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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이성복 - 세월에 대하여


세월에 대하여

- 이성복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同時上映館)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孫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天國)으로 통하는 차(車)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정말
허리 꺾인 아이들이 철 지난 고추나무처럼
언덕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정말 거세(去勢)된
친구들이 유행가를 부르며 사라져 갔지만
세월은 흩날리지 않았다 세월은 신다 버린 구두
속에서 곤한 잠을 자다 들키기도 하고
때로는 총알 맞은 새처럼 거꾸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으흐허 웃고만 있었다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나는 높은 새집 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다


3

세월은 갔고 아무도 그 어둡고 깊은 노린내 나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몇 번인가 되돌아온
편지(便紙) 해답은 언제나 질문의 잔해(殘骸)였고 친구들은
태엽 풀린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곤 했다 너무
피곤해 수음(手淫)을 할 수 없을 때 어른거리던
하얀 풀뿌리 얼어붙은 웅덩이 세월은 갔고
매일매일 작부들은 노래 불렀다 스물 세 살,
스물 네 살 나이가 담뱃진에 노랗게 물들 때까지
또 나는 열 한 시만 되면 버스를 집어 탔고

세월은 갔다 봉제 공장 누이들이 밥 먹는 30분 동안

다리미는 세워졌고 어느 예식장에서나 30분마다
신랑 신부는 바뀌어 갔다 세월은 갔다 변색한
백일 사진 화교(華僑)들의 공동묘지 싸구려 밥집 빗물
고인 길바닥, 나뭇잎에도 세월은 갔다 한 아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번잡한 찻길을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쌍했고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었다 아무것도 그 비리고 어지러운
숨 막히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4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 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事件)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修業時代),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風化)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醉氣)처럼 올라온다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까지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 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物體)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렁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房)이었다
인형(人形)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액자 속의 교회(敎會)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房)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空氣)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戀愛)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門間)을 지나가야 했다.


*

언젠가 친구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내 나이 쉰살이 되었을 때, 나는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사서 내 뒷 자리에 예쁜 여고생 아이를 태우고 길거리를 달리고 싶다고...' 그랬더니 다들 나를 무슨 변태 취급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이 쉰 살에 여고생 아이를 등 뒤에 태우고 달리는 내 모습을 내가 상상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사실 이런 상상은 참 오래된 상상이었다, 다만 나는 그 아이가 내 딸이길 바랐을 뿐인데, 아무래도 딸 아이를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려면 더 일찍 아이를 가졌어야 했는데 이젠 아무래도 글러버린 것 같다), 그 상상이 남의 머리 속에 스며들자 나는 고만 옴짝달싹할 수 없는 변태가 된 거다. 또 얼마 전엔 내가 진행요원으로 참여한 백일장에서 여고생 아이들이 무언가 물어보기 위해 내 곁에 다가서다가 그네들이 젖살로 내 팔꿈치를 슬쩍 건드렸을 때 온몸에 봄물이 오르듯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더니 이번엔 변태 중에서도 상변태(롤리타) 취급을 받았다.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고 누가 말했나? 나이는 나이고, 세월은 세월이다. 내가 제 아무리 알퐁스 도데의 스테파네트 아가씨 모시듯 하고 싶어도, 내가 제 아무리 윤 초시 네 손녀 딸 모시듯 하고 싶어도 상대방이 날 중늙은이 취급하면 변태가 될 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서 시인 이성복은 이렇게 말한다.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孫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기승을 부리던 1980년 중반쯤 어느날엔가 나는 1999년에 내가 몇살쯤 되었을지 중학교 교실에서 친구들과 헤아려 보았다. 우리 나이 스물아홉에 죽기엔 허망했다. 그 나이쯤에 나는 결혼을 했을까? 아이는 있을까? 그 날이 과연 올까? 전부 헛소리라고 밀쳐두기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모두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는 일본 작가의 구라가 있었으므로 어느 점집 늙은이 이야기처럼 뒤로 젖혀두기엔 신빙성으로 넘쳐났다.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나는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시에 등장하는 아이는 틀림없이 이성복 시인의 어린 시절의 자화상이었다고 그렇게 단정 짓는다. 아, 시인이여! 이 촌놈!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 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事件)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플까? 사실 이성복 시인의 시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자 시도하는 일은 우습다. 이성복의 시에서 정황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빼놓고 나면 도대체 무엇이 남아서 의미를 찾는가? 그의 시에선 종종 한국 독자들을 감복시키려고 들어가
는 경구 같은 구절이 없어서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선 내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한 구절이 있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내가 세월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세월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더미처럼 내려앉은 하늘, 그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게 뭘까? 눈물일 수도 있겠단 섣부른 생각이 든다. 실패했던 두어 번의 연애, 놀리는 사람이나 놀림 받는 사람이나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세월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인가. 어쨌거나 그래서 시인은 또 습기찬 문간을 지난다. 눈물의 시인이다. 얼마전 날 놀려먹었던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나이 쉰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 딸 아이를 등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제 올해 갓 태어난 내 딸아이를 내 나이 쉰 살에 등 뒤에 태우고 싶어도 그 아이는 고작 10살도 채 안 될 것이다. 과연 나는 내 나이 쉰 중반에도 오토바이를 탈 수 있을까? 아니 그 때도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고 싶어할까? 세월이 서글픈 건 1999년에 세계 멸망이 오지 않은 것처럼 내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 사실 로열엔필드 같은 류의 모터사이클을 좋아한다. 비록 게바라가 탔던 녀석은 이게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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