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서양 20세기사 - 박무성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2년 3월 격동의 서양 20세기사 - 박무성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2년 세기말이었던 지난 2000년 무렵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내나름으로 지난 20세기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혹은 세계를 움직인 10대 사건을 정리해보기로 결심했었다. 생각외로 이런 궁리는 재미있다. 오늘 하루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재미있었던 혹은 재미와 상관없이 기억할만한 일 3가지를 정리해보는 일, 한달 동안, 아니면 1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10대 사건을 언론사에서 정리하는 것처럼 혼자 해보라. 그렇게 해서 막상 정리된 사건들을 보면 정말 이 한 해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저 일이 올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내가 궁리 끝에 정리해낸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대 사건"은 다음과 같.. 더보기 문효치 - 공산성의 들꽃 공산성의 들꽃 - 문효치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거추장스런 이름에 갇히기 보다는 그냥 이렇게 맑은 바람 속에 잠시 머물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두꺼운 이름에 눌려 정말 내 모습이 일그러지기보다는 하늘의 한 모서리를 조금 차지하고 서 있다가 흙으로 바스라져 내가 섰던 그 자리 다시 하늘이 채워지면 거기 한 모금의 향기로 날아다닐 테니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한 송이 ‘자유’로 서 있고 싶을 뿐. * 올해(2011년) 제23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문효치 시인은 1943년생으로 9권의 시집 이외에도 몇 권의 기행집과 산문집을 상재해두고 있는 원로 시인이다. 글 쓰는 사람치고 방랑이든 여행이든 길 떠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만 문효치 시인은 별도의 여행에세이를 펴낼 만큼 여행을, 특히 .. 더보기 이상국 -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 이상국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창작과 비평사) * 숲에서... 어쩌면 구태여 미천골 숲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어쩌면 물푸레나무 숲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그런건 아무래도 좋으리라. 숲에서.... 산꼭대기까지 자란 나무들이 물 길어 올리느라 흠씬 젖은 새벽 이기고 지는 일이야 삼.. 더보기 정일근 - 묶인 개가 짖을 때 묶인 개가 짖을 때 - 정일근 묶인 개가 짖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그대, 은현리를 지날 때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움찔거리지도, 두려워 물러서지도 마라 묶여서 짖는 개를 바라보아라, 개는 그대 발자국 소리가 반가워 짖는 것이다 목줄에 묶여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세상의 작은 인기척에도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모른다 그 소리 구원의 손길 같아서 깜깜한 우물 끝으로 내려오는 두레박줄 같아서 온몸으로 자신의 신호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묶인 개는 짖는 것이다 젊은 한때 나도 묶여 산 적이 있다 그때 뚜벅뚜벅 찾아오는 구둣발 소리에 내가 질렀던 고함들은 적의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불빛 같은 신호였다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쓸쓸하여 굳어버린 그 눈 바라보아라 묶인 개의 눈알에 비치는 .. 더보기 김승희 -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 김승희,『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이상 듣기 싫다는 .. 더보기 반칠환 - 은행나무 부부 은행나무 부부 -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2004년 10월호) * 어느 시인들 아름답지 않으련만은 반칠환의 시는 아름답기 보다 어여쁘다. 아니 아직 덜 여문 어린 아이 잠지처럼 예쁘다. 사랑이 온통 뜨겁기만 한 것인 줄 알았더니 사랑이 저리도 따순 것이기도 한 것이구나 사랑이 저리도 멀.. 더보기 절망의 끝에서 -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절망의 끝에서 -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죽음이란 생을 낭만화하는 원리이다. 생에 로맨틱(낭만적) 차원을 주는 원리이다" - 노발리스 희랍어 "아포리아"는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하는 말로 막다른 길이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논리를 아포리아 상태에 빠뜨리는, 무지의 자각이란 교육법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대화에서 로고스의 전개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을 일컬어 아포리아라고 말한다. 아포리아란 철학의 막다른 길은 아니지만 말이 끊기는 곳에서 사유가 꽃핀다는 점에서 가장 "끊을 절 + 입구 = 철학"적이다. 내가 위치한 지점(혹은 입장)을 어느 순간부터 자각하게 되었는가? 그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더보기 이기철 -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 이기철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 넝마 같은 삶이다. 헌옷이 된 생을 다시 펴서 주름없이 다림질하고 싶어지는 삶이란...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설.. 더보기 이하석 - 구두 구두 - 이하석 풀덤불 속에 입을 벌리고 누워 구두는 뒷굽이나마 갈고 싶어한다, 풀들 속으로 난 작은 길을 가고 싶어하며, 어디로든 가 버릴 것들을 놓아 주면서. 주물 공장 최 반장은 토요일에 그를 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최씨의 바지 밑으로 그는 끈이 풀렸고 뒷굽이 너무 닳아 있었다. 일년 가까이 그는 벌겋게 달아 있었다, 술과 불이 어울어진 최씨의 온몸 밑에서. 내던져진 채 그는 이제 가고 싶은 곳을 잊었다, 최씨의 여자 속을 걸어가는 허약한 다리 대신 차가운 빗물을 맑게 담고서. 문득 흐르던 구름 하나가 구두 속에 깃들어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그래도 최씨의 구두는 뒷굽에 매달린다. * 처음부터 내 닉이 바람구두로 안착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대학 때 별명이었고, 뒤늦게 인터넷을 시작하다보니 적당한.. 더보기 이문재 - 푸른 곰팡이 푸른 곰팡이 -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혹은 '템푸스(Tempus)'로 구분될 수 있다. 크로노스는 객관, 물리적 의미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주관, 감정적 의미의 시간, 다시 말해 시간을 감지하는 자신이 의미를 느끼는 절대적 시간이다.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족들은 사사(sasa.. 더보기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 8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