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오키나와 유랑 중인 우리 권혁태 교수님(황해문화 편집위원)이 그리워져 오래전에 즐겨찾기 해놓았던 권혁태 선생님의 블로그에 갔더니 블로그 제호가 "몽상가의 세상이야기"라 혼자 빙긋 웃었다. 선생님께 "Jeon Sungwon ^^ 오랜만에 예전의 선생님 홈피를 다시 방문해서 살펴봤어요. 블로그 이름에 들어있는 '몽상가'란 호명 방식을 보며 문득 여러 생각이 들더라구요."라고 했더니 "권혁태 Jeon Sungwon '몽상가'라는 호명에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블로그 다시 할까 생각 중입니다"라고 답을 하셔서 어제 퇴근 무렵에 잠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았다.
'몽상가'와 '세상이야기'는 그냥 보면 그럭저럭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 에리히 프롬의 견해를 빌리면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작명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무의식적으로는 절망하면서도 낙관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경우 모든 환상을 버리고 실제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어 어려움을 완전히 인식하였을 때 비로소 그는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침착성이 눈뜬 공상가와 꿈꾸는 몽상가를 구별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아마도 몽상가와 공상가에 대한 이야기 중 우리에게는 가장 익숙한 이야기일 게다.
뒤이어 그는 "꿈꾸는 몽상가"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어떠한 것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인간들이나 실천 없이 마냥 행복을 바라는 무능한 인간들이고, "눈뜬 공상가"는 현실과 자신의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 상황에 맞게 방법을 찾아 해결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인간 그리하여 현실을 자신의 의지대로 바꾸는 합리적인 인간들이라고 말하면서 공상가를 긍정하고, 몽상가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의견에 별로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에서 내 나름의 이야기로 출발해 보면 이렇다.
(무)의식적으로는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겉으로는 낙관주의의 가면을 쓰고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이고, 현실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절망하고, 이것을 드러내지만 적응도, 실천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냉소주의자',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자신이 일단 의식적으로 노력하면(낙관하여)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에리히 프롬은 '눈뜬 공상가'라고 했지만 나는 이들을 다른 말로 '혁명가' 혹은 '급진주의자'라 부른다.
에리히 프롬은 공상가와 몽상가의 차이를 환상의 극복 유무에 두었는데, 그에 따르면 눈뜬 공상가는 환상을 극복한 사람이고, 몽상가는 환상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상가란 현실에 절망하지만 루쉰(魯迅)의 말 "絶望之為虚妄、正与希望相同(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한 것처럼)"처럼 손쉽게 희망(낙관)이나 절망(비관)하거나 현실에 적응하거나 이를 개선하려는 실천에 나서는 대신 바라보는 사람(조력자)이다. 몽상가들은 그들과 어느 면에선 흡사하지만 너무나 다른 존재인 '눈뜬 공상가'를 대하는 방식(온도차)을 통해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냉소주의자와 몽상가를 구분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차가운 몽상가라 할 수 있는 냉소주의자는 ‘눈뜬 공상가’들도 냉소의 대상으로 삼지만 몽상가들은 ‘눈뜬 공상가’들의 낙관이 그들의 속도와 가벼움으로 인해 아예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준다. 에리히 프롬은 몽상가들의 환상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나는 이 환상이야 말로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이 아닐까 싶다(혹시 선생님이 장 르누아르 감독의 이 영화를 아직 못 보셨다면 권하고 싶은 영화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면 그 순간 모든 함의도 사라져버릴 거다.
비록 권혁태 선생님은 내게 한 번은 '또라이', 또 한 번은 '싸가지'라는 충격적인 정의를 내리고 ‘껄껄’ 웃었지만(앞의 말은 성공회대 미디어 특강 강사로 초대된 나를 학생들 앞에서 그렇게, 뒤의 말은 오키나와 가기 전에 가졌던 술자리에서... 저렇게 말해놓고 두 번 다 특유의 껄껄 웃음을... ㅋㅋ ), 나는 권혁태 선생을 떠올리면 68혁명 당시 거리의 민중들이 벽에 써놓았다는 낙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Don't liberate me! I'll take care of that.
(나를 해방시키지마! 내가 알아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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