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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문충성 - 무의촌의 노래 無醫村의 노래 - 문충성(文忠誠) 바다가 휘몰아오는 어둠이 바람 속에 바람이 어둠 속을 걸어 오는 아이가 빛을 찾아 미닫이 새로 얼굴 내밀고 호롱불 곁으로 비집어드는 마을, 불치의 병든 아이들이 모여 산다, 東西南北 아이야 어디를 가나 끝이 없는 시작은 장만이 되는 것, 맨발에 빠져든다, 겨울의 깊이 그 차가운 깊이 속 아이들은 한 줌의 무게를 찾아 빈 손을 들고 바다로 떠나간다 그렇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삼백 예순 날 아이들의 발걸음은 바다 끝에서 칭얼칭얼 열려 죽음을 살려내는 자맥질 속 숨 가빠라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숨 가빠라 누더기를 벗지 못한 채 누더기 속에 바람을 키우며 떠났지만 떠난 자리로 자꾸만 떠나가고 있다, 깨어진 사발에 구겨진 꿈을 담고 꿈속에 일렁이는 바닷길을 절뚝절뚝 달려가.. 더보기
정끝별 - 안개 속 풍경 안개 속 풍경 -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 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우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 더보기
고정희 - 쓸쓸한 날의 연가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 시인 고정희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민족시인, 지리산, 여성의 자의식 등등 여러가지가 떠오르겠지만 난 시인 고정희 하면 무엇보다 먼저 쓸쓸함의 정조가 우선 떠오른다. .. 더보기
강은교 - 사랑법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진부(陳腐)하다"는 말이 있다. 케케묵고 낡았다는 뜻이다. "늘어놓을 진"에 "썩을 부"를 쓴다. 두 글자 모두 "묵은"이란 뜻이 있다. 가령, 내가 누군가와 10년을 사귀었다면 그는 나에게 오래 "묵은" 사람이다... 더보기
김명인 - 베트남1 베트남 1 - 김명인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짚이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3부인 남편은 출정 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 속에서도 가랭이 벌여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꺽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을 시절이 있었던.. 더보기
이하석 - 버려진 병 버려진 병 - 이하석 바람 불어 와 신문지와 비닐 조각 날리고 깊은 세계 속에 잠든 먼지 일으켜 놓고 사라진다, 도꼬마리 대궁이 및 반짝이는 유리 조각에 긁히며. 풀들이 감춘 어둠 속 여름은 뜨거운 쇠 무더기에서 되살아난다. 녹물 흘러, 붉고 푸른 뜨겁고 고요한 죽음의 그늘 쌓은 채. 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꽂힌 채 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조각들에 스치며 이지러진 알파벳 흙 속에 감추며. 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 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질이며. 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 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와 콜라 병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쓰러진다. 풀들 그 위를 덮고 .. 더보기
김형영 - 지는 달 지는 달 - 김형영(金泂榮)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캄캄한 하늘에 저리 밀리는 구름떼들 데리고 우짖는 草木 사이에서 이제 지는 달은 6천 만 개 눈 깜짝이는 바람에 다시 뜨리니 누가 이 세상 벌판에 혼자 서서 먼 草木 새로 지는 달을 밝은 못물 건너듯 바라보느냐 4월 초파일 절간에 불 켜지듯 바라보느냐 한 해에도 가장 캄캄한 밤에 우리 모두 바라보는 사람들, 바라보는 눈길마다 지난 날은 되살아 머뭇거리다가 멀리 사라진다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앞 뒤를 같은 구절로 끝맺는 시를 수미상관(首尾相關)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처음과 끝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뜻인데 모두 4연의 이 시에서 마지막 연의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는 앞의 3연이 모두 7행, 5.. 더보기
오탁번 - 꽃 모종을 하면서 꽃모종을 하면서 - 오탁번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 더보기
최두석 - 달래강 달래강 - 최두석 임진강이 굽어 흐르다 만나는 휴전선, 그 달개비꽃 흐드러진 십 리 거리에서 부모 없이 과년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몇 마디씩 고구마 넝쿨을 잘라서 강 건너 밭에 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고스란히 다 맞고 바라본 누이의 베옷. 새삼스레 솟아 보이는 누이의 가슴 언저리. 숨막히는 오빠는 누이에게 먼저 집에 가라 하고 집에 간 누이는 저녁 짓고 해어스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 나섰다. 덤불숲 헤매다 반달이 지고 점점점 검게 소리쳐 흐르는 강물, 그 곁에 누워, 오빠는 죽어 있었다. 자신의 남근을 돌로 찍은 채. 하여 흐르는 강물에 눈물 씻으며 누이가 뇌었다는 말, "차라리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그래....." * 최두석 시인의 이 시를 낭송.. 더보기
조은 - 동질(同質) 동질(同質) - 조은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 나 지금 입사시험 보러 가. 잘 보라고 해줘. 너의 그 말이 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밧줄처럼 잡고 있는 추레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잡을 것이 없었고 잡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다 망설이다 나는 답장을 쓴다 --- 시험 잘 보세요, 행운을 빕니다! 출처: 『황해문화』, 2004년 봄호 * 문득, 잘 사느냐고... 밥은 먹고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서럽게 울었었지. 그래, 그래... 걱정하지마...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어때... 그래그래... 밥이 보약이지... 소식없으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