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외국시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바람에 지지 않고

바람에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외국 시인의 시는 원래의 언어로 낭송되는 것을 듣고 싶었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  <바람에 지지 않고>는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에서 해마다 연말에 개최하는 송년회에서 일본인 평화운동가 두 분이 낭송하는 것을 직접 들을 일이 있었다. 시의 내용이야 두 말 할 것 없이 좋았지만 두 분이 한 번은 일본어로 한 번은 한국어로 번갈아가며 낭송하는 것이 얼마나 풋풋하게 웃기던지 시를 낭송하던 본인들은 물론 낭송을 진중하게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던 청중들마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차라리 일본어로 전부 낭송한 뒤에 다시 한국어로 낭송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다닐 때 스스로를 '바보'를 자임하는 친구가 두 명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나보다 두어 살이 많았는데 두 사람 모두 사고로 죽었다. 대학 동기들이 그 두 사람이 생전에 썼던 습작시와 에세이들을 묶고, 자신들이 추도글 한두 편을 보태 유고시집을 냈는데, 나는 두 번 모두 참가하지 않았다. 한 친구와는 대학 다닐 때 매우 절친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발간하는데 돈은 보탰지만 글은 보태지 않았다.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추모한다는 것이 부질 없게 여겨진 탓이 컸다.

어려서 가까운 혈육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한 탓도 있을 것이고, 평소 당신과 가까웠던 지인들이 조문와서 살뜰하게 해주었던 위로의 말씀들에 배반당한 기억이 있는 탓이겠지만 나는 장례식장에서 건네는 위로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위로는 그저 위로일 뿐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남겨진 두 자식은 장례식장에서의 절절한 위로보다 좀더 현실적인 도움이 절실했다. 나는 스스로를 바보라 칭하는 이들에게 연민과 동시에 두려움이 든다. 스스로 바보라 말하기에, 바보처럼 살려하고, 바보 같은 짓을 종종 벌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보라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간보다 스스로를 적당히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더 편하다. 바보같이 착한 것들은 꼭 남에게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미야자와 겐지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더라도 칭찬도,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나 보다. 어떤 사람이 나보고 '바보'라고 했다. 있는 마음, 없는 마음 죄다 퍼주면서도 결국 제 실속은 하나도 챙기지 못한다고 했다.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바보가 되기란 정말 어렵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그 분에게 그와 같은 칭찬을 듣기엔 너무나 많이 모자란 사람이란 것을... 그러나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한 계속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