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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Tempus Edax Rerum

매혹(魅惑; 도깨비 매 / 미혹할 혹)의 재발견

매혹(魅惑)의 매(魅)는 '요괴(妖怪)' 혹은 '도깨비'라 풀이되는 한자입니다. '매'란 중국인들의 전설상으로는 존재했던 가상의 짐승으로  '魅는 사람의 얼굴이지만 짐승의 몸에 네다리를 하고 있는데 사람을 잘 호린다.'라고 설명하고 있지요.  

우리가 흔히 백년 묵은 여우, 구미호 같은 것을 지칭할 때 쓰는 한자어가 이른바 매호(魅狐)인데, 이와같이 매'魅'란 본래 노물(老物), 즉 오래된 것의 정령(精靈)을 말합니다. 가끔 외국의 판타지물에 현혹된 이들이 외국의 정령들 이름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에 정통해 있거나 그것을 홈페이지의 주요 컨텐츠로 삼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에 비해서 동양의 판타지적인 컨텐츠들 역시 양이나 질이란 점에서 결코 꿀리지 않는데 아쉬움이 좀 있군요.

이 도깨비 매자가 들어가는 말들로는 매혹, 말고도, 매력(魅力), 매료(魅了)라는 말이 있지요. 도깨비에게 홀린 것처럼 사람을 끄는 힘을 매력, 넋이 나간 것처럼 완전히 홀린 상태를 매료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매혹이라는 것이 낡은 것에 대한 이끌림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여인에게 매혹당했다거나, 매혹적인 여인이라고 했을 때 사전적인 의미던 통상적인 말의 사용과 상관없이 제게 매혹적인 여인이란 서정주의 시에 나오는 국화 앞에 서 있는 누님 연배의 여인을 의미하며, 매혹적인 예술작품이란 젊은 작가의 패기만만한 작품이 아닌 적당히 곰삭고, 저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뒤늦게 철나면서 그 맛을 새로 깨우친 작품들을 말하는 것이 될 겁니다.

남자의 사랑이 가장 치열한 순간은 사실 '惑'의 상황일 겁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에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 또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혹입니다. 의심이 나서 정신이 헷갈린다는 뜻의 의혹(疑惑),세상 사람을 현혹시켜 속인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혹(惑)이 바로 그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매혹이란 처음 만난 상대나 이제 막 알게 된 사람, 작품에 사용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게 매혹이란 이제 막 목욕하고 나온 섹쉬한 미녀가 아니라 늘상 밥상머리에서 오래도록 지켜봐 온 제 아내의 입술을 훔치고 싶은, 어느날 제 마음을 아리까리하게 만드는 그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죠. 혹은 오래도록 보아왔으나 그 의미가 아리까리하던 싯구가 해독되던 순간. 아무 생각없이 지나쳐 온 사물, 사건의 의미가 명징해지는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찬란하게 빛나는 매혹적인 순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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