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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호승 - 벗에게 부탁함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개인적으로 정호승의 시가 90년대 들어와서 휠신 더 천연덕스러워졌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위와 같은 말이 그의 진심일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도지는 지도 모르겠다. 에이, 저 꽃 같은 놈! 하긴 꽃도 꽅 나름이라 이 사쿠라 같은 놈이라고 말하면 그건 욕이다. 욕도 이만저만한 욕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쿠라 꽃을 보면서 욕봤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전에 아마 이달의 영화로 '친구'를 추천했다가 그 추천을 얼마 안되어 철회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이 <공화국 망명지>를 들락거린 분들은 아실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이 다른 많은 한국영화들을 잡아먹는다는 비판이 그런 추천 철회의 가장 큰 요인이었고, 그런 비판적인 판단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결국 스스로 뱉어논 말도 있고 해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던 애초의 내 다짐은 지켜졌다. 어제 비디오로 나온 이 영화를 보았다.

보고나서 들었던 나의 심사는 역시 배배꼬인 것일 수밖에 없다. 영화로서는 참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직 국어교사인 친구의 강력한 추천사가 어떤 이유에서 내게 쏟아졌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서는 한발만 엉거주춤하게 들여놓았다면 그리 멀지도 않은 나의 이야기가 될 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변경에서도 다시 변두리에 사는 인간들에게 골목의 악다구니는 어머니의 자장가만큼이나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고개를 갸우뚱한 것은 이 영화에 쏟아진 부산 시민들의 강렬한 지원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영화를 보고서 외쳤다는 그 수많은 아담들의 '의리'라는 것이 역겨웠다. 대관절 친구의 뱃 속에 뭐가 들었길래 30번을 넘게 사시미칼로 회를 뜬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의리라 외치는 조폭이 고작 우정과 의리의 상징이라니.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IMF 이후 생활의 현장에서 감원당하거나 도태되며 가부장의 권위를 급속히 상실해가는 남자들의 우울증과 우리 사회의 의리 결핍에 관한 심각한 진단이 그것이다. 마초(Macho)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자는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친구에게 한 번 하라고 줄 수도 있고, 빠구리(성교)트는 능력이 뛰어나면 자신이 그냥 데리고 살아도 되는 그런 존재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적인 영화 <친구>가 강력하고도 절실하게 외치는 첫번째 목소리 "남자들 세계에서 여자는 제발 좀 빠져!"이다.

남자는 자신을 잃었을 때 정도 이상으로 오바하는 경향이 있다.(그렇게 말하는 나도 그렇다. 생물학적 남자니까.) 이런 자신감 상실은 마치스모 (Machismo) 현상으로 이어져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성 폭력을 일삼거나 여성을 구타해 남자임을 과시하는 행위를 하곤 한다. 30번이나 찌르는 칼질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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