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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 사청사우(乍晴乍雨) 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예아변응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 花門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기어세인수기억 취환무처득평생) 갰다가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기리는 사람 문득 돌이켜 또 나를 헐뜯을 터, 공명을 피하더니 저마다 또 공명을 구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이 무엇을 다투랴.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새겨들으시라, 즐겁고 기쁜 일 평생 가지 않나니.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지은 "사칭사우"를 우리말로 .. 더보기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여름에 핀 가을꽃 - 강영환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마른 눈을 들어 들어서 안간힘으로 버텨선 흔들림으로 가을꽃이 피었다 먼 원시림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건강한 뼈대 자갈밭에 내려 쌓이는 수천의 빛 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로이 홀로 서서 말라비틀어진 이 계절의 중심에서 억센 근육을 부러뜨려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출처] 칼잠, 시로사(1983) * "여름에 핀 가을꽃"은 강영환 시인의 등단작이자 첫 시집 칼잠에 수록된 시인데 아쉽게도 시집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에는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란 구절이 첫 행과 마지막 행에서 반복(5행에서도 축약된 형태로 '가을꽃이 피었다'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 더보기
김사인 - 늦가을 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요즘 시인들은 왜 달에 대한 멋진 시 하나 토해내지 않는 건지. 제가 가장 마지막에 주목했던 소설가는 "마루야마 겐지"였습니다. 이 말은 최근엔 소설을 읽지 않는 제 현실의 문제이죠. 어쨌거나 그의 소설 는 참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낡은 오.. 더보기
김수영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 더보기
마종기 - 證例6 證例6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 더보기
옥타비오 빠스 - 서로 찾기 서로 찾기 - 옥타비오 빠스(Octavio Paz)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중간에서 * 나는 정신의 사랑보다 몸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의 유물론'쯤이라고 해두자. 이 말은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난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 미칠 것 같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옥타비오 빠스의 "서로 찾기"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다. 몸의 사랑. 여자는 남자에게서 산을, 남자는 여자에게서 배를 찾는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 머무를 곳을 찾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 떠날 곳을 찾는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애타게 찾지만 만남은 잠시고 엇갈림은 영원히 반.. 더보기
오세영 - 비행운 비행운(飛行雲) - 오세영 한낮 뇌우(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 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긴급 발진 제트기 한 대가 재빨리 날아오르더니 천을 덧 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 비행운(飛行雲)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 42년생 시인에게 천진(天眞)하단 말은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갈수록 오세영 시인의 시가 천진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천진해지는 시인들이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시인이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오세영 선생의 시(詩) 3편을 받았는데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었기에 당신의 시를 받.. 더보기
안현미 - 여자비 여자비 -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메이는 소리 * 사는 게 비루하다고 여기다가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래도 좀 낫다 싶어 한숨을 푹 내쉰다 살아야 할 날이 어제보다 하루 줄었으니 더보기
신경림 - 갈구렁달 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 더보기
윤성학 - 내외 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가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