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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외국시

베르톨트 브레히트 - 악한 자의 가면

악한 자의 가면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 방 벽에는 일본제 목제품인
황금색 칠을 한 악마의 가면이 걸려 있다.
그 불거져 나온 이마의 핏줄을 보고 있노라면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출전 : 악한 자의 가면/  브레히트/ 김길웅 옮김/ 청담사/ 1991


*

 
새해 벽두에 마음을 잡아끄는 시가 있어 옮겨 보았다. 비록 매우 짧은 시이지만 브레히트적인 위트와 풍자가 녹아있어 읽는 재미가 제법 삼삼하다. 늘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가르침들을 받아왔고,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막상 그리 산다는 일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통이 필요한가. 그런데 브레히트는 정색을 하고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라고 되묻는다. 황금가면을 뒤집어 쓴 악의 번드르한 얼굴은 사실 선과 악을 불문하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힘이 든다는 고백같이 들린다. 악마도 오죽하면 가면을 써야했겠나. 가면을 쓰고서도 인상 쓰느라 불거져 나온, 그것이 아니라면 악한 표정을 짓노라면 저도 모르게 이마의 핏줄이 불거져 나온다는 일본 사람들의 표현력도 가상하지만, 방 벽에 걸려 있는 악마의 가면을 보고 저런 시를 지을 수 있는 브레히트의 감각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경원시(敬遠視)하다"는 말이 있다. 본래 이 말은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제자 번지(樊遲)가 "지(知)란 어떤 것이냐”고 공자께 묻자 공자가 말하길 "백성의 도리(義)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知)라고 말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라고 답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본래의 말 뜻은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말이지만 오늘날엔 공경의 개념은 사라지고, 낮추어 보거나 멀리한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 하지만 속으로는 멀리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물론 이때 공자의 태도는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랴(未知生 焉知死)"라는 태도의 연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귀신의 존재 (사후 세계)자체는 인정하되, 그보다는 현세에서의 도덕적 완성을 기하는 데 인간 자신의 노력을 쏟아붓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유학이 지닌 태도는 서구의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전통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다만 공자의 이런 태도가 서구의 인본주의, 휴머니즘과 같은 각박함으로 흐르지 않은 것은 동양의 전통적인 인식, 생사여일(生死如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사여일", 말그대로 하자면 '삶과 죽음이 하나'란 것인데, 삶과 죽음의 이치가 하나이므로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 죽음 이후가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선과 악도 이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선의 의미인지 모르는 채, 선하게 살겠다는 다짐만으로는 선하게 살 수 없으며 스스로 선한 행위로 믿고 행한 일조차 결과적으로 악을 돕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경의 어떤 가르침에서는 진리란 "깨우친 자에게는 진리이지만 깨우치지 못한 자 즉 미(迷)한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니라 장애"가 되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공자는 귀신에 대한 경원의 태도를, 미혹되지 않는[不感]의 지혜로움(知)으로 파악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선과 악이 어찌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항상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쉴러가 말하길 "지나치게 반성하는 사람은 성취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는데, 스스로 늘 경원하는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우리들은 미오(迷吾)의 세계에 빠진 생의 미아(迷兒)가 될 수밖에 없다.



▶ 일본 전통 연희인 '노(能)'는 기본적으로 가면극이지만 등장인물 전원이 가면을 쓰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면을 쓰지 않고 출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도 얼굴이 마치 가면인양 연기한다. '노'에 사용되는 가면의 종류는 200개 이상이지만 크게 6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 데 오키나(翁)계, 죠(尉)계, 남성계, 여성계, 귀신계, 원령계가 그것이다. 흔히 악마의 가면이라고 하는 위의 가면은 원령계의 대표적인 가면으로 전쟁으로 원통한 죽음을 맞이한 무장이나 살생을 해서 사후에 성불할 수 없는 망자 등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한다. 보통 눈이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과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절로 배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