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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기림 - 연가

연가(戀歌)

- 김기림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중앙신문}, 1946.4.27)

*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해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한 몸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고, 신을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조국이, 신이 제정신이라면 그렇게 스스로도 가치없고, 하찮게 생각하는 목숨이라면 별로 중하다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와 반대의 경우로 당신이나 나의 목숨이 당신이나 나에게나 중요한 것이지 남들에게도 똑같이 중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나 옛 어르신들은 참깨 하나 털면서도 조심조심해서 털고, 우리들의 먹을 거리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다른 생명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다른 생명들에 대해서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일게다. 혹시 밥상없이 맨땅에서 밥을 먹게 되더라도 먹는 사람은 맨땅에 앉지만 먹을 거리들은 반드시 어딘가 올려놓고 먹도록 하고 맨땅에 내려두지 않았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생명도 중히 여기시고, 나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만큼 남의 생명도 중히 여기시길. 그리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죽지 마시고, 열심히 살자. 김기림 시인의 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까닭일가?

**

김기림(본명 : 김인손)은 1908년 5월 11일 함경북도 학성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김병연은 과수원과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었다. 1914년 김기림은 임명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상경해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병 때문에 중퇴한다. 그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조선일보> 기자로 근부하며 주로 G.W.란 필명으로 글을 발표하였다. 1933년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특히 나중에 가입한 이상, 박태원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36년 신문사의 후원으로 도후쿠(東北)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 1939년 도후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낙향하여 고향 인근의 경성중학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다가 해방 이후 서울로 올라와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및 서울시 문학가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6.25때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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