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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도종환 - 산경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불혹이 될 때까지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산'과 '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산은 그저 그곳에 있게 하면 되고 강은 그저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 가는 것이오 강이 멈추지 않으니 내가 강을 따라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더보기
공광규 -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더보기
김선우 - 낙화, 첫사랑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 더보기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는.. 더보기
문태준 -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 문태준 끔찍하다 조그맣게 모인 물속 배를 내 눈앞처럼 달고 올챙이가 헤엄치고 있다 아주 어둡고 덜 어두울 뿐인 둥근 배 속 다리 넷이 한테 엉겨 있다 한 통이다 한 통이 통째로 움직인다 마음 가면 마음이 전부 간다 속으로 울 때 손발이 모두 너의 눈물을 받아준다 너의 몸을 보고 내 몸을 보니 사람이 더 끔찍하다 팔을 밀어넣고 나의 다리를 밀어넣어 저 원적(原籍)으로 돌아갔으면 둥근 배 속 아직은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이라는 말에 태동(胎動)이 있기 전 출처 : 현대문학, 2007년, 9월호 * 남진은 란 노래에서 목놓아 노래 부른다. "다앙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것을"이라고... 바다야, 이별이 있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으련만 대중.. 더보기
김정란 - 눈물의 방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 세상은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많은 것을 누려본 기억도 별로 없지만 세상은 한 가지를 주면.. 더보기
도종환 - 책꽂이를 치우며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 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나는 도종환 시인의 이 시가 머리로 꾸민 시가 아니라 정말 일상에서 시인이 직접 대면한 그 순간의 일부를 시로 옮긴 것이라 생각한다. 신혼 살림을 13평 짜리 방 두개의 작은 연립에서 시작했다. 방 하나는 부부 침실,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책창고였다. 우리 부부가 가장 먼저 생각한 혼수는 책꽂이였는데, 좋은 책장을 들일 수 없어 동네 가구점에 부탁해서 책장 여섯 개를 맞췄다. 책장 여섯 개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작은 유리창 하나도 허락할 수 없으리만치 책으로.. 더보기
고정희 - 고백 고백 -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 짧은 시에는 감상 평도 짧아야 옳으리 나는 찌 리 릿 더보기
최승자 - 삼십세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릎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언젠가 안도현 시인의 초청강연 자리에서 그가 말하길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를 가졌고, 김용택은 '섬진강'을 가졌는데, 자신은 기껏해야 '연탄재'뿐이라고 말.. 더보기
이승희 - 사랑은 사랑은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 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히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 이.. 더보기