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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Tempus Edax Rerum

빈곤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1. 절대 빈곤과 상대 빈곤에 대한 접근

사회학(직업사회학)자들은 빈곤을 경제적으로 정의할 것인가, 문화적으로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 절대 빈곤과 상대 빈곤이라는 지표를 제공한다. 절대 빈곤은 인간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생계형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가정을 말하고, 상대 빈곤은 경제적 결핍만으로 빈곤을 정의한다는 것은 인간의 필요가 동일하다는 가정을 하는 것인데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 증거로 제시되는 것이 "가장 소득이 적은 가정도 20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1979년에 비해 1994년에 비디오, 중앙 난방, 세탁기, 자동차, 전화, 냉장고의 이용 인구가 80%가 넘는다)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지표이다. 때문에 빈곤은 문화적으로, 또는 '사회 발전'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그 훨씬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회가 현대 '산업사회'라는 점이다. 이반 일리히는 현대 산업사회는 "희생자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사회"라고 말한다. 이는 사회는 발전하는데 왜 사회 양극화는 심화되는가, 왜 부자 나라일수록 빈곤층은 확대되는가와 같은 의문을 풀어준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빈곤층, 혹은 준빈곤층의 고혈(저임금과 실업 등)을 빨아먹어야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빈곤층은 얼마든지 빈곤층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또한 그들을 사회로부터 배제시켜야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발전이고 성장이고 진화이다"라는 사고패턴을 사회 속에 살아가는 개인은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아왔다는 점이다. 능력있는 사람이 잘사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이러한 예이다. 문제는 그 '능력'이란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 산업사회가 원하는 인간상과 일치하는 것이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빈곤문제는 단순히 사회'사업', 복지'사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했을 때는 절대 빈곤을 말하는 것도 현대 산업사회가 잘 굴러가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사회적 불평등의 한 예를 짚어내는 것밖에 아니지 않을까. 문제는 이러한 만연된 '가치관의 전복'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사고패턴이 당연하다는 전제하에서 우리는 앞서 절대 빈곤, 상대 빈곤을 얘기할 수 있을까. 있을까요. 아무 이야기여도 좋으니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발제하려고 하다가 여기서 턱 막혔습니다.

*

빈곤의 문제와 상관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역으로 생각해본다는 점에서....
하나는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하나는 역으로 중요한 점이란 생각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보겠습니다.


이야기 1.

“왕이시여, 로마를 이긴 후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이탈리아를 정복해야지!”
“그 후에는요?”
“시칠리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그러면 전쟁이 끝납니까?”
“물론 아니지. 그것은 보다 위대한 일들을 위한 시작과 전주곡에 불과하다. 리비아가 남아 있고 카르타고도 그리 멀지 않으니 말이야. 그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 이상 적이 남아 있지 않게 될 걸세.”
“분명히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 후엔 무엇을 하지요?”
“그 후에는 조용히 인생을 즐겨야지.”
“그렇다면 이곳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이탈리아로 건너가려고 준비할 때 피로스와 그의 부하가 나눈 대화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20)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든 것은 프로테스탄트(신교도)들이었으며 그들은 근면과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아 자신의 직업을 신에게 부여받은 ‘천직(天職)’이라 생각하여 신앙생활을 하듯 자기 목적적으로 노동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신도들에게 부를 얻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했다. “만약 하느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 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실 때 하느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와 죄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려고 힘써도 된다.”

물론 서구의 근대인들이 모두 프로테스탄트들은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자본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일하기 위해 일한다는 마음가짐은 자본주의의 정신이 중산계급에 침투하게 되고, 다시 노동자 계급에 침투하여 근대에 이르러 가정과 노동 현장이 분리되면서 노동자가 마치 수도사들이 삼종 기도하듯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일을 한다는 생활 태도가 몸에 배게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란 세속화된 기독교의 형태, 자본가는 세속화된 수도원 원장, 노동자는 세속화된 수도사라 할 수 있다. 자본의 축적 과정이 신의 소명을 받드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자본의 은총이기도 하지만 제품을 만들기만 하고 스스로 소비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정신은 - 생산된 제품에 대해 계속 금욕적이라고 한다면 - 문제를 발생시킨다.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국가)가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근대화란 어떤 의미에선 결국 노동을 해서 제품을 생산하기만 하고 소비하지 않는 - 소비는 타민족, 타국민에게 강제시키는 - 국가가 세계를 제패한 역사를 말한다.

만일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이 없다면, 즉 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그렇게 모은 돈을 써서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만 있다면 - 피로스 왕과 그의 부하가 나눈 대화처럼 - 자본주의 사회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생산과 소비는 국내에서 나름대로 자급자족에 만족하게 될 것이고, 특별히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면 타국을 침략하거나 착취할 필요도 없으며 대자본이 축적되어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할 가능성도 없다.

예컨대 어떤 선진국이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산업을 증진시키고 자본주의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할 때, 선진국은 원주민들에게 그들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사치품들을 제공(사치품을 생필품화)하여 맛을 들인 후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이들 고용된 원주민들의 의식 속에 ‘자본주의 정신’이 깃들어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원주민들이 한 달분 급료를 받은 뒤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는다면 자본에 의한 고용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화 과정에선 필히 기독교화 과정이 병행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맑스나 니체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티즘 혹은 자본주의 정신(노동)이란 결국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데도 일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이야기2.

다른 한 편으로 스미스의 <국부론>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분석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들의 이윤추구적 경제활동이 결과적으로 전체 사회의 가장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스미스는 이윤추구적 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산업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게 되도록 산업을 지휘함으로써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노린다. 그리고 다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추구하는 결과를 낳는다.”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의도하지만, 전체적인 효과는 전체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이것이 바로 <국부론>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그는 이러한 통찰에 빠져서 안 될 요소들로, 경쟁시장, 분업, 자기이해의 추구를 들고 있다.

스미스는 분업이 한사람의 생산물을 1-2개에서 약4천 8백 개로 증가시킨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과업의 반복으로 발생되는 숙련도의 증가, 시간절약, 정밀한 작업분화를 고무하는 전용 기계의 발명이 바로 그것이다.

분업이 상품의 범위와 지위에 미치는 영향은 놀랄만하다.

전 세계적 분업의 결과 문명국의 평범한 기술자나 노동자조차도 다른 노동자들에 의해 투입된 수천 가지의 노동을 표상하는 광범위한 상품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노동자도 그가 소비하는 기본적인 물품을 생산하는데 있어 방대한 전 세계적 분업에 포함됨을 당연시 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스미스가 일용노동자 조차도 전 세계적인 분업의 숨겨진 수혜자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분업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정도는 시장의 크기에 달려 있다.

스미스는 보다 큰 도시 중심지로의 이동, 운송과 교통의 개선을 통해 생산적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또한 스미스의 주장은 지역적 수준과 국제적 수준 양자에서 시장 개방을 위한 강력한 공격 수단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시장이 커지면 커질수록 분업의 증대와 생산성 향상의 가능성이 더욱더 커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스미스는 새로운 시장 지향적 상업과 이후에 전개된 산업혁명이라는 사건을 예견하고 있다는 관점을 가능하게 한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생산 확대를 위해 자본을 절약하고 증대시킬 필요가 있다는 맥락에서 자기이해를 논한다. 국부론에서의 자기이해는 경제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다소 협소하게 논의된다.

스미스는 열망이라는 것이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개인들의 욕망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좀 더 나은 조건을 원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기는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 허영심이라고 주장 한다. 스미스는 “우리가 우리의 조건을 개선함으로써 얻는 잇점들은 공감, 만족, 인정 속에서 관찰되고 주의를 끌며 주목받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편안함이나 쾌락이 아니라 허영심이다”라고 말한다.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며, 사람들은 흔히 재화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부가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적 존경과 평판 때문에 물질적 재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나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그러나 분업에 대한 스미스의 논의는 자본투자가 거의 없는 노동집약적 제조업에 기반하여 구성된 것이었다. 그가 분업의 예로 말한 핀 제조업 공장은 단지 10명만을 고용했다. 기계로 핀을 생산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선 이후였다. 핀 제조에 나타난 엄청난 노동생산성 증가는 분업이 아니라 바로 기계적 생산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스미스의 설명에 포함되지 못한 것은 분업에 대한 기계적 생산의 영향력이다.


이야기3.

첫째 이야기는 생산구조가 어떻게 개인이나 사회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고 규정하는가? 의 문제(마르크스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둘째 이야기는 분업(혹은 산업화)을 통해 "일용노동자조차도 전 세계적인 분업의 숨겨진 수혜자"라는 점인데, 이 이야기는 산업화된(선진) 사회의 노동자는 비디오, 중앙 난방, 세탁기, 자동차, 전화, 냉장고를 이용하지 못하는 후진사회의 엘리트보다 물질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적인 풍요와 심리적인 풍요와 행복 사이의 상관 관계입니다. 삶의 질이란 측면에서 미국의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은 아프리카 가나의 가난한 의사보다 몇 십배에 가까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행복의 질은 아프리카 가나의 가난한 의사보다 낮더라는 통계가 잘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말해 미국 거지는 아프리카의 의사보다 풍요롭지만 불행한 대신 아프리카의 의사는 미국 거지보다 가난하지만 사회적 존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람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절대빈곤'이란 개념은 어느 의미에서 보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유지를 위한 필요악입니다. 왜 그런가? 현대 사회의 생산성은 이미 어느 누구도 절대빈곤 상황에서 헤매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생산력과 생산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지요.(이 부분은 "유리병편지"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책 "세계가 만일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을 참조해보세요.)

여기서 다시 아담 스미스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며, 사람들은 흔히 재화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부가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적 존경과 평판 때문에 물질적 재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다.라는 이야기인 듯 합니다.  

이반 일리히의 말대로 자본주의 체제는 체제 자체로 언제나 희생자를 요구하는 시스템이며, 사회적 부와 재화의 생산을 규정하는데 있어 일정하게 편협한 시스템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노동자 재생산 시스템에 대해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이윤을 획득합니다. 첫째. 여성의 가사 노동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둘째. 노동자 한 명이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셋째. 생산자와 소비자를 재생산하는 사회를 유지하는 비용을 턱없이 적게 부담하거나 최대한 회피합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사회적 재생산 구조를 유지하는 비용을 개인에게 부담시키거나 공공영역에 떠넘깁니다. 그런데 노동자 혹은 개인은 그것을 응당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으로 생각하도록 교육받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이자, 동시에 그가 비워둔 공간이며 제가 공부하고 있는 일상'문화'의 영역(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이 혁명의 공간이며 동시에 혁명이 좌절하는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일상, 일상 영역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현재 매우 높은 편이고, 이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르페브르의 제법 오래된 고전인 "현대 세계의 일상성"은 여전히 이 분야에 대한 좋은 지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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