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썸네일형 리스트형 유하 - 자갈밭을 걸으며 자갈밭을 걸으며 - 유하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재잘거리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밞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만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 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 나, 그대가 익숙해졌.. 더보기 기형도 - 정거장에서의 충고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된다. 주저앉으면.. 더보기 유하 -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 더보기 함민복 - 선천성 그리움 선천성 그리움 -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 시인. 함민복! 오늘까지 날 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솔직히 말해서 가끔 이 사람 시를 혼자 읽다가 운다. 남자의 눈물은 가끔 부끄럽다.(그렇게 세뇌 교육 받은 탓에.) 그러나 이 시인의 시는 그런 갑옷 사이의 빈틈을 예리한 비수처럼 단번에 찔러 들어온다. 한 1년 반 정도 함민복 형과 함께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회사에 출근하는 날보다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가 출근하는 날은 여지없이 사무실엔 웃음꽃이 피었다. 그는 행복을 전.. 더보기 김소월 - 가는 길 가는 길 - 김소월 그렵다 말을 할 하니 그려워 그냥 갈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져 산(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압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도라오라고 도라가쟈고 흘너도 년다라 흐릅듸다려* ({개벽} 40호, 1923.10) * 흐릅디다려 : '흐릅니다그려'의 준말. - 김소월의 시가 좋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런지 모른다. 그 구질구질한 감정들. 뭔 설움이 그리도 많은지....시라는 것은 이렇게 감정에서 감정으로 흐르는 것인데도 우리가 받는 문학교육은 감정에서 감정으로 흐르는 솔직한 제 감정에 빠질 틈을 주지 않는다. 기승전결의 도치법이니 선정후경이니 선경후정이니 시적허용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 것 아니라도 시.. 더보기 김수영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더보기 김기림 - 연가 연가(戀歌) - 김기림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 더보기 정호승 - 벗에게 부탁함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개인적으로 정호승의 시가 90년대 들어와서 휠신 더 천연덕스러워졌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위와 같은 말이 그의 진심일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도지는 지도 모르겠다. 에이, 저 꽃 같은 놈! 하긴 꽃도 꽅 나름이라 이 사쿠라 같은 놈이라고 말하면 그건 욕이다. 욕도 이만저만한 욕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쿠라 꽃을 보면서 욕봤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전에 아마 이달의 영화로 '친구'를 추천했다가 그 추천을 .. 더보기 김명인 - 앵무새의 혀 앵무새의 혀 - 김명인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 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 가끔 시를 읽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려들거나 이해를 하려고 들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아, 내가 시의 속살을, 그 깊은 속내를 얼마나 파고들 수 있을까? 김명인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나 어릴 적의 국어선생님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나는 유별나게 국어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결국엔 친구 녀석 하나를 꼬드겨 국어선생님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말을 파먹고 산다. 그런데 혹시 아시는지 우리는 한동안 우리말을 우리 국어라고 가르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어가 국어였다. 그리고 전.. 더보기 김지하 - 빈산 빈 산 - 김지하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 김지하 시인에 대해서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끊이지 않고, 하루에 시 한 편을 올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나치게 게으른 친구. 하제누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었고(그가 필자로 시 읽기를 전담해주기로 .. 더보기 이전 1 ··· 20 21 22 23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