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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천양희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은은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스테인레스처럼 녹 하나 슬지 않는 반듯함도 아니고, 크롬도금처럼 윤기와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인위적인 광택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오랜 세월이 주는 은은한 광택이다. 은은하다.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아니하고 어슴푸레하며 흐릿하다. 그러나 그 흐릿함이 주는 온기와 정감은 허기진 위장을 채워주는 장국밥, 할머니가 내어주시는 달지 않은 감주, 어머니가 밥을 푸며 먼저 건네주는 말랑말랑한 누룽지 조각이다.

어쩐지 물끄러미.
시인이 길을 가다 멈춰서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을 그 사람들.

'구두 닦는 사람, 창문 닦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부처의 눈엔 부처가 보이고, 보살의 눈엔 보살이 보인다는, 우리도 익히 알아서, 이미 세상의 때가 묻을데로 묻어서 시인의 웬만한 온기쯤 '가비압게' 개구라로 튕겨낼 수 있는 내공의 빈틈을 겨냥한다.


그러나 시인의 어조는 세상은 다 그런 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라는 사파무공의 신조를 깨뜨리고, 파헤치는 날카로운 비검이 아니라 은은하게 스며드는 달빛 같은 것이다. 섣달 그믐밤길을 걸어본 이들은 안다. 보름달이 휘엉청 떠오른 밤길이 얼마나 환한지... 얼마나 포근한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빛을 내도록 도와주는 깊은 밤 한 줄기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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