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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Tempus Edax Rerum

無題


1.

내가 한 번도 학자로 살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까닭, 사회과학이나 경제학, 자연과학을 전공하거나 이 분야의 지식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까닭은 내가 문학을 선택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와 정확히 겹친다. 나는 우유부단하고, 모호한 인간이기에 오래도록 논쟁을 거듭하며 제련되는 결론, 혹은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한 논쟁을 거듭하고, 훈련을 쌓는 일을 싫어한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설령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결론(논리)을 방어하기 위해 누군가와 논쟁을 벌일 만큼 그 결론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나는 결론을 믿지 않는다. 학문이 정의를 내리고, 명제를 만드는 동안 문학이나 예술은 말한다(혹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고, 사람이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지." 끝까지 질문만 있고, 결론이 없다는 점에서 문학과 예술은 삶과 서로 닮는다.


2.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
자본주의와 동거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진보, 좌파적인 사람, 아니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사회의 상식이 된 말이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말은 아무래도 '함정'이란 생각이 든다. 기업은 기껏해야 '법인'에 불과한데,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기업을 의인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다시 말해 기업에게 '사회적 권리(시민권)'을 인정하여 기업이 정치, 사회, 문화에 참견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은 기업이 아니라 '주주'들에게 물어야 한다.


3.

이분법은 많은 것을 감추지만 반대로 많은 것을 드러내고 명확히 해준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어느 부분에서 첨예하게 형성되는지 잘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 갈등의 원인으로 '이분법' 혹은 이분법적 사고를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정작 이분법이 은폐하는 것은 이분법 사이에 숨겨져 잘 드러나지 않는 갈등과 이해의 여지가 아니다. 이분법이 은폐하는 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분법으로 드러나는 갈등의 이면을 섬세하고 사려깊게 살필 여유와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갈등의 근본원인이나 주변 상황들을 섬세하고 사려깊게 살피는 대신 중도에서 포기하거나 살피러 갔다가 길을 잃는다. 


4.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나 '대변혁' 같은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현대 자본주의와 심각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주체'가 자본 대 '노동자'같은 계급적 주체,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이주노동자' 등 시민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다양한 마이너리티들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세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물론 '현재'를 파괴하지만 가장 가혹한 피해자들은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가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터전을 파괴한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피해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 다시 말해 지금 당장은 견딜만 하기 때문에 - 거대한 침묵의 공모로 미래의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를 좀 먹고, 파괴하는데 동조하고 있다.


5.

존 레논은 "천국이 없다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노래한다. 그는 역시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현대인들 대부분은 "천국이 없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한 부류는 상상할 필요가 없고,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천국을 상상할 여유가 없다.


6.

한때 집 장사를 했던 숙부 밑에서 자랐기에 나는 사업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집 장사라는 것이 큰 돈 들여서 큰 돈 버는 일이라 어떤 의미에선 큰 돈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내 궁핍해야 하고, 정작 돈이 들어왔을 때는 그 돈으로 다음 집을 지을 터와 자금을 비축해야 한다. 그래서 숙모는 가끔씩 월급쟁이가 최고란 말을 입에 올렸다. 

내가 사업가가 되지 못하고, 혹은 자영업자의 일종인 전업 글쟁이가 되지 못하고, 월급쟁이로 사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그 영향이다. 나는 예측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다. 언제고 죽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두렵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인터넷으로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상대에게 호감을 갖고, 그와 넷상으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주인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는 짐승은 다시 누군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살게 되더라도 늘 끊임없이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친한 사람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두고 있다. 아무런 볼일이 없어도 상대방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람, 그래서 문득 아무런 이유 없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게 되고, 목소리 한 번 듣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친할 친(親)'에 '볼견(見)'이 들어 있는 이유는 친하기 위해선 자신을 먼저 상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부모가 많은 자식들을 일일이 보살펴주듯 내가 그를 헤아리고, 보살펴 준다는 의미다. 그래서 친할 친의 반대말은 '성길 소(疎)'이다. 친하다는 건 편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를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헤아려 줄 의지가 있는지를 드러내는 말이다.


8.

노예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치러진 미국 시민전쟁(남북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전쟁비용)은 모두 66억 달러에 달한다. 이 정도 금액이면 당시 시가로 노예를 모두 사서 자유민으로 만든 뒤 그들이 지난 100년 동안 체불한 임금을 모두 지급하고도, 해방된 흑인 노예 한 가정당 40에이커의 농장과 노새 한 마리를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필경 경제학자들은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전쟁 비용은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경제의 순환구조로 보자면 사회적으로 적절한 비용으로 지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예들에게 자유와 토지를 제공하고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건 종종 잊혀져 버린다. 전쟁은 평화보다 더 많은 걸 제공한다. 누군가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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