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노래방에 갔을 때 더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신곡 코너가 아닌 '가나다'순 어딘가를 뒤져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가끔 어쩌다 알바생들이랑 일을 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들이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세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살라고 충고하고 있는 나를 느끼면서 혼자 속으로 웃었다.
남자들은 영원히 철이 들지 않는다.
동서양의 모든 여자들이 느끼는 부분이다. 영원히 철 들지 않는 남자들의 삶은 사실 비슷하다. 특히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더욱더 비슷하게 산다. 고추 달고 태어나서 가족의 환호를 받는 것은 잠시 그 뒤부터 내내 고추달린 값을 해야 한다. 남자니까 울어도 안 되고, 남자니까 말을 많이 해도 안 되고, 남자니까 남에게 맞고 다녀도 안 되고, 남자니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도맡아야 하고... 여자들도 할 말은 많겠고, 이재무 시인이 말하는 저 감정이 여성이라고 해당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도 고추 달린 남자라서 그냥 남자 이야기만 하는 거다.
남자로 살아보니 고등학교 졸업한 뒤의 인생은 그냥 쭈욱 직장생활 내지는 돈벌이에 연관된 것들뿐이었다. 한 번도 그 궤도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산다. 아이들이 죽을동살동 대학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단지 대학을 나와야 취업이 잘 되고, 사람 취급 받기 때문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4년의 유예기간을 번다는 거, 어쩌면 그게 더 간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대학에 들어가기 전 3년간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이 당시엔 너무나 비참하고 서러웠지만 이제 는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자유로운 시간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물론 그 시간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거절하겠지만...).
그리고 원통하고 분하기도 하다. 당시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어디 한둘이었겠냐만 외부적인 요인을 제외하고도, 막 살아버리고 싶었던 나의 충동을 가로막은 것은 정작 나 자신이기도 했다. 난 좀더 막 살아버릴 수 있었는데, 내 안의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갈망은 끝끝내 남았다. 시인은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이 꼬드긴다고 말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햇살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한 햇살은 아니다. 이재무 시인이 말하는 '햇살'은 젊은 시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 일상에 가로막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뜻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이란 영원히 철 들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일찌감치 철 들어버린 남자는 또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다. 철 없는 남자는 꿈꾸는 남자고, 꿈꾸는 남자가 못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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