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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Tempus Edax Rerum

執中無權



孟子曰  楊子는 取爲我하니 拔一毛而利天下라도 不爲也하니라. 墨子는 兼愛하니 摩頂放踵이라도 利天下인댄 爲之하니라 子莫은 執中하니 執中이 爲近之나 執中無權이 猶執一也니라 所惡執一者는 爲其賊道也니 擧一而廢百也니라.- 『맹자(孟子)』, 진심(盡心)편, 제26장

맹자가 이르기를 “양자는 오로지 나를 위한다는 설을 주장하니 한 오라기의 털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더라도 하지 않았다. 묵자는 겸애하였으니 이마를 갈아 발뒤꿈치에 이르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하였다. 자막은 중간을 붙들었으니, 중간을 취하는 것이 바른 길(진리)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중간만을 붙들고 저울질함이 없으면 오히려 한 가지만 고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한 가지만 고집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바른 길을 해치기 때문이니, 한 가지를 붙들고서 백 가지를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 신영복 선생은 맹자 진심편에 나오는 “執中無權”이란 말의 뜻을 “저울 추를 권(權)이라 합니다. 권은 권력이 아니라 균형입니다. 가운데를 잡으면 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해석했는데, 불민(不敏)한 탓인지 신영복 선생이 하신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더군요. 신영복 선생의 말씀은 “執中無權”을 직역하여 ‘가운데를 잡으면 무게 추가 필요 없다’는 뜻인 듯싶은데, 달리 보면 말 그대로 ‘가운데를 잡으면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되니까요. 그렇게 이해한다면 신영복 선생은 맹자가 미워해야 한다고 말한 노나라의 현인이었던 ‘자막’이 되는 셈입니다(음, 설마 신영복 선생이 그런 뜻으로 한 말씀은 아닌 듯 한데, "처음처럼"에서 나온 말로 알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좀더 자세한 부연을 찾을 수가 없네요).

맹자의 핵심 주장 중 하나가 ‘중용(中庸)’인데 ‘執中無權’의 이야기는 그런 맹자의 주장 중 핵심인 중용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맹자는 노나라의 현인이었던 자막이 양자의 이기주의와 묵자의 겸애주의라는 양 극단론을 피하고 중도를 주장(執中)한 것은 겉으로 보았을 때는 바른 길(中庸之道)을 취한 것으로 보이지만, 양측 주장을 저울질(權)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무조건 가운데를 취하는 것은 바른 중용의 길이 아닌데도 바른 길인 것처럼 보이는 ‘사이비(似而非)’라 특히 더 위험하고, 도리어 인의를 해치는 것이란 뜻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중용이란 그저 양 극단 사이에서 가운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양 극단의 뜻을 두루 헤아려 옳고 그름을 살핀 연후에 가능하다는 말인 것이죠. 요즘 같은 시대, 중용을 취한다는 건 참 어려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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