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강간(가족 내 성폭력)’이라고 써서 원고를 보내면 편집자가 오타인 줄 알고 ‘근친상간’으로 바꾸어, 나도 모르게 활자화되는 경우를 수없이 겪었다. 내가 장애인의 ‘상대어’를 비장애인이라고 쓰면 ‘정상인’이나 ‘일반인’으로 고친 후, “이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한다. 성 판매 여성 혹은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가리켜 불가피하게 ‘창녀’라고 표현할 때가 있는데, 작은따옴표를 삭제해 버린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 논의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행위다. 여성과 성에 대한 기존의 의미가 고수되는 것이다. - "[정희진의 낯선사이]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중에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2142125025&code=990100
1. 게이트키핑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사이에서
정희진 선생이 이 칼럼에서 이야기하려는 부분이 단지 어떤 편집자의 무능을 지적하려는 바가 아닌 줄 알면서도 막상 읽는 입장에선 편집자로서 가장 아프고 예민하게 느끼는 부분을 뼈아프게 지적받는 기분이 든다.
편집자의 역할과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능으로 평가하는 것이 이른바 ‘게이트 키퍼’의 역할을 말하는데 그냥 우리말로 옮기면 ‘문지기’ 구실이다. 편집자는 필자와 독자 사이의 가교 구실을 하지만 기본적으론 독자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어있다. 상업적인 의미에서 독자는 곧 소비자이기 때문에 출판사에 속한 편집자는 필자와 협력하여 좋은 상품(글 혹은 책)을 만드는 동업자라 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동업자치곤 대등할 수 없는 조건이며, 필자와의 관계에서 갑을 관계이므로 속으론 까칠하더라도 겉으론 상냥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필자가 편집자의 이런 겉모습만 본다면 편집자의 진짜 기능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독자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독자에게 필자의 글이 어떻게 전해질지 그 출판사 혹은 그 잡지가 스스로 독자라고 상정하는 평균적인 독자의 수준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 편집자의 진짜 기능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자신의 담당 편집자를 업무 대리인 정도로 생각하기보다 가상의 독자로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다. 그러므로 필자와 편집자 사이엔 언제나 묘한 긴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때때로 우리 사회에서 글이란 교수라는 자격증을 획득해야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간혹 학력 자본은 있을지라도 인격이나 필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 어쩌면 고학력이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자신의 능력보다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현상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학력이란 그저 그 사람의 스펙(specification)일 뿐이지 그 사람의 캐파(capacity)와는 무관하며 인격과는 더욱더 무관한 일이다 - 필자도 있기 마련이고, 그와 반대로 한 문장 한 문장 글쓴이의 피땀이 녹아있는 사유의 산물을 다루면서 그에 대한 고민이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편집자들도 종종 있다. 필자 마다 자신의 스타일이 있고, 문장에 어떤 버릇이 있는 것처럼 편집자들도 나름의 원칙이나 고치기 힘든 버릇이 있는데, 다른 말로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문장에 대한 이데아가 있는 법이다.
간혹 어떤 편집자는 다소 거칠긴 하더라도 글쓴이의 개성이 살아있는 비범한 문장을 자신의 기준에 맞춰 평범하고 매력 없는 문장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많이 봤다. 이럴 때 편집자는 붉은 펜을 든 강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일지 모른다. 원고를 전체 틀에서 보지 못하고 단편적인 부분에만 집중해서 보면 나오는 현상이기도 하고, 글쓴이가 어떤 의도와 생각으로 이 글을 썼는지 전체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일면적인 부분만 살펴 기계적으로 수정하다 보면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가끔 저자의 문체를 이해 못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문장도 단지 길다는 이유만으로 멋대로 토막쳐버리는 편집자들도 많이 봐왔는데, 최근 편집자들 가운데에는 단문 선호 경향이 많아서(또는 실수가 두려워서) 중문이나 복문을 무슨 오문이나 비문처럼 대하는 경향도 있다.
2.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부자이자 편집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자화자찬의 우를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황해문화”는 한국 잡지사에서 제법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우선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가 아니란 점이 그렇고, 계간지라는 매체가 학술전문지의 성격을 갖기 쉬운데 학술전문지라기 보다는 저널의 성격이 좀더 강하다는 점이 그렇다. 엄밀하게 말하면 논문과 저널의 중간자적 성격을 표방하고 있으며 내부의 편집방향이나 지향점 또한 그렇다. 약간 논외의 이야기로 잡지, 특히 계간지의 경우에 고정필자 혹은 회전문 필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정한 필자군이 형성되어 이들을 일종의 에꼴(학파)이라고 지칭할 만한 그룹이 형성되기도 하는데, “황해문화”의 경우엔 그런 에꼴이 존재하지 않는다.
“황해문화”가 서울(중심)이 아닌 인천(지역, 주변부)에서 발간되는 특성도 있고, 애초부터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비주류 지향을 가진 편집주간, 편집위원회 선생들 덕분이기도 할 것이지만 기본적으론 “황해문화”가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않)기 때문이다. 에꼴을 형성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단행본 출판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황해문화”는 단행본 출판을 하지 않기에 에꼴의 지식인들에게 나눠줄 떡고물이 생길 일이 없으며, 빵을 배분할 능력이 없으니 설령 우리가 원하더라도 그런 권력은 생길 수 없는 구조다.
간혹 주변에서 “황해문화”도 단행본 출판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슬쩍 웃곤 한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런데 하나는 “황해문화”란 잡지는 애초부터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잡지가 아니며, 두 번째는 편집노동자로서 이 열악한 환경(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1년에 “황해문화” 딱 4권만 뽑아내는 줄 안다)에 단행본 출간까지 감당할 능력이 없다. “황해문화”는 ‘새얼문화재단’이라는 인천 시민들이 기금을 만들어 준 지역의 시민문화재단의 지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구조적으로 상업출판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매체 자체가 침몰하는 타이타닉의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인터넷 공간을 통해 늘 정기구독자를 애타게 찾는다. “황해문화”에는 창간 이래 지금까지 영업담당자가 없기 때문에 편집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정기구독자를 만들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다. 그런 덕분인지 몰라도 “황해문화”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계간지 중에서 모 계간지를 제외하곤 발행 부수 2위의 잡지가 되었다. 이제 올연말이면 “황해문화”도 창간 20주년을 맞이한다. “황해문화”가 걸어온 20년의 역사는 권력의 길, 성공의 길을 멀리 우회하는 노선이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이었다고 감히 평가해 본다.
에꼴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 시작한 이야기이니 “황해문화” 편집회의 분위기를 조금 옮겨보면 이렇다. 나는 불경스럽게도 가끔 우리 편집위원들을 ‘꼴통들’이라고 칭하는데 - 그건 애초에 나부터 그런 꼴통에 속하는 편이니 - 그건 편집위원들이 성향 탓일 수도 있겠다. “황해문화”의 편집위원회는 이념적 스펙트럼은 물론 각자의 개성도 상당히 다채로운 편이라 차마 남들에게 공개할 수 없을 만큼 편집회의 분위기는 난장(亂場)에 가깝다.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안에 뭔가 진검 승부가 이루어지는 기분도 드는 터라 화기애매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좌충우돌, 우충좌돌하는 묘한 긴장감 속에 때때로 불꽃이 튄다. 같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 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벗도 없으며 동지도 없다는 식으로 나가다보니 살짝 위험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큰 충돌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어쨌든 그런 분위기 덕분에 “황해문화”는 구성이나 필자 선정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편이다.
잡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특집의 지향점은 현실이고, 이론과 현실이 적절하게 교차하길 바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낯익고 익숙한 필자가 선정되는 경우가 다른 매체에 비하면 적은 편이고, 이른바 교수만으로 필진이 구성되는 경우도 적은 편이다. 또 편집위원들 역시 낯익은 필자보다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는 것을 잡지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연구소의 연구를 위한 연구원 보다는 현장 활동가를 좀더 선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그것이 편집자로서는 더 힘든 일이기도 한데 때로 글쓰기 훈련이 덜된 필자의 원고를 받아 고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필력보다는 그 바닥에서 쌓은 경험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또 나 자신이 편집자 마인드 못지않게 활동가 마인드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내 가슴을 덥히지 못하는 원고를 받아 교정보는 것보다는 거칠어도 결기 있는 문장을 읽고 고치는 편을 선호한다.
정희진 선생의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를 읽다가 또다시 먼 길로 와버렸지만 세상은 자신의 말(뜻)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정희진 선생의 지적을 가슴에 잘 새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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