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 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문학론'을 김수영 시인이 살아서 겪게 되었다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하고 가끔 꿍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는 반성문을 썼을까? 아니면 절필 했을까? 그도 아니면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들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 김수영은 분명히 절필하거나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드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건강한 문학들이 피어나기 전에 세상을 달리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런 반성문같은 시들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솔직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는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자신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나 참여시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소위 힘있는 자들의 위세 또한 그리 대단한 존재들은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땅 주인'이나 '구청 직원' 또는 '동회 직원' 나부랑이에 불과하다. 나는 그가 언급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보며 솔직히 키득거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바닥에 납죽 엎드려 우리들의 비위를 살살 건드린다. 아니 소위 '지식인'이라는 비루한 인간들의 비위를 확 뒤집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런 똥물에 빠져 고상한 척, 있는 척 하는 지식인들의 쓸개를 꺼내 씹어주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풍자냐, 자살이냐"를 말할 때에는 이 정도 배포는 가지고 한 말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여 '이발장이'나 '야경꾼'들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 없는 자에게는 단돈 일 원 때문에 흥분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다 '붙잡혀 간' 소설가를 보면서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똥물을 뒤집어 씌우면서 그보다 더큰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설렁탕집'에서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이들의 똥침을 찌른다.
얼얼하게 아팠을 것이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의 최고 최대 명작인 <풀>의 세계로 나아간다. 자기 모멸과 반성을 거치면서 말이다. 스스로 더러운 땅에 들어가 온몸을 오물을 적시며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들에게 비판의 세례를 준다.
이 시의 배경 중 다소 특별한 것은 그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아는 이들은 아는 이야기지만 그는 의용군이었다. 그후 반공시대를 살아오면서 생존을 위해 김수영 역시 의용군에 들어갔던 것이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강제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원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의식이 투철한 편은 아니었으로 입대했다가 도망쳤는데 다시 인민군에게 붙들려 파묻어두었던 군복과 총기를 다시 파서 보여주고서야 총살을 면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그의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병원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느낀 모멸감은 상당한 것으로 후일 영어를 할 줄 알았음에도 실생활에서는 영어를 통해 할 수 있는 밥벌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수원의 어떤 서양화가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었다. 그가 포로에 풀려나와 다시 사회로 북귀한 뒤에도 한동안 아내를 만나러가지 못하고 망설인 데에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이런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얘기는 길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 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문학론'을 김수영 시인이 살아서 겪게 되었다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하고 가끔 꿍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는 반성문을 썼을까? 아니면 절필 했을까? 그도 아니면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들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 김수영은 분명히 절필하거나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드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건강한 문학들이 피어나기 전에 세상을 달리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런 반성문같은 시들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솔직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는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자신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나 참여시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소위 힘있는 자들의 위세 또한 그리 대단한 존재들은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땅 주인'이나 '구청 직원' 또는 '동회 직원' 나부랑이에 불과하다. 나는 그가 언급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보며 솔직히 키득거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바닥에 납죽 엎드려 우리들의 비위를 살살 건드린다. 아니 소위 '지식인'이라는 비루한 인간들의 비위를 확 뒤집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런 똥물에 빠져 고상한 척, 있는 척 하는 지식인들의 쓸개를 꺼내 씹어주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풍자냐, 자살이냐"를 말할 때에는 이 정도 배포는 가지고 한 말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여 '이발장이'나 '야경꾼'들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 없는 자에게는 단돈 일 원 때문에 흥분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다 '붙잡혀 간' 소설가를 보면서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똥물을 뒤집어 씌우면서 그보다 더큰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설렁탕집'에서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이들의 똥침을 찌른다.
얼얼하게 아팠을 것이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의 최고 최대 명작인 <풀>의 세계로 나아간다. 자기 모멸과 반성을 거치면서 말이다. 스스로 더러운 땅에 들어가 온몸을 오물을 적시며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들에게 비판의 세례를 준다.
이 시의 배경 중 다소 특별한 것은 그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아는 이들은 아는 이야기지만 그는 의용군이었다. 그후 반공시대를 살아오면서 생존을 위해 김수영 역시 의용군에 들어갔던 것이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강제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원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의식이 투철한 편은 아니었으로 입대했다가 도망쳤는데 다시 인민군에게 붙들려 파묻어두었던 군복과 총기를 다시 파서 보여주고서야 총살을 면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그의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병원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느낀 모멸감은 상당한 것으로 후일 영어를 할 줄 알았음에도 실생활에서는 영어를 통해 할 수 있는 밥벌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수원의 어떤 서양화가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었다. 그가 포로에 풀려나와 다시 사회로 북귀한 뒤에도 한동안 아내를 만나러가지 못하고 망설인 데에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이런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얘기는 길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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