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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식 - 木瓜 木瓜 -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 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란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진리 같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사랑도 호르몬의 작용이라 길어야 3년이란다.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든, 호르.. 더보기
이재무 - 저 못된 것들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노래방에 갔을 때 더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신곡 코너가 아닌 '가나다'순 어딘가를 뒤져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가끔 어쩌다 알바생들이랑 일을 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들이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세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 더보기
천양희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은은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스테인레스처럼 녹 하나 슬지 않는 .. 더보기
이면우 - 소나기 소나기 - 이면우 숲의 나무들 서서 목욕한다 일제히 어푸어푸 숨 내뿜으며 호수 쪽으로 가고 있다 누렁개와 레그혼, 둥근 지붕 아래 눈만 말똥말똥 아이가, 벌거벗은 아이가 추녀 끝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붉은 마당을 씽 한바퀴 돌고 깔깔깔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턴다 점심 먹고 남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와 나는 고추밭에서 쫓겨나 어둔 방안에서 쉰다 싸아하니 흙냄새 들이쉬며 가만히 쉰다 좋다. * 나이 먹고 제일 많이 달라진 게 있다면... 비 맞는 일이 줄었다는 거다. 비 오는 날... 나갈 일도 없고, 비가 와도 우산 없이 다닐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비 온다고 젖어들, 손바닥만한 맨 땅도 도시에선 구경하기 힘들다. 이제 비오면 맨먼저 비릿하게 달려들던 흙 냄새 대신 콘크리트 냄새와 열기가 먼저 후욱 .. 더보기
복효근 - 가마솥에 대한 성찰 가마솥에 대한 성찰 - 복효근 어디까지가 삶인지... 다 여문 참깨도 씹어보면 온통 비린내 뿐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할 날들은 남아 참깨는 기름집 가마솥에 들어가 죽어서 비로소 제 몸을 참깨로 증명하는구나 그렇듯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살과 피에서 향내가 날 때까지 어떻게 죽음까지를 삶으로 견디랴 세상의 가마솥에서 참 삶까지는 멀다 * 복효근 시인의 은 성찰(省察)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시이다. 비록 시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향적(polyphonic)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훌륭한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시인은 묻는다. "어디까지가 삶이냐?" 참깨라는 .. 더보기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 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1998년)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 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1998년) 내가 어렸을 때 영화는 흑백영화였고, FBI요원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임을 받았으며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그리는 FBI요원은 대부분 악당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대도시의 경찰 지휘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그는 좀더 높은 차원의 내밀한 수사를 한다는 이유로 명백한 정의를 왜곡시키는 방해꾼으로 간주된다. 경찰 역시 악역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매우 노골적인 영화 람보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람보 영화인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를 보면, 베트남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 존 람보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을 걷다가 지방 보안관 브라이언 데니히에게 체포된다. 영화.. 더보기
기형도 - 비가2:붉은달 비가 2 ---- 붉은 달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 더보기
이성복 -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시인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럼에도 시는 .. 더보기
백석 - 고향(故鄕) 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의 이 시 "고향"은 그 자체로 참 따스하다. 하나의 에피소드, 하나의 국면만으로 구축된, 보기에 따라 참 단순한 시(미의 세계.. 더보기
철학, 예술을 읽다 -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06년 철학, 예술을 읽다 -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06년 『철학, 예술을 읽다』는 시민을 위한 대안 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가 그간 진행해온 예술과 철학이라는 세미나에서 강의된 텍스트를 모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시민을 위한 강의였던 만큼 개괄적이고, 대중적인 수준의 텍스트란 점이 이 책이 지닌 기본적인 미덕이자 역시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 예술을 읽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미학(美學)이란 학문 영역은 우리에게 다소 낯선 세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학 자체가 근대의 학문이자 서구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 할 길을 창공의 별이 지도 몫을 하는 시대는 복되도다”란 루카치의 언술에서 말하는 시대가 그리스 고전 시대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