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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마종기 - 낚시질 낚시질 - 마종기 낚시질하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평생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낚시질하다 문득 온 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 * 나도 중년인가 보다. 이 시를 읽고 문득 눈물이 났다. 물고기 같아서.... 물고기 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눈물 흘리려고 했는데 슬픈 눈물 대신 늘어져라 하품이 나와서 슬펐다. 왜 먹먹한 거냐? 인생아! 더보기
공광규 - 나를 모셨던 어머니 나를 모셨던 어머니 - 공광규 늙은 어머니를 따라 늙어가는 나도 잘 익은 수박 한 통 들고 법성암 부처님께 절하러 간 적이 있다 납작 납작 절하는 어머니 모습이 부처님보다는 바닥을 더 잘 모시는 보살이었다 평생 땅을 모시고 산 습관이었으리라 절을 마치고 구경삼아 경내를 한 바퀴 도는데 법당 연등과 작은 부처님 앞에는 내 이름이 붙어 있고 절 마당 석탑 기단에도 내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어머니가 다니며 시주하던 절인데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평생 나를 아름다운 연등으로 작은 부처님으로 높은 석탑으로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출처 : 『황해문화』, 2008년 여름호(통권 59호) * “눈에 밟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런 말을 흔히 관용구(慣用句)라 하는 데, 관용구란 본래.. 더보기
이영광 - 숲 숲 -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 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子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주고.. 더보기
유하 - 뒤늦은 편지 뒤늦은 편지 - 유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개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 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 "떠나야 .. 더보기
김선우 - 사골국 끓이는 저녁 사골국 끓이는 저녁 - 김선우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나를 향해 눈을 끔뻑이고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는 않다 나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만 보지 않고 내 옆과 뒤를 통째로 보면서(오, 질긴 냄새의 눈동자) 아무것도 안 보는 척 멀뚱한 소 눈 찬바람 일어 사골국 소뼈를 고다가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한 그릇…… 한 그릇 사골국 은하에 밥 말아 네 눈동자 후루룩 삼키고 내 몸속에 들앉아 속속들이 나를 바라볼 너에게 기꺼이 나를 들키겠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몸속의 소 , 2007년 봄호 *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는 내 연애의 대상이었다. 막노동판을 떠돌 때, 나는 최승자의 목을 비틀어 꺾으면 그 목에서는 이차돈의 흰 젖 같은 피 대신 시가 나.. 더보기
장영수 - 自己 自身에 쓰는 詩 自己 自身에 쓰는 詩 - 장영수 참회는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죽음은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젊은 시절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미, 있는 세상에 대해 죄악인 여러 날들이 지나가고. 그것은 대개 이 세상 손 안의 하룻 밤의 꿈. 하루 낮의 춤. 그러나 살게 하라. 살아가게 하라. 고 말하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깨어나며 살아가게 하라. * 시인은 참회는, 죽음은 젊은이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전 한 젊은이의 죽음을 보았다. 나와 동갑내기 청년이었다. 나는 내가 늙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의 죽음을 보고 치밀어오르는 분노 혹은 슬픔의 켜켜이 쌓인 두께를 가늠하면서 아직 내가 젊다는 사실을 알았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미 죄악인 세상이다. 그렇게 치욕적인 여러 날들이 흘러간다. 가늠할 .. 더보기
김형영 - 갈매기 갈매기 - 김형영(金炯榮) 새빨간 하늘 아래 이른 봄 아침 바다에 목을 감고 죽은 갈매기 * 지역이 지역인만큼 가끔 아파트 옆 더러운 개천가 담벼락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냥 이 시를 읽고 나도 모르게 약간 서글퍼지면서 그렇게 비오는 날 더러운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개천가에 앉아 있는 갈매기가 떠 올랐다. 갈매기 깃털은 왜 더러워지지도 않고, 그런 순백으로 빛나는 건지 말이다. 그래서 시인의 갈매기는 "바다에 목을 감고" 죽나보다. 순백으로 빛나기 위해서.... 더보기
김해자 - 바람의 경전 바람의 경전 -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내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확 밀어버리는 것 저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애비에미도 없이 집도 절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탕진하고도 한 자도 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작가들, 2005년 겨울호(통권 15호) 김해자 :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제8회 전태일 문학상.. 더보기
최금진 - 끝없는 길, 지렁이 끝없는 길 - 지렁이 - 최금진 꿈틀거리는 의지로 어둠속 터널을 뚫는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 믿으며 흙을 씹는다 눈뜨지 않아도 몸을 거쳐 가는 시간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인데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올까 무너진 길의 처음을 다시 만나기라도 할까 잘린 손목의 신경 같은 본능만 남아 벌겋게 어둠을 쥐었다 놓는다, 놓는다 돌아보면 캄캄하게 막장 무너져 내리는 소리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누군가 파묻은 탯줄처럼 삭은 노끈 한 조각이 되어 다 동여매지 못한 어느 끝에 제 몸을 이어보려는 듯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최금진, 『새들의 역사』, 창비, 2007 * 내일모레 내 나이 마흔. 사회적인 까닭이겠지만 남자의 마흔은 최승자가 노래한 여자의 서른과.. 더보기
고은 - 하루 하루 - 고 은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루가 저물어 떠나간 사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오 하잘것없는 이별이 구원일 줄이야 저녁 어둑밭 자욱한데 떠나갔던 사람 이미 왔고 이제부터 신이 오리라 저벅저벅 발소리 없이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아름답구나 * 아침 출근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별한 뒤엔 사람이 달라진다. 보이지 않던 것들, 보이지 않던 소리들, 보이지 않던 사람들,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죄다 안아달라고 달려든다. 늙어서 더이상 이별할 것이 제 목숨 밖에 없는 사람도 이별을 구원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삶에서 이별은 불가피(不可避)한 것이다. 불가피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만 이 말의 의미가 강렬하면 할수록 가능한 한 피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