 고려사항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을 움직인 상징이나 전설적인 요소에도 근거를 둔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1994년의 대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전쟁 -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

이외에도 존 G. 스토신저는 6장 「신의 전쟁」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현재까지 치르고 있는 오랜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7장 「성지에서의 60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그리고 8장 「후세인의 전쟁 - 이라크의 이란,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쟁」을 다루고 10장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 - 미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21세기 초엽 9.11테러 이후 부시의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의 양상과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저자는 이 모든 전쟁의 양태를 두루 살피는 와중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듯 서로 다른 전쟁이 결국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이며 전쟁은 결코 인간의 천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전쟁은 회피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는 무엇보다 전쟁은 지도자의 성격,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잘못된 지각’이 사실상 ‘전쟁의 시작과 평화 유지’라는 정책의 향배를 결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해 존 G. 스토신저 교수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역사상 벌어졌던 전쟁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전쟁이 사실은 하부 구조,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서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 의해 벌어진다는 주장을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남북한 경제협력, 특히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이 안전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데, 여기엔 한 가지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물론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전쟁이 양측의 이해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은 전쟁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좋은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양 측의 잘못된 오해와 인식 혹은 증오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성공단이 아무리 잘 돌아가고, 경제적으로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하더라도 증오의 물길이 파놓은 심연이 너무 깊다면 전쟁의 위기는 상존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존 G. 스토신저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을 통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길 바란다.


마지막 하나의 경고는 “우리가 들어왔던 어떤 전쟁이 과연 ‘불가피’했던 것인가?”였다. 이 단어는 내가 연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철의 주사위’를 다루는 순간부터 수없이 떠오른 질문이었다. 십자군들은 특히 그러한 주장을 좋아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역사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외교정책을 결정한다. 이들은 지혜롭게 혹은 어리석게 정책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책을 만든다. 전쟁 이후에 역사가들은 종종 전쟁을 뒤돌아보고 운명이나 불가피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결정주의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은유에 불과하가다. 결국 우리의 생에는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이 있을 뿐이다. <본문 537쪽>


다시 말해 그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란 없으며, 평화란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조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선택은 잘못된 인식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선택되는 것이며 전쟁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한 사람은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랜 고통 속에서 전쟁의 맨 얼굴을 직접 대면한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이 지닌 가장 큰 딜레마는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큰 스승이 곧 전쟁 그 자체라는데 있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2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