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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함민복 - 서울역 그 식당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 가끔 어떤 시들을 읽노라면 사람의 마음이 울컥해진다. 중요한 건 쌩하니 차가운 바람 소리 들리며 "벌컥" 문이 열리고 마음이 들고 나는 것이 아니라 울컥해진다는 거다. 사람들이 생각.. 더보기
천양희 - 한계 한계 -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 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출처 :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사, 1994 * 깊은 밤 세상 만물이 모두 잠든 것 같은 시간에 홀로 깨어난다. 곁사람의 고운 숨소리도, 태어난지 이제 막 7개월 된 딸 아이의 뒤척임도 저 멀리 있다. 갑자기 깨어나 부우우하며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는 냉장고, 초침의 재깍이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저 멀리 한길로 밤새워 북으로 달리는 차량 불빛이 서치라이트처럼 희번득하는 밤에 문득 이제 다 살아버린 듯 갈 곳도.. 더보기
황동규 - 몰운대행(沒雲臺行) 몰운대행(沒雲臺行) - 황동규 1 사람 피해 사람 속에서 혼자 서울에 남아 호프에 나가 젊은이들 속에 박혀 생맥주나 축내고 더위에 녹아내리는 추억들 위로 간신히 차양을 치다 말고 문득 생각한 것이 바로 무반주(無伴奏) 떠돌이. 폐광지대까지 설마 관광객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길들의 고요. 지도를 펴놓고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치고 방학에도 계속 나가던 연구실 문에 자물쇠 채우고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 길을 나선다. 2 영월 청령포를 조심히 피해 31번 국도를 탄다. 상동 칠랑에서 국도를 버리고 비포장 지방도로로 올라선다. 중석 걸러낸 크롬 옐로우 물이 길 옆 시내 가득 흘러오고 저단 기어를 넣은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로 떤다. 차 고장 없기만을 길의 신(神)에 빌며 망초꽃이 모여선 길섶을 지나 아다.. 더보기
신경림 - 다리 다리 - 신경림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 억울해 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 언젠가 글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 중 하나는 자존감, 즉 자기존재감이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나로 온전히 서지 못할 때, 사랑도 지겹고, 허무해집니다. 그런데 때로 사랑에 이 자기존재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도리어 장애가 될 때도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주고 싶다는 마음은 때로 나를 온전히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나.. 더보기
김상미 - 연인들 연인들 - 김상미 내 몸에서 나가지 마 눈썹이 닿고 입술이 닿고 음부 가득 득실거리던 꿈들이 닿았는데 서릿발 같은 인생 겨우 겨우 달랬는데 나가지 마 시커멓게 열려 있는 비존재들. 그 허공 속으로 우린 연인들이야 날마다 새로워지는 마음 금빛 월계관처럼 육체에다 씌우며 몰아, 몰아, 그 뜨거운 파도 그 치열한 외침 인생이 보일 때까지 껴안고 또 껴안아야지 자지러지면 어때 신선한 육체의 광택 바다와 사막을 길어나르듯 땀 흘리며 몸부림치고 매달리면 어때 숨쉬는 육체의 수렁은 깊고도 깊어 나 네게서 떨어지지 않을래 쫙 쫙 쫙 입 벌리는 관능 몸이 몸을 먹는 경이, 경이 속으로 끝도 없이 흘러 흘러갈래 내 몸에서 나가지 마 우린 연인들이야 더러운 신의 놀라운 흔적들이야 땅이고 하늘이야 출처 : 김상미, 『모자는 .. 더보기
심재휘 -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 심재휘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 더보기
고정희 - 아파서 몸져 누운 날은 아파서 몸져 누운 날은 - 고정희 오월의 융융한 햇빛을 차단하고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악귀를 쫓아내듯 신열과 싸우며 집 안에 가득한 정적을 밀어내며 당신이 오셨으면 하다 잠이 듭니다 기적이겠지... 기적이겠지...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제자리로 돌아간 이 대낮에, 이심전심이나 텔레파시도 없는 이 대낮에, 당신이 내 집 문지방을 들어선다면 나는 아마 생의 최후 같은 오 분을 만나고 말거야. 나도 최후의 오 분을 셋으로 나눌까 그 이 분은 당신을 위해서 쓰고 또 이 분간은 이 지상의 운명을 위해서 쓰고 나머지 일 분간은 내 생을 뒤돌아보는 일에 쓸까 그러다가 정말 당신이 들어선다면 나는 칠성판에서라도 벌떡 일어날거야 그게 나의 마음이니까 그게 나의 희망사항이니까... 하며 왼손가락으로 편지를 쓰다가 고요의 밀.. 더보기
최승자 - 외로운 여자들은 외로운 여자들은 - 최승자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출처 :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말에 비해 표피적이다. 고독이란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下)〉 '호화호색장(好貨好色章)'에서 나오는 '환과고독(鰥寡孤獨)'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 더보기
고정희 - 지울 수 없는 얼굴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에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고정희 시인의 시가 자꾸만 밟히고,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자꾸만 지리산에 가고 싶은 건 내 삶이 위독한 탓이다. 산에 오르면 세상이 좁쌀만 해 보여 간이 커지고 엄지와 검지를 들어 눈 앞의 빌딩을 들어 옮기고, 지나는 버스를 막아세우고, 거리를 오가는 죄 없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본다. 산에서 .. 더보기
정현종 - 말하지 않은 슬픔이 말하지 않은 슬픔이 - 정현종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모든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 정현종 시인의 이 시는 딱 요즘 내 맘 같다. "당신은 내게 평생 말해도 다 말할 수 없을 거야."라고 오래전 그 사람은 내게 말했었지. 그 말 앞에선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말들을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대는 들어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겠지만 더이상 듣지 않겠노라는 그 완강한 선언 앞에 말은 시들어버렸다. 말하지 못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엔 도도한 강물이 흐른다. 넘어설 수 없는... 그 앞에도 여전히 나불대는 수많은 입들이 있을 것..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